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謁訥隱李先生日錄(1756) 29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1756년(영조 32) 2월 6일부터 13일까지의 일록이다. 김약련은 정월 보름께에 눌은 이광정이 覺華寺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10여 년 동안 만나고자 했던 李光庭을 만나러 길을 나선 것이다. 6일에 길을 떠났지만, 大雪로 인해 지체되어 9일에서야 覺華寺에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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遊江都錄(1757) 31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1757년(영조 33) 초겨울에 기록한 것으로, 8월 하순에 德翁 등과 함께 江華島 長寧殿에 머물러 있던 叔父를 뵙기 위해 강화도를 다녀온 일을 기록한 유람록이다. 이 유록에는 강화도를 유람하게 된 배경과 도착하기까지의 주요경로 및 강화도에 얽힌 이야기를 빠짐없이 모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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除夜書示兄子壽(1751) 35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1751년(영조 27) 섣달 그믐날 咸集堂에서 한해가 저물어 감을 안타까워하면서 밤을 지새우는 조카 壽에게 써준 글이다. 조카가 한 해가 저물어가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기에, 오늘 하루가 저물어 감을 아까워할 것이 아니라, 평소에 1년 360일을 알차게 보낼 것을 권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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擇日說示戒門內後生 36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장사지낼 때 택일하는 잘못을 지적하여 문내의 후생들에게 보여주면서 경계시킨 글이다. 죽은 사람을 전송하는 일은 人倫의 큰 일로 모름지기 예를 다해서 장사를 지내야 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대부분 좋은 날과 좋은 때를 선택해서 장사를 지낸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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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虎溪書院士林文 37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虎溪書院 士林에 보내는 통문이다. 金令이 지은 통문에 상단부분은 의리에 맞는 말이지만, 하단 부분은 의리에 맞지 않는 말이 많기 때문에, 이를 바로잡아 천천히 다시 의논을 한 다음에 소를 올려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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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別西亭宗叔擎厦氏歸西亭序 1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宗叔인 西亭 金擎厦 씨가 西亭으로 돌아감을 전송하면서 지은 서문이다. 경하는 충청도 사람으로, 8‧9대조에서 갈린 어릴 때 선친 곁에서 21살의 나이로 고향을 방문한 경하씨가 이제 20년이 지난 41세의 나이로 다시 고향을 찾아와서 함께 즐긴 일을 기록한 것이다. 경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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洞契序 2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一洞契에 대한 서문이다. 마을에서 오래전부터 있었던 契모임이 중간에 폐해졌다가 다시 새롭게 열면서 마을 사람들이 한마음 한 뜻으로 親疎‧上下‧賢不肖의 구분 없이 오로지 禮에 근본하여 相扶相助하면서 서로 규제하고 권면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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德山宋氏增修譜牒序 3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김약련이 鄕序堂을 유람할 때 함께 따르는 자가 德山宋氏의 내력에 대해서 묻기에, 이에 대한 대답에서부터 德山宋氏의 내력에 대한 언급이 시작된다. 덕산송씨는 鼻祖 朝散公부터 3대가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조산공의 아들 掌令公이 閔氏에게 장가들면서 비로소 榮州에 살게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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滄溪遺稿序(1790) 5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1790년(정조 14) 여름에 쓴 外先祖 文敬仝(1457∼1521)의 문집에 대한 서문이다. 문집의 초고본은 본래 외손 張氏 집에 보관되어 있다가 張世相이 編首에 표점을 한 것만 직접 베껴 두었고, 남은 編과 拾遺 약간은 山泉精舍에 보관해 두었다. 1788년(정조 1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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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溪集序 7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宋鼎鎔의 요청에 의해서 지은 景退齋 李天相(1637∼1708)의 문집 서문이다. 楡巖 裵幼樟의 문인으로 일찍이 科擧를 폐하고 實學(성리학)에 뜻을 두어, 실천궁행을 근간으로 견문을 넓혀 窮格存養의 방법이나 冠婚喪祭의 제도 등에 이르기까지 두루 채집하여 항목별로 분석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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伯氏重牢宴序(1794) 8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1794년(정조 18) 3월 27일 형의 重牢宴(回婚式)을 기리기 위해서 지은 서문이다. 17세 때인 1734년(영조 10)에 혼례를 올린 형 金虎鍊(1718∼1799)이 결혼한 지 60년이 되도록 내외가 먼저 죽지 않고 偕老하였음을 기리고 있다. 김호련은 82세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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素庵遺稿序 10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素庵 金世鍊(1733∼1790)의 문집 서문으로, 맏아들 永傳의 부탁으로 지은 것이다. 서로 知音이였던 관계로 몸은 둘이지만 마음은 하나여서, 둘 중에 먼저 의견을 꺼내면 나머지 한 사람은 그 의견에 무조건 찬동할 정도였다. 그래서 素庵의 입장에서 마음 가는대로 손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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忍齋李公遺稿序(1800) 11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1800년(정조 24) 4세손 李昌燮의 요청에 의해서 지은 忍齋 李希楙(1617∼1684)의 문집 서문이다. 三峯書院의 원장을 6‧7년 역임한 사실을 토대로 그의 덕망을 기리고 있으며, 忍齋의 부친 李弘挺의 묘소가 김약련이 사는 집에서 몇 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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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壁遺稿序 12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北壁 金弘濟(1661∼1737)의 문집에 대한 서문으로, 김홍제의 再從孫 金燦亨의 요청에 의해서 지은 것이다. 몇 편의 시를 吟詠해보니 대부분 天眞하였으며, 기타 著作들은 조탁을 가하거나 꾸민 흔적이 없는 자연스러운 것들임을 언급하면서 이들 모두는 김홍제의 脫略한 胸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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楊州宋氏世譜序 13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宋五奎가 대략 닦아 놓은 「楊州宋氏世譜」에 대한 서문이다. 우리나라의 송씨는 礪良에서 冶爐로 분파되었고, 冶爐에서 다시 恩津으로 분파되었으며, 楊州宋氏 또한 이들 중의 한 갈래임을 언급하고 있다. 또한 楊州宋氏가 영주에 이주하게 된 내력을 자세히 기술하고 있으며, 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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斗庵記 14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거처하던 집을 ‘斗庵’이라 한 것은 마을이름 때문이다. 마을 위에 바위가 우뚝하게 서 있는데 그 바위 위에 또 바위가 있어 마치 斗와 같은 형상을 하고 있기 때문에 마을을 ‘斗巖’이라 불렀다. 바위 아래 1리쯤에 집이 있는데, 집밖에 서서 보면 바위처럼 보이고, 집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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斗庵後記 15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김약련은 평소 집이 작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는데, 며느리가 거처할 공간이 없어서 자신이 기거하던 곳을 며느리에게 내주고, 자신은 남쪽에 옛집과 같은 크기의 집을 짓고 안에서 반 칸, 밖에서 반 칸을 더 늘였다. 그래서 斗같은 공간이 두 곳이나 더 생기게 되었다. 그리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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宗宅重修記(1780) 16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1780년(정조 4) 가을 宗宅인 三判書故宅을 중수하면서 지은 기문이다. 삼판서고택은 고려 말 형부상서를 지낸 鄭云敬(1305∼1366, 정도전의 父)이 살던 집으로 정운경이 工曹典書를 지낸 그의 사위 黃有定에게 물려주고, 황유정이 다시 사위 金小良에게 물려주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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野逸堂重修記 18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野逸堂은 栢巖 金玏의 손자인 金鸞이 지은 정자이다. 김란은 김륵의 둘째 아들인 金止善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서 이곳에서 직접 밭을 일구어 먹고 우물을 파서 마시는 등 野人이나 逸士들과 차이가 없는 생활을 하면서 스스로 ‘野人’이라 자처하고 당호를 ‘野逸’이라고 한 것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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黙窩記 20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외사촌 權讜(字 仲得)의 집인 ‘黙窩’에 대한 기문이다. 위나라 때 王昶이 자기 자식들이 輕浮할 것을 걱정해서 자식들의 이름을 ‘黙’과 ‘渾’으로 지었다. 그러나 渾은 王濬과 공을 다투는 등 이름에 걸맞지 않은 행동을 했다. 그러나 ‘묵’에 대한 기록이 없어 그의 사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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素庵記 22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素庵에 대한 기문이다. 검은색‧푸른색‧붉은색‧노란색들은 서로 색깔을 변화할 수 없지만, 오직 흰색은 자유자재로 원하는 색깔로 바꿀 수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아울러 은나라 사람들은 질박한 것을 숭상했기 때문에 흰색을 좋아했으며, 공자가 말한 ‘繪事後素’에서 ‘素’는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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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陋庵記(1788) 23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1788년(정조 12) 초봄에 쓴 기문이다. 성맹성은 김약련이 사는 집에서 반나절 정도 가면 닿을 수 있는 基木縣 鳳巖村으로 이사를 와서 자기가 살던 집을 ‘三陋庵’이라 이름 붙이고는 김약련에게 기문을 요청한 것이다. ‘삼루암’이라 이름 붙인 이유로, 첫 번째는 집안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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夏寒亭重修記 25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夏寒亭을 중수하면서 지은 기문이다. 하한정은 醉睡 朴漉이 아버지 嘯皐 朴承任을 위해 둘째 아들 朴樅茂로 하여금 짓게 한 정자이다. 박승임은 直言을 하다가 조정에 쓰임을 얻지 못하자 蟠谷의 별장으로 退居하였다. 이에 박록이 아버지의 뜻을 알고는 자기 집 남쪽에 십여 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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雙竹齋記(1793) 26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1793년(정조 17) 가을 송도에 살던 宗人 金士黙이 찾아와서 기문을 요청하였다. 당시 그는 개성의 善竹橋와 竹林堂 사이에 살았는데, 자신의 거처를 ‘雙竹齋’라 명명하고 여기에 대한 기문을 요청한 것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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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巖亭記 27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上舍 柳長源(1724∼1796)이 樸谷에서 大坪으로 移居하여 살면서 산 위에 ‘東巖亭’을 지어 놓았다. 동암정은 水谷의 서쪽과 馬嶺의 남쪽에 위치해 있으면서 남쪽으로 樸谷이 바라보였다. ‘東巖’은 곧 ‘박곡’의 옛 명칭이었던 것이다. 정자가 지어진 지 7년 만에 일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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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峯精舍記(1793) 29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1793년(정조 17) 초겨울에 쓴 九峯精舍의 기문이다. 구봉정사는 金鵬運(1755∼1812)의 지은 것으로, 그는 瓢隱 金是榲의 후손이다. 그는 일찍이 科擧를 포기하고 龜峴에 묻혀 살면서 再從祖인 蘭谷 金江漢(1719∼1779)에게서 글을 배웠다. 벽에는 이황의 「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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木假山記 31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龜東居士가 소백산에서 木假山을 하나 발견하였다기에 직접 가서 보고 이에 대한 느낌을 적은 기문이다. 목가산이란 원래 나무인데, 모양이 산처럼 생겼고, 특히 뿌리가 세 봉우리 모양으로 생긴 것이 특이하다. 김약련은 이 나무가 다른 나무들과 달리 귀동거사에게 발견되어 그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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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用齋記(1796) 34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天雲亭 서쪽 수십 보 떨어진 곳에 위치한 齋로, 주인은 孟仁이다. ‘無用’이라고 이름 붙인 이유는 정자가 쓸모없는 것이 아니고, 주인인 자신이 보잘 것 없기에 이름 붙인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이유인즉 어려서부터 글을 배웠지만 늙은 지금까지 제대로 쓸 곳이 없고, 여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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箭溪草堂記(1797) 36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전계초당은 砂溪 張汝華(1566∼1621, 字 茂甫)가 지은 초당이다. 장여화는 집 동쪽 골짜기에서 시작된 냇물이 집 앞에 와서는 화살처럼 빨리 흐른다 하여 ‘箭溪’라 이름 붙이고는 시냇물 위에 초당을 짓고 살게 된 것이다. 그의 성품 또한 권문세족들에게 아부하지 않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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希白堂記(1800) 37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1800년(정조 24) 12월 16일에 지은 기문이다. 希白堂은 南厓 成彦楫(1732∼1812)이 지은 정자이다. 그가 ‘希白’이라 이름 붙인 까닭은 조상 대대로 내려온 청백리의 정신이 자신의 대에 와서 쇠퇴해졌고 淸白을 몸소 실천하는 사람도 드물기 때문에 청백리 집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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曠慕祠創建記 39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曠慕祠는 1801년(순조 1) 8월에 지어진 것으로, 金若鍊의 從先祖인 金潧(?∼1455)과 先祖인 金淡(1416∼1464, 호 撫松軒)의 덕행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서 지은 사당이다. 金潧과 金淡 형제는 1435년 문과에 급제하여 集賢殿에 選入었으며, 1447년(세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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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庚午曆末伯氏詩後(1754) 1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1754년(영조 30) 11월 11일에 지은 것으로, 1750년(영조 26) 부친이 죽을 때까지 기록한 일기를 김약련의 형 김호련이 우연히 들춰보고 슬픈 감회가 북받쳐 7언 율시 한수를 읊고 그 뒤에 김약련에게 몇 마디 적을 것을 요구하므로 庚午曆 끄트머리에 적은 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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題澗雲居士金剛錄後 3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金剛錄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澗雲居士의 금강록은 ‘海金剛’과 ‘雲金剛’의 기이한 특징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직접 가보지 않아도 마치 직접 본 것 같은 느낌이 있어서 ‘文金剛’이라고 이름 붙이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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樊浦書齋落成會題名冊糚修跋 3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樊浦書齋는 원래 1718년(숙종 44)에 마을의 長老들이 후진들을 양성할 목적으로 지어진 것이다. 이는 族叔인 重鐋씨의 집에 소장된 당시 『會員題名』을 보고 알 수 있었다. 낙성식은 1719년(숙종 45) 봄에 이루어졌으며, 여기에는 모두 47명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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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吳氏六世文稿後(1781) 5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吳司重의 부탁으로 그의 선조들의 문집을 한 곳에 모아 엮은 『오씨육세문고』 뒤에 쓴 발문이다. 등재된 인물은 竹牖 吳澐의 曾祖父인 三友堂 吳碩福과 祖父인 竹塢 吳彦毅 그리고 竹牖 吳澐, 또한 吳澐의 아들 敬菴 吳汝橃, 孫子 誠齋 吳益熀과 성재의 아들 伊溪 吳慶基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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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光山卓氏世稿後 7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광산탁씨 卓鼎運의 요청에 의해 쓴 景濂亭 卓光茂와 竹亭 卓愼(1367∼1426) 父子의 문집에 대한 발문이다. 비록 남아 있는 시가 4수밖에 안 되지만 그들의 行誼와 名節을 알 수 있는 것들이며, 『東文選』에는 鄭道傳이 지은 「景濂亭銘後說」이 있으며, 이 뒤에 실린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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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於于堂文稿後 8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於于堂 柳夢寅의 문고 뒤에 쓴 발문이다. 유몽인이 광해정권에 벼슬한 것을 두고 유죄인지 무죄인지를 논하기에는 자세하지 않음을 언급하면서 문고 중에 있는 「送李相國赴義州序」에서는 李爾瞻과 是非를 함께 하지 않았음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유몽인의 죽음에 대해서는 그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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闕里耆老會題名錄跋(1799) 10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闕里社에 耆老會 모인 사람들의 명부 뒤에 쓴 것이다. 82세부터 60세까지의 사람들을 일일이 기록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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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金孝子(始器)事蹟後 12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金致運이 孝子로 알려진 아버지 金始器의 事蹟에 대해서 한 마디 언급해 줄 것을 요청하였기에 김약련이 어떤 사람과의 문답한 내용을 토대로 기록한 것이다. 金始器는 아버지의 관을 運柩하려다가 물에 빠져 죽었다. 이런 행동이 진정한 효인가에 대해서 의문을 품은 사람이 있기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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敎子以身說 14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형과 동생은 어릴 때는 부모의 사랑과 가르침을 함께 받으면서 너와 나의 구분이 없었는데, 성장해서 分家하여 각기 따로 살면서 어릴 때의 마음 같지 않아 형은 형으로서, 동생은 동생으로서의 올바른 도리를 못하게 된다. 이런 형제가 각자 자식을 낳고, 그 자식들도 또한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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兄子永觀名字說 14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조카 永觀의 名과 字에 대한 설명이다. 永은 行列이므로 이름의 무게는 ‘觀’자에 있음을 언급하면서 字를 ‘景大’라 한 것은 커다란 안목으로 소인의 입장이 아닌 군자의 입장에서 사물을 바라보고 행동하라는 의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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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子名字說 16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세 아들의 이름을 永忠‧永恕‧永悳이라 한 것은 永은 항렬자이고 ‘忠’은 글자를 나누면 中心, ‘恕’는 如心, ‘悳’은 直心이 되므로 각자가 이름에 맞게 행동하라는 의미에서 지었음을 언급하면서, 또한 中心‧如心‧直心을 세 아들의 자로 삼았음을 설명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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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雞說 16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병아리가 자라나서 어미 닭이 된 뒤에 자기 새끼 부양을 위해 어미 닭에게 박대하는 모습을 보고 미물의 닭이 자기 새끼 부양을 위해 어미를 구박하는 형상은 인간생활과 흡사함을 나타내고 있다. 아울러 인간들에 대한 경각과 교훈성을 보여주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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買草說(1761) 17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32세 때 지은 것으로, 7년(1754) 전에 담배를 사러 갔다가 겪은 일을 기술하면서 스스로를 경계하고자 함이다. 담배를 사러 갔는데, 담배 주인이 한 주먹 주고 또 다시 불러 한 주먹을 주었다. 이유를 물으니, 대부분 사람들은 적게 주는 것을 가지고 다투어 두 번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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灌水說(1767) 19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가뭄에 서로 자기 논에 물을 대어 흉년을 면해 보려고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물 대기를 양보하는 것을 보고는 나에게 이로움은 곧 남에게 해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의 욕심을 참아 남에게 양보하는 미덕을 가지게 된다. 이를 黃石公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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雜說 21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참새는 길하고, 까마귀는 흉하다는 잘못된 선입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까마귀가 아무리 좋은 소식을 알려주어도 사람들은 까마귀를 쫓으려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악하다고 알려진 사람은 아무리 좋은 소식을 알려줘도 사람들은 그를 내쫓으려 하기 때문에 나쁘다고 알려진 사람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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孝婦傳 22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김약련은 서두에서 “부녀자의 입장으로서 孝를 행하기란 남자보다 어렵고, 천한 사람의 입장에서 효를 행하기란 선비보다 어렵고, 청상과부의 입장에서 효를 행하기란 남편이 있는 경우보다 더 어렵고, 가난하고 누추한 입장에서 효를 행하기란 부유하고 풍요로운 사람보다 어려운데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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烈女傳 26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우리 고을엔 자고로 義烈이 많아 조정에서 정표를 명하기도 하고 혹 家傳이나 狀‧銘에 기록하여 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權氏는 후손이 끊어졌고, 朴氏는 지독한 재앙을 받았으며, 宋氏는 천하고도 자식을 두지 못하였다. 이런 이야기들이 오래되지 않아 없어져 버릴까 슬퍼하여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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續烈女傳 29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우리 영천 땅은 수 십리에 불과하나, 젊은 부인으로서 순절한 사람이 서로 잇달았다. 李氏가 죽고 수십 년이 되어 金氏가 있었고, 김씨가 죽고 수년 만에 安氏가 있었다. 그 뒤 5년 뒤에 黃氏가 또 죽었고 또 張氏가 그 해에 죽었다. 이들은 모두 몸을 가벼이 여기고 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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琴烈女傳 31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열녀 금씨는 영주에서 출생하여 16세에 안동 춘양현에 사는 黃氏에게 시집간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남편 황씨가 병이 들어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 처음에 금씨는 남편을 따라 죽으려 하였으나 시부모를 저버리고 죽는다는 것은 곧 지아비를 저버리는 것이라 생각하고 슬픔을출처 : 유교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