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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체: 에 대해 총641,787건의 자료가 검색되었습니다.
  • 326051

    寄孫命和敬和 47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손자인 이명화와 이경화에게 보낸 편지이다. 서연에 나아갔음을 알리는 것으로 보아 1822년(순조 22) 익위사익위로 임명되었을 당시의 것이다. 이 편지는 陽浩 종형제와 같이 보라고 하였다.
    출처 : 유교넷
  • 326052

    寢園謾錄 1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1790년(정조 14) 온릉참봉으로 임명되었을 당시의 여러 일을 기록한 것이다. 사은하고 부임하니 齋宇와 堂室이 많이 무너졌고, 특히 전사청이 가장 심했다. 그 이유를 물은 즉 1739년(영조 15) 복위 때 창건한 것으로 이후 한 번도 수리하지 않아서 그러하다고 하
    출처 : 유교넷
  • 326053

    檀弓疑義 7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단궁」편에 나오는 여러 기록들에 대하여 의문점을 적고 자신의 견해를 밝힌 것이다. 주로 상례에 대한 것으로 공자가 상례를 마치고 5일 만에 탄금했다는 기록은 잘못된 것이라고하고,曾子易簀‧恭世子‧石祁子兆‧季孫之母 등 여러 조항에 대하여 의문을 표시하였다.
    출처 : 유교넷
  • 326054

    諭高山士民文 13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西學의 가르침은 군신‧부자의 윤리를 멸절시켜 이적금수의 땅으로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니 소탕하고, 가르쳐 교도하도록 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삼대 이래 이단의 설이 날로 성하여 송대의 문명도 불교의 폐단을 못 면하여 육선의 난이 일어났고 우리나라도 신라‧고려 때 불교에
    출처 : 유교넷
  • 326055

    客難 15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위원에 유배되어 있으면서 겪은 어려움을 적은 것이다. 沴氣 때문에 노비를 시켜 소나무 가지로 가구를 만들어 거리를 띄워놓았는데 이웃집에서 매일 밤 麻油를 때어 옷과 이불이 연기에 그을렸으므로 밖에 내어놓고 방을 어둡게 하고 靜坐하면서 쓴 글이다. 밝음을 좋아하고 어둠
    출처 : 유교넷
  • 326056

    邊備(在長淵時) 16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변방을 방어하는 것은 별장과 군관 등 무장들이나 甲兵으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羈縻策과 내수외양이 더 중요하다는 내용이다. 즉 변란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다스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출처 : 유교넷
  • 326057

    遊佛陀山 19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海西의 불타산을 유람하고 쓴 글이다. 불타산의 위치는 長山에서 30리 해구 쪽으로 뻗어 吾叉‧助泥 양진 사이에 기를 쌓아 두는 땅으로 동북쪽을 향해 따로 국면을 이루었다. 옛날에는 城址가 있어 雉堞이 있었으나 지금은 찾아 볼 수 없다. 사찰은 靑蓮菴이 있었으나 지금은
    출처 : 유교넷
  • 326058

    伊山書院講學所居齋節目 21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居齋하는데는 옛부터 규칙이 있으니 새로이 덧붙이는 것은 檢櫛하여 해마다 居齋할 것. ◦一鄕의 정원은 10인으로 돌아가며 강독할 것. ◦輪讀은 15일을 기한으로 할 것. ◦회를 시작하는 날 훈장과 별임을 입원여 檢飭하고 때때로 왕래하면서 점검할 것. ◦독서하는
    출처 : 유교넷
  • 326059

    霽亭李公遺卷序 24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霽亭 李達衷(1326~1385)의 문집 중간본의 서문이다.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하고, 成均館祭酒‧典理判書·監察大夫 등을 역임하였다. 戶部尙書로 있던 八關會 때 왕의 노여움을 사서 파면되었으나 1366년(공민왕 15) 密直提學을 지냈다. 辛旽의 전횡시절에 그에게 酒色
    출처 : 유교넷
  • 326060

    舂邨李公遺集序 26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舂邨 李某의 문집 서문이다. 舂邨은 문장이 뛰어났으나 매번 향시는 통과하고 소과를 통과하지 못하였다. 항상 후학들에게 학문하도록 권면하였으며, 80까지 장수하였다. 임여재 류규가 문집을 讎校하였고, 손자 李玄祚가 서문을 청하므로 쓴다고 하였다. 舂邨이 누구인지는 이
    출처 : 유교넷
  • 326061

    炊沙李公遺集序 28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炊沙 李汝馪(1556~1631)의 문집 서문이다. 젊어서부터 자질이 영민하고, 문장이 渾浩해서 1591년(선조24) 진사에 합격하였다. 1600년(선조 33) 增廣試 문과에 급제하고, 昏朝에 李爾瞻 등의 죄를 논하고, 仁穆大妃 폐위의 부당성을 상소하고 7일 동안 대궐
    출처 : 유교넷
  • 326062

    八友軒趙公遺集序 30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八友軒 趙普陽(1709~1788)의 문집 서문이다. 고산 이유장을 사숙하였고, 난졸재 이산두, 청대 권상일에게 수학하였다. 형제 5인이 일시에 문명을 떨쳐 5명 모두 소과에 급제하였고 한 명이 대과에 급제하였는데, 대과에 급제한 인물이 팔우헌 조보양이다. 명리에 담담
    출처 : 유교넷
  • 326063

    臥隱張公遺卷序 32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臥隱 張緯恒(1678~1747)의 문집 서문이다. 장위항은 고산 이유장의 문인으로 명리를 멀리하였으며, 뜻을 굽혀 벼슬을 구하지 아니하였다. 증손 省矩가 유고를 수집하여 3권으로 만들고, 고손 宗鎭의 부탁으로 서문을 작성하였다. 字는 天應이며, 本貫은 仁同이고, 榮州
    출처 : 유교넷
  • 326064

    藤巖權公逸稿序 33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藤巖 權徵(1426~1467)의 문집 서문이다. 이시애의 난 때 평사로 절도사 허종의 막하에서 종군하다가 전사하였다. 약관의 나이 때 理氣論을 논한 것이 있는데 주자와 퇴계의 이론과 동일하였다. 공의 후손이 영남에 거주하면서 번성하고 賢者와 顯者가 무수히 나왔다. 후
    출처 : 유교넷
  • 326065

    龜巖權公遺事後叙 35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龜巖 權用衡(1659~1738)의 문집 발문이다. 소학을 좋아하였으며, 평소의 行身이 소학의 규범에 벗어나는 것이 없었다. 상제에 정성을 다하여 영남과 호남의 인사들이 모두 권효자라고 칭하였다. 눌은 이광정이 행장을 찬했고, 임금에까지 명성이 알려져 징소되었으나 취임
    출처 : 유교넷
  • 326066

    德山宋氏尋源後叙 37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덕산 송씨는 국초부터 번성한 집안으로 덕산을 본관으로 한 것은 매우 오래되었다. 朝散公 부자와 사인공 형제를 비롯하여 한 때 문헌이 매우 번성한 가문이었으나 병화로 인하여 가승이 불타고 자손이 遊落하여 상고할 것이 없었다. 1737년(영조 13) 同樞公 德輔가 집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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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26067

    贈崔汝信序 40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1804년(순조 4) 장단에 귀양갔을 때 마을의 주민 몇 명에게 자를 지어주고 준 글이다. 이인행이 자를 지어준 인물은 金特世, 盧碩祚, 金養源, 姜翼周, 崔潤翰으로 최여신은 최윤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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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26068

    伊山書院講學所謄錄序 42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서원에 강학소를 세우는 것은 옛 제도는 아니나 날로 유풍이 쇠퇴하여 별도의 건물을 세운 것이라고 하였다. 1808년(순조 8) 동주를 맡아 노선생의 四時 居齋하는 제도를 복구하려 절약하고 여러 유사의 도움을 받아 利殖하여 7년째인 1815년(순조 15) 배여길의 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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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26069

    思復齋權先生遺卷後叙 44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思復齋 權定(1353~1411)의 문집 발문이다. 權定은 고려말의 명현으로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세워지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그리하여 그가 살던 마을의 이름이 棄仕里가 되었다. 그러나 세월이 오래되어 기록이 민멸되었으나 다행히 376년 뒤 비석 3조각을 찾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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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26070

    拱北軒重修記 1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공북헌은 桃村 李秀亨의 구택이다. 나이 21세에 벼슬을 버리고 내려와 1455년(단종 3) 이 집을 지었다. 북쪽으로 벽을 틔우고 창문을 설치하였으니 북쪽으로 바라보고자 함이었다. 창설재 권두경이 그 세태를 논하면서 그 뜻을 슬퍼하여 이 벽은 천장의 높은 氣節이라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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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26071

    影江亭重修記 2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가정 연간에 직장 權公이 사환하다가 을사사화 당시 陰이 성하고 陽이 소멸하는 때를 만나 분연히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지은 것이 龍潭齋이다. 정침 동쪽에 강이 흘러 강에 임하여 누정을 세우고 影江이라고 이름하였으니 학사 김응조가 지은 읍지에 실려 있다. 공의 6대조
    출처 : 유교넷
  • 326072

    願豊菴記 4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강주의 동쪽에 촌이 있어 두암리라고 하니, 만취당 김개국의 유지이다. 그 후손들이 둘레에 거주하여 질박한 풍속이 있었다. 金德秀가 와서 선인의 弊廬가 촌의 뒷 골짜기에 있는데 선군자께서 실을 지어 이름을 願豊이라고 하였으나 불행히 돌아가셔서 중간에 무너졌다. 근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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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26073

    因樹亭記 6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강주 북쪽 40리 정도의 위치에 감곡리가 있는데 마을의 동쪽에 정자가 있으니 炊沙 이선생의 幽棲이다. 공은 공북헌의 주손으로 목릉 말년에 문학으로 이름났다. 공이 거처하는 곳에 청사가 없어 여름에 책을 가지고 나무그늘에서 읽었다. 공의 둘째아들 처사공이 나뭇가지로 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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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26074

    鶴坡書堂記 7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근래 趙奎應이 학문에 뜻을 두고 士友들 사이에 명망이 있었으나 벽지에 살아 드러나지 못함을 한하였다. 이에 石堡에 집을 짓고 숨어 살았다. 1824년(순조 24) 나에게 찾아와 자신이 지은 剡溪書堂記를 보여주면서 鶴坡에 건물을 짓고 촌의 수재들을 모아 연찬하고자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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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26075

    豊樂軒記 9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두암리의 서쪽에 집을 짓고 豐樂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는 산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누구의 정자인지는 알 수 없다.
    출처 : 유교넷
  • 326076

    日省齋記 10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이인행 자신이 鹿野에 정자를 짓고 쓴 글이다. 日省은 󰡔논어󰡕에서 따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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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26077

    鳳棲樓記 12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순흥의 봉서루의 기문이다. 鳳의 뜻을 풀고 봉서루의 유래를 설명하였다. 수령 韓喆裕가 부임한 이듬해 읍인들이 요청하여 무너진 봉서루를 다시 세우고자 하였다. 당시 刺史(관찰사) 이공이 듣고 봉급을 아껴 기부하고 사람들이 각각 米布를 내어 중건하니 모두 15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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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26078

    訥翁精志交孚契帖識 13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訥翁 宋碩忠(1454~1524)이 쓴 계첩에 쓴 지문이다. 당시 계에 참여하였던 인물은 文敬公 김굉필, 눌옹 송석충, 錦南 최부, 靈川 박공, 嵩陽 신공 등 5인이었다. 학사 김응조의 叙가 있고, 宋弘洙의 부탁으로 지문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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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26079

    筆墨稧帖小識 14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조모 박씨가 아버지의 형제들이 학문에 전념할 수 있도록 田 수십 畝를 사서 필묵계라 이름 붙이고 형제들이 유지를 준수하도록 하였다. 신해년 농장이 침수되어 겨우 10여 두의 소출밖에 없었다. 후에 종질 순부가 와서 필묵계는 사실 존재하지 않고 이름 또한 민멸되니 4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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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26080

    敬書靜菴趙先生手稿後 15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정암 조광조의 시 2수가 실린 시고 필첩을 보고 적은 것이다. 이 시는 교리 장공에게 준 것인데 기묘사화로 인하여 용납되지 못하였음을 말하였다. 교리공의 후손인 張中矩이 필첩으로 만들었고 장중구의 아들 張宗鎭의 부탁으로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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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26081

    敬書退陶先生手筆千字文帖後 16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퇴계가 손자인 몽재 이안도에게 써준 것으로 대대로 물려받은 것이다. 그러나 중간에 잃어 버렸다가 李野淳이 江右의 한 선비 집에서 발견하여 手簡 여러 첩과 바꾸어 가져온 것이다. 이병운이 개장하고 豆谷의 黃龍漢이 그 전말을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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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26082

    書三溪書院新刊近思錄後 17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삼계서원에서 󰡔근사록󰡕을 새로 인간할 때 쓴 후지이다. 충재 權橃이 소장하던 것을 바탕으로 1734년(영조 10) 영조가 보고 本孫에게 내려주었고, 정조 병인년(병진년의 잘못으로 보인다. 병진년이면 1796년이고 병인년은 순조 6년이다) 근신을 시켜 고적을 찾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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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26083

    書屛谷權公歷代沿革圖後 18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屛谷 權榘(1672~1749)의 고금역대연혁지도를 보고 쓴 후지이다. 黃靑黑으로 華夷를 구별하여 중국은 황제부터 역대 왕조를 거쳐 명까지 기록하였고, 우리나라는 단군에서 신라 고려를 거쳐 조선까지 기록하였으며, 北胡는 獯鬻부터 후금까지 서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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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26084

    南谷權公遺集跋 19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南谷 權尙吉(1610∼1674)의 문집 발문이다. 척화론을 편 것이 삼학사와 비견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하였다. 권상길은 1635년(인조 13) 增廣試 2등으로 생원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유학하였으며,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화의를 주장하는 崔鳴吉 등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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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26085

    沙川徐公遺稿跋 21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沙川 徐某의 문집 발문이다. 아들 徐弘胤의 부탁을 받고 쓴 것이다. 沙川의 호를 가진 인물은 徐昌鏡(1726~1799)이다. 서창경은 영주 사천출신으로 이상정의 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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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26086

    書金孝子家狀後 22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영주출신의 金爀이 그 부친의 孝行要撰을 가지고 와서 글을 청하므로 써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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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26087

    書丁美庸贈言後 23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정약용이 쓴 필첩에 후지를 붙인 것이다. 정약용과 이인행은 같이 서학 및 채제공 일파로 몰려 유배되었다. 정약용과 주고받은 편지도 문집에 실려 있으며, 필첩을 받은 것으로 보아 상당한 친분을 유지하였던 것 같다. 유배되어서도 학문에 힘썼음을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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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26088

    書自警編後 24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주역󰡕의 妬‧夬 두 괘에 대하여 언급하고 자경편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자경편은 송대의 명신들의 언행을 모은 것으로 趙善繚가 지은 것이다. 일세의 귀감이 될 수 있는 것으로 특히 왕씨의 법을 어지럽히는 것에 대하여 경계하였다. 뒤에 朴和叔이 增刪하여 의해를 내놓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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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26089

    書金伯雍金剛遊錄後 26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金熙紹의 󰡔金剛遊錄󰡕에 쓴 발문이다. 금강산은 자신이 한 번 꼭 가보고 싶은 곳이었으나 임술년 유배가면서 관동의 여러 명승들을 살펴볼 수 있었다고 하고, 이제 병으로 인하여 집에 있는 상황에서 김희소가 60세의 나이로 석 달 동안 금강산을 구경하고 遊錄 한 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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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26090

    鄭生所藏易經匣書朱子詩因識後 27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易經匣에 적혀 있는 주자의 讀書詩에 대한 감상을 적은 것이다. 長潭에 있으면서 鄭喆鎭 소장 경서를 빌려 읽고 돌려 주면서 작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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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26091

    書姜季鷹所謄近思錄後 28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姜翼周가 필사한 󰡔근사록󰡕의 뒤에 쓴 글이다. 강익주가 󰡔근사록󰡕을 필사하고 2책으로 만들어 글을 청하므로 적어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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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26092

    自警箴 29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篤敬忠信할 것을 다짐하고 몸가짐을 예에 맞도록 하겠다고 다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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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26093

    持志箴 29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立志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그 뜻을 계속 지속시킬 것을 다짐하였으며 居敬에 힘쓰리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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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26094

    小學六箴 30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소학󰡕의 편명에 따라 서술하고 아이들에게 보여준 것이다. 立敎, 明倫, 敬身, 稽古, 嘉言, 善行 6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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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26095

    硯銘 33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위원에서 벼루를 구해서 아들인 淵浩와 조카 道浩에게 각각 하나씩 주고 각각의 성품과 재질에 따라 권면하는 바를 달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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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26096

    硯匣銘 34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장연에서 오동나무를 구하여 匣을 만들고 명을 적어 그 연혁을 밝혔다.
    출처 : 유교넷
  • 326097

    金大以(在讓)字詞 34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김재양의 자를 大以로 한 뜻은 君子儒가 되라는 뜻이라고 하였다.
    출처 : 유교넷
  • 326098

    徐元直(在愚)字詞 35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서재우의 자를 元直으로 짓고 이름과 자의 뜻을 풀었다.
    출처 : 유교넷
  • 326099

    道溪書院景節祠重建上樑文 36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도계서원의 사우인 경절사를 중건하고 지은 상량문이다. 도계서원은 도촌 李秀亨을 배향한 서원이다. 이수형은 단종조의 유신으로 생육신에 비견할 만한 인물이었다고 하고, 炊沙 李汝馪도 광해군 대 인목대비 유폐사건이 일어났을 때 죽기를 무릅쓰고 항거하였다고 하였다. 도계서원
    출처 : 유교넷
  • 326100

    鳳溪里社上樑文 38 / 기록자료>고도서 / 이인행
    봉계이사를 지을 때의 상량문이다. 배향된 인물의 충의를 말하였고, 봉계의 경치가 중요한 인물을 배향할 만한 곳이라고 하였다. 배향한 인물은 安村 裵應褧(1544~l602)이다.
    출처 : 유교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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