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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烈女傳 35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김열녀는 남편이 병든 지 5년 동안 한결같이 남편의 병수발을 하다가 남편이 죽자 손수 염을 하고는 빈소로 나아가 한 바탕 곡을 한 다음 이내 자결하였다. 이런 그녀의 행동에 대해 김약련은 대부분의 忠臣‧義士가 그렇듯이 한 순간 참지 못하는 剛果輕躁한 성질에서 나온 것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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杏堂童子傳 36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천부적인 재능을 지녔으나 9살이라는 짧은 삶을 마감한 金景霖(1760∼1768)과 그의 누이에 대한 事蹟을 입전한 것이다. 김경림의 자는 澤世이며, 杏堂은 그의 호이다. 동자가 나이 7세에 스스로 이름을 짓고 스스로 호를 지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弼衡(字는 克夫)이며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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烈雞傳 50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닭에 대한 이야기이다. 서로 사랑하던 암탉과 수탉 한 쌍이 있었는데, 어느 날 수탉이 이웃집 수탉과 싸우다가 다쳐서 결국 죽고 말았다. 이에 대한 복수로 암탉은 자신이 낳은 알이 부화해서 생긴 병아리들도 합세하여 결국 이웃집 닭을 물리치는 복수극을 입전한 것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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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狗傳 51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주인을 위해 충직한 개들의 형태를 기술하고 있다. 수록된 이야기의 개략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첫 번째 개는 김씨가 시집을 가면서 기르던 개를 데리고 갔는데, 개는 항상 그녀를 따라 다녔다. 그런데 김씨가 병이 들자 개는 죽도 먹지 않다가 김씨가 죽자 담장 아래에서 죽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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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狗傳 52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과부녀가 기르던 개가 주인의 억울한 죽음을 고을 원님에게 알려 주인의 억울한 누명을 벗기고 아울러 주인의 수절을 드러내 준 의로운 이야기를 기술하고 있다. 비록 말 못하는 미물이지만, 주인이 평소 자신을 사랑하고 아껴 준 것에 대한 보은의 정신에 입각하여, 주인을 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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宗宅重修上樑文 1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속칭 ‘三判書故宅’이라 전하는 宗宅을 중수하면서 지은 상량문이다. 상량된 뒤에는 조상들의 업을 후손들이 이어 부자지간에는 돈독하고, 부부지간에 和愛하고, 형제간에 우애 있게 지내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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野逸堂重修上樑文 2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野逸堂은 栢巖 金玏의 손자인 金鸞이 지은 정자이다. 그는 이곳에서 野人이나 逸士들과 차이가 없는 생활을 하면서 스스로 ‘野人’이라 자처하고 당호를 ‘野逸’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던 이곳에 장마로 인해 불어난 물이 범람하여 더 이상 사람이 살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새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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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山精舍上樑文 3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北山精舍를 중수하면서 지은 상량문이다. 200년이 지난 봄날에 옛 선인들의 규모 그대로를 따라서 順興의 동쪽 30리쯤 떨어진 곳에 새롭게 중건하였음을 전하고 있다. 이곳은 貞夫人張氏가 자식을 엄정하게 가르친 곳이며, 吏曹判書를 지낸 李玄逸의 遺業이 깃들어 있는 곳임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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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祖敏節公廟告由文 5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先祖인 敏節公 栢巖 金玏(1540∼1616)의 廟宇에 告由하는 글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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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雲山望祭壇立石告由文 6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白雲山 望祭壇에 立石하였음을 알리는 고유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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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先祖黃判書祭壇告由文 6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外先祖이신 판서 黃有定의 제단을 설치하면서 올리는 고유문이다. 본손을 대신해서 지은 것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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從先祖集賢殿校理公別祠奉安文 6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從先祖이자 집현전교리를 역임한 金潧(?∼1455)을 別祠에서 봉안하면서 지은 축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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常享祝文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세종 때 명신인 文節公 金淡(1416∼1464)의 덕행을 추모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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雲谷社錦江張先生題位版告由文 7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雲谷社에서 錦江 장선생이 位版에 題하였음을 알리는 告由文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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鍾山精舍新溪李公常享文 7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鍾山精舍에서 新溪 李天相(1637∼1708)이 지은 常享文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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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溪書院移建後奉安文 7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도계서원을 이건하고 난 뒤에 올리는 봉안문이다. 서원의 명칭은 마을 이름을 따서 붙였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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荷塘權先生遷厝時祭文(1789) 8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1789년(정조 13) 荷塘 權斗寅(1643∼1719)의 무덤을 이장할 때 지은 제문이다. 살아계실 때는 영남의 習俗이 투박하지 않았고 유학의 연원이 끊이지 않았으며, 덕행과 문장은 한 지방에서 師表가 될 만하여 正學을 扶植하고 邪說을 물리치는 역할을 하셨는데, 죽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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伯氏葬事時祭文 9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형 金虎鍊(1718∼1799)을 장사지낼 때 지은 제문이다. 어머니부터 아버지‧형수‧조카가 연이어 죽고, 이제 형이 죽은 지 얼마 안 되어 아내까지 죽었음을 전하고 있다. 형은 80세까지 살았고, 아내 또한 70살은 넘겼으니 그다지 애통할 것이 없지만, 홀로 남게 된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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叔母淑夫人義城金氏葬事時祭文 9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숙모인 숙부인 의성김씨의 장사 때 지은 제문이다. 어려서 어머니를 잃어 어머니의 모습과 목소리를 기억할 수 없지만, 숙모를 통해서 어머니의 德行과 遺事를 듣게 되었고, 숙모의 보살핌 덕분에 무탈하게 성장할 수 있었음을 전하면서 73세의 수를 누리다가 죽은 숙모의 죽음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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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舅氏大祥文 12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외삼촌의 대상을 맞아 지은 제문이다. 비록 땅속에 묻혀 있지만, 2년이 지난 지금도 외할머니는 늘 우리 아이는 효자였다는 말을 하고 다니시니 너무 슬퍼하지 말라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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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聾叟全上舍丈文 12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聾叟 全必錡의 죽음을 애통해하는 제문이다. 부친과는 肝膽相照할 정도로 절친한 사이였음을 증명하는 창수시를 소개하고 있다. 특히 부친이 聾叟에게 준 16구의 7언시가 곧 聾叟의 행장이니, 이 시를 제외하고는 聾叟를 논할 수 없음을 언급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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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內弟朴(時復)善初文 14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외사촌 동생 朴時復의 제문이다. 형제 없이 부모만 섬기다가 요절한 것에 대해 마음 아파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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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申維降(翰周)文 16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형을 대신해서 지은 것으로 申翰周의 죽음을 애도하는 제문이다. 같은 해에 태어나 같은 마을에 살면서도 만나려고 해도 결국 죽을 때까지 만나보지 못한 기구한 운명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기르던 물고기와 가축들을 모두 버리고 소나무를 베어 서실을 만들어 100여권의 책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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亡女李室遷葬時祭文 18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죽은 딸의 무덤을 大舅氏 곁으로 옮기면서 지은 제문이다. 죽었을 때나 상을 마쳤을 때도 글을 짓지 않았지만, 시댁 쪽에서 아직까지도 딸이 생전에 다한 효행과 재능을 칭찬하므로 부득이 글을 짓게 되었음을 전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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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女婿李載淳文 19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사위 李載淳의 죽음을 애도하는 제문이다. 딸이 먼저 죽었음을 언급하면서 사위의 집안에도 43세부터 20세까지 수년 동안 연이어 요절한 기막힌 불운을 슬퍼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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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從弟得翁文(1784) 22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사촌 동생 金魯鍊(1745∼1784)의 죽음을 애도하는 제문이다. 효성이 지극하던 부인을 먼저 잃고, 하나 밖에 없던 딸도 시집 간 지 얼마 안 되어 아들 하나만을 남기고 죽은 것에 대해 애통해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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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艾軒文 24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艾軒의 죽음을 애도하는 제문이다. 자신은 狂簡하고 果剛하였지만, 慈詳하고 溫雅하여 자신의 不善함을 경계시켜 주던 친구의 죽음에 애통한 심정을 담아 永訣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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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深广金公叔文 25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막역하게 지내던 深广 金公叔을 永訣하면서 지은 제문이다. 안타깝고 애통한 심정을 글로 다 표현할 수 없음을 전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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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馬壽海文 26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馬壽海의 언행과 덕행을 기리는 제문이다. 그의 영웅적인 자질을 漢의 伏波와 唐의 北平에 비기고 있다. 어릴 때는 聾叟 全必錡에게서 배우다가 성장해서는 자신의 부친 晩庵 金(1697∼1750)에게서 배웠음을 전하고 있다. 本貫은 木川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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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均生員丹砂張公行狀 1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上舍 張泰祺의 부탁으로 지은 丹砂 張直方(1687∼1741)의 행장이다. 자는 以大, 초명은 緯軫, 初字는 休應, 본관은 仁同이다. 아버지는 命相 지행과 재주가 뛰어났으나 일찍 죽었으며, 어머니는 선성김씨 宗渼의 딸이다. 상사 朴文曅과 도의지교를 맺어 뒷날 妹壻가 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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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生眞城李君行略 5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李師矩(1761∼1786)의 行略이다. 초명은 師道, 자는 天若, 본관은 진성이다. 아버지 緘은 조부 壽天의 학비조달을 위해 자신은 글공부를 그만두고 농사를 지어 아버지의 학비를 조달할 정도로 효성이 지극하였다. 성품이 진실되고 민첩하며, 글공부에 독실하였으나 26세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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折衝將軍龍驤衛副護軍閔公行狀 6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89세의 수를 누려 용양위부호군에 제수된 閔世彦(1684∼1776)의 행장이다. 자는 美叟, 본관은 驪興이다. 아버지는 起宗, 어머니는 襄陽林氏 正時의 딸이다. 59년 동안 아버지를 위해 엄동설한에도 오얏 열매를 구해 오는 등 아버지가 원하시는 것은 기필코 구해 드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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處士永嘉權公行狀 8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효자로 알려진 權(1722∼1787)의 행장이다. 아버지는 準慶, 어머니는 영천이씨 東植의 딸이다. 3세에 어머니가 병에 걸리자 울면서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어머니가 한 끼를 먹으면 자신도 한 끼를 먹고 어머니가 두 끼를 먹으면 자신도 두 끼를 먹었으며 어머니가 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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孝子四非閔公行狀 10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閔炯一(1699∼1756)의 행장이다. 자는 千兼, 본관은 여흥이다. 12세에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중국 후한 때의 曹娥(조간의 딸로 조간이 강을 건너다가 급류에 빠져 죽자 70일 동안을 아버지를 찾아 헤매었다. 시체를 찾지 못하자 조아도 강물에 몸을 던졌는데 5일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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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德郞豊壤趙公行狀 13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東巖 趙公의 행장이다. 동암은 저자인 김약련이 친척도 하나 없는 유배지에 처해 있을 때 백리 길을 마다 않고 김약련의 형 金虎鍊의 편지를 직접 전해 주는 등 이미 교분이 두터웠다. 또한 동암공의 맏아들 胤洙는 김약련의 조카사위가 된다. 이 행장은 동암의 從兄과 조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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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友堂朴公行狀 17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六友堂 朴檜茂(1575∼1666)의 행장이다. 자는 仲植, 자호는 崇禎野老, 본관은 潘南이다. 嘯皐 朴承任의 손자로, 아버지 漉(호 醉睡)은 일찍부터 과거를 포기하였으며, 아들의 귀함으로 인해 禁府都事에 올랐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어머니는 김해김씨 士廉의 딸이다. 寒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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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均生員繩軒權公行狀 21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鶴林 權訪의 아버지인 繩軒 權濤(1709∼ 1788)의 행장이다. 字는 浩源, 初名은 韶, 初字는 來鳳이다. 아버지는 山澤齋 權泰時의 6子이고, 어머니는 東萊鄭氏 堯允의 딸이다. 4세에 아버지를 잃고, 9세에 어머니를 여의자, 조부에게 의지해 살다가 2년 뒤에 조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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處士潘南朴君行狀 26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朴時龍(1733∼1788)의 행장이다. 자는 雲徵, 호는 星坡, 본관은 潘南이다. 아버지는 孝述, 어머니는 羅州丁氏 생원 謙愼의 딸이다. 嘯皐 朴承任의 8세손이자, 崇禎野老 朴檜茂의 6세손이다. 12세에 어머니가 심한 염병에 걸리자, 젖먹이 동생을 업고 손수 약을 달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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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均進士丹丘趙公行狀 28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趙顯文이 晩谷 趙述道가 편집한 遺事를 가지고 와서 행장을 부탁하기에 지은 丹丘 趙貞(1498∼1529)의 행장이다. 趙貞의 자는 正卿, 본관은 漢陽이다. 아버지는 直長을 지낸 仁琬, 어머니는 淸州鄭氏 進士 龜年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族叔父인 靜庵 趙光祖에게 수업을 받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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處士西山金公行狀 31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西山 金弘運(1711∼1753)의 행장이다. 자는 應甫, 본관은 禮安이다. 生父는 穆然, 아버지는 通德郞 斐然이고, 어머니는 仁同張氏 掌令 瑱의 딸이다. 12세에 종백부에게 양자를 들어 祖考喪을 承重하기를 成人같이 하였다. 평상시 빨리 말하거나 얼굴빛이 갑자기 변하는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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素庵處士金君行狀 33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저자인 金若鍊보다 비록 3살 어린 동생이지만, 어려서부터 서로 知己처럼 지내던 素庵 金世鍊(1733∼1790)의 행장이다. 字는 德卿, 본관은 예안이다. 아버지는 弘遠, 어머니는 義城金氏 南重의 딸이다. 3살부터 조부와 동침할 정도로 조부를 무척 따랐는데, 8세에 조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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從弟嫂恭人達城徐氏行略 37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사촌동생 金魯鍊(字 得翁)의 부인 達城徐氏(1743∼1780)의 行略이다. 달성서씨는 梧山 昌載의 딸로 태어나 19세에 김노련에게 시집을 왔다. 체격은 작았지만 단아한 맵시에 부드럽고 단아한 말과 온화한 기풍을 지녔다. 가난한 집에 시집와서 지극정성으로 시부모를 봉양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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從叔父雙巖公行狀 1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종숙부인 金埅(1706∼1778)의 행장이다. 자는 巨卿, 본관은 예안이다. 문밖에 두 개의 바위가 서로 마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김약련의 先親인 晩菴 墀가 ‘雙巖’이라 호를 붙여준 것이다. 1729년(영조 5)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1738년(영조 14) 33세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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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考晩菴府君世系行蹟記實 8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先親인 金墀(1697∼1750)의 행적과 세계를 기술한 것이다. 자는 公獻‧獻可, 晩菴은 自號이다. 初名은 圭, 初字는 君復이다. 아버지는 元烈이며, 어머니는 完山柳氏 進士 昌時의 딸이다. 일찍부터 文詞와 行誼로 이름이 났으며, 27세인 1723년(경종 3) 사마시에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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叔父渴睡軒府君狀草 15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叔父인 渴睡軒 金㙔(1709∼1789)의 행장이다. 字는 公準, 初名은 壇, 初字는 虎卿이다. 1750년(영조 26) 문과에 급제하여, 持平을 역임하였다. 1756년 江華島 長寧殿別檢이 되었고, 1759년 성균관전적과 예조좌랑을 지낸 뒤 1763년 이조좌랑을 거쳐 司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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伯氏僉樞公行略 19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형 金虎鍊(1718∼1799)의 行略이다. 初名은 百鍊, 字는 幼精이다. 집이 한 마을의 동쪽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里東居士’로 自號하였다. 마음이 넓고 허탄하여 성낼 만하고 걱정할 만하고 슬퍼할 만하고 싫어할 만한 일이 있어도 오래도록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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族弟處士君行略 21 / 기록자료>고도서 / 김약련金晉鍊(1736∼1799)의 行略이다. 자는 幼剛‧爾翁이다. 初名은 致鍊이었는데, 친척 중에 같은 이름이 있어 晉鍊으로 改名하였다. 아버지는 重衡, 어머니는 榮川閔氏 炯三의 딸이다. 孝悌忠信을 몸소 실천하였으며, 사람이 빨리 말하고 갑자기 태도가 변하는 것은 마음에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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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7년 일반 지출 내역 및 물품 현황을 기록한 전장기 / 기록자료>고문서 / 도산서원1837년(헌종 3) 4월 8일부터 8월 9일까지의 기록이다.<br/> 일반 경비 지출 내역의 기록이다. 비교적 다양한 지출 내역이 기록되어 있다. 道淵 유생들의 거마비 지출, 당회 개최 경비, 수호군 급료 지급 등이다. <br/> 書押한 사람은 기록에 없다.<br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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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7년 일반 지출 내역 및 물품 현황을 기록한 전장기 / 기록자료>고문서 / 도산서원1837년(헌종 3) 8월 16일부터 12월 28일까지의 기록이다.<br/> 미곡과 잡곡 지출 중심의 현황 기록이다. 文은 12냥 4전 4푼이었는데, 書員 급료 지출, 수호군 踏印 경비 지출 등이 있었다. 대미는 1석 4두 56홉이 지출되었다. 총 지출 文은 16냥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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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7년 일반 지출 내역 및 물품 현황을 기록한 전장기 / 기록자료>고문서 / 도산서원1837년(헌종 3) 3월 15일의 기록이다.<br/> 기물 및 일반 지출 현황의 기록이다. 광명실 소장 서책은 점검 결과, 이상이 없었다. 기타 창고의 잡물도 점검 결과 별 이상이 없었다. 품목은 벼루, 재복, 방석, 두락 문건 등이다. 1월 12일부터 1월 15출처 : 유교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