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체: 에 대해 총641,787건의 자료가 검색되었습니다.
-
325801
答李仲章(天燮) 2 / 기록자료>고도서 / 정재로仲章 李天燮에게 답한 편지이다. 오랫동안 소식을 전하지 못했는데도 두 차례나 서신을 보내주어 황망하기 그지없다고 하면서 우리들 앞에 놓인 길이 점점 좁아드는 현실 속에서 어찌 그대가 생각하고 있는 好造를 얻어 자연 속에서 남은 회포를 이어갈 수 있겠느냐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325802
與申時成 2 / 기록자료>고도서 / 정재로申完에게 보낸 편지이다. 서로 가까이에 살고 있기는 하지만 자주 만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고 전하면서 紅紙 告身의 일은 어찌되었는지 묻고 南行을 다녀오는 길에 사람과 말이 모두 병으로 고생을 하였으며, 빌려 탄 말이 또한 죽었다고도 하였다.출처 : 유교넷 -
325803
答族兄器伯(載遠) 3 / 기록자료>고도서 / 정재로族兄 器伯 載遠에게 답한 편지이다. 남쪽으로 벼슬을 제수받아 떠난 뒤로 다시 만날 수 없음이 한스러웠다고 하면서 바닷가 마을의 習俗도 잘 알지 못하고 풍토병도 있을 것이니 더욱 더 굳건히 하라고 전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325804
答黃季則(麟采) 4 / 기록자료>고도서 / 정재로黃麟采(1716~?)에게 답한 편지이다. 작년 가을에 얻은 병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다니 슬프기 그지없다고 하면서 병을 얻은 후로 오랜 知己와도 접촉이 드물어 忠을 도모하고자 하여도 기회를 얻을 수가 없으니 의논할 바가 있다면 어찌 감히 뒤로 미룰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출처 : 유교넷 -
325805
寄選兒 4 / 기록자료>고도서 / 정재로아들인 義選에게 보낸 편지이다. 돌아오지 않은 것이 병이 완쾌되지 않아서인 것 같아 너의 처자와 집안사람들이 모두 걱정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으나 형을 통해서 자세한 소식을 들을 수가 있었다고 하면서 表叔母의 喪을 당한 것에 대하여 전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325806
寄再從孫履敎 5 / 기록자료>고도서 / 정재로再從孫 履敎에게 보낸 편지이다.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 事親의 도를 다해야 한다는 말을 어찌 다른 사람이 해줄 수 있겠느냐고 하면서 내가 우리 집안의 아직 죽지 않은 老物의 자격으로 너에게 말해주지 않는다면 누가 말해주겠느냐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325807
答履敎 5 / 기록자료>고도서 / 정재로履敎에게 답한 편지이다. 연일 계속되는 병으로 인하여 움직이지 못한 지가 며칠이 지났으며, 마을에는 홍역이 극에 달했다고 하면서 禫祭가 初丁으로 예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여의치 않다면 中丁이나 下丁에 치르는 것도 무방하다고 전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325808
捕鯊記 6 / 기록자료>고도서 / 정재로모래무지 잡이를 기록한 記文이다. 강에서 나는 산물 중에 맛있는 것이 있으니 입이 커서 모래를 머금었다가 품어내는 것을 좋아하고 여울에 숨기를 좋아하며, 모래가 흐르는 돌 사이에서 잡을 수 있다고 하였다. 이어서 고기를 잡을 때 사용하는 도구와 잡는 방법에 대하여 서출처 : 유교넷 -
325809
衆香窩銘 8 / 기록자료>고도서 / 정재로形色은 수없이 많고 臭味는 서로 같지 않지만 서로 합하여 서로 크게 조화를 이루게 되면 馨德이 비로소 發하게 된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325810
行狀 9 / 기록자료>고도서 / 정재로延谷 權聖翊(1735~1821)이 쓴 行狀이 실려 있다. 자세한 내용은 글 앞의 저자 소개에 나와 있다.출처 : 유교넷 -
325811
墓碣銘(幷序) 14 / 기록자료>고도서 / 정재로鄭宗魯(1738~1816)가 撰한 저자의 墓碣銘이 실려 있다. 내용은 행장과 비슷하다.출처 : 유교넷 -
325812
墓誌銘(幷序) 16 / 기록자료>고도서 / 정재로후손 泰鎭(1876~1960)이 撰한 저자의 墓誌銘이 실려 있다. 내용은 행장과 비슷하다.출처 : 유교넷 -
325813
輓詞 21 / 기록자료>고도서 / 정재로趙宜陽‧權思浩‧黃龍漢‧權聖鳳‧李天燮‧金象鍊‧金泗鍊‧權聖翊‧李鎭九‧柳象春‧權相宅‧李章祖‧權進標‧權玉相‧李正璧‧金龜鍊‧趙時中‧趙養晦‧朴彭寧‧趙玄道‧金商運‧張南斗‧李攀龍 등이 쓴 만사가 실려 있다.출처 : 유교넷 -
325814
祭文 31 / 기록자료>고도서 / 정재로表從叔 李經祿‧內弟 成鼎鎭‧李攀龍‧朴漢淵 등이 쓴 제문이 실려 있다.출처 : 유교넷 -
325815
題四無翁詩稿後 38 / 기록자료>고도서 / 정재로延谷 權聖翊이 쓴 後記가 실려 있다. 詩文만을 모은 상태에서 지은 글이다.출처 : 유교넷 -
325816
跋 39 / 기록자료>고도서 / 정재로孫子 文敎가 쓴 跋文이 실려 있다. 여기 저기 흩어져 있던 王考의 글을 모아 1冊을 이루었으며, 延谷 權聖翊이 編摩하고 斗谷 趙鳳九(1878~1932)가 覆校하고 愚山 李鉉五(1868∼1923)가 卒勘하였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325817
識 / 기록자료>고도서 / 정재로玄孫 珠燮이 1938년 淸明節에 쓴 後識가 실려 있다. 흩어져 있던 王考의 글을 祖考께서 모았으나 오랫동안 결과를 얻지 못하고 있다가 再從弟 璉燮이 도모하고 延谷 權聖翊의 후손 廷燮이 참여한 뒤에 권성익이 원고를 정리하고 貞窩 黃龍漢이 覆校하였으며, 立齋 鄭宗魯가 卒출처 : 유교넷 -
325818
가은집 / 기록자료>고도서 / 성언근가은집(稼隱集) 稼隱 成彦根의 문집. 木活字本, 跋: 權命燮‧成大源(1935)‧成漢永(1936), 4卷 2冊: 四周單邊, 半郭 21.6×15.7㎝, 10行 20字, 註雙行, 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 32.7×21.2㎝. 權命燮(1885~1949)과 玄孫 大源이 쓴 跋출처 : 유교넷 -
325819
詩 / 기록자료>고도서 / 성언근踰竹嶺,詠燈, 詠杜鵑, 與鄭易之(易簡)權孟燁(思晦)枕上吟,丁酉司馬蒙恩次同年權孟燁韻, 雲巖水雲亭, 春秋翁鄭易之來訪共賦, 次霞巖小集韻, 贈金上舍德承(復仁, 忠州人後登第), 養賢堂嶺南會次會中韻, 四端七情吟, 與姜使君(忱)景濂亭賞花,權敎官(思潤)以東京尹李(益運)所饋內賜丹藥二출처 : 유교넷 -
325820
丁未討逆儒䟽 1 / 기록자료>고도서 / 성언근1787년(정조 11)에 지은 疏이다. 文孝世子(1782~1786)의 죽음과 관련하여 역도를 찾아 벌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정조가 의빈 성씨에게서 얻은 아들인 문효세자가 3세 때에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5세라는 어린 나이로 요절하자 老論에서 평소 출신과 정통성출처 : 유교넷 -
325821
戊申倡義事蹟申辨儒䟽 4 / 기록자료>고도서 / 성언근1728년(영조 4)에 일어났던 李麟佐의 亂과 관련하여 당시에 倡義하였던 인물들에 대한 申辨을 호소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비록 嶺南지역의 수치이기는 하였지만 60여 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으니 이제 당시 많은 人士들이 창의가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고 하였출처 : 유교넷 -
325822
擬壬子義理䟽 7 / 기록자료>고도서 / 성언근1792년(정조 16) 思悼世子(1735~1762)의 죽음에 대하여 영남 남인들이 명분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 것과 관련된 疏이다.출처 : 유교넷 -
325823
浣溪李公請贈疏 11 / 기록자료>고도서 / 성언근浣溪 李彦英(1568~1639)의 증직을 청하는 疏이다. 이언영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寒岡 鄭逑의 門人으로 1591년(선조 24)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효도와 청렴으로 純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03년(선조 36) 文科에 장원급제하였으나 학문이 아출처 : 유교넷 -
325824
崇禎處士杜谷洪先生加贈請諡疏 14 / 기록자료>고도서 / 성언근崇禎處士 杜谷 洪宇定(1595~1656)의 諡號를 청하는 疏이다. 홍우정은 조선 중기의 선비로 본관은 南陽이고 字는 靜而이며, 號는 杜谷 혹은 桂谷이다. 조부는 可臣이고, 부친은 榮이며, 어머니는 許筬의 딸이다. 1614년(광해군 6) 진사가 되었으나 1616년(광해출처 : 유교넷 -
325825
與鄕校長任 17 / 기록자료>고도서 / 성언근우리의 儒敎는 盛宋에 뒤지지 않고 成周에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흔히 '禮義之邦'이라고도 하는데, 근래에는 점차 世道가 어지러워지고 있으니 오직 學校만이 배움을 일으킬 수 있다고 하면서 배움을 일으키는 방법은 經書의 요지를 강학하고 토론하며, 義理를 익혀서 밝히는 것이출처 : 유교넷 -
325826
與金院長(宅源) 19 / 기록자료>고도서 / 성언근院長 金宅源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안질이 여전히 완쾌되지 않아서 院會의 약속을 또 다시 어기기 되었다고 하면서 후에 함께 자리를 해 준다면 젊은이들에게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325827
上樊巖蔡判書 20 / 기록자료>고도서 / 성언근樊巖 蔡濟恭(1720~1799)에게 올리는 편지이다. 警戒하기에 힘쓰라는 말씀은 집안 자손들에게 百世의 龜鑑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푼 것이라고 하면서 여러 가지로 상황이 허락하지 않아서 몇 차례 인사를 전하지 못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점출처 : 유교넷 -
325828
上樊巖蔡判書 21 / 기록자료>고도서 / 성언근蔡濟恭에게 올리는 편지이다. 영남의 상황이 零盡하여 오직 희망은 閤下에게 있다고 하면서 집안 형편이 허락하지 않아서 한 달이나 두 달 동안은 멀리 떠날 수가 없어서 단지 스스로 탄식할 뿐이라고 전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325829
答樊巖蔡相公(䟽廳聯札) 21 / 기록자료>고도서 / 성언근蔡濟恭에게 답한 편지이다. 思悼世子의 죽음에 대한 伸寃을 주장하는 疏와 관련된 견해에 대하여 지난 편지에서 밝힌 세 가지 가르침에 대한 견해를 전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325830
與安東疏廳 23 / 기록자료>고도서 / 성언근安東 疏廳에 보낸 편지이다. 思悼世子의 죽음에 대한 신원을 위하여 疏를 준비하면서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을 것이라고 하면서 죽기 전에 義理가 펼쳐지는 것을 볼 수 있다면 무슨 한이 있겠느냐고 전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325831
答安東疏廳 23 / 기록자료>고도서 / 성언근安東 疏廳에 답한 편지이다. 1791년(정조 15) 3월 초에 있었던 일을 언급하면서 疏를 올리는 일과 관련하여 견해를 전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325832
答崔參判(獻重,宰仁同時) 27 / 기록자료>고도서 / 성언근參判 崔獻重에게 답한 편지이다. 思悼世子의 죽음에 대한 신원을 청한 疏에 관하여 전에 있었던 오해가 이번 서신을 통해 전한 사람의 잘못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하면서 대개 신중을 기하자는 뜻이 아니었겠느냐고 전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325833
與崔參判 29 / 기록자료>고도서 / 성언근崔獻重에게 보낸 편지이다. 점점 나이가 들어 두문불출하고 병을 치료하고 있다고 하면서 思悼世子의 죽음에 대한 신원과 관련하여 지난 번 通文에 대한 견해를 전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325834
答徐若先 30 / 기록자료>고도서 / 성언근龜川 徐成烈(1783~1838)에게 답한 편지이다. 이제 막 撤殯한 처지를 밝히고 글을 청한 것에 대하여 감당하기 어려우며 웃음을 살까 걱정이라고 하면서 指意가 지나치게 무겁다는 등 견해를 전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325835
答族叔仲文(激) 31 / 기록자료>고도서 / 성언근族叔 仲文 成激에게 답한 편지이다. 先稿에 대하여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려 하였다고 하면서 刊本은 本院에 소장하고 原本은 春軒公 徐崦 본가에 소장하는 것이 좋겠다고 전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325836
答族叔仲文 31 / 기록자료>고도서 / 성언근族叔 成激에게 답한 편지이다. 勿溪書院의 追享과 관련하여 집안의 우환과 천연두로 인하여 참석할 수 없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325837
春秋過客傳 32 / 기록자료>고도서 / 성언근‘春秋過客'은 뛰어난 偉士라고 하면서 스스로 호를 춘추과객이라고 지은 노인과의 대화를 통해 그 까닭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 노인이 바로 鄭易簡이라고 전하고 있다. 정역간의 字는 易之이고, 號는 春秋이며, 조선 肅宗 때 봉화군 물야면 오록리 근처에 살았던 선비이다.출처 : 유교넷 -
325838
孝狗說 34 / 기록자료>고도서 / 성언근邊氏 집안에서 기르고 있는 개가 어미를 잘 보살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도적들로부터 부모를 구한 변씨 집안의 효자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325839
洞中講義文 35 / 기록자료>고도서 / 성언근늦은 봄 雪坪에서 義에 대하여 강론한 일을 언급하면서 위험에 임했을 때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선비의 義理이고 힘으로 돕는 것은 백성의 職分이니 선비는 의리에 죽고 백성은 직분을 다하다 죽는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325840
聖幀改摹時通道內文 37 / 기록자료>고도서 / 성언근紹修書院의 孔子 聖幀을 다시 그리는 일과 관련하여 山長 金台가 상경하여 화공을 청해 왔다고 하면서 관련된 일들을 道內에 전한 通文이다.출처 : 유교넷 -
325841
通虎溪書院文 39 / 기록자료>고도서 / 성언근思悼世子의 죽음에 대한 신원과 관련된 虎溪書院의 通文이다.출처 : 유교넷 -
325842
祭樊巖蔡相公文(雲院洞主時送儒生致祭) 1 / 기록자료>고도서 / 성언근樊巖 蔡濟恭(1720~1799)에게 올린 제문이다. 본관은 平康이고, 字는 伯規이며, 號는 樊巖 혹은 樊翁이다. 부친은 膺一이다. 吳光運과 姜樸에게 배웠다. 1735년(영조 11) 15세에 향시에 급제한 후 1743년(영조 19)에 문과정시를 통해 承文院에 들어갔다.출처 : 유교넷 -
325843
祭存身齋權公(思聞)文 2 / 기록자료>고도서 / 성언근存身齋 權思聞(1734~1800)에게 올린 祭文이다. 字는 幼聞이고, 號는 存身齋이다. 조부는 穫이고, 부친은 正觀이며, 配位는 順天金氏 萬采의 딸이다. 遺稿가 전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325844
祭權景實(思溫)文 4 / 기록자료>고도서 / 성언근權思溫(1739~?)에게 올린 祭文이다. 저자보다 1살이 많기는 했으나 17세부터 50여 년간을 함께 절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세상을 떠난 것이 너무도 가슴이 아프다고 전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325845
祭權上舍孟燁文 5 / 기록자료>고도서 / 성언근上舍 權思晦(1741~1810)에게 올린 祭文이다. 字는 孟燁이고, 號는 巷南이다. 正傳의 아들로 1777년(정조 1)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고인의 풍모와 군자의 덕성을 지닌 친구가 나의 부족함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함께 하였는데, 이제 이렇게 세상을 떠났으니 그출처 : 유교넷 -
325846
祭族兄南厓公文 6 / 기록자료>고도서 / 성언근族兄 南厓公 成彦檝(1732∼1812)에게 올린 祭文이다.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本貫은 昌寧이고, 字는 用汝이며, 號는 南厓이다. 부친은 澯이며, 어머니는 玉山張氏로 緯三의 딸이다. 1762년(영조 38)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1768년(영조 44)에 승출처 : 유교넷 -
325847
祭嘉山郡守鄭公(蓍)文 7 / 기록자료>고도서 / 성언근嘉山郡守 鄭蓍(1768~1811)에게 올린 祭文이다. 조선 순조 때의 무신으로 字는 德圓이며, 號는 伯友이다. 贈執義 魯의 아들로 1799년(정조 23) 武科에 급제하여 宣傳官이 되고, 訓鍊院主簿·都摠府經歷 등을 지냈다. 1811년(순조11) 洪景來의 난 때 嘉山郡守출처 : 유교넷 -
325848
祭族祖僉樞公文 7 / 기록자료>고도서 / 성언근族祖 僉樞公 成祖寅(1713~1796)에게 올린 祭文이다. 본관은 昌寧이고 字는 汝述이며, 조부는 正夏이고 부친은 世玶이다. 芙蓉堂 安義의 玄孫으로 관직이 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에 이르렀으며, 賢行으로 鄕黨에 稱頌을 받았다.芙蓉堂 安義의 玄孫으로 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에 이출처 : 유교넷 -
325849
祭權酉陽文(代紹修儒生作) 9 / 기록자료>고도서 / 성언근紹修書院의 儒生들을 대신하여 酉陽 權思浩(1733~1806)에게 올린 祭文이다. 본관은 安東이고, 字는 基天이며, 號는 酉陽이다. 1783년(정조 7)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蔭補로 正郞과 縣監을 지냈으며 實記가 전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325850
祭金大諫(翰東)文(代文陽儒生作) 10 / 기록자료>고도서 / 성언근文陽書院의 儒生들을 대신하여 大諫 金翰東(1740~1811)에게 올린 祭文이다.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義城이고, 字는 翰之이며, 號는 臥隱이다. 安東 출신으로 부친은 佐郞을 지낸 景泌이다. 1763년(영조 39) 진사를 거쳐 1781년(정조 5) 경릉참봉이 되출처 : 유교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