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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今上庚辰) 25 / 기록자료>고도서 / 홍우정홍우정에게 介節이라는 시호가 내려진 것을 고하는 분황문이다. 1820년(순조 20)에 苕川 金是瓚(1700~1767)이 썼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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尊周錄陪臣列傳 26 / 기록자료>고도서 / 홍우정존주록에 실려 있는 홍우정의 열전이다. 존주록은 尊周攘夷의 정신에 입각하여 명나라를 받들고 청나라를 물리치는 이른바 尊明攘淸의 절의 정신을 드높이려는 취지에서 1716년(숙종 42) 李壽頤가 편찬한 책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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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諡敎旨 26 / 기록자료>고도서 / 홍우정1816년(순조 16) 10월 홍우정에게 介節이라는 시호를 내릴 때의 교지이다. ‘介’는 ‘하나에 오로지하여 다른 것에로 마음을 옮기지 않는다[執一不遷]’는 뜻이고, ‘節’은 ‘염치를 중히 여겨 스스로를 단속한다[好廉自克]’는 뜻이라고 시호의 의미를 풀이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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諡狀 27 / 기록자료>고도서 / 홍우정홍우정에게 시호를 내릴 것을 주청하는 글이다. 홍우정의 생애와 절의를 기리며 시호가 내려지기까지의 경과를 서술한 것이다. 甹山 韓致應(1760~1824)이 썼다. 홍우정의 후손인 墵과 塧가 許穆이 지은 묘갈명을 들고 와 부탁을 하여 짓게 되었음도 밝히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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請諡疏(1816年4月16日) 31 / 기록자료>고도서 / 홍우정홍우정에게 시호를 내릴 것을 주청하는 상소문이다. 疏頭는 順興에 살던 成守魯로 되어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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遺墟碑陰識 35 / 기록자료>고도서 / 홍우정홍우정의 유허비에 음각한 글이다. 李光庭이 썼다. 홍우정의 옛 집터에 유허비를 세우게 된 내력을 적은 글이다. 英祖가 홍우정의 행적과 절의를 듣고 吏曹參議에 추증하면서 ‘崇禎處士 洪某’라는 교지를 내렸는데 뒤에 사림에서 옛 집터를 사들여 터를 마련하고 선생의 절의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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玉溜庵記 35 / 기록자료>고도서 / 홍우정옥류암의 기문이다. 李光靖이 썼다. 옥류암은 봉화 文殊山 아래 杜谷村에 있던 암자로, 홍우정이 삼전도의 國恥를 계기로 세상과 등졌을 때 물러나 은거하던 곳이다. 은거지 곁에 冷泉이 있었는데, 그 맑음을 좋아하여 거처를 옥류암이라 이름 지었다고 전한다. 기문은 바위틈으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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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詩 37 / 기록자료>고도서 / 홍우정雩潭 蔡得沂(1605∼1646)가 홍주정의 인품과 절의를 칭송하며 쓴 헌정시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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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 38 / 기록자료>고도서 / 홍우정蔡得沂의 헌정시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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次韻 39 / 기록자료>고도서 / 홍우정蔡得沂의 헌정시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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題玉溜庵 40 / 기록자료>고도서 / 홍우정옥류암을 소재로 한 忠翼公 灘叟 元斗杓(1593~1664)의 시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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志感(辛酉九峯毁撤時有遺墟立碑之議) 40 / 기록자료>고도서 / 홍우정1741년(영조 17) 九峯祠가 훼철될 때 유허비 건립에 대한 논의가 있었는데, 이때의 감회를 쓴 글이다. 江左 權萬(1688~1749)이 썼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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焚黃日感吟 40 / 기록자료>고도서 / 홍우정權萬이 분황 때의 감회를 읊은 시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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起感 40 / 기록자료>고도서 / 홍우정海左 丁範祖(1723~1802)의 시이다. 구봉사가 훼철될 때의 감회를 읊은 것으로 추정된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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杜谷先生文集跋 1 / 기록자료>고도서 / 홍우정발문이다. 1830년(순조 30) 하지 닷새 뒤 홍우정의 후손인 墵과 耆의 부탁으로 廣瀨 李野淳(1755~1831)이 썼다. 홍우정의 절개와 절의를 칭송하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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識 3 / 기록자료>고도서 / 홍우정홍우정의 7대손 墵이 쓴 後識이다. 제목은 없다. 홍우정은 시를 짓더라도 잘 적어 놓지 않았고 게다가 남아 있는 원고도 버린 것이 많아 시문이 얼마 전하지 않았음을 전하면서, 아쉬운 대로 남은 것들을 모아 1820년(순조 20) 겨울에 문집간행에 착수한 후 1824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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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암집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두암집(斗庵集) 斗庵 金若鍊의 시문집. 10卷 5冊. 木活字本. 上下白口, 半郭 14.5×22㎝, 有界, 10行20字, 上下向2葉花紋魚尾,19×30㎝. 『두암집』은 김약련의 손자인 樂在가 貞窩 黃龍漢의 교감과 閑坪 柳令益의 질정을 받아 1836년(헌종 2) 여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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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客中阻雨將歸又雨(丙子), 立春次幼濯, 壽翁幼立春詩步其韻以自嘲, 洪叙仲溪亭韻, 李參奉丈江亭韻, 次朴民瞻(師尹), 除夜次滄浪子二首, 上元看月次伯氏韻, 庵中八詠, 讀退溪先生文集有立春詩今日乃立春節也感而次之, 雇奴告去歎賦一律, 甲午臘月鎖直堂后今來追思便成一夢感吟四韻, 糟兵懷舊,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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輓詞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金戚叔成仲氏(聖集)輓, 權奇玉(琦)輓, 趙叔章(玉然)輓, 趙景得(錫魯)輓, 成君(必魯)輓, 再從叔父雙巖公輓詞, 金汝豪(應延)輓, 妹婿李上舍(寅秦)輓, 哭滄浪子(漢鍊), 哭從弟得翁(魯鍊), 李校理穉道(埦)輓, 李同樞(世述)輓, 金副摠(玄奭)輓, 姜丈(濼)輓, 哭宗姪(永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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誄辭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內從叔東巖柳公(長源)誄辭, 從姪婦安東權氏誄文.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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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酉擬疏(1789) 1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세손시절부터 등극한 뒤에도 正祖를 음해하고 모략하던 노론의 영수 金尙魯 일당의 잔악무도한 짓을 들추어 이들의 죄를 규명할 것을 거론하고 있다. 아울러 이들의 세력인 順興府使 申大孫, 龍宮縣監 金尙黙, 安東府使 兪翰蕭 등이 1776년(영조 52) 역변이 있던 날 누각에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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辭持平疏(1793) 4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司憲府持平을 사직하는 상소이다. 병조좌랑의 직을 그만 둔 지 겨우 30일밖에 되지 않았는데, 또 다시 사헌부의 직책을 맡겨주신 은혜에 몸 둘 바를 모르겠으나, 자신은 재주도 없고 조정의 體例를 알지 못하는 입장에서 淸顯직인 사헌부의 직책을 감당할 수 없기에, 명을 거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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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丑擬疏(1793) 6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士林을 대신해서 지은 상소문이지만, 임금에게 올리지는 않았다. 당시 領府事 蔡濟恭과 判府事 金鍾秀가 동시에 재상에 발탁되어 서로 번갈아 소를 올렸으나 정조는 이 두 사람의 상소를 모두 封還하였다. 채제공은 상소를 올려 정조가 평소에 ‘차마 말하지 못하고 감히 말해서는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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擬辭獻納附陳所懷疏(1794) 10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司諫院獻納을 사직하면서 지은 상소문이다. 이미 병조좌랑이나 사헌부지평 등을 제수 받은 은혜만도 과분한 것인데 또 새롭게 사간원헌납의 직분을 맡기시니 너무나 황송한 일이며, 그동안 5번이나 제수되었음에도 한 번도 나아가지 않은 죄는 죽어도 마땅하지만, 지금은 천식 때문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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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東巖內叔柳公(1793) 13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외삼촌인 東巖 柳長源(1724∼1796)에게 보낸 편지이다. 사헌부지평을 사직한 그 다음날 咸從과 胤從과 함께 陶淵 일대를 유람했는데, 胤從이 기문을 요청함에 경모하는 뜻만 붙였음을 전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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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丁上舍(志宬)兼示金安甫(㙈)丁孝範(協祖) 14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丁志宬(1718∼1801)에게 보내면서 金㙈‧丁協祖(1734∼1819)에게 함께 전달한 편지이다. 喪制의 예법과 해당 服制에 대하여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고 있다. 특히 心喪에는 無服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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再答安甫 17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거듭 金㙈에게 답장한 편지이다. 心喪은 無服이지 非服이 아님을 언급하면서 자신은 心과 服을 나누어서 말을 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服과 心을 섞어서 말을 하고 있어서 서로 의견 충동이 발생하게 되었음을 전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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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趙士威(虎然) 21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趙虎然(1736∼1807)에게 답장한 편지이다. 글자 교정을 부탁한 것에 대해서 해당 글자의 온당함과 부당함에 대해서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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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趙士威 23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趙虎然에게 답장한 편지이다. 서로 연이은 喪을 당해 슬플 터인데, 먼저 위로의 편지를 보내 주어 감사하다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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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白雲池石役所諸有司 24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白雲池 石役所 여러 有司들에게 보낸 편지이다. 산송문제 때문에 발생한 금씨 문중과의 불화가 발생한 사유를 기술하면서 서로 의혹을 풀고 원만하게 처리되기를 바란다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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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川城諸友 1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川城에 사는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이다. 里社의 院任을 선출함에 있어서 뒷짐지고 가만히 있지 말고 뜻을 모아 자신의 의견에 따라 주었으면 하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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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張輝甫(光玉) 2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張光玉에게 답장한 편지이다. 後嗣를 세움에 있어 喪服에 대한 잘못된 점을 지적하면서 다른 禮書를 자세히 살펴보고 결정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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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李穉道(埦) 3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李埦에게 보낸 편지이다. 從兄의 행동에 대해서 조만간 만나서 이야기 나눌 것을 전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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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權如天(思溥) 3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權思溥(1735∼1805)에게 보낸 편지이다. 임금의 은택을 입어 벼슬을 하고 있는 처지지만, 최근 몇 년 동안의 흉년과 올해는 가뭄까지 겹쳐 난감하다는 입장을 전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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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表弟權仲得(讜)季周(訪) 4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表弟 權讜과 權訪(1740∼1808)에게 보낸 편지이다. 凶疏의 내용을 판각하여 후세에 남기고자 각처에 발송한 通文을 빨리 거두어 다른 우환이 없게 하라는 당부의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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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權仲得季周 5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權讜과 權訪에게 보낸 편지이다. 최근에는 德翁과 더불어 홀아비의 고독한 심사를 풀고 있음을 전하면서 先判書의 비문에 대해서는 서두 부분을 장황하게 기술하였는데, 많은 부분을 수정하고 조탁해야 함을 전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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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權公允(相允) 6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權相允에게 보낸 편지이다. 疏를 올리는 문제는 愼重하고도 嚴正하게 해서, 가까이는 올 봄에 올리고, 늦으면 가을에 올리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는 의견을 전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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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鄭敬式(章簡) 7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鄭章簡에게 답장한 편지이다. 江右에서 다시 疏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면 虎溪書院이나 三江書院에서 협의한 대로 正論을 명확하게 말해서 저들이 급급해하지 않도록 해야 함을 전하면서 자신은 북쪽으로 갈 형편이 못되니 南浦로 한 번 방문해 줄 것을 당부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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再與敬式 8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鄭章簡에게 재차 보낸 편지이다. 虎溪書院에서의 通諭는 해도 되고 안 해도 그만인 일인데, 굳이 廡를 청하는 疏를 올리려 하니, 이는 의리상 마땅히 해야 되는 일이지만 다시 한 번 더 公議를 모아 신중하게 검토해야 함을 전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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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崔老國樑 10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崔國樑에게 보낸 편지이다. 간곡한 부탁으로 인해 碑文은 대충 얽었으나 實錄을 釐正하는 일은 진실로 감당하기 어려운 일임을 전하면서, 여러 가지 역사서들을 참고해 보니 실록 중에 몇 군데 疑訝한 곳이 있어 해당 實錄과 名臣錄과 『海東野言』을 등사해서 보내니 참고할 것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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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伯氏 11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형 金虎鍊(1718∼1799)에게 보낸 편지이다. 7월 26일 李道顯이 갑자기 도성의 자기 집으로 찾아와서 사도세자의 신원을 회복하는 소를 올릴 뜻을 전하기에 만류하면서 고향으로 내려갈 것을 권유하였고, 또 아들 李應元도 찾아와서 소를 올릴 뜻을 표명하므로 재차 아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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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叔父 14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숙부인 渴睡軒 金㙔(1709∼1789)에게 보낸 편지이다. 숙부님과 여러 형님들의 보살핌과 임금의 특별한 은혜를 입어 謫所에서 풀려나게 되었음을 언급하면서 돌아가서는 학문에만 정진할 것을 전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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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從叔父 15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종숙부인 雙巖 權埅(1706∼1778)에게 보낸 편지이다. 죽을 운명에 놓인 자신이 聖恩을 입어 적소에서 풀려나게 되었음을 전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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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德翁五昆季 15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金象鍊(1731∼1804) 5형제에게 답장한 편지이다. 聖恩을 입어 돌아가게 되었음을 전하면서 할 말이 많지만 紙面상 간략하게 적었으니, 다른 형제들도 참고해서 보라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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寄龍兒兼示堅貞兩姪及容孫 17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아들 龍에게 부치면서 아울러 永堅‧永貞 두 조카와 손자인 容에게 보낸 편지이다. 평소 孝友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 하늘에 벌을 받게 된 것임을 언급하면서 자신을 경계로 삼아 더욱 孝友하고 서로 敦睦하여 자신처럼 先訓을 저버리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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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反浦門中 17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反浦 門中에 보낸 편지이다. 聖恩으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음을 전하면서 그동안 여러 친지 분들께 심려를 끼쳐드려 대단히 죄송하다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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箕子論 18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중국 은나라 마지막 임금인 紂王이 종사는 돌보지 않고 온갖 失政으로 인해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르렀다. 간언을 하면 죽인다는 주왕의 嚴命에도 불구하고, 比干‧微子‧箕子는 신하된 입장으로 지켜볼 수 없었다. 그래서 比干은 간언을 하다가 죽었고, 微子는 간언을 하지 않고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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曾子責子夏辨 21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성인들은 제자들이나 다른 사람이 잘못을 해도 직접 대놓고 화를 내거나 나무라지 않았다. 그런데 『禮記』에 “子夏가 자식의 죽음에 지나치게 슬퍼하다가 失明해 놓고 본인은 죄가 없다고 함에 증자가 성내면서 ‘상아 네가 어찌 죄가 없겠는가, 너는 親喪을 당했어도 백성들로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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箕子朝周辨 23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星湖 李瀷이 『星湖僿說』에서 언급한 「箕子朝周」의 의심나는 대목에 대한 辨論이다. 이익은 「箕子朝周」에서 “箕子가 ‘罔爲臣僕(주나라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고 말한 것은 아니고 反語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익의 이 주장에 대해 김약련은 반론을 제기 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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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雲碑辨 26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白雲’이라 名稱한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어 이를 변론하는 글이다. 白雲의 古名이 ‘船湖’였는데, 퇴계 선생이 고치도록 한 이후로 사람들은 白雲은 알고 船湖라는 이름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白雲이라 명명하였음을 설명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