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桐山精舍記 14 / 기록자료>고도서 / 권우준桐山精舍를 건립하고 전말을 기록한 글이다. 동산정사는 1829년(순조 29)에 건립하여 陶谷 權鈞(1435~1502)과 龜巖 權用衡(1659~1738)을 향사한 곳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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棣禊遺事後小記 15 / 기록자료>고도서 / 권우준형제 및 자제들과 계를 맺고 기록을 남긴 것이다. 禊는 원래 물가에 나가 묵은 때를 씻어서 깨끗하게 하고, 높은 곳에 올라 재앙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지만 지금 계를 맺은 것은 행동을 삼가고 예의염치를 지켜서 스스로 깨끗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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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華堂記 16 / 기록자료>고도서 / 권우준六華堂을 건립한 전말을 기록한 것이다. 형제간의 우애를 노래한 棠棣詩의 뜻을 빌어 여섯 형제가 함께 즐긴다는 의미로 六華堂이라고 당 이름을 붙였으며, 늘 빛나는 날이 이어지고 빛나는 세상이 되기를 기원하며, 후세에도 이어지기를 바란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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棄仕里齋菴記 16 / 기록자료>고도서 / 권우준棄仕里는 저자의 15대조 權定(호 思復齋)이 은거한 곳이다. 권정은 고려에서 대사간을 지냈으며, 고려가 망한 뒤 조선에서 여러 번 벼슬을 주어 불렀으나 끝내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安東의 玉山에 은거하였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이 그 마을을 ‘棄仕里’라고 하였다. 근래에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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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息墳菴記 18 / 기록자료>고도서 / 권우준水息峴은 저자의 14대조 權曜의 묘소가 있는 곳이다. 근래에 묘소를 수호하기 위해 墳菴을 짓고 그 전말을 기록한 것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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晩開軒記 19 / 기록자료>고도서 / 권우준1824년(순조 24)에 만개헌을 짓고 전말을 기록한 것이다. 晩開라고 이름 붙인 이유는 늦게 내 마음을 열고, 내 눈이 열리고, 내 얼굴을 열고, 내 후손을 열어 주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내 마음이 열리면 어두워지는 것을 면할 수 있고, 내 눈이 열리면 광명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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養士所事記 20 / 기록자료>고도서 / 권우준형제 10여 명이 자손들을 교육시킬 곳을 마련하여 養士所라 하고, 그 전말을 기록한 것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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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塘濬治記 20 / 기록자료>고도서 / 권우준1829년(순조 29)에 前塘의 제방을 확장하고 浚渫하고, 그 남쪽에 토지를 구입하여 50그루의 소나무를 심었는데 부형의 뜻을 이은 것이라고 하였다. 바람이 불어 맑은 소리가 나고 물이 흘러 맑은 그림자가 생기면 느끼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 전말을 기록하고, 주자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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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均生員全公同谷記 20 / 기록자료>고도서 / 권우준同谷은 성균관 생원 全敬熙의 자호인데 ‘동곡’이라고 자호하게 된 경위를 적은 것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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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二代祖考宣敎郞陶谷公家狀 22 / 기록자료>고도서 / 권우준저자의 12대 조인 陶谷 權鈞(1435~1502)의 가장이다. 權鈞은 本貫이 安東, 號는 陶谷, 奉化에 거주하였다. 영남 사림으로 金宗直과 함께 출사하여 宣敎郎에 이르렀으나, 연산군의 학정을 간하다가 주효치 못하자 강주(剛州, 現 영주 이산면 지동)에 은둔하여 후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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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代祖考副護軍府君遺事 23 / 기록자료>고도서 / 권우준저자의 6대조 權尙中(1624~1707)의 유사이다. 권상중은 본관이 安東, 자는 仲景이다. 壽職으로 호군이 되었다. 대대로 영주의 池洞里에 살다가 봉화 선돌[立石]의 桐幕으로 이주하여, 선돌 입향조가 되었다.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부모의 상에 6년동안 시묘살이를 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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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祖考贈司僕正府君甲稧帖後跋 24 / 기록자료>고도서 / 권우준고조부 權以璠(1678~1751)은 호가 東巖이다. 고조부 갑계첩의 발문으로 왕희지의 蘭亭稧는 술 마시는 즐거움에 불과하지만, 조부의 계는 뜻을 같이하고 길흉을 서로 물으며 세의를 닦는 세 가지 절목이 있고, 풍속을 돈독히 하고 分誼를 두텁게 하는 의미가 있으니, 난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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曾祖考贈左承旨府君遺墨粧帖後小誌 24 / 기록자료>고도서 / 권우준증조부 權命申(1706~?)은 호가 仙巖이고 贈左承旨이다. 증조부의 유묵 七帖이 종조부이 대상자 속에 들어 있는 것을 찾아내어 따로 粧帖하게 된 전말을 기록한 것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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祖考所山府君家狀後小誌 25 / 기록자료>고도서 / 권우준조부 權師周(1730~1804)의 행적은 중형이 쓴 가장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고 하였다. 조부께서 돌아가실 때 유언하신 것을 생각하고 감회가 일어서 이것을 기록한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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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考處士府君家狀 26 / 기록자료>고도서 / 권우준1851년(철종 2)에 쓴 선친의 가장이다. 부군 若會(17525~1822)는 자가 先民이고 호는 立菴이다. 1752년(영조 28)에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명석하여 향시에서 明經으로 이름을 날렸으나 東堂試에는 실패하였다. 이후 오직 학문에만 힘쓰고 과거에 응시하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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魚水堂銘 29 / 기록자료>고도서 / 권우준君臣이 서로 만나는 것을 梧桐‧鳳凰‧風雲‧龍虎에 비유하는데, 당이름을 魚水로 한 것도 또한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을 현군과 현신이 만난 것에 비유한 것이라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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集春門銘 29 / 기록자료>고도서 / 권우준春塘의 동문을 집춘문이라고 한 의미를 기록한 것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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耆會錄跋 30 / 기록자료>고도서 / 권우준老會錄의 발문이다. 1867년(고종 4)에 院中에 耆會를 열고 사람을 보내 초청하기에 참석하고, 기회록을 읽고 감회가 있어서 발문을 적는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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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海金氏族譜紀事 30 / 기록자료>고도서 / 권우준1825년(순조 25)에 쓴 것으로 김해김씨가 족보를 만들게 된 전말을 기록한 것으로 김씨를 대신해 쓴 것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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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權參判晶山翁(載大)文 1 / 기록자료>고도서 / 권우준權載大(1778~1859)의 제사에 올린 글이다. 권재대는 本貫이 安東, 字는 汝車, 號는 晶山, 奉化 酉谷에 거주하였다. 1795년(정조 19) 참봉이 되고, 선전관을 거쳐서 1851년(철종 2) 工曹參判에 올랐다. 두 번이나 장헌세자의 추숭을 상소했다가 호남에 유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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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李應敎丈(家淳)文 1 / 기록자료>고도서 / 권우준李家淳(1768~1844)의 제사에 올린 글이다. 이가순은 본관 眞城, 자는 學源, 호는 霞溪이다. 1789년(정조 13)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813년(순조 13) 문과에 급제하여 지평‧정언‧수찬‧응교 등을 역임하였다. 경연에 입시하여 소학을 강의하고 왕대비로부터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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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金承旨悔軒公(建銖)文 2 / 기록자료>고도서 / 권우준承旨 金建銖(1790~1854)의 제사에 올린 글이다. 김건수는 본관이 義城, 자는 公立, 호는 晩悔이며, 奉化에 거주하였다. 순조 때 생원시에 합격하고, 1830년(순조 30) 문과에 급제하여 군수‧부사‧승지 등을 지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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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權疎軒公(載綸)文 2 / 기록자료>고도서 / 권우준權載綸(1785~1844)의 제사에 올린 글이다. 권재륜은 본관이 安東, 자는 聖能, 호는 疎軒이다. 奉化 酉谷에 거주하였다. 학문이 넓고 정결하여 유림의 추앙을 받았다. 저서로는 疎軒集이 전한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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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洪丈(德容)文 3 / 기록자료>고도서 / 권우준洪德容의 제사에 올린 글이다. 세월이 지나 묘소에 풀이 우거졌지만 사모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다고 하면서 슬픈 마음을 진술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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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安査兄(錫宇)文 4 / 기록자료>고도서 / 권우준아들을 대신해서 지은 것으로 安錫宇의 제사에 올린 글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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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守眞翁權翁(命夏)文 4 / 기록자료>고도서 / 권우준權命夏(1792~1856)의 제사에 올린 글이다. 권명하는 본관이 安東, 자는 叔欽, 호는 氷皐이다. 奉化 酉谷에 거주하였으며, 遺稿가 전한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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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權禮安公(宅夏)文 6 / 기록자료>고도서 / 권우준禮安縣監을 역임한 權宅夏(1799~1861)의 제사에 올린 글이다. 권택하는 본관이 安東, 자는 周輔, 호는 修齋이다. 奉化 酉谷에 거주하였으며, 1840년(헌종 6) 生員試에 합격하고, 蔭職으로 禮安縣監을 역임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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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金典籍(瑞)査兄文 6 / 기록자료>고도서 / 권우준典籍 金瑞의 제사에 올린 글이다. 사돈간의 정의 뿐만 아니라 가르침을 받은 감회까지 서술하면서 애도를 표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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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金座首(世奎)丈文 7 / 기록자료>고도서 / 권우준座首 金世奎의 제사에 올린 글로 백형을 대신하여 지었다. 겉치레에 힘쓰는 세상에서 덕망을 갖추었으며 가문의 유풍을 간직했던 풍모를 회상하며 애도를 표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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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李院長(元淳)文 7 / 기록자료>고도서 / 권우준李元淳의 제사에 올린 글이다. 아우를 대신하여 지은 것이다. 세도가 무너진 것을 탄식하고 유풍의 진작에 힘썼던 고인을 기리며 그리움을 표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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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金公(斗煥)文 8 / 기록자료>고도서 / 권우준남을 대신하여 지은 것으로 金斗煥의 제사에 올린 글이다. 이웃에 거주하면서 아들의 스승이었던 고인을 회상하며 애도를 표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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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砂禮族叔(若度)文 8 / 기록자료>고도서 / 권우준族叔 權若度의 제사에 올린 글이다. 고을에서 善人이며 豪傑之士로 칭송받았던 사자의 제사에 애도를 표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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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全進士(敬熙)丈文 9 / 기록자료>고도서 / 권우준進士 全敬熙의 제사에 올린 글로 伯兄을 대신하여 지은 것이다. 몇 대를 거쳐 이웃에 거주하면서 조석으로 왕래하고 기쁜 일과 슬픈 일을 함께 하였던 死者를 애도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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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從叔父松鶴公文 10 / 기록자료>고도서 / 권우준從叔父 松鶴公의 제사에 올린 글이다. 문중의 스승이었고 가문의 모범이었으며, 저자 자신이 어려서부터 가르침을 주었던 고인을 애도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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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代門中作) 11 / 기록자료>고도서 / 권우준從叔父 松鶴公의 제사에 올린 것으로 문중을 대신하여 지은 것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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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伯兄八窩公文 12 / 기록자료>고도서 / 권우준백형 權道準의 장사 때 올린 제문이다. 권도준은 본관이 安東, 자는 公直, 호는 八窩, 봉화에 거주하였다. 타고난 자질이 어질고 몸가짐은 검소하고 마음은 민첩하였다는 것으로 공의 평생을 개괄하고 형제의 정의를 서술하면서 애도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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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仲兄都正苞齋公文 13 / 기록자료>고도서 / 권우준중형 權達準(1782~?)의 장례 때 지은 제문이다. 권달준은 본관이 安東, 자는 公立, 호는 苞齋, 봉화에 거주하였다. 1816년(순조 16)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지평‧장령‧봉화현감‧태안군수‧통례원좌통례‧종부시정‧돈녕부도정 등을 역임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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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從叔父同樞公文 15 / 기록자료>고도서 / 권우준從叔父 同知中樞府事公의 장례 때 지은 제문이다. 집안에 연이어 흉화를 당한 것에 대해 기술하고 어릴 때부터 가르침을 주었던 사자를 애도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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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四季上庠公發文 15 / 기록자료>고도서 / 권우준넷째 아우 權起準(1792~1834)의 장례 때 지은 제문이다. 권기준은 본관이 安東, 자는 公發, 호는 巽巖, 奉化에 거주하였다. 1819년(순조 19) 生員試에 합격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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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三從叔(若敎)文 17 / 기록자료>고도서 / 권우준삼종숙 權若敎의 제사에 올린 글이다. 삼종숙이지만 친숙부처럼 친밀하게 지냈으며, 어릴 때부터 가르침을 많이 주었던 일 등을 서술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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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從叔父(文錫)文 18 / 기록자료>고도서 / 권우준從叔父 權文錫의 제사에 올린 글이다. 叔行이 열 하나였는데 차례로 세상을 떠나버려서 의지할 곳이 없게 되었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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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再從弟持憲(敎準)文 18 / 기록자료>고도서 / 권우준재종제 權敎準(1803~1864)의 제사에 올린 글이다. 권교준은 본관이 安東, 자는 達可, 봉화에 거주하였다. 헌종조 문과에 급제하여, 지평‧장령 등을 역임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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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三從叔(若需)文 19 / 기록자료>고도서 / 권우준삼종숙 權若需의 제사에 올린 글이다. 친척의 情誼 뿐만 아니라 이웃에 거처 하면서 늘 왕래하였던 것을 서술하며 그리운 마음을 서술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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哭泰和姪 19 / 기록자료>고도서 / 권우준조카 權泰和(1817~1857)를 애도하는 글이다. 권태화는 본관이 安東, 자는 叔通, 호는 文南이다. 뛰어난 문장으로 문중을 이끌 사람으로 추앙받던 조카의 죽음을 슬퍼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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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再從兄(載準)文 20 / 기록자료>고도서 / 권우준재종형 權載準의 제사에 올린 글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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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再從兄三苟公(戴準)文 21 / 기록자료>고도서 / 권우준再從兄 權戴準의 제사에 올린 글이다. 함께 공부하고 함께 과거에 응시하였으며, 비가 오거나 꽃이 피면 함께 구경하고 즐거워하였던 형과의 정의를 서술하면서 애도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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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族叔(若昊)文 21 / 기록자료>고도서 / 권우준족숙 權若昊의 제사에 올린 글이다. 젊어서 과거 공부를 하여 세 번 사마시에 합격하였지만 마침내 산림으로 돌아와 학문에 전념하였고, 선배들의 문집을 교감하여 간행하는 등 향촌 교화에 노력하였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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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全(震一)文 22 / 기록자료>고도서 / 권우준全震一의 제사에 올린 글이다. 선현의 유업을 잇고, 한 고을의 문장을 이끌었다고 하였다. 반평생 해온 과거 공부를 버리고 고을의 선비를 가르치고 가정의 여러 손자들을 훈육하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았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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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亡妹葛川金孺人文 22 / 기록자료>고도서 / 권우준누이의 제사에 올린 글이다. 성품은 유순하였지만 분발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행실은 신실할 뿐만 아니라 치우침이 없었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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願納時呈文 23 / 기록자료>고도서 / 권우준願納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 경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각계각층에 자진 납부하게 한 돈을 말하는데, 이 때 一門의 單子를 올린 것이다.출처 : 유교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