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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5월 15일에 제(弟) 백순우(白淳愚)가 보림서당(寶林書堂)의 원장인 박(朴)우산댁(우산댁)에 보낸 문안 편지 / 기록자료>고문서 / 제 백순우1931 5월 15일에 제(弟) 백순우(白淳愚)가 보림서당(寶林書堂)의 원장인 박(朴)우산댁에 보낸 문안 편지로, 박원장이 부탁한 묘갈문(墓碣文)을 짓는 문제를 묻는 편지이다. 먼저 상대의 안부를 묻고, 석역(石役 ;돌을 다루어 물건을 만드는 일)이 잘 마무리 되었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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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2월 23일에 성균관 근처에 사는 양붕순(梁鵬淳)이 생원주(生員主)가 다녀간 정황을 적어 보낸 고목. / 기록자료>고문서 / 양붕순1927년 2월 23일에 성균관 근처에 사는 양붕순(梁鵬淳)이 생원주(生員主)가 다녀간 정황을 적어 보낸 고목이다. 흉변을 당한 생원주(生員主 ; 생원님)가 자신이 사는 곳을 방문했다가 돌아가기까지의 과정을 적어 보낸 고목이다. 피봉에 수신인을 영해 박생원이라 적고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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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3월 2일에 장무(掌務)인 만복(萬福)이 보림서당(寶林書堂)의 도유사(都有司)로 선출되었음을 알리는 고목(告目)이다. 상대가 보림서당(寶林書堂)의 도유사(都有司)로 천출(薦出 ; 천거되고 뽑힘)되었으므로 그 망기(望記)를 보내면서 석채례(釋菜禮)가 3월 1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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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년 모월 모일에 문장(門長) 세영(世寧)과 종손(宗孫) 영진(英鎭)이 참의공(參議公)의 묘소와 재사(齋舍) 건립을 위해 각 각 자손들이 정성을모아 줄 것을 청하는 개통(箇通)과 통문(通文)이다. / 기록자료>고문서 / 종손 영진모년 모월 모일에 문장(門長) 세영(世寧)과 종손(宗孫) 영진(英鎭)이 참의공(參議公)의 묘소와 재사(齋舍) 건립을 위해 각 각 자손들이 정성을 모아 줄 것을 청하는 개통(箇通)과 통문(通文)이다. 개통(箇通)에 쓰기를, 참의공(參議公)의 대한 조정의 칭찬과 상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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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10월 15일에 박원석(朴元錫)·박문화(朴文華)·박영진(朴榮振) 등10인이 보낸 통문(通文) / 기록자료>고문서 / 박원석·박문화·박영진 등 10인1921년 10월 15일에 도유사(都有司) 박원석(朴元錫), 전도정(前都正) 박문화(朴文華)와 유학(幼學) 박영진(朴榮振) 등 8인이 영명재(永明齋)를 건립하여 조상을 받들어 모실 뜻으로 종중(宗中)의 협조를 구하는 통문(通文)이다. 묵재 할아버지가 예안에 터를 닦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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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6월 20일에 박찬배(朴瓚培)·박찬호(朴贊鎬)·박태진(朴泰鎭)·박연성(朴演性)이 훌륭한 조상들의 사실(事實)을 책으로 엮을 계획으로 수단(收單)하여 보내라는 통문(通文) / 기록자료>고문서 / 박찬배·박찬호·박태진·박연성1917년 6월 20일에 발기인 박찬배(朴瓚培), 편집인 박찬호(朴贊鎬),와 인쇄 박태진(朴泰鎭),그리고 발행인 박연성(朴演性)이 함양박씨 문중에 보낸 통문(通文)이다. 통문의 요지는 신라 시조(始祖)왕 이하 9왕의 문헌과 자손 중 군호(君號)를 받았거나 장수(將帥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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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11월 3일에 금동 자연정 종중(琴洞自然亭宗會)에서 종택(宗宅)을 다시 짓는(重創) 일로 분배된 돈을 모아 보내달라는 통문(通文) / 기록자료>고문서 / 금동자연정종회중1935년 11월 3일에 금동의 자연정종회(琴洞自然亭宗會)에서 종택(宗宅)을 다시 짓는(重創) 일로 각 파에 분배된 돈(各派排錢)을 모아 보내달라는 통문(通文)이다. 통문의 내용은 예천 금동의 대종택(大宗宅)을 지난 계미(癸未)년에 넓히려다가 불행히도 세상이 어지러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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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12월 28일에 보낸 물목(物目) / 기록자료>고문서1927년 12월 28일에 함양박씨(咸陽朴氏) 집에 보낸 물목(物目)이다. 물건을 보내면서 그 목록을 적어 함께 보내는데 이것을 물목이라 한다. 물목을 받은 사람은 보내온 물건과 물목의 내용이 맞는지 확인할 수 있다. 이 물목을 보내는 사람은 이름을 알 수 없는 권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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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新川)사람 박일원(朴一源)의 대책문(對策文)을 서술한 시권(試券)이다. 시권은 과거응시자들이 제출한 답안지 혹은 채점지를 말하는데, 시지(試紙) 또는 명지(名紙)라고도 한다. 시권(詩券)은 과거시험의 답안지이다. 시권은 원래 응시자에게 반환되지 않으나, 합격자에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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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新川)사람 박일원(朴一源)의 과거시험에서 제출한 답안(試券)으로 대책문(對策文)에 해당된다. 시권에 3주(三宙)하고 쓴 것은 자호(字號)라고 하는데, 천자문(千字文) 순서로 연번호(連番號)를 사용하게 되어있다. 이 시권은 3주(三宙)라고 적혀 있으므로 주(宙)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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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情友) 조병화(趙秉華)가 보낸 만사(輓詞) / 기록자료>고문서 / 정우 조병화모년 모월 모일에 정우(情友) 조병화(趙秉華)가 박공(朴公)의 영전(靈前)에 올린 만사(輓詞)이다. 이 만사는 죽은 사람을 애도(哀悼)하는 마음을 담아 지은 영결시(永訣詩)이다. 네 편(四首)의 시를 7언 절구의 형태로 썼다. 그 세 번째 시에서 ‘고향땅이 천리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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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종(族從) 주락(周洛)이 올린 만사(輓詞) / 기록자료>고문서 / 족종 주락모년 모월 모일에 족종 주락(周洛)이 죽은 사람을 위하여 지은 만사(輓詞)인데 만시(輓詩)라고 볼 수 있다. 이 글을 지은 사람은 집안 사람인 주락(周洛)으로 그에 대한 기록은 자세하지 않으며, 수신자도 알 수 없다. 문서의 끝에 족종(族從)이라고 적은 것으로 보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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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계제(情契弟) 이상적(李相勣)이 망자 박공(朴公)의 영전(靈前)에 올린 만사(輓詞) / 기록자료>고문서 / 정계제 이상적정계제(情契弟) 이상적(李相勣 : 1805∼1887)이 박공(朴公)의 영전(靈前)에 올린 만사(輓詞)이다. 만사(輓詞) 또는 만시(輓詩)라고 하는데, 이 글은 죽은 사람을 애도(哀悼)하는 마음으로 지은 영결시(永訣詩)이다. 7언 절구의 형태로 다섯 수(首)를 써내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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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2월 2일에 이종(姨從)조카인 백순석(白淳錫)이 이종숙모(영남남씨)님의 소상(小祥 : 중상(中祥))을 맞아 올린 제문(祭文)이다. 이종 조카인 백순석의 본관은 수원 또는 대흥이고 같은 마을인 창수면 인량리 익동에 살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제문의 대략적인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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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10월 14일에 십사대손(十四代孫) 희대(熙大)가14대 할아버지와 12대 할아버지의 묘사(墓祀)를 지내면서 적은 축문. / 기록자료>고문서 / 십사대손 희대1916년 10월 14일에 종손(宗孫) 박희대(朴熙大)가 14대 조부모와 12대 조부모의 묘사를 지낼 때 쓴 축문이다. 축(祝)을 올리는 사람은 14대 손(孫)인 희대(熙大)이고 희대(熙大)에 대한 인적 사항은 이 문서만으로는 다 알 수 없으나 주손이거나 종손이었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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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신 분의 묘소에 표석(表石)을 안치하면서 올린 고유문(告由文) / 기록자료>고문서모년 모월 모일에 자손 아무개가 28년 전에 돌아가신 분의 묘소에 표석을 놓으면서 올린 고유문(告由文)이다. 내용을 보면 일찍 조정에 나아갔으며(少小趨庭) 문장과 필체가 뛰어났고 덕망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돌아가신지 28년 만에 표석을 세운다는 사실도 알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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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9월 7일에 중표제(重表弟)인 조주기(趙周基)가 박공(朴公)에게 올린 제문 / 기록자료>고문서 / 중표제 조주기1941년 9월 7일에 중표제(重表弟 : 외육촌)인 조주기(趙周基 : 한양)가 박공(朴公)의 인품과 어진 행적을 추모하면서 올린 제문이다. 제문을 지은 조주기는 자신을 중표제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박공에게는 외6촌으로 짐작된다. 제문을 올린 조주기는 망자의 거동과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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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7월 10일에 족하생(族下生) 의원(義元)이 처사공(處士公)의 영전(靈前)에 올린 제문(祭文) / 기록자료>고문서 / 족하생 의원1939년 7월 10일에 족하생(族下生 : 자신에 대한 겸칭으로 집안의 손아래 사람 ) 의원(義元)이 집안사람 처사공(處士公)의 영전(靈前)에 올린 제문으로 정확한 연대는 1939년인지 분명하지 않다. 제문(祭文)은 죽은 사람을 조상(弔喪)하는 글로 흔히 제물(祭物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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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고종 39) 10월 8일에 이질(姨侄)인 안달원(安達源)이 이모(姨母) 영양남씨(英陽南氏)의 영전(靈前)에 올린 제문 / 기록자료>고문서 / 이질 안달원1902년 10월 8일에 이질(姨侄)인 안달원(安達源)이 이모(姨母) 영양남씨(英陽南氏)의 기일(忌日)일에 영전(靈前)에 올린 제문이다. 안달원의 호(號)는 해서(海西)며 택범(宅範)의 현손(玄孫)으로 풍채가 크고 바르며 언론이 정중하였고 효우(孝友)가 돈후하여 마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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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7월 10일에 후생(後生) 이근호(李根浩)가 처사(處士) 박공(朴公)의 소상(小祥)일에 올린 제문(祭文) / 기록자료>고문서 / 후생 이근호1940년 7월 10일에 후생(後生) 이근호(李根浩)가 처사(處士) 박공(朴公)의 소상(小祥)일에 올린 제문(祭文)이다. 이근호는 본관이 재령(載寧)이고 안릉(安陵)이라고도 쓴다. 상대의 소상에 이근호는 과일과 생선을 갖추어 올리고 자신의 부친이 살아 계셨을 때 자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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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7월 19일에 표종제(表從弟) 황석영(黃石英)이 내종형(內從兄)박공(朴公)의 장례날(葬日)에 올린 제문(祭文) / 기록자료>고문서 / 표종제 황석영1939년 7월 19일에 표종제(表從弟) 황석영(黃石英)이 내종형(內從兄) 박공(朴公)의 장례날(葬日)에 올린 제문(祭文)이다. 제문은 죽은 사람에 대하여 애도의 뜻을 나타낸 글로서 흔히 제물을 올리고 축문처럼 읽는다. 황석영이 올리는 제문의 대상은 고종사촌 형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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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7월 10일에 족종(族從) 주락(周洛) 죽은 박군(朴君)의 소상일(小祥日)에 영전(靈前)에 올린 제문(祭文) / 기록자료>고문서 / 족종 주락1940년 7월 10일에 박주락(朴周洛)이 죽은 족종(族從)의 소상(小祥 : 中祥)에 쓴 제문(祭文)이다. 제문을 지은 박주락(朴周洛)은 자신을 족종이라고 했고 상대를 박군(朴君)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일가간(一家間)의 동항(同行)이며 나이도 비슷했음을 알 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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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진(庚辰) 7월 10일에 척소제(戚小弟) 이의발(李宜發)이 처사(處士) 박공(朴公)의 소상일(小祥日)에 영전(靈前)에 올린 제문(祭文) / 기록자료>고문서 / 척소제 이의발경진년 7월 10일에 척소제(戚小弟)인 이의발(李宜發)이 처사(處士) 박공(朴公)의 소상일(小祥日)의 영전(靈前)에 올린 제문(祭文)이다. 제문은 죽은 사람을 조상(弔喪)하는 글이다. 흔히 제물(祭物)을 올리고 축문(祝文)처럼 읽는 애뢰(哀誄)이다. 제문을 올린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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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10월 18일에 효손(孝孫) 대원(大源)이 현조고(顯祖考) 등 3인에게 올린 고유문(告由文) / 기록자료>고문서 / 효손 대원1932년 10월 18일에 효손(孝孫) 대원(大源)이 조부모님 세 분의 무덤 앞에 머리가 둥글고 짤막한 빗돌(短碣)을 세우면서 올린 고유문(告由文)이다. 고유(告由)를 드리는 사람은 손자 대원(大源)이고 그 대상은 할아버지(處士 : 벼슬하지 않고 초야(草野)에 은둔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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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己卯) 7월 10일에 시하생(侍下生) 이인호(李麟浩)가 선우처사(先友處士)박공(朴公)에게 올린 제문(祭文) / 기록자료>고문서 / 시하생 이인호기묘년 7월 10일에 이인호(李麟浩)가 죽은 벗인 처사(先友處士) 박공(朴公)의 영전에 올린 제문(祭文)이다. 제문을 작성한 이인호(李麟浩)는 본관이 안릉(安陵)이다. 망자인 처사 박공과는 친구 간이었으며 내용을 통하여 망자(亡子)의 조부 칠포공(七圃公)은 자신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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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7월10일에 부이질(婦姨侄) 백락진(白洛鎭)이 처사(處士) 박공(朴公)에게 올린 제문(祭文) / 기록자료>고문서 / 부이질 백락진1940년 7월10일에 며느리의 이종조카(婦姨侄)인 백락진(白洛鎭)이 처사(處士) 박공(朴公)의 소상을 맞아 올린 제문(祭文)이다. 망자(亡子)인 박공을 금세(今世)의 고인(古人)이라 칭송하면서 망자의 충성스럽고 신의(信義)있으며 자상한 모습과 덕행을 통하여 고인(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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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고종 32) 4월에 남화진(南華鎭)이 고을 원(城主)에게 올린 소지 / 기록자료>고문서 / 원하 화민 남화진원하(元下 : 元邱. 현재의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원구리)에 사는 남화진이 신건이(申乾伊)에게 떼인 돈을 그 육촌(六寸)인 신석주(申錫周)에게 대신 받을 수 있게 조처해 달라고 고을 원에게 청하는 소지이다. 지난 1891년(辛卯) 신건이는 가난하여 대곡(大谷) 초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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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2년(헌종 8) 11월에 남진사(南進士)의 노(奴) 정축(貞丑)이 도둑 맞은책 42권을 책 도둑에게 돌려받게 해달라고 관찰사에게 올린 소지 / 기록자료>고문서 / 원하 남진사 노 정축1842년 11월에 남진사(南進士)의 노(奴) 정축(貞丑)이 관찰사에게 올린 소지이다. 소지는 상전을 대신하여 노의 이름으로 올린 것이다. 관찰사에게 호소한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지난 갑오년(1834년) 2월에 집에 소장하고 있던 책 40여 권을 한꺼번에 도둑맞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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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9년(고종 16) 남고(南皐)가 73세 때 가족 및 처족의 신상 명세를 기록한 호적단자 / 기록자료>고문서 / 남고(73세)원구(元邱)리 거주 남고(南皐 : 1807 ~ 1879)의 호적단자이다. 이것은 남고가 사망하던 해 작성된 호적임을 알 수 있다. 기재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생원(生員) 남고(南皐) 73세 정묘(丁卯 : 1807년)년 생 본관 영양(英陽)부(父) 학생(學生) 유로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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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1년(고종 28) 남효술(南孝述)이 44세 때 가족 및 처족의 신상 명세를 기록한 호적단자 / 기록자료>고문서 / 남효술(44세)원구(元邱)리 거주 남효술(南孝述 : 1848 ~ 1935)의 호적단자이다. 기재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유학(幼學) 남효술(南孝述) 44세 무신(戊申 : 1848년)년 생 본관 영양(英陽)부(父) 성균(成均) 생원(生員) 고(皐)조(祖) 학생(學生) 유로(有魯)증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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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고종 13) 남고(南皐)가 70세 때 가족 및 처족의 신상 명세를 기록한 호적단자 / 기록자료>고문서 / 남고(70세)원구(元邱)리 거주 남고(南皐 : 1807 ~ 1879)의 호적단자이다. 기재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생원(生員) 남고(南皐) 70세 정묘(丁卯 : 1807년)년 생 본관 영양(英陽)부(父) 학생(學生) 유로(有魯)조(祖) 학생(學生) 두양(斗陽)증조(曾祖) 성균(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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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년(고종 25) 남효술(南孝述)이 41세 때 가족 및 처족의 신상 명세를 기록한 호적단자 / 기록자료>고문서 / 남효술(41세)원구(元邱)리 거주 남효술(南孝述 : 1848 ~ 1935)의 호적단자이다. 기재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유학(幼學) 남효술(南孝述) 41세 무신(戊申 : 1848년)년 생 본관 영양(英陽)부(父) 성균(成均) 생원(生員) 고(皐)조(祖) 학생(學生) 유로(有魯)증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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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고종 19) 남효술(南孝述)이 35세 때 가족 및 처족의 신상 명세를 기록한 호적단자 / 기록자료>고문서 / 남효술(45세)원구(元邱)리 거주 남효술(南孝述 : 1848 ~ 1935)의 호적단자이다. 기재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생원(生員) 남고(南皐) 고(故) 대자(代子) 효술(孝述) 35세 무신(戊申 : 1848년)년생 본관 영양(英陽)부(父) 성균(成均) 생원(生員) 고(皐)조(祖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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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희철(南熙哲), 남희수(南熙壽)의 아버지가 족대부(族大父)인 남일호(南一浩)에게 준 명문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불행하게도 남일호의 장자(長子)인 병화(秉和)가 참화(慘禍)를 입고 사망한 것을 매우 슬프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가제(家弟)인 희수(熙壽)를 후사로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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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丁未) 4월 20일에 논 주인 병남(丙男)이 상전댁(上典宅)에 논을 팔았음을 증명하는 전답매매명문 / 기록자료>고문서 / 답주 동호병남정미(丁未)년 4월 20일에 논 주인 병남(丙男)이 동호(同戶)의 상전댁(上典宅)에 논을 팔았음을 증명하는 전답매매명문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명문은 훗날 참고를 위해 계약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상전(上典) 댁에서 절실한 용처(用處)가 있어서 묵계(黙溪)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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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7월 7일에 박재철(朴載轍)이 집을 매입하면서 지불하지 못한 돈을 나중에갚겠다고 약속한 계약증서 / 기록자료>고문서 / 박재철1922년(大正 11) 음력 7월 7일에 영덕(盈德)군 영해(寧海)면 원구(元邱)동에 거주하는 박재철(朴載轍)이 쓴 계약증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금(一金) 40원, 위 금액에 대하여 본인이 집을 사면서 미지급한 금액과 원구(元邱) 동 초가집 네 칸을 90원으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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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고종 31) 11월 3일에 김응주(金應周)가 남효술(南孝述)의 아들남악진의 상을 당한 것을 위로하며 보낸 편지 / 기록자료>고문서 / 중표손 김응주1894년 아들 남악진(南岳鎭)을 잃은 남효술에게 중표손(重表孫 : 重外孫)김응주가 보낸 위로 편지이다. 남효술은 시암(時庵) 남고(南皐)의 큰아들이며, 남악진은 남효술의 큰아들이다. 외가(外家)는 덕을 쌓고 인(仁)을 두터이 한 가문인데 이렇게 아들이 먼저 죽는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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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고종 36) 8월 27일에 이병엽(李丙燁)이 남효술(南孝述)에게 숙부 시암(時庵) 남고(南皐) 선생의 유집(遺集)을 간행하는 일로 보낸 편지 / 기록자료>고문서 / 표종 이병엽1899년 8월 27일에 외사촌(表從)인 이병엽이 남효술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병엽은 돌아가신 숙부 시암(時庵) 남고(南皐) 선생의 유집(遺集)을 간행하는 일을 초가을에 시작한다고 들었는데,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는 일과 겹쳐서 비용 측면이나 보살펴야 할 것들이 많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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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년(고종 5) 2월 18일에 조언육(趙彦育)이 남고(南皐)에게 아내와 자부(子婦)의 상을 한꺼번에 당한 것을 위로하며 보낸 편지 / 기록자료>고문서 / 척종제 조언육조언육(趙彦育)이 남고(南皐)에게 보낸 편지이다. 아내와 자부(子婦)의 상을 한꺼번에 당한 것을 위로하면서 조언육 자신은 전염병 때문에 가서 도울 수가 없다는 사정을 전하고 있다. 대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현합부인(賢閤夫人 : 편지수신자의 부인을 높여 이르는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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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고종 36)에 이종제(姨從弟) 최효순(崔孝淳)이 시암(時庵) 유고(遺稿) 간행에 관하여 원파(元坡)에 보낸 편지 / 기록자료>고문서 / 이종제 최효순1899년에 이종제(姨從弟) 최효순(崔孝淳)이 보낸 편지이다. 수신자는 시암(時庵) 남고(南皐)의 아들인 남효술(南孝述)로 추측된다. 봉투에 쓰인 주소인 원파(元坡)는 원구(元邱)를 가리키는데, 현재의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원구리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남북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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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년(고종 5)에 이돈우(李敦禹)가 남고(南皐)가 권씨(權氏)의 편에 선것을 책망하며 보낸 편지 / 기록자료>고문서 / 제 이돈우이돈우(李敦禹 : 1807 ~ 1884)의 자는 시능(始能), 호는 긍암(肯庵)이다. 그는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의 현손이며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의 문하에서 배웠다. 따라서 남고와는 동문수학한 사이가 된다. 이 편지 가운데에서도 ‘우리가 서로 교류한지 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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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년(고종 30) 12월 12일에 남악진(南岳鎭)이 경제적인 도움을 달라고 보낸 편지 / 기록자료>고문서 / 소제 남악진1893년 12월 12일에 남악진(南岳鎭)이 보낸 편지이다. 수신인은 알 수없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찾아 가서 외람되게도 공부하시는 말석에라도 끼고 싶은 것이 오래된 소원이나 이루지 못하여 답답하던 중에, 집사(執事 : 편지 수신인을 감히 직접 지칭하지 않고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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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순종 3) 3월 18일에 이재격(李在格)이 자부(子婦) 상(喪)에 위로의 편지를 보내준 남효술(南孝述)에게 감사함을 전하는 답장 / 기록자료>고문서 / 제기복인 이재격이재격(李在格)이 보낸 편지로서 수신인은 남효술로 추정된다. 발신일은 기유(己酉)년 3월 18일인데, 기유년은 1909년으로 추정된다. 수신인이 자부(子婦)상에 대하여 위문편지를 보내준 데 대한 감사 답장으로서, 감사의 뜻을 표한 것과 일상적 안부를 물은 것 이외에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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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고종 37) 4월 20일에 이창원(李昌源)이 사돈에게 딸의 근행(覲行)일에 함께 방문해 줄 것을 청하는 편지 / 기록자료>고문서 / 사제 이창원1900년 4월 20일에 이창원(李昌源)이 사돈에게 보낸 편지이다. 수신인은 남효술(南孝述)로 추정된다.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난달에 편지는 받았는데 집안 일로 바빠 답장을 못하였으니 헤아려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요즈음 아버님, 숙부님은 모두 건강하시며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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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12월 26일에 남기진(南麒鎭)이 딸의 혼처에 대해 문의하면서 매부에게 보낸 편지 / 기록자료>고문서 / 부소제 남기진1937년 12월 26일에 남기진(南麒鎭)이 매부에게 보낸 편지이다. 편지 앞머리에 ‘계상배(稽顙拜)’라고 쓰고 있고, 자신을 ‘죄인(罪人)’이라고 칭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발신자인 남기진이 상중(喪中)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안부 인사로 보아 수신인도 역시 상중임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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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9년(고종 16) 3월 17일에 이재목(李在穆)이 아버지의 상을 당한 남효술(南孝述)에게 보낸 위로 편지 / 기록자료>고문서 / 계생 이재목1879년 3월 17일에 이재목(李在穆)이 남효술(南孝述)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 해에 남효술의 아버지인 남고(南皐 : 1807 ~ 1879)가 사망했다. 편지 종이를 접어 만든 피봉에 ‘남(南) 생원(生員) 대효(大孝) 점전(苫前)’이라고 쓰고 있어 수신자인 남효술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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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고종 42) 3월 16일에 김도화(金道和)가 글 청탁을 거절하면서 보낸 편지 / 기록자료>고문서 / 병제 김도화1905년 3월 16일에 김도화(金道和)가 보낸 편지이다. 수신인은 알 수 없으나 남효술로 추정된다. 김도화(金道和 : 1825 ~ 1912)의 본관은 의성(義城)이며 자(字)는 달민(達民), 호(號)는 척암(拓庵)이다.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의 문인이었는데,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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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7년(헌종 13) 1월 9일에 유치명(柳致明)이 원구(元邱)에 사는 남고(南皐)에게 여러 가지 사연을 적어 보낸 편지 / 기록자료>고문서 / 손제 류치명1847년 1월 9일에 류치명(柳致明 : 1777 ~ 1861)이 남고(南皐)에게보낸 편지이다. 남고는 류치명에게 학문을 배운 사이인데, 류치명은 정중하면서도 격의 없는 어조로 여러 사연을 적어 보내고 있다. 편지의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거듭 편지를 보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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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4년(고종 1) 1월 10일에 유정호(柳廷鎬)가 장인인 남고(南皐)에게 보낸 문안 편지 / 기록자료>고문서 / 외구 류정호1864년 1월 10일에 류정호(柳廷鎬)가 남고(南皐)에게 보낸 편지이다. 류정호는 남고의 사위이다. 여러 가지 사연을 자세하게 적어 장인에게 올린 편지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라에 전 임금이 승하한 슬픔과 새 임금이 즉위한 경사(慶事)가 있는데(1864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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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년(철종 14) 11월 7일에 류정호(柳廷鎬)가 장인인 남고(南皐)에게보낸 문안 편지 / 기록자료>고문서 / 외생 류정호1863년 11월 7일에 류정호(柳廷鎬)가 남고(南皐)에게 보낸 편지이다. 류정호는 남고의 사위이다.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직접 가서 뵙지도 못하고 틈이 없어 편지도 못 보내 필경 소홀함이 심하다고 보실 것이니 무슨 변명을 하겠습니까? 죽을죄를 지었습니다출처 : 유교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