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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체: 에 대해 총641,787건의 자료가 검색되었습니다.
  • 325951

    祖妣孺人安東權氏行錄 16 / 기록자료>고도서 / 송정환
    高祖 南川 權斗文이 壬亂 당시 平昌郡守로 포로가 될 때 本生曾祖 權黑+主가 끝까지 모시다가 하늘에 축원하여 비가 오는 야밤에 업고 도주하여 돌아왔으므로 세칭 ‘父子忠孝’라 하고, 조부는 文科 正郞 垕文이고 아버지는 喜學이다. 어머니는 同樞府知事 黃應奎의 손녀이자 副護
    출처 : 유교넷
  • 325952

    先妣孺人安東金氏省墓記夢錄 19 / 기록자료>고도서 / 송정환
    先妣는 안동김씨 用成과 능성구씨 栢潭 具鳳齡(1526~1586)의 五世 孫女의 사이에서 1682년(숙종 8)에 태어나 1702년(숙종 28)에 先府君께로 시집을 왔는데, 新行도 오지 못하고 1703년(숙종 29)에 친정인 蘇山에서 죽어 인근에 장사지냈다. 所生子도 두
    출처 : 유교넷
  • 325953

    先妣孺人眞城李氏行錄 20 / 기록자료>고도서 / 송정환
    先妣 眞城李氏의 계보는 松安君 子脩, 副正 云侯, 善山府使 禎, 縣監 遇陽, 삼세를 지나 松溪 李亨男은 고조인데 周村으로부터 九老洞에 처음 이거한 분이고, 증조는 慶仁, 조는 琯, 아버지는 成翼이다. 어머니는 영양남씨 宣敎郞 天翊의 딸이다. 21세 되던 1705(숙종
    출처 : 유교넷
  • 325954

    甲寅元朝兄弟相約五條 22 / 기록자료>고도서 / 송정환
    孝友睦姻任恤의 6字로 齊家의 법도로 삼고, 廉恥禮讓遜順의 6字로 修身의 요체로 삼되 餘力이 있으면 옛 글과 아름다운 말, 착한 행실을 부지런히 읽고 서로 강론하여 體認하기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는 내용을 다섯 조목으로 나누어 형제간 약조로 삼은 글이다.
    출처 : 유교넷
  • 325955

    乙未十月伊山書院通讀時規約七條 24 / 기록자료>고도서 / 송정환
    국가에서 학교를 세워 인재를 배양하는 것은 오로지 강학을 권하고 賓興之挽에 있는데 비하여, 근래의 儒習이 文詞를 높이고 實質을 다음으로 여기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이러한 기풍을 조정하기 위하여 이산서원의 유생들과 함께 退溪 선생의 遺集을 강학하기로 약조를 정하여 일곱
    출처 : 유교넷
  • 325956

    勸諭南澗書堂講學諸生 25 / 기록자료>고도서 / 송정환
    南澗書堂의 訓任을 맡았을 때, 諸生들에게 󰡔소학󰡕을 읽어 어려서는 배우고 장성해서는 실천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할 것을 권유하는 내용이다.
    출처 : 유교넷
  • 325957

    小白山遊錄 25 / 기록자료>고도서 / 송정환
    1738년(영조 14) 자신의 丈人인 潛軒 琴公이 小白山을 다녀와서 기록한 遊錄을 보여주기에, 그것을 읽고 나서 소백산이 가진 峰巒水石과 臺榭洞壑의 명칭을 대략 기억하게 되었는데, 장인이 돌아가고 난 뒤, 1747년(영조 23) 아우 仲通과 李圭瑞 朴行源과 동행이 되
    출처 : 유교넷
  • 325958

    後遊小白山錄 30 / 기록자료>고도서 / 송정환
    1750년(영조 26) 봄 李圭瑞와 金行源과 아우 仲通과 함께 소백산 유람을 도모하였으나, 바람이 심하게 불어 다음 해를 기약하면서 중도에서 돌아온 일이 있었다. 다음해인 1751년(영조 27) 봄에 아우 중통이 죽음으로써 遊山에 뜻이 없어 포기한 채 십여 년이 지났
    출처 : 유교넷
  • 325959

    鶴駕山遊錄 36 / 기록자료>고도서 / 송정환
    1773년(영조 49) 宗會次 醴泉 夢吟寺에 갔다가 하루 밤을 정담으로 지내고, 이튿날 십여 인이 함께 鶴駕山을 왕복한 기록이다.
    출처 : 유교넷
  • 325960

    聞見錄 39 / 기록자료>고도서 / 송정환
    祖妣 安東權氏의 本生 曾祖 權黑+主의 기이한 행적에 감동하여 지은 蒼石 李埈의 시와 木齋 洪汝河의 시를 들을 바대로 적어 소개하는 외에, 南溪 琴軸, 孤松 朴成範, 護軍 李振鐸, 裵晉龜, 閔若曾, 李天相, 成必聖, 權最樂, 權任相, 閔炯一, 李光燁, 金兌遇, 朴泰來,
    출처 : 유교넷
  • 325961

    節行 45 / 기록자료>고도서 / 송정환
    生員 閔鋮의 아내, 裵晉錫의 아내가 남편이 죽자 음식을 전폐하고 따라서 죽은 일 외에, 金守大의 아내, 權斗文의 側室 康氏, 朴宗阜의 側室 金召史, 金鑒의 아내 등의 烈行을 기려서 기록하였다.
    출처 : 유교넷
  • 325962

    行狀 1 / 기록자료>고도서 / 송정환
    진성이씨 李晩寅(1834~1897)이 지었다. 모두의 인물소개란에 제시한 내용과 동일하다.
    출처 : 유교넷
  • 325963

    墓碣銘(幷序) 5 / 기록자료>고도서 / 송정환
    訥隱 李光庭의 제자로 저자와는 동문인 斗庵 金若鍊(1730~1802)이 지었다. 내용은 「행장」과 대동소이하다.
    출처 : 유교넷
  • 325964

    輓詞 10 / 기록자료>고도서 / 송정환
    만사를 지은 인물의 명단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金㙔, 權夢虎, 黃鱗采, 金玄奭, 朴鼎象, 金瑞鐔, 金㙈, 權命守, 趙錫晦, 金漢鍊, 金學烈, 琴滌心, 權若龍, 朴龍元, 李孝騫, 朴鼎調, 金相舜, 從弟 鼎鎔.
    출처 : 유교넷
  • 325965

    祭文 15 / 기록자료>고도서 / 송정환
    제문 지은 인물의 명단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金汝鍊, 金洙鍊, 金泗鍊, 從弟 鼎鎭, 季弟 鼎銘.
    출처 : 유교넷
  • 325966

    / 기록자료>고도서 / 송정환
    宣城金氏 金㙽이 東渠 宋鼎鋎 사후 200년 뒤인 1925년에 기록한 발문이다.
    출처 : 유교넷
  • 325967

    / 기록자료>고도서 / 송정환
    族後孫 啓欽이 쓴 발문이다.
    출처 : 유교넷
  • 325968

    / 기록자료>고도서 / 송정환
    5세손 寅鈺이 쓴 後識이다.
    출처 : 유교넷
  • 325969

    연곡유집 / 기록자료>고도서 / 권성익
    연곡유집(延谷遺集) 延谷 權聖翊의 문집. 石印本, 序:權相圭(1936), 跋: 權廷燮(1936), 2卷 1冊: 四周雙邊, 半郭 21.7× 16.4㎝, 10行 20字, 註雙行, 上下向二葉花致魚尾; 32.0×21.0㎝. 본 문집은 발문을 쓴 권정섭의 증조부인 素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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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25970

    성재집 / 기록자료>고도서 / 남한호
    성재집(誠齋集) 誠齋 南漢皜의 문집. 木版本, 11卷 5冊: 四周雙邊, 半郭 19.7×16.0㎝, 有界, 10行 20字, 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 32.3 ×21.3㎝. 이 책은 조선 후기 학자인 誠齋 南漢皜의 문집이다. 서문이나 기타 관련된 정보가 없어서, 정확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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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25971

    신야집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신야집(新野集) 新野 李仁行의 문집. 木版本, 14卷 7冊: 半郭 23.2× 17.5㎝, 四周雙邊, 10行 18字, 註雙行, 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 33.3×21.8㎝. 卷1~2는 詩를 수록하였고, 卷3에는 「書筵講義」를 수록하였으며, 卷3~4에 채제공‧류범휴‧류낙
    출처 : 유교넷
  • 325972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次陶靖節四時吟, 聞喜日伏次家大人韻, 送李上舍學祖(幷序),深店乞策(時在泮步歸), 雨泊困知化, 過丹山口占, 元子百日謹次太學志慶韻, 辛亥元日自溫陵出直口占, 知舊多言齋官久直之苦戱題解嘲(二首),陵卒逐日呈課每言官令嚴樵竪不敢來,孝陵齋所有仁廟御畵墨竹帖乃內賜河西金公麟厚者也每念金公藥院
    출처 : 유교넷
  • 325973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癸亥立春, 夜坐見月, 病中伏次晦庵酬黃子厚詠雪韻,, 上元日次朱詩春雪十韻叙感, 感晦菴酬范伯崇自警韻伏次,土人爲圃斫林木植庭謂之瓜手, 渭城曲二章章九句(幷序), 冱寒之餘得和煦簷溜滴可愛,鄭筆工乘月來訪沽酒以飮之, 詠雪馬, 夢見瓢谷老兄兄弟, 人言秫餳利於治痰招市人要煑黑餳,悼寢郞族祖(鎭
    출처 : 유교넷
  • 325974

    書筵講義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1822년(순조 22, 壬午) 8월 6일 翊衛에 首望되어 권점을 받았다. 26일 發行하여 24일 泮中에 들어갔다. ◦26일 연영문 밖에서 숙배하고 입직을 한다고 아뢴 후에 召對에 참석하였다. 弼善 金裕憲, 司書 權敦仁과 더불어 宜春軒에 들어가 詩傳 東山章을 강의하
    출처 : 유교넷
  • 325975

    上樊巖蔡相公 7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능의 참봉으로 있으면서 채제공(1729~ 1799)에게 올린 서한이다. 나무가 고사하는 것과 소나무의 犯斫에 관련된 작폐를 논한 것으로 비록 업무에는 철저해야 하나 陵卒을 침학하고, 曺吏들은 標信도 없이 무시로 공갈하니 禁養의 도리가 下吏들의 사적 이익을 위한 것은
    출처 : 유교넷
  • 325976

    上蔡相公 9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채제공에게 올린 서한으로 안부를 묻고 주자의 劍南詩를 읽은 소회를 밝혔다. 또한 洛下의 문장가로 星湖 李瀷과 愚潭 丁時翰 등을 높이 평가하면서 다른 여타 문장가들도 있으나 동시의 이목을 속이는 것이라고 평가 절하하였다. 또한 聖明의 표장을 만나 주자의 학문과 우리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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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25977

    與臨汝齋柳丈 10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임여재 류규(1730~1808)에게 보낸 서한으로 귀양살이에서 돌아와서 보낸 것이므로 1805년(순조 5) 이후 1808년(순조 8) 사이의 것이다. 귀양가 있을 때 위문 편지를 보내준 것에 대하여 사례하고 자신은 귀양가 있었으므로 仲弟‧백모의 상에 분상하지 못하였음
    출처 : 유교넷
  • 325978

    與俛菴李丈 11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면암 이우(1739~1810)에게 보낸 서한이다. 임자의리소를 주도하는 李土+禹의 행동과 입장이 정당하며, 이는 선왕이 영남사림들에게 밝혀줄 것을 부탁한 것이므로 백세의 의논으로 당연히 참여하여야 하는 것이라고 동의하였다. 또 이는 하늘에는 해가 있고 아래에는 공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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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25979

    答立齋鄭丈(宗魯) 12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立齋 정종로(1738~1816)에게 보낸 답장이다. 정종로가 노성한 선배의 지위에 있으면서 아직 젊은 자신에게 먼저 편지를 보내어 견해를 물으니 감당하기 어렵다고 하고, 자신은 󰡔麗史彙纂󰡕의 勘校작업에 매달려 있다고 하였다. 정종로가 물은 사안에 대한 입장은 別紙
    출처 : 유교넷
  • 325980

    別紙 14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도남서원의 일은 이미 정리되었으니 다시 검토할 필요는 없다고 하였고, 옛날의 현자들도 번거로운 말을 듣는 것을 면하기 어려웠으니 지금 정종로가 처한 입장이 그러한 것이므로 중간에 서서 처리하는 것이 마땅하고 공의가 정해지는 것에 따라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대학
    출처 : 유교넷
  • 325981

    與壺谷柳丈 15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壺谷 柳範休(1744~1823)에게 보낸 서한이다. 귀양갔을 때는 制服을 하지 않는다는 견해에 대해서 󰡔서애집󰡕에서 그 근거를 찾아서 牒이 주어지지 않으면 관직이 없는 자나 마찬가지이므로 制服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근거가 없지 않다고 하고 다시 류범휴의 견해를 물
    출처 : 유교넷
  • 325982

    與壺谷柳丈 16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류범휴가 보낸 답장에 대하여 다시 자신의 견해를 밝힌 것이다. 合理氣의 설에서 性은 理이니 이는 전현들의 不易之論이며, 性에는 本然‧氣質之殊가 있고, 情에는 四端‧七情之別이 있으므로 性情은 확실히 理氣를 겸한 것이라 말한 것이지 氣에 얽매인 것이라고 말한 것은 아니다
    출처 : 유교넷
  • 325983

    與壺谷柳丈 16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몇 가지 학문적 의문을 질의한 것으로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은 아니나 문목이다. ①東巖과 川沙 사이의 仁說의 대립은 왜 생겼는가? ② 已私 이하는 주자의 설이므로 주자‧장자의 입장이 차이가 없는데 무엇 때문에 다투는가? ③󰡔주자서절요󰡕에서 글머리(書首) 7行을 삭제
    출처 : 유교넷
  • 325984

    與壺谷柳丈 20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류범휴에게 보낸 서한으로 인근의 학자들에 대한 논의를 간략하게 하고, 자신의 학문하는 태도를 밝힌 것이다. 우선 隱嶺의 학문은 가히 敬服할 만하며, 金熙奮(1760~1822), 김희소(1758~1837)의 학문적 입장이 매우 정치함을 칭찬하였다. 이인행은 이 서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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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25985

    與壺谷柳丈 22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류범휴에게 보낸 서한으로 전의 물음에 대하여 상세히 가르쳐 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를 표하였다.
    출처 : 유교넷
  • 325986

    與壺谷柳丈 23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류범휴에게 보낸 서한이다. 서부지역의 반란에 대하여 근심하고 旬日동안 여는 講會는 世敎를 회복하고 민정을 진정시킬 한 방도라고 하였다. 내용으로 보아 1811년(순조 11)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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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25987

    別紙 24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愛之理便是仁’에 대한 물음이다. 이 문제는 대산 이상정 문하에서 상당한 논란이 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앞의 문목에서 해명되지 못한 문제에 대하여 거듭 질문을 한 것이다. 이 문제와 아울러 족숙 貞燮의 아들 中行이 仲父에게 입후한 후 다시 그 아들 중 하나를 本宗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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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25988

    與柳疇瑞 27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柳洛休(1749~1825)에게 보낸 서한이다. 류낙휴는 류범휴의 동생으로 이인행과 상당한 교분이 있었다. 류낙휴의 행장도 이인행이 썼다. 特蒙을 받아 유배에서 풀려 나왔다는 자신의 근황을 전하고 자식의 교육을 부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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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25989

    與柳疇瑞 27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자신이 渭源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것과 자신은 별다른 일없이 문을 닫고 조용히 지낸다고 하였다. 또 곧장 오더라도 1,700리 길이니 제때에 소식을 주고받을 수 없으므로 비용을 들여가며 소식을 전할 필요는 없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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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25990

    與柳疇瑞 28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아들을 보내어 소식을 전해준 것에 대하여 감사하고 백씨 즉 류범휴의 건강을 물었다. 그리고 心‧中內에 대한 柳洛休의 견해를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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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25991

    答柳疇瑞 29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隱嶺의 回敎는 반드시 사람을 놀라게 하고 계발시킬 것이니 되는대로 적어서 보내주심이 어떨 지 물었다. 이와 아울러 內에 대한 견해를 물으면서 자신은 中과 內를 같은 것으로 보고 바꾸어도 된다고 생각하는데 어떠냐고 물었으며, 動靜설에 대한 견해도 같이 질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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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25992

    答柳疇瑞 31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柳洛休에게 보낸 서한으로 用工之方, 主靜之工에 대한 물음으로 主一의 본지에 대하여 물었다. 동정에 대해서는 平巖이 동정을 분속시킨 것은 圓而無滯이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지만 자신은 못하겠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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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25993

    答柳疇瑞 33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처의 상을 당하였을 때의 가례에 대한 것으로 손을 맞이하는 것을 아들을 시켜서 대행하는 것은 예법에 어긋나는지, 長子의 부자가 모두 일찍 사망하였을 때 次孫으로 하여금 승중하게 하는 것은 어떨 지에 대하여 물었다.
    출처 : 유교넷
  • 325994

    答柳疇瑞 35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柳洛休에게 보낸 서한으로 답을 일찍 주어 고맙다고 하고 홍경래의 난과 민심의 동요에 대하여 우려를 표시하였다. 모친상을 당하고 다시 부친상을 잇달아 당하는 경우 祝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에 대하여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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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25995

    答柳疇瑞 36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잇달아 흉년이 들고 전염병이 창궐하는 것에 대하여 우려를 표시하고 홍수가 났음을 들었다고 하였다. 자신은 김희분이 잘 돌보아주어 큰 걱정은 없다고 하였으며, 6일의 도목정에 翊衛에 의망되어 낙점되었다고 소식을 전하였다. 1822년(순조 22)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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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25996

    答柳疇瑞 37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서연에 입시한 자신의 근황을 전하고 여강서원에서 벌어지는 사건, 즉 병호시비에 대한 우려를 표하면서 保合하자는 견해는 성기고 迃闊한 것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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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25997

    答柳疇瑞 38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진주의 立院의 일에 대하여 처음으로 상세하게 들었다고 하면서 그 운기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고 걱정하였다. 郭‧李 두 가문에서 三壯士의 일로 다투어 소를 올렸으니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궁금하지만 두 집안 모두 학봉 김성일의 막하에서 마음을 합하여 같이 환난을 구제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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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25998

    與權士善 39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權思浹(1753~1832)에게 보낸 서한이다. 영조와 정조의 御題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 서한의 내용으로 보아 충재 權橃의 문집 중간본 간행과 관련한 내용으로 보인다.
    출처 : 유교넷
  • 325999

    答權士善 40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책의 刊行 일을 곧 마칠 것이라고 하니 가히 빠르다고 말할 수 있다고 하면서 編次에 대한 논의도 이미 결정되었는지 물었다. 즉 일은 博採하는 것을 귀하게 여겨야지 한 두 사람의 견해만 담아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출처 : 유교넷
  • 326000

    與鄭禮安(烈) 41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예안현감 鄭烈에게 보낸 서한이다. 가산군수 鄭蓍의 褒贈은 전 영남의 영광으로 종족의 영광에만 그치겠는가라고 하였다. 가산군수 鄭蓍는 홍경래 군에게 잡혀 처형되었으며, 뒤에 증직되었다.
    출처 : 유교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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