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從先祖無名齋先生家狀 1 / 기록자료>고도서 / 강엄從先祖 無名齋 康伯珍(1449~1504)의 가장이다. 자는 子韞, 호는 無名齋, 시호는 文簡, 본관은 信川이다. 고려 문하시중 康之淵이 靖社功臣으로 信川을 식읍으로 받았기 때문에 본관으로 삼은 것이다. 金宗直(1431~1492)의 문하생으로 1472년(성종 3)에 생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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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祖克齋府君家狀 5 / 기록자료>고도서 / 강엄선조 克齋 康景善(1514~1565)의 가장이다. 자는 元卿, 호는 克齋, 본관은 信川이다. 眞樂堂 金就成(1492~1551)과 龍巖 朴雲(1493~ 1562)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537년(중종 32)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당시 선비들과 무오사화에 화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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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祖一竹府君家狀 8 / 기록자료>고도서 / 강엄선조 一竹 康在山(1573~1636)의 가장이다. 자는 山叟, 호는 一竹, 본관은 信川이다. 장성한 후 星山으로 寒江 鄭逑를 찾아가 수학하였으며, 張顯光‧李潤雨‧李彦英 등과 도의교를 맺고 학문에 힘썼다. 蔭職으로 監役에 임명되고, 곧이어 黃山察訪이 되었다. 그 후 獒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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祖考松潭府君家狀 11 / 기록자료>고도서 / 강엄祖父 松潭 康錫大의 가장이다. 자는 天賚, 본관은 信川이다. 젊어서 성현의 의리문자를 공부하는 한편 가문을 떨치려고 과거 공부에 매진하였다. 그러나 향시에 몇 번 합격하고 회시에는 실패하며, 중년 이후로는 과거 공부를 하지 않고 오직 독서하고 몸을 단속하며 집안을 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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內舅權信天翁行狀 14 / 기록자료>고도서 / 강엄외숙 權思潤(1732~1803)의 행장이다. 본관은 安東, 자는 德以, 호는 信天齋이다. 李象靖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효행과 學德으로 監司의 추천을 받아 돈령부참봉‧공릉참봉‧후릉참봉‧동몽교관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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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室孺人金氏行記 18 / 기록자료>고도서 / 강엄죽은 부인 孺人 善山金氏(1760~1781)의 행록이다. 행실이 단정하고 정숙하였으며, 부녀자의 도리를 잘 익혔다. 21세에 저자에게 시집온 후 시부모를 정성을 다해 모셨고, 분가한 후로도 제삿날과 생일날 그리고 노비들의 이름까지도 기억하였다. 그러나 병이 들어 23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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家狀 20 / 기록자료>고도서 / 강엄아들 康敏淳이 쓴 저자의 가장이다. 자세한 내용은 글 앞의 저자 소개에 나와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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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狀 24 / 기록자료>고도서 / 강엄柳疇睦(1813~1872)이 쓴 저자의 행장이다. 내용은 가장과 비슷하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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墓碣銘 33 / 기록자료>고도서 / 강엄李相奭이 쓴 저자의 묘갈명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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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수재집 / 기록자료>고도서 / 권택모만수재집(晩修齋集) 晩修齋 權宅模의 문집. 石版本, 序: 金道和(1908), 跋: 金㙽‧權廷燮(1936), 4卷 2冊: 四周雙邊, 半郭 19.2×15.6㎝, 有界, 10行 18字, 註雙行, 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 30.7×20.3㎝. 序는 1908년에 金道和가 쓰고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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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 기록자료>고도서 / 권택모次道南書院講會韻三首, 鳴鳳菴次趙丈子希(承洙)韻, 偶題, 送趙明逸(居南), 輓宋敬一(相天), 古文, 謹次山泉齋韻贈趙稺夢(述周), 周王菴訪古蹟僧語多誕遂題院壁, 椵峴丹楓, 玉溪(盧玉溪有道心說卞穌齋未發之論),玉蓮菴,有西都簫客過我一龠昌關山月和贈雲一段一章.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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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損齋南先生 4 / 기록자료>고도서 / 권택모스승인 損齋 南漢朝(1744∼1809)에게 보낸 편지로, 먼저 朱子書 중 이해할 수 없는 두세 조목을 질문하고, 大學或問에 관한 의문을 別紙에 기록하여 보낸다고 말미에 언급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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別紙 5 / 기록자료>고도서 / 권택모大學或問에 언급된 개념이나 註에 나오는 諸說에 대해서 저자가 질문을 하고, 그에 대해 남한조가 답하는 형식으로 되었는데, 모두 15조목에 이른다. 知와 智를 설명한 胡雲峰과 沈氏의 설은 합당치 않고, 表章은 ‘表而出之 章而明之’의 뜻이고, 具衆理와 應萬事를 體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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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損齋先生 15 / 기록자료>고도서 / 권택모물음에 답변을 주어 고맙다는 인사말과 함께 大山集을 읽으면서 ‘望洋之嘆’을 실감하게 되었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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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損齋先生朱書節要問目(答條附,1802) 16 / 기록자료>고도서 / 권택모18조목에 걸쳐 朱子書節要의 내용에 대해 주고받은 문답이다. 서문의 ‘稡’자를 ‘졸’로 읽거나 ‘최’로 읽거나 그 의미는 모두 ‘모인다’는 뜻이기 때문에 독음을 굳이 따질 필요가 없고, 張欽夫에게 답한 편지의 ‘親見’이란 내 몸에서 직접 본다는 의미이다는 식으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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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舊堂趙丈(沐洙,1779) 23 / 기록자료>고도서 / 권택모스승인 豊壤人 舊堂 趙沐洙(1736~1807)에게 보낸 답장으로, 자신의 立志가 견고하지 못해서 제대로 수양이 이루어지지 못함을 탄식하였다. 조목수의 字는 士威로, 尙州에 거처했으며, 趙天經(1695~1776)의 문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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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南丈子皥(漢皜) 23 / 기록자료>고도서 / 권택모誠齋 南漢皜(1760~1821)가 大學 ‘正心’章의 四有所에 대해 논변을 벌이자, 저자가 자신의 견해를 밝혀 논변을 중지하고 近思錄에 언급된 程伊川의 不遷怒說을 자세하게 음미하기를 권고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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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南丈子皥(1802) 25 / 기록자료>고도서 / 권택모앞서 보냈던 편지에 대해 답장이 없는 이유를 물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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別紙 25 / 기록자료>고도서 / 권택모焦火凝冰說에 대한 논변을 듣고서 사실 여부를 물은 뒤에, 朱子와 黃榦(1152~1221)의 설을 증거로 하여 반박하면서 의견을 구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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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南丈子皥(1812) 26 / 기록자료>고도서 / 권택모先師의 유고를 정리할 때 참석하지 못한 죄스러움을 말한 뒤에 자신의 집에 보관하고 있던 원고를 보낸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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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柳內叔修林翁(景祚,1796) 26 / 기록자료>고도서 / 권택모修林 柳景祚에게 보낸 편지로, 拙齋 柳元之(1598~1674)의 문집인 拙齋先生文集을 빌려 달라고 청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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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趙丈子希別紙 27 / 기록자료>고도서 / 권택모梅隱 趙承洙(1760∼1830)가 通書의 太極과 陰陽의 動靜에 대해 논변한 것에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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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趙丈子希 30 / 기록자료>고도서 / 권택모太極圖說과 太極圖說後論에서 말한 내용을 서로 다른 두 가지의 것으로 파악하려는 견해에 반대하는 글이다. 즉 圖說에서 말한 造化와 品彙는 後論에서 말한 그것과 같은 맥락이라는 것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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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宋敬一 1 / 기록자료>고도서 / 권택모勿齋 宋相天에게 보낸 편지로, 기력이 쇠하여 맹렬한 공부를 하지 못함을 탄식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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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宋敬一 1 / 기록자료>고도서 / 권택모학업에 열중해야 할 시기를 헛되이 보내는 자신의 상황을 질책한 뒤에 보내온 글에서 의문 나는 사항이 있어 다시 질의를 하여 답변을 부탁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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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宋敬一別紙 2 / 기록자료>고도서 / 권택모‘마음은 강자 속에 두어야 한다[心要在腔子裡]’는 말과 內外賓主辨에 대해 송상천이 의문을 제기한 부분을 제시하고, 이에 저자가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 글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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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宋敬一別紙 7 / 기록자료>고도서 / 권택모太極圖說註解의 流行과 一定의 개념에 대해서 黃某‧南漢皜‧趙承洙 등이 내세우는 서로 다른 설을 요약한 뒤, 저자는 大傳 제5장의 뜻과 같은 것으로 보아야 하는바 繼之善은 流行이고 成之性은 一定이라는 설을 제기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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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宋敬一別紙 8 / 기록자료>고도서 / 권택모大學의 明明德於天下에서 明德과 新民의 體用은 心의 體用과 다르다는 입장을 제기하였고, ‘사물의 이치의 극처가 이르지 않음이 없다[物理極處無不到]’와 ‘心不在’에 대해서도 논변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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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權汝濬(應哲)家禮疑目別紙 10 / 기록자료>고도서 / 권택모‘易服’條에서 袵을 어느 帶에 끼우는지, 銀丁을 여덟 개 사용하는 문제, 成服할 때 門內外의 사람들의 위치, 諸侯의 다섯 번의 우제[五虞]와 天子의 일곱 번의 우제[七虞]의 문제,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妻를 위해서 喪杖을 짚고 禫祭를 지내는 문제, 支子가 스스로 주인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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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金景安(宅壽) 12 / 기록자료>고도서 / 권택모자신의 안부를 간단히 언급한 편지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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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金汝見(龍在,1827) 13 / 기록자료>고도서 / 권택모과거시험에 합격하기 위한 글공부는 儒家에서 힘쓸 부분이 아니므로 경계해야 한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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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朴稺承(箕寧,1823) 13 / 기록자료>고도서 / 권택모荷叟 朴箕寧(1779~1857)에게 보낸 편지로, 집안에 冠禮가 있으니 主賓으로 참석해 달라고 부탁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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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金壻(商雨) 13 / 기록자료>고도서 / 권택모筆法을 익히고 있는 둘째 사위에게 보낸 편지로, ‘나는 글자를 쓸 적에 아주 정성스레 쓰는데, 이는 글자의 아름다움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것이 학문이기 때문이다’는 程子의 말을 명심하라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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兒子婚書 14 / 기록자료>고도서 / 권택모아들의 혼례를 거행할 때, 納徵의 예를 행하면서 보낸 婚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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易學啓蒙疑義 14 / 기록자료>고도서 / 권택모易學에 대한 저자의 관심을 알 수 있는 글로, 五音司日에 대해 李滉의 啓蒙傳疑에서 기재된 것외의 법식에 대해 기록하고, 伏羲六十四卦圖註의 내용을 해석하였으며, 伏羲河圖畫卦圖와 蓍策數‧大衍數에 대해 논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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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庸首章圖 17 / 기록자료>고도서 / 권택모中庸 首章에 子思가 말하고자 하는 심오한 의미가 담겨 있다고 보고 이를 圖式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뒤에 저자의 설명을 곁들여 첨부하였다. 그는 설명문 말미에서 仁은 心之道, 敬은 心之貞이라 하고, 이는 徹上徹下의 도리요 聖學의 근본이므로 이를 분명히 밝히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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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首章圖 20 / 기록자료>고도서 / 권택모역시 위와 같은 방법으로 圖式을 먼저 제시하고 뒤에 설명문을 곁들였는데, 大學의 요지를 설명한 주자의 언급을 빌려 정리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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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補亡章間字論義 21 / 기록자료>고도서 / 권택모대학 補亡章의 ‘間嘗竊取程子之意 以補之曰’이라는 구절에서 ‘間’자의 의미에 대해 논한 것이다. 어떤 이가 여기에서의 ‘間’은 대학 序文에 나오는 ‘間亦竊附己意’의 ‘間’과 같이 聖經賢傳之間의 의미라고 주장하자, 저자는 諺解에서 ‘間’을 ‘근간에’라고 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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延平李氏求中說記疑 1 / 기록자료>고도서 / 권택모朱子의 스승인 延平 李侗(1093~1163)의 求中說에 대해 의문을 기록한 글이다. 주자가 呂氏의 求中說과 楊氏의 體中說을 취하지 않고 李延平의 ‘體認未發氣像 求所謂中’의 설만 취했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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讀朱書節要箚疑 3 / 기록자료>고도서 / 권택모이 글은 권1의 「上損齋先生朱書節要問目」과 같은 내용의 箚錄이지만 스승에게 답변을 받지 못하여 의문만 기록하였을 뿐이다. 제7편 「答劉德修」의 玄中之趣의 의미, 제8편 「答何叔京書」 ‘示諭溫習’條의 ‘某近來尤覺昬憒~終能有所濟否’의 내용을 李滉이 채록한 이유 등 朱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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緇布冠 14 / 기록자료>고도서 / 권택모冠禮에 始加冠으로 사용하는 치포관에 대하여 禮記의 「玉藻」와 「郊特牲」에서 관례를 치른 뒤에 치포관을 폐기해도 좋다고 말한 사례를 서술한 뒤에 자신의 按說을 붙여 의문을 제기하였지만, 명확한 답안은 내리지 못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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程冠 15 / 기록자료>고도서 / 권택모程伊川이 썼던 程冠의 형태는 道士의 仙桃巾과 같다고 하는데, 그 제도는 지금 사용하는 程子冠의 제도와는 다르다. 그런데 沙溪 金長生(1548~1632)은 이를 始加冠으로 정했으니 그 제도는 어떠하며 또 선도건은 어떤 것인지 의문을 제기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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勒帛 15 / 기록자료>고도서 / 권택모勒帛에 대해서 古禮가 없어진 상황에서 그 제도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정강이를 묶어 무릎에 이른다는 설명이나 비단으로 배[腹]를 싼다는 설명은 알 수가 없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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朞三百布算圖 17 / 기록자료>고도서 / 권택모書經 「堯典」의 ‘朞三百有六旬六日’이란 문구에서 나오는 것으로, 朞年 즉 1년 동안의 천체 운행을 圖式으로 정리한 것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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述活齋處士之義作圖 18 / 기록자료>고도서 / 권택모活齋 李榘(1613∼1654)가 1년을 12개월로 나누어 12개의 도식으로 나누었던 것을 저자가 하나로 합쳐서 열람의 편의를 도모한 천체 운행의 도식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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觀葛庵集記疑 20 / 기록자료>고도서 / 권택모李玄逸(1627∼1704)의 葛菴集(권19 「愁州管窺錄」)에서 渾天儀가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은 것에 대해 설명한 말에 의문을 기록한 것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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深衣集說序(1808) 21 / 기록자료>고도서 / 권택모深衣는 天子와 諸侯로부터 公卿大夫士庶人에 이르기까지 모두 입었던 고대의 法服으로서, 그 명칭은 深衣, 長衣, 麻衣, 中衣 네 가지가 있지만 그 제도는 차이가 없다. 이를 家禮에서 圖式으로 표현하기는 했지만 주자의 만년 정론과 다른 점이 많아서 논의가 끊이지 않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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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損齋先生文(1810) 23 / 기록자료>고도서 / 권택모스승인 損齋 南漢朝를 위한 제문으로, 문하에 나아가 배울 적에 深淺과 精粗에 따라 알맞게 가르침을 주었던 일을 되짚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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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舊堂趙公文 24 / 기록자료>고도서 / 권택모스승인 舊堂 趙沐洙를 위한 제문으로, 가학을 바탕으로 학문을 연마하여 영남 인사들의 모범이 되었음을 추앙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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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三從大父龍菴公(聖鳳)文 25 / 기록자료>고도서 / 권택모大山 李象靖(1711∼1781)의 문인인 龍菴 權聖鳳을 위한 제문이다.출처 : 유교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