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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祖考安奇道察訪府君墓碣銘(幷序) 30 / 기록자료>고도서 / 황재영先祖考 安奇道察訪 黃立顯(1611~1653)의 墓碣銘이다. 본관은 昌原이고, 자는 而晦이다. 천성이 효성스럽고 자애로우며 근후하여 관직에 있을 때는 청신하였다. 1651년(효종 2)에 음직으로 천거되어 繕工監假監役을 시작으로 安奇道察訪까지 지냈다. 부인은 안동 權尙正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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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舅承政院左副承旨金公墓誌銘(幷序) 31 / 기록자료>고도서 / 황재영저자의 장인인 承政院左副承旨 金鎭右(1805 ~1861)의 墓誌銘이다. 본관은 義城이고, 자는 國元이다. 鶴峯 金誠一의 10세손이다. 1834년(순조 43) 明經科에 올라, 1842년(헌종 8)에 홍문관에 들어가고 우부승지를 거쳐 좌부승지까지 올랐다. 공의 타고난 자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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從祖考成均生員府君墓誌 34 / 기록자료>고도서 / 황재영從祖考 成均生員 黃中炯(1803~1868)의 墓誌이다. 본관은 昌原이고, 자는 光彥이다. 豊基 白也洞에서 태어나 9세에 부친상을 당하였다. 일찍이 同樞公에게 나아가 글을 배웠고, 엄격한 공부 과정을 괴로워하지 않아 문필이 일찍 이뤄졌다. 1844년(헌종 10)에 생원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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亡弟通德郞墓誌 36 / 기록자료>고도서 / 황재영죽은 동생 通德郞 黃在薰(1839~1881)의 墓誌이다. 본관은 昌原이고, 자는 應韶이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병이 많아 죽을 고비를 많이 넘겼다. 그러나 총명함을 타고났으며천성이 秉彛와 인륜을 독실하게 했다. 여러 차례 과거시험을 보았으나, 번번이 뜻을 얻지 못하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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亡室恭人金氏墓誌銘(幷序) 38 / 기록자료>고도서 / 황재영저자의 죽은 부인 金氏(1832~1882)에 대한 墓誌銘이다. 김씨는 鶴峯 金誠一의 후손인 승지를 지낸 金鎭右의 딸이다. 김씨는 1832년(순조 32)에 태어나 20세에 시집을 와서 1882 년(고종 19)에 세상을 달리했다. 古事 보기를 좋아해서 半切文으로 역대 사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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埋殤子錫寧銘 39 / 기록자료>고도서 / 황재영죽은 아들 黃錫寧을 묻으면서 지은 銘文이다. 총명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는데, 12세에 요절하였다. 조상의 묘소 가까운 곳에 묻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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族曾祖貞窩公行狀 1 / 기록자료>고도서 / 황재영증조부 黃龍漢(1744∼1818)의 행장이다. 본관은 昌原이고, 자는 穉見이며 호는 貞窩이다. 忠北 延豊 외가에서 태어나 특별한 사우가 없었지만, 5~6세에 이미 향리에서 이름이 났다. 20세에는 大山 李象靖에게 문장을 인정받고 수학하였다. 37세에 과거를 보러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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亡友鄭文五行錄 9 / 기록자료>고도서 / 황재영죽은 벗 鄭奎鉉(1837~1864)의 行錄이다. 본관은 河東이고, 자는 文五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10세에 큰아버지를 따라 예안으로 갔다. 1848년 12세에 아버지상을 당하고 이듬해 큰아버지상을 당했다. 그래서 16세에 관례를 치르고 결혼해서 집안일을 해나갔다. 집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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從叔學生公行述 11 / 기록자료>고도서 / 황재영從叔 黃冀夏(1841~1867)의 行述이다. 본관은 昌原이고, 자는 禹尊이다. 息庵 黃暹의 후손이다. 공이 생을 마감하려 할 때 저자를 불러 자신의 이름을 남기게 해 달라고 부탁하여 행술을 지었다. 공의 성품은 강직했으며, 만년에는 소동파와 육방옹의 시를 즐겨 읽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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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王考豊山柳公遺事 13 / 기록자료>고도서 / 황재영외조부 柳晉春(1780~1834)의 遺事이다. 본관은 豊山이고, 자는 希明이다. 어렸을 적에 사람들이 천둥소리를 듣고 하늘이 운다고 하니, 공이 정색을 하고 “하늘이 어찌 울 수 있겠는가? 이건 바로 천둥소리다.”라고 하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20세에 부모상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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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考同知中樞府事府君遺事 15 / 기록자료>고도서 / 황재영조부 同知中樞府事를 지낸 黃中愼(1788~ 1867)의 遺事이다. 본관은 昌原이고, 자는 謹之이며 호는 白埜이다. 대대로 豊基 白洞에서 살았다. 공은 천품이 빼어나 4~5세에 남이 장난감으로 희롱하면 버리고 돌아보지 않았다. 10세에는 필법이 성숙해져 필력이 굳건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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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考承政院左副承旨府君遺事 18 / 기록자료>고도서 / 황재영부친 承政院 左副承旨公인 黃仁夏(1811 ~1885)의 遺事이다. 본관은 昌原이고, 자는 幼善이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너그러워 남과 다투지 않았으며, 겨우 말을 배울 적에는 글자를 모아 문장을 만들었다. 1849년(헌종 15)에 식년시 을과에 1등으로 급제하여 承文院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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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妣淑夫人柳氏遺事 22 / 기록자료>고도서 / 황재영모친 淑夫人 柳氏의 遺事이다. 豊山 柳晉의 딸로 西厓 柳成龍의 후손이다. 1808년(선조 8)에 尙州 愚川里에서 태어났다. 성품이 자상하고 곧아서 어떤 사람이 굶주린 기색이 있으면 좌시하지 못하고 음식을 내주었다. 1829년(순조 29) 22세에 黃仁夏에게 시집을 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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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고집 / 기록자료>고도서 / 송정흠송고집(松皐集) 松皐 宋程欽의 문집. 木活字本, 序: 張錫英(1923), 跋: 朴勝振(1923), 4卷 2冊: 四周雙邊, 半郭 20.0×17.5㎝, 有界, 10行 18字, 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29.0× 20.4㎝. 문집은 저자의 아우 宋啓欽과 아들 宋渭翼이 정리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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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 기록자료>고도서 / 송정흠伏次王考晬甲韻(1846,公八歲),詠飛鷺, 放牛歎, 讀書義山院(1861), 歎邪敎方熾, 登西程(1864), 有感, 晴夜, 十月望夜萬籟靜寂窓月益朗湛然虛明而心境之能保夜氣者尠焉故有感而吟, 敬次權吾吾齋(大奎)晬甲韻, 歎儒宮盡毁(1868), 僶勉赴擧(見時象廢擧不敢違庭命), 踽踽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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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鄕校僉丈(1861年2月) 14 / 기록자료>고도서 / 송정흠향교의 여러 尊丈께 보낸 편지로, 저자의 나이 22세 때인 1861년(철종 12) 2월에 지은 것이다. 당시는 향교의 존장들과 도내의 유생들이 군수에게 글을 올리고 巡營에 보고하는 등 저자의 효성을 드러내기 위하여 여러 가지 방법으로 애쓰던 때였다. 이 편지는 이러한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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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愼庵先生李公(晩慤) 14 / 기록자료>고도서 / 송정흠愼庵 李晩慤(1815~1874)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만각의 본관은 眞城, 자는 謹休이고 신암은 그의 호이다. 柳致明의 문인이고 부친은 李彙運이다. 1865년(고종 2) 박규수의 추천으로 繕工監 假監役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성품이 담박하여 榮利에 뜻을 두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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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愼庵 16 / 기록자료>고도서 / 송정흠이만각에게 보낸 편지이다. 앞 편지에 대한 답장을 받고 다시 보낸 편지인 듯하다. 별지의 질문에 대한 대답 가운데 의심나는 부분을 재차 질문하였다. 그 내용은 며느리의 喪事에 시아버지가 喪主가 되는 이치는 없지만 아직 分家하지 않아 殯所가 같은 집에 있을 경우에는 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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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愼庵 17 / 기록자료>고도서 / 송정흠이만각에게 보낸 답장이다. 앞서의 질문에 친절이 대답해준데 대해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편지이다. 아울러 직접 찾아뵙지 못하는 송구한 마음을 전하고, 질문에 대한 가르침은 마땅히 하나하나 그대로 실천하겠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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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山泉朴丈(周鐘) 18 / 기록자료>고도서 / 송정흠山泉 朴周鐘에게 보낸 답장이다. 박주종의 본관은 咸陽, 자는 聞遠이고 산천은 그의 호이다. 僉知 朴弼寧의 아들이다. 학행이 순수하고 독실하였으며 문체가 雄渾하고 搏識하였다. 저술로는 類鑑東國通誌‧四七考證‧鄕約集說 등이 있고 遺稿가 있다. 이 편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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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守窩金丈(重厚) 18 / 기록자료>고도서 / 송정흠守窩 金重厚에게 보낸 편지이다. 일상적인 안부를 묻고,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과 생각을 이야기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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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守窩 19 / 기록자료>고도서 / 송정흠수와 김중후에게 보낸 답장이다. 일상적인 안부를 묻고 자신의 상황을 이야기한 다음, 앞서 보내준 물건은 감사하게 잘 받았다고 하였다. 염치없게도 이미 보살펴주는 은혜를 두텁게 입고 있는데다가 다시 미혹된 마음을 일깨워주는 가르침을 받게 되니, 부끄러운 마음에 몸둘 바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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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希齋金丈(輝濬) 20 / 기록자료>고도서 / 송정흠希齋 金輝濬에게 보낸 편지이다. 직접 인사하지 못한 사이의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현재 자신이 처한 형편을 이야기하고, 다시 문하에 나아가 가르침을 받들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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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希齋 20 / 기록자료>고도서 / 송정흠희재 김휘준에게 보낸 답장이다. 한 번도 인사한 적이 없는데, 먼저 편지를 보내주어 감사한 마음 이루 표현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 말로 짐작하건대 앞의 편지보다는 시기적으로 앞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 번 찾아가려 했지만 이리저리 분주히 지내느라 그렇게 하지 못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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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太古金丈(輝鑰) 20 / 기록자료>고도서 / 송정흠太古 金輝鑰에게 보낸 답장이다.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 한 해가 거의 다 지났다고 하면서 앞의 편지를 받고 바로 답장하지 못한데 대해 양해를 구하였다. 지난 모임에 참석하지 못해 아쉽다고 하였다. 그 뒤로 새 봄을 맞이한 회포를 이야기하고, 부질없이 지내는 형편이라 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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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恥庵金丈(碩奎) 21 / 기록자료>고도서 / 송정흠恥庵 金碩奎(1826~1883)에게 보낸 편지이다. 김석규의 자는 德文, 본관은 宣城이고 치암은 그의 호이다. 定齋 柳致明의 문하에 수학하였고 策問에 능하였다. 1880년(고종 17) 수신사 金弘集이 일본에서 돌아와 黃遵憲이 지은 朝鮮策略을 왕에게 소개하고 개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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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古巖族大父(廷奭) 22 / 기록자료>고도서 / 송정흠족대부 宋廷奭에게 보낸 답장이다. 나이 차이가 많고 사는 곳이 멀어 한 번도 찾아뵙지 못했는데, 먼저 안부를 물어주고 자상한 가르침을 주셔서 몸 둘 바를 모르겠다고 하였다. 바로 답장을 보내려 했지만 부끄럽고 송구한 마음에 조심조심하다가 이렇게 늦어졌으니 무슨 말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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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族大父(廷恊) 22 / 기록자료>고도서 / 송정흠족대부 宋廷恊에게 보낸 답장이다. 인근에 있으면서 성묘에도 가지 못하고 花樹會에도 참석하지 못한 채 흠모하는 정만 가지고 있었는데, 먼저 정겨운 편지를 보내주어 감사한 마음에 몸둘 바를 모르겠다고 하였다. 이어 일상적인 안부를 물은 다음, 한 번 찾아보고 싶지만 그것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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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族叔(哲欽) 23 / 기록자료>고도서 / 송정흠족숙 宋哲欽에게 보낸 답장이다. 멀지 않은 거리에 있으면서도 찾아가지 못하고 화수회에 참석도 하지 못해 면목이 없던 차에 장문의 편지를 받으니 반갑기 그지없다고 하였다. 이어 일상적인 안부를 물은 다음, 말미에서 감당할 수 없는 추중과 기대는 자재해 주었으면 고맙겠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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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李道源(學洙) 24 / 기록자료>고도서 / 송정흠李學洙에게 보낸 답장이다. 지난번 누추한 곳을 찾아준 일은 너무도 뜻밖이었는데, 하룻밤 만에 헤어지게 되어 매우 아쉬웠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간의 안부를 물은 다음, 지난번의 유람은 어떠하였는지 물었다. 당시 이웃고을에 역병이 널리 펴져 있었기 때문에 부친의 건강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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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李響山(晩燾) 24 / 기록자료>고도서 / 송정흠響山 李晩燾(1842~1910)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만도의 자는 觀必, 본관은 眞城이고 향산은 그의 호이다. 조선 말기의 학자이자 독립운동가로, 조선 성리학의 泰斗인 退溪 李滉의 후손이다. 1876년(고종 13) 강화도조약을 체결할 때 崔益鉉이 반대 상소를 올리자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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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李順則(晩煃) 25 / 기록자료>고도서 / 송정흠李晩煃에게 보낸 답장이다. 이만규의 본관은 眞城이고, 順則은 그의 자이다. 헤어진 뒤 그리움이 간절했는데 반가운 비와 편지가 함께 이르니, 근래에 가장 위로되는 일이라고 하였다. 당시 이만규는 山寺에서 공부하고 있었던 듯한데, 그가 지어 보낸 祭文의 草本에 대해 자신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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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李順則 25 / 기록자료>고도서 / 송정흠李晩煃에게 보낸 답장이다. 가을로 접어든 이후 매일 편지를 기다렸지만 끝내 소식이 없다가, 지난번 편지를 받고서야 東海로 떠났다는 사실을 알고 서로 만나 회포를 풀 날이 늦어질 것이라는 사실에 더욱 마음이 울적해진다고 하였다. 그러나 편지와 함께 보내준 文草를 통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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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李順則 26 / 기록자료>고도서 / 송정흠李晩煃에게 보낸 편지이다. 洛城에서 헤어진 뒤 겨울이 지나도록 소식을 전하지 못한 채 울적한 회포만 품고 있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일상적인 안부를 전한 다음, 東會가 언제인지 묻고 그날만 기다린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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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臥雲族大父(蘅) 27 / 기록자료>고도서 / 송정흠族大父인 臥雲 宋蘅에게 보낸 답장이다. 송형의 자는 仲極‧景徽, 初名은 鎭八이고, 와운은 그의 호이다. 定齋 柳致明의 문인으로, 2권 1책의 臥雲文集이 전하고 있다. 이 답장은 일상적인 안부를 묻는 편지로 특기할 만한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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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宗大父(珪煥) 27 / 기록자료>고도서 / 송정흠宗大父 宋珪煥에게 보낸 편지이다. 先稿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전에 보여주었던 別紙가 필요하니, 일일이 수습하여 보내주었으면 좋겠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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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金文彦(輝昌) 28 / 기록자료>고도서 / 송정흠文彦 金輝昌에게 보낸 답장이다. 김휘창의 자는 叔度, 본관은 宣城이고 문언은 그의 호이다. 지금은 선현들의 은택이 갈수록 사라져서 학맥이 끊어지게 되었으니 斯文의 슬픔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고 하였다. 때문에 叔度같이 재능 있는 사람들이 문을 닫고 독서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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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金文彦 29 / 기록자료>고도서 / 송정흠지난번 보내준 글을 읽어보니 筆力이 더욱 노성해져서 ‘士不見三日 刮目相對’라는 말을 실감케 되었다고 稱歎하고, 더욱 정진하기를 당부하였다. 또 金溪와의 왕복편지에서는 어떤 의리를 논의하였는지 물은 다음, 이런 大家의 사람들과 지속적으로 왕래하면서 안목을 넓히라고 하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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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黃性習(學洙) 30 / 기록자료>고도서 / 송정흠黃學洙에게 보낸 답장으로, 일상적인 안부를 묻고 서로간에 학업을 면려하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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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大人(1882) 31 / 기록자료>고도서 / 송정흠1882년(고종 19)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서울로 갔을 때 부친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 해에 저자는 鄕試에서는 합격했지만 省試에는 오르지 못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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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面會中僉友(1874) 31 / 기록자료>고도서 / 송정흠1874년(고종 11) 襄陽에 가 있을 때 고을의 여러 벗들이 面會를 沮止하려는 논의가 있었기 때문에, 그 논의를 중지시키기 위해 고을로 보낸 편지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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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李錦山(希迪) 32 / 기록자료>고도서 / 송정흠錦山 李希迪에게 보낸 답장으로, 일상적인 안부를 묻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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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李文熙 32 / 기록자료>고도서 / 송정흠湖西에 사는 李文熙에게 보낸 답장이다. 산천을 사이에 두고 멀리 헤어져서 서로 간에 만나지 못하는 애틋한 정을 담고 있는 편지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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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義山同硏僉友(1862) 33 / 기록자료>고도서 / 송정흠義山에서 함께 공부하던 벗들에게 보낸 편지이다. 예전에 함께 공부하던 날을 회상하며 안부를 묻는 내용으로, 1862년(철종 13)에 보낸 것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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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弟啓欽 33 / 기록자료>고도서 / 송정흠당시 東陵寺에서 南北史를 읽고 있던 아우 宋啓欽(1856∼1934)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런 巨帙의 책을 읽을 때는 그저 한 번 섭렵하고 지나가게 되면 남는 것이 하나도 없으니 작은 책자를 마련한 다음 그 요점을 기록하며 읽어서 뒷날의 참고자료로 삼아야 한다고 권면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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寄兒渭翼 34 / 기록자료>고도서 / 송정흠이 편지는 저자가 1882년(고종 19) 과거에 응시하기 위하여 서울에 있을 때, 집에서 家事를 돌보고 있던 아들 宋渭翼에게 보낸 편지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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辭米肉狀(辛酉正月時參判趙公永和莅郡) 34 / 기록자료>고도서 / 송정흠1861(철종 12)년 1월에 당시 참판 趙永和가 군수로 부임하여 저자의 지극한 효성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고기와 쌀을 내렸는데, 그것을 사양하며 올린 呈狀이다. 이 정장에 대해 군수는 “孝는 仁의 근본이고 謙은 德의 기반이다. 그대는 효성스러우면서도 스스로 겸손하니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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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子忍記事 35 / 기록자료>고도서 / 송정흠옛날 荊楚 지역에 사는 魏進明이라는 사람은 ‘强忍子’라는 좌우명을 붙였고 같은 郡에 사는 黃士彦이란 사람은 자기 집에 ‘能忍子’라는 편액을 걸었다고 하면서, 이 두 사람의 일화를 소개하였다. 그러고 나서는 그들이 견지하였던 强忍과 能忍의 의미를 설명한 다음, 忍에 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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雙於里記事 38 / 기록자료>고도서 / 송정흠옛날 雙於里에 부유하게 살면서 효성스러웠던 王氏와 가난하게 살면서 효성스러웠던 旬氏가 있었는데, 이 둘의 孝에 대한 일화를 소개하였다. 그러고 나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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知命說 40 / 기록자료>고도서 / 송정흠하늘을 敬畏하는 마음을 가지고 자신의 운명을 편안히 여기며 仁과 義를 실천하게 되면 하늘과 사람의 정성이 感通할 것이라는 자신의 운명론을 밝힌 論說文이다.출처 : 유교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