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再祭文 7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洛北 李孝淳의 제문을 두 번째로 쓴 것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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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洛坡柳相國文(代門中作) 8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문중을 대표하여 지은 제문으로, 洛坡 柳厚祚(1798~1876)를 애도한 글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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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稷西蔡公文(代熊淵儒生作) 8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熊淵書院의 유생을 대표하여 지은 제문으로, 稷西 蔡光禹를 애도한 글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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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箕疇鄭公文 9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箕疇 鄭民秉을 애도하며 지은 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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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李公(鍾煜)文 9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李鍾煜을 애도하며 지은 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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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權公(昇彦)文 10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權昇彦을 애도하며 지은 제문이다. 권승언은 안동권씨이고, 안동사람인 權聖翼(1735~ 1821)의 아들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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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柳公(致好)文 11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柳致好를 애도하며 지은 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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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柳溪堂文(代堂儒生作) 12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溪堂 柳疇睦(1813~1872)을 애도하며 지은 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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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李公(潭九)文 12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李潭九를 애도하며 지은 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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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黃秋塘文 13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黃秋塘을 애도하며 지은 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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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權姨兄(弘模)文 14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姨從兄 權弘模를 애도하며 지은 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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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李仲臣(彙喬)文 15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仲臣 李彙喬를 애도하며 지은 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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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鄭退而(慶愚)文 16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退而 鄭慶愚를 애도하며 지은 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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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柳妹兄敬老(祐榮)文 17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妹兄인 敬老 柳祐榮을 애도하며 지은 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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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洪姨母文 19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姨母 洪公을 애도하며 지은 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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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趙婿景熙文 19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婿 趙景熙를 애도하며 지은 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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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宋婿孝直(鎭九)文 21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婿 孝直 宋鎭九를 애도하며 지은 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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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姑母金孺人文 22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姑母 金孺人을 애도하며 지은 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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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第四叔父文 24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넷째 叔父를 애도하며 지은 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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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十一從兄文 25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저자와 동년배였던 11번째 從兄을 애도하며 지은 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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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澤之文 26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從姪 高宅龍(澤之)을 애도하며 지은 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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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亡女趙室文 28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죽은 딸을 애도하며 지은 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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祖考府君遺事 30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돌아가신 저자의 조부 高補(1742~1816)의 遺事를 기록한 글이다. 사적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府君의 휘는 補이고, 자는 鍊卿, 본관은 開城이다. 시조는 高令臣이고, 고려조에 吏部尙書를 지냈으며, 그의 시호는 良敬이다. 그로부터 版圖判書를 지낸 高瑛에 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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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考府君遺事 36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저자의 부친에 관한 사적을 기록한 글이다. 사적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부군의 휘는 夢贊(1793~1858)이고, 자는 理叟, 호는 錦洲이다. 부군의 부친은 高補이고, 모친은 繼妣인 淸州鄭氏이다. 1793년(정조 17) 10월 초하루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큰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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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狀 1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李晩寅(1834~1897)이 지은 高聖謙(1810~ 1886)의 행장이다. 행장에 따르면 이만인은 眞城李氏이고, 弱冠의 나이가 되기도 전에 고성겸에게 時文을 배웠던 인물이다. 행장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공의 성은 高氏이고, 휘는 聖謙이며, 字는 穉希, 호는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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墓碣銘 5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權璉夏(1813~1896)가 찬한 高聖謙(1810 ~1886)의 묘갈명이다. 권연하는 안동권씨이고, 류치명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던 인물이다. 그가 찬한 묘갈명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권연하는 어려서부터 一世를 구할 선비가 商山의 북쪽에 있다는 명성을 들었다. 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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墓誌銘 8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聞韶 金道和(1825~1912)가 지은 고성겸의 묘지명이다. 본관은 義城(聞韶)이고, 자는 達民, 호는 拓庵이다. 묘지명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공의 휘는 聖謙이며, 자는 穉希이고, 開城 사람이다. 高氏의 선조는 고려조에 吏部尙書를 지낸 良敬公 高令臣으로부터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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甪里亭記 12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聞韶 金興洛(1827~1899)이 녹리정에 관해 쓴 기문이다. 김흥락의 자는 繼孟이고, 호는 西山이다. 그는 鶴峯 金誠一의 11대손으로, 19세에 定齋 柳致明의 문하에 들어 수학하였다. 이 기문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商山의 鹿門에 정자가 하나 있는데, ‘甪里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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跋 13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高文謙이 형인 高聖謙의 『녹리문집』을 엮게 된 경위를 기록한 발문이다. 모두 7책으로 이루어졌는데, 이 원고는 先兄 고성겸이 생존에 손수 엮은 것들로 편집되었다. 『녹리문집』은 고성겸이 죽은 후 10년 되는 1895년(고종 32)에 집의 동쪽에 있는 甪里亭에서 鑄字로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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눌옹유사 / 기록자료>고도서 / 송석충눌옹유사(訥翁遺事) 訥翁 宋碩忠의 시문집, 1冊, 木板本, 四周雙邊, 半郭 20.5 × 15.2㎝, 有界, 10行19字, 小字雙行, 上下內向花紋魚尾, 31.4 × 19.7㎝. 권수의 구분이 없이 單冊으로 구성되어 있다. 金과 黃龍漢이 쓴 序文에 이어 世系와 子孫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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訥翁先生世系 / 기록자료>고도서 / 송석충고려 중기 문신인 始祖 冶城君 孟英으로부터 시작하여 高祖 嘉善大夫 開城府尹 吉昌과 曾祖 通政大夫 掌隷院 判決事 千祐을 비롯하여 祖父 宣敎郞 鎭岑縣監兼勸農兵馬團練判官 守와 父親 通訓大夫 永柔縣令 綸에 이르기까지 집안의 世系를 소개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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訥翁先生子孫錄 / 기록자료>고도서 / 송석충儼‧儀‧侃‧偁 등 4형제로부터 高孫에 이르기까지 자손들의 관직과 이름이 가계도로정리되어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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事實 / 기록자료>고도서 / 송석충저자의 遺事가 출생으로부터 간략하게 단편적으로 소개되어 있다. 사적이 소실되어 전하는 바를 若干 정리하여 기록하였다고 전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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輓韓毅巖(伯倫) / 기록자료>고도서 / 송석충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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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河護軍(哲石)書 3 / 기록자료>고도서 / 송석충護軍 河哲石에게 보낸 편지이다. 근자에 왕래하는 자가 없었다고 하면서 안부를 전하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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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姜草堂子文(景叙)書 3 / 기록자료>고도서 / 송석충草堂 姜景叙(1443~1510)에게 답한 편지이다. 산속에 한가롭게 거하고 있다고 전하면서 조만간에 옆에서 함께 할 사람을 구하여 이곳에서 같이 지내게 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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剪燈餘話跋耕織圖記八分書識 3 / 기록자료>고도서 / 송석충1518년(중종 13) 7월에 쓴 글로 우연히 「剪燈餘話跋」과 「耕織圖記」를 구하여 보게 되었는데, 모두 八分字體로 그 필법이 기묘하고 독보적이었다고 하면서 전하고자 하는 뜻이 있었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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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家君手書姜景愚八分篆體後 4 / 기록자료>고도서 / 송석충姜景愚가 模寫한 八分篆書體를 보고 그 필법이 端整할 뿐만 아니라 奇妙하고도 독특하여 한가한 틈을 이용하여 직접 모사하였다고 전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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惟十有三祀王訪于箕子(止)彞倫攸叙 4 / 기록자료>고도서 / 송석충道의 出處를 밝힌 글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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情志交孚契會圖 7 / 기록자료>고도서 / 송석충金宏弼‧宋碩忠‧崔溥‧朴聃孫‧申希演 등이 1480년(성종 11) 6월 6일 大猷에 모여 契를 맺었다는 기록이다. 계의 명칭은 ‘情志交孚’라는 등의 내용을 적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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契會影幀 8 / 기록자료>고도서 / 송석충大猷에 모여 契를 맺어 春秋로 講信을 하기로 하여 이듬해 1481년(성종 12) 8월 8일 好賢坊에 金宏弼‧宋碩忠‧崔溥‧朴聃孫‧申希演 등 다섯 명이 모인 모습을 그린 것이다. 뒤에 契를 맺게 된 전후 과정을 간략히 기록하여 전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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墓碣 9 / 기록자료>고도서 / 송석충朴承任이 撰한 墓碣銘이며, 내용은 行狀과 유사하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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遺事 10 / 기록자료>고도서 / 송석충從姪 倻溪 希奎(1494~1558)가 撰한 遺事로 내용은 行狀과 유사하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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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狀 14 / 기록자료>고도서 / 송석충立齋 鄭宗魯(1738~1816)가 撰한 行狀으로 자세한 내용은 글 앞의 저자 소개에 나와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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敍述 17 / 기록자료>고도서 / 송석충鶴沙 金應祖(1587~1667)가 撰한 世譜의 序文과 訥隱 李光庭이 撰한 후손 萬宗의 行狀 등을 통하여 관련된 기록들을 일부 옮겨놓았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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契會圖識 17 / 기록자료>고도서 / 송석충金應祖와 金學培(1628~1673)가 1671년(현종 12) 봄에 쓴 글로 두 편이 이어져 있다. 宋文星이 선조인 訥翁公의 契帖을 가져와 계와 관련된 전후 사정을 간략하게 기록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金宏弼‧宋碩忠‧崔溥‧朴聃孫‧申希演 등 道義之交로 맺어진 契의 구성원과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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影幀識 20 / 기록자료>고도서 / 송석충安村 裵應褧(1544~1602)이 1600년(선조 33) 10월 2일에 쓴 글과 5세손 時雍 및 成彦檝이 쓴 세 편의 글이 함께 연이어 수록되어 있다. 宋福基가 古帖을 보여주어 契가 만들어진 경위와 ‘情志交孚’라고 하는 명칭을 적고 도의와 학문으로 교류하였다고 하였으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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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別詩 23 / 기록자료>고도서 / 송석충送宋元老之京師(丹山禹重翁錫鼎參奉,公山李子敬).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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輓詞 23 / 기록자료>고도서 / 송석충哭訥翁(李桃隱秀亨)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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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文 24 / 기록자료>고도서 / 송석충栢谷 鄭崐壽(1538~1602)와 寒江 鄭逑(1543 ~1620)의 이름으로 올린 祭文이다.출처 : 유교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