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墓碣銘(幷序,1833) 124 / 기록자료>고도서 / 권상룡柳尋春(1762~1834)이 지은 묘갈명으로 내용은 이 글 앞의 저자소개에 자세하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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跋 128 / 기록자료>고도서 / 권상룡1935(을해)년에 저자의 5대손 秉燮이 쓴 발문이다. 후손 權道黙이 수집하였는데, 詩文이 淡白하고 古雅하여 時俗에는 맞지 않았지만 반드시 안목 있는 사람이 알아 줄 것이라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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跋 128 / 기록자료>고도서 / 권상룡1984(갑자)년에 저자의 8대손 奇旭이 쓴 발문이다. 저자가 세상을 떠난 후 가세가 쇠락해져서 흩어져있던 원고를 모아 책으로 만들었지만 간행하지 못했다고 하였다. 이제야 權奇鶴이 경비를 마련하여 간행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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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천집 / 기록자료>고도서 / 강윤법천집(法川集) 法川 姜潤의 문집. 木版本, 3卷 2冊: 四周雙邊, 半郭 20.5× 15.5㎝, 有界, 10行 20字, 註雙行, 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 29.5 ×20.5㎝. 서문과 발문이 없어서 정확한 간행연도는 알 수 없다. 卷1에는 詩 127題 138首, 疏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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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 기록자료>고도서 / 강윤偶吟(1735), 題乙卯曆後自警, 元朝和再從兄韻(1736), 早起見夜雨後田麥頓好漫吟(1736年 3月), 謹次從叔壽席韻, 翌日其季房宅又設酌次席上韻, 次敦本契帖韻, 大宅宴席次韻(二首), 次柳上舍(以亨)韻, 偶吟自警, 戊午爲宗叔換甲元日出韻相和敬決(二首), 蠭, 新恩時峽路偶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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辭持平疏(1759,莊獻世子代理時下同) 1 / 기록자료>고도서 / 강윤사헌부지평을 사양하는 소로 1759년(영조 35) 12월 莊獻世子가 代理聽政할 때 올린 것이다. 사헌부의 임무는 위로는 임금이 잘못을 바로잡고 아래로는 관리의 잘못을 바로잡는 것이라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의 이익과 병통 그리고 백성의 행복과 슬픔에 관계된 것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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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辭持平疏(1760) 2 / 기록자료>고도서 / 강윤다시 사헌부지평을 사양하는 소로 1760년(영조 36) 12월에 올린 것이다. 80된 노모가 오랫동안 병을 앓고 있으며, 근래에는 시력을 잃고 한 쪽 팔은 마비되어 움직일 수가 없다고 하였다. 이러한 사정으로 모친을 떠나 관직에 나갈 수 없으니 속히 임명한 관직을 거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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辭掌令疏(1761) 5 / 기록자료>고도서 / 강윤사헌부장령을 사양하는 소로 1761년(영조 37) 2월에 올린 것이다. 자신은 나라를 다스리는 원대한 뜻과 임금을 바로 잡는 正學에 어두우니 사헌부의 직책을 맡을 만한 인물이 아니며, 모친의 고질병 때문에 관직에 나갈 수 없다고 하였다. 성상의 총명함은 천부적인 것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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辭弼善疏(1761) 10 / 기록자료>고도서 / 강윤시강원필선을 사양하는 소로 1761년(영조 37) 6월에 올린 것이다. 書筵[世子가 經史를 강론하는 자리]의 관리는 경전의 뜻을 강론하여 道義로 바로잡으며, 훈도하고 함양시켜서 도움이 되고 보탬이 있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다. 요즘 세자께서 날마다 書筵을 열고 연구하며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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辭掌令疏(1761,本草佚) 12 / 기록자료>고도서 / 강윤사헌부장령을 사양한 소로 1761년(영조 37) 7월에 올린 것이다. 원문은 잃어버리고 批答만 남아 있다. 비답의 내용은 진달한 것이 매우 절실한 것이고, 銀店의 일은 대신에게 문의하여 처리하겠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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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辭掌令疏(1761) 12 / 기록자료>고도서 / 강윤사헌부장령을 사양한 소로 1761년(영조 37) 11월에 올린 것이다. 팔순 노모의 병세가 깊어 버려두고 관직에 나갈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앞의 辭章에서 말씀 드렸듯이 臺閣의 직책을 맡을 능력이 없으니 내려준 관직을 빨리 체직하여 조정의 기강을 엄숙하게 하고 자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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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辭掌令疏(1762) 17 / 기록자료>고도서 / 강윤사헌부 장령을 사양한 소로 1762년(영조 38) 4월에 올린 것이다. 모친이 오랜 병을 앓아 시력을 잃고, 몸은 마비되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버려두고 관직에 나갈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관직을 시작한 지 15년 동안 참봉과 郎官 벼슬만 지냈기 때문에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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辭弼善疏(1762,英宗大王復政後) 19 / 기록자료>고도서 / 강윤시강원필선을 사양하는 소로 1762년(영조 38) 12월 영조가 친정할 때 올린 것이다. 모친이 오랜 병을 앓아서 시력을 잃고 몸이 마비되어 거동이 자유롭지 못하며, 또 실수로 넘어진 후로 구토가 심하여 음식을 먹지 못한지 오래되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주야로 옆에서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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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辭弼善疏(1765) 21 / 기록자료>고도서 / 강윤또 시강원필선을 사양하는 소로 1765년(영조 41) 7월에 올린 것이다. 자신은 세자의 교육을 맡을 적당한 인물이 아니라고 하였다. 세자의 교육은 마땅히 천하제일의 인물을 선택하여 맡겨야지 저자처럼 시골의 노둔한 사람이 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또한 모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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辭校理疏(1765) 23 / 기록자료>고도서 / 강윤홍문관교리를 사양한 소로 1765년(영조 41) 7월에 올린 것이다. 자신은 홍문관의 직책을 감당할 수 없고, 재주가 없으면서 외람되이 영광과 총애를 입는 것은 도리어 화를 받는 길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동안 관직에 나가지 않은 것은 노모의 병을 간호하기 위해서였으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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辭執義疏(1765) 24 / 기록자료>고도서 / 강윤사헌부집의를 사양하는 소로 1765년(영조 41) 11월에 올린 것이다. 여러 차례 벼슬을 임명하였지만 노모를 간호하느라 한 번도 관직에 나갈 수 없었다고 하였다. 뜻밖에 관직을 임명받았지만 봉록으로 부모를 봉양하지 못하는 애통함이 절실하고, 노둔하고 쇠약하여 관직에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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辭司諫疏(1766) 26 / 기록자료>고도서 / 강윤사간원사간을 사양하는 소로 1766년(영조 42) 3월에 올린 것이다. 성은에 감격하여 출발하였으나 병세가 중도에 더 심해져서 음식을 먹을 수 없었기 때문에 조령 아래에서 걸음을 돌렸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 연유를 縣과 道를 경유하여 올렸지만 죄가 크다고 하였다. 조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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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辭執義疏(1765) 27 / 기록자료>고도서 / 강윤사헌부집의를 사양하는 소로 1765년(영조 41) 10월에 올린 것이다. 벼슬에 나가서 펼칠 만한 재주가 있으면 나가서 재주를 펼치고, 情理에 절실한 것이 있으면 물러나서 그 정리를 지키는 것이 신하의 도리라고 하였다. 모친이 살아 계실 때 병을 간호하느라 자식이 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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辭輔德疏(1767) 29 / 기록자료>고도서 / 강윤시강원보덕을 사양하는 소로 1767년(영조 43) 3월에 올린 것이다. 세자를 보좌하고 인도하는 사람은 마땅히 천하제일의 인물을 선발하여야 하는데, 저자와 같은 사람은 그런 인물이 아니라고 하였다. 지난 번 소장에서 진달하였듯이 눈과 귀가 멀고 기력이 쇠하여 길에 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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辭司諫疏(1768) 30 / 기록자료>고도서 / 강윤사헌부사간을 사양하는 소로 1768년(영조 44) 7월에 올린 것이다. 오랫동안 앓던 병이 더운 여름이 되어 더욱 심해지고 吐瀉癨亂이 때때로 일어나서 관직에 나갈 수 없다고 하였다. 이러한 사정을 헤아려 체직시키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비답에, 사양하지 말고 길에 오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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辭執義疏(1768) 31 / 기록자료>고도서 / 강윤사헌부집의를 사양하는 소로 1768년(영조 44) 10월에 올린 것이다. 지난번 사간에 임명되었을 때 나가서 謝恩하지 못하여 그 죄가 이미 큰데, 허물하지 않으시고 또 집의에 임명하니 두려워 몸둘 바를 모르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오랜 병으로 기력이 쇠하여 관직에 나갈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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辭副校理疏(1769) 33 / 기록자료>고도서 / 강윤홍문관부교리를 사양하는 소로 1769년(영조 45) 5월에 올린 것이다. 王安石이 다른 관직은 모두 사양하고 知制誥는 사양하지 않았는데, 왕안석이 관직을 사양한 것은 다른 관직에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저자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교묘한 짓이라고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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辭執義疏(1771) 35 / 기록자료>고도서 / 강윤사헌부집의를 사양하는 소로 1771년(영조 47) 정월에 올린 것이다. 십여 차례 사헌부의 관직을 임명받았으나 한 번도 나가지 못해 죄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뜻밖에 다시 임명한다는 교지를 받고 두려워 몸둘 바를 모르겠다고 하였다. 병들고 기력이 쇠약하여 길에 오를 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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辭修撰疏(1772) 36 / 기록자료>고도서 / 강윤홍문관수찬을 사양하는 소로 1772년(영조 48) 7월에 올린 것이다. 근래에 병이 더욱 심해져서 길에 오를 수 없다고 하였다. 여러 차례 병으로 관직에 나갈 수 없는 사정을 진달하였으니, 吏曹에 명하여 다시는 관직에 擬望하지 말고, 성은을 안고 시골에서 살다가 죽기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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辭修撰疏(1773) 37 / 기록자료>고도서 / 강윤홍문관수찬을 사양하는 소로 1773년(영조 49) 2월에 올린 것이다. 오랜 병을 앓고 있으며 겨울이 되어 가슴에 통증이 더욱 심해져서 관직에 나갈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학문에 더욱 정진할 것을 간청하였는데, 특히 대학과 맹자를 읽으라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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辭校理疏(1773) 40 / 기록자료>고도서 / 강윤홍문관부교리를 사양하는 소로 1773년(영조 49) 3월에 올린 것이다. 養老宴에 참석하였다가 병세가 악화되어 이 소장을 올리고 되돌아 왔다. 말미에 성상의 몸을 잘 보전하고 세자를 잘 훈육할 것에 대해 진달하였다. 왕이 그 내용에 대해 기뻐하며, 비답을 내리기를 경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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辭同副承旨疏(1773) 42 / 기록자료>고도서 / 강윤승정원동부승지를 사양하는 소로 1773년(영조 49) 3월에 올린 것이다. 그간 공로가 없기 때문에 이 관직을 받을 수 없고, 질병이 고질이 되어 눈과 귀가 어둡고 발이 약하여 관직에 나가기 어렵다고 하였다. 왕명을 출납하는 막중한 자리에 자신의 재주를 헤아리지 않고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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辭洪忠監司疏(1780) 43 / 기록자료>고도서 / 강윤洪忠道觀察使를 사양하는 소로 1780년(정조 4) 3월에 올린 것이다. 자신은 이미 高齡이고 병이 깊어 관직에 나갈 수 없다고 하였다. 비답에 병 때문에 사양하지 말고 관직에 나오라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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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渼湖金先生(元行) 44 / 기록자료>고도서 / 강윤渼湖 金元行(1702∼1772)에게 올린 편지이다. 김원행은 자가 伯春이며, 호는 渼湖‧雲褸이며, 시호는 文敬이고, 본관은 安東이다. 金昌協의 손자로 辛壬士禍로 가문이 화를 당했을 때 요행히 면하였으며 평생 학문에만 정진하였다. 저자와는 道義交를 맺었으며, 周易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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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權諮議亨叔(震應) 45 / 기록자료>고도서 / 강윤權震應(?~1775)에게 보낸 편지이다. 권진응은 본관이 안동, 자는 亨叔, 호는 山水軒이다. 권진응이 지은 「雲溪祠奉安文」에 대해 花巖書院의 士林들이 원망을 품고 있다는 말을 듣고, 이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적어 보낸 것이다. 나이순으로 보면 洛涯 金安節(1564~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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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府伯金(尙黙) 46 / 기록자료>고도서 / 강윤안동부사 金尙黙(1726~?)에게 답한 편지이다. 김상묵은 자가 伯愚, 본관은 淸風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수원부사‧안동부사‧형조참의를 지냈으며, 안동부사로 재임할 때 공정한 사무 처리로 명성을 얻었다. 흉년이 들었을 때 구휼해 주어서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는 것을 면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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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府伯 47 / 기록자료>고도서 / 강윤안동부사에게 답한 편지이다. 전에 찾아와 문안해 준 것에 대해 감사한데, 또 편지를 보내 안부를 물으니 더욱 감사하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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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府伯 47 / 기록자료>고도서 / 강윤안동부사에게 올린 편지이다. 관찰사가 정사를 펴는데, 어질고 은혜로움은 넉넉하지만 위엄과 결단력은 부족하니, 강단이 있는 정사를 펼쳐 달라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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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府伯 48 / 기록자료>고도서 / 강윤안동부사에게 답한 것이다. 선조의 묘갈명 중에서 子孫錄에 관한 내용이다. 저자는 자손록을 옛날 문집의 관례에 따라 5,6대를 연이어 적었는데, 글자 수가 늘어나면 비문에 쓰는 글자가 작아지게 되어 마모될 염려가 있다는 관찰사의 지적에 玄孫까지 제한하여 고쳐서 올린다고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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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裵(是袗) 48 / 기록자료>고도서 / 강윤裵是袗(1730~1794)에게 답한 편지이다. 배시진은 본관이 星州, 호는 月洲이며, 奉化에 살았다. 배시진이 저자에게 ‘先生’이라고 칭한 것에 대해 나이가 많으니 ‘長者’라고 칭하는 것은 가당하지만 선생이란 호칭은 감당할 수 없다고 하였다. 주자의 경우를 예로 들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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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族祖(再文)師仲 49 / 기록자료>고도서 / 강윤姜再文에게 답한 편지이다. 喪事를 듣고도 관직에 매어 있어서 조문을 하지 못했다고 하였다. 문중의 이어지는 喪事로 어른들이 차례로 세상을 떠나니 가슴 아프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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朱子封箚會通序 50 / 기록자료>고도서 / 강윤「朱子封箚會通」을 편집한 전말을 기록한 것이다. 주자대전에서 封事와 奏箚 체제가 다른 것을 封事와 奏箚로 나누어 편집하였다고 하였다. 봉사는 時務를 통괄해서 논의한 것으로 그 말이 매우 절실하고, 주차는 한 가지 일을 가리켜서 황제 앞에서 진달한 것으로 그 뜻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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族譜序 52 / 기록자료>고도서 / 강윤1667년(현종 8)과 1685년(숙종 11) 사이에 강씨의 족보를 만들었는데, 지금 다시 만들게 된 전말을 기록한 것이다. 세월이 오래되어 昭穆의 순서가 바뀌고, 뒤에 태어난 자손을 기록하지 않을 수 없으며, 派가 나누어진 것을 기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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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丁稧帖後序 54 / 기록자료>고도서 / 강윤1747년(영조 23)과 1748년(영조 24)에 계첩을 다시 만들게 된 경위를 적은 글이다. 저자의 선친이 29명과 동갑계를 만들고 해마다 한 번씩 모임을 가졌었는데, 자손들이 선조를 추모하는 마음으로 옛날 계첩을 찾아서 다시 베껴 29부를 만들어 각 집안에 보관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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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朴寬汝行狀後 55 / 기록자료>고도서 / 강윤朴寬汝의 行狀 뒤에 붙인 글이다. 사대부가 관직에 나가 충성하고 바르게 인도하는 것에 뜻을 두었지만 도리어 형벌을 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박관여가 그러한 경우라고 하였다. 억울하게 세상을 마쳤을 뿐만 아니라 그가 쌓은 경륜을 조금도 세상에 펼치지 못한 것이 안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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敬書荷塘權公與祖妣田券後 57 / 기록자료>고도서 / 강윤荷塘 權斗寅(1643~1719)이 저자의 조모에게 준 토지문서의 뒤에 적은 글이다. 권두인은 자가 春卿, 본관은 安東으로 당시 영남 제일의 선비라고 일컬어졌다. 저자의 조모와는 6촌 사이이다. 천성이 어질고 재물을 좋아하지 않아서 30두락의 땅을 출가한 누이에게 주었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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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說 58 / 기록자료>고도서 / 강윤諱法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적은 것이다. 왕의 이름을 쓰지 않거나 선조의 이름을 쓰지 않거나, 혹은 읽어야 할 경우에 피하는 것 등에 대해 적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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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甥益顯字說 60 / 기록자료>고도서 / 강윤甥姪 金益顯의 字를 用晦로 지어 주면서 그 이유를 적은 글이다. 비단 옷을 입으면 드러나지만[顯] 겉옷을 입어서 가린다[晦]고 하였다. 옛날 사람들은 務實을 자기의 일로 삼아서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안으로 갈무리 하였다고 하였다. 用晦라고 字를 지어 준 것은 務實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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卦變說(上渼湖金先生就正) 60 / 기록자료>고도서 / 강윤周易卦의 변화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적어 渼湖 金元行에게 보인 것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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代族弟漷新第上樑文 61 / 기록자료>고도서 / 강윤族弟 姜漷(1716~1794)이 새 집을 지을 때 상량식에 지은 글이다. 姜漷은 자가 眞源, 호는 俟翁이다. 상량한 후에 남편은 의로움으로 가족을 이끌고 부인은 유순하며, 아들은 공부하고 딸은 길쌈하여 각자의 본분을 다 하고, 집안이 화목하며, 선조의 유업을 실추시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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家廟焚黃告由文 1 / 기록자료>고도서 / 강윤저자가 1780년(정조 4)에 洪忠道觀察使에 임명되어 先親은 이조참판에 증직되고 先妣는 貞夫人에 증직되었기에 그 연유를 고하는 글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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亡室焚黃告由文(宜在上) 1 / 기록자료>고도서 / 강윤저자의 죽은 아내가 淑夫人에 증직되었으므로 그 연유를 고하는 글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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羅梅陰公焚黃告由文(代本孫作) 2 / 기록자료>고도서 / 강윤羅以俊(1602~?)은 자가 宅宇, 호는 梅陰, 본관은 壽城이다.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에 병자호란이 일어났는데, 유생들이 모두 흩어져 달아났으나 홀로 공자 위패를 남한산성으로 옮겼다. 이에 그 공을 가상하게 여겨 포상하게 되었으므로 그 연유를 고한 글인데 본손을 대신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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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渼湖金先生(元行)文 2 / 기록자료>고도서 / 강윤金元行(1702∼1772)의 제사에 올린 글이다. 유가의 도통을 보위하는데 힘을 쏟아 우암 송시열의 학통을 이었으며 농암 김창협의 적통을 이었다고 하였다. 저자 자신은 心性論과 易卦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는데, 이제는 가르침을 받을 수 없게 되어 애통하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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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安知事(復駿)文 3 / 기록자료>고도서 / 강윤安復駿의 제사에 올린 글이다. 뛰어난 재능을 지녔지만 젊어서 고생을 많이 하다가 과거에 올라 형통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우리에게 은혜를 많이 끼쳐줄 것이라 여겼는데 일찍 세상을 마친 것이 애통하다고 하였다. 저자는 성균관에서 함께 공부하던 일을 회상하며 더욱출처 : 유교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