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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族弟啓宇(周大) 40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족제 朴周大(1836∼1912)에게 준 편지로, 啓宇는 그의 자다. 집안소식과 일간에 希夷墳庵에 가서 수일 간 머무르면서 몇 권의 책을 探討하고 싶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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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族弟啓宇 41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족제 박주대에게 준 편지이다. 독감에 걸려 힘든 형편인데도 상소를 초하는 일에 가담하게 되었다. 衣章의 存廢는 우리 동방 문물의 大關이며, 모든 영남인들에게 관계되는 것으로 결코 가볍지 않다. 그래서 저자는 동국의 역대고사를 인용하여 소장의 초안을 잡았다. 그러나 족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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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族孫士延(益相) 41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족손 朴益相에게 준 편지로, 士延은 그의 자다. 저자는 守黙齋 朴成敏(1603∼1666)의 遺文 가운데 한두 군데 헤아려 볼 만한 곳을 지적해 주었으며, 그리고 행장은 이전에 비해 상세하지만 宗中에 널리 의견을 물어 壽傳의 계획을 도모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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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仲弟穆卿 41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둘째 아우 朴周雲에게 준 편지로, 穆卿은 그의 자다. 沃逋吏의 일은 상사에게 달려 있어 우리들이 관여할 바가 아니라는 사실과 관직에 임명되어 家計가 조금 나아질지는 모르지만 우리 집안의 ‘淸素’의 명분을 실추하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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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仲弟穆卿 42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둘째 아우 박주운에게 준 편지이다. 일전에 棲碧 李대감이 방문했을 때 가난 때문에 점심을 잘 대접하지 못한 점과 文丹의 자형이 急疾로 일어나지 못한 소식을 전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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寄兒奉鎭鼎鎭 42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장남 朴奉鎭과 차남 朴鼎鎭에게 부친 편지이다. 아들에게 부지런히 독서할 것과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 있게 노력하여 孝順의 자식이 될 것을 경계하였다. 그러면서 독서할 때는 字는 그 訓을 구하고 句는 그 뜻을 구하여, 한 자라도 간과하거나 한 구라도 走馬看山식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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寄兒華鎭 43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三男 朴華鎭에게 부친 편지이다. 여름공부[夏課]에서 10여 수의 시밖에 짓지 못한 것을 책망한 동시에, 그러나 이보다 중요한 것은 어른을 섬기고 친구와 사귐에서 항상 겸손하고 공손하게 행동하는 것이라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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寄孫兒一洙 43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손자 朴一洙에게 부친 편지이다. 자신이 처한 신세를 한탄하면서, 時文에도 유념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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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則陽生後論(附橫圓二圖) 1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八則陽生’에 대한 후론이다. 주역坤傳의 ‘八則陽生’의 뜻에 대해서는 선배들이 논의한 문자가 많지만, 각각 異同이 있어 쉽게 궁구하지 못하는 난점이 있다. 그래서 象數의 은미하고 오묘한 뜻은 저자 자신도 쉽게 논의할 수 없는 문제지만, 근자에 이학수가 이 논제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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鳶飛魚躍同勿忘勿助 9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중용의 “鳶飛戾天 魚躍于淵”의 자연현상과 맹자의 “勿忘勿助”의 내용이 동일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음을 변설한 것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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鄕黨卒章 10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논어 「鄕黨」편 卒章에 대한 변설이다. 주자는 이 문장의 상하에 闕文이 있다고 하였는데, 저자는 ‘色斯擧矣’ 위에 ‘子曰’ 두 글자가 빠진 것이 아닌가 하였다. 또한 ‘山梁雌雉’ 한 구절을 이 章의 제일 앞에 옮겨 놓으면 말의 뜻이 더욱 분명하다는 陳氏의 설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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宰我問井有人章 11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논어 「雍也」편의 ‘仁者는 비록 우물에 사람이 빠졌다고 말해 주더라도 따라서 우물에 들어가겠습니다.’라는 재아의 물음에 공자가 ‘어찌 그렇게 하겠는가? 군자는 우물까지 가게 할 수는 있으나 빠지게 할 수는 없으며, 이치에 있는 말로 속일 수는 있으나 터무니없는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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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書集註聘君辨 12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사서집주에 나오는 ‘聘君’에 대한 변론이다. ‘빙군’은 주자가 사서집주에서 白水劉氏의 설을 기록하면서 ‘劉聘君’이라고 한 것이 처음인데, 이때 ‘빙군’은 군주에게 부름을 받은 칭호이다. 유공이 일찍이 포의지사로 군주의 부름을 받고 대궐에 나아갔기 때문에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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景慕宮典禮私議 12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莊祖(思悼世子)의 追崇에 관해 올린 글이다. 「請景慕宮典禮疏」는 사림을 대표하여 지은 것이고, 이 글은 개인의 입장에서 지었지만 내용은 거의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사도세자 추숭문제는 정조 당시부터 정치적 현안 문제였으며, 정치적 열세를 면치 못하던 영남 남인에게는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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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譜密直公官銜誤錄辨 26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新譜에 기록된 저자의 17대조고 官銜의 오류를 변별한 글이다. 17대조고는 고려시대 密直副使를 역임하였는데, 新譜에는 잘못하여 그냥 부사로 기록하였다. 그래서 밀직부사와 부사의 관명을 고려와 조선의 예를 들어 그 잘못을 지적하였으며, 이후 족보를 편찬할 시에는 舊譜를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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父母喪小祥後上食哭 27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親喪에 小祥 이후 上食 때 곡을 하는지의 여부에 대해 설명한 글이다. 저자는 우리나라 학자와 조정에서 행해진 예설에 근거하여 부모의 초상이 났을 때 소상 이후 상식에 곡을 하는 것이 인정과 의리에 부합하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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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或人問 28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각종 의절에 대한 물음에 답한 글이다. 부모의 體魄이 훼손되었을 때 改葬의 예에 의해 三月의 시마복을 입는다는 물음에 저자는 선릉·정릉이 훼손되었을 때의 예를 들어 白衣白笠으로 석달복을 입고 백관들은 黑笠素帶로 그 月數를 마친다고 하였다. 또 이 경우에 있어서도 黑笠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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俗節茶禮上墓尊爵立式 29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正朝‧七夕‧重九‧冬至의 속절에 上墓 때 奠爵하는 定式에 대해 논한 글이다. 속절의 薦은 고례에는 없었으나 주자가 특히 이 의식을 허여한 이후로 사대부가에서 실행하고 있다. 그러나 근래에는 각 집안의 事力에 따라 행하지 않은 경우도 있으니, 문중에서 收議하여 省簡을 참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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追遠齋門約 31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추원재 門約으로 모두 19조목인데, 必篤孝友, 必誠祭祀, 必修敦睦, 必去驕奢, 必速遷改, 必忍憤怒, 必重名節, 必擇交遊, 必勸耕讀, 必敎子孫, 勿陷酒色, 勿近賭博, 勿取非義, 勿犯祭土, 勿侵丘木, 勿干鄕事, 勿緩公賦, 勿言時政, 勿揚人過 등으로 되어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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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令 32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早起夜寐‧勤讀趲做‧出入步趨‧謹言語‧勿戱謔‧愼交道‧用夏楚 등 7조목으로 되어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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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政策 33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三政의 폐단에 관해 올린 글이다. 1862(철종 13)년에 삼정의 폐단이 노골화 되었다. 임금은 조정의 신하들뿐만 아니라 재야에 있는 유생들에까지 삼정의 구제책을 製進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때 저자는 일만여 자에 달하는 懋實八條, 즉 「삼정책」을 올리게 된다. 저자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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隨得漫筆 1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60여 편의 짤막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용에 등장하는 사람은 우리나라의 인물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중국 인물도 포함되어 있다. 한 개인의 신변잡사에서부터 인조반정과 병자호란 등 국가적 변혁기에 있어서의 출처관, 그리고 학문과 예에 관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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勉學類鑑序 1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저자가 저술한 勉學類鑑에 대한 서문이다. 경전과 사기 및 제자서 등에서 학문과 관련이 깊고 실용에 절실한 내용을 8권 4책 24조목으로 발췌, 분류한 전말을 기록하고 있다. 성현의 격언과 가르침을 모았기에 모두 誠正齊治의 요체라고 평가된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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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國通志凡例總序 1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조선의 선비들이 중국의 역사에 대해서는 눈앞에서 본 것처럼 환하게 이야기하면서, 정작 우리나라의 역사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 자각하여 東國通志를 만들게 된 배경을 설명하였다. 동국통지는 漢書를 모방하여 十志를 만들고, 거기다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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鄕約集說序 4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향약의 始原과 우리나라 향약의 보급에 대해 언급한 뒤, 저자는 주자의 본문에 의거하여 제현들이 보충한 주석과 경전과 제자서, 사서의 기록 및 우리나라의 향약이 실행된 고사를 인용하여 일반 서민들까지 모두 쉽게 볼 수 있도록 향약집설을 지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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磨厓先生權公實紀序 5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후손의 부탁을 받아 磨厓 權輗(1495∼1549)의 實記에 붙인 서문이다. 기묘년에 神武門의 화가 일어나 조광조 일파에 대해 탄압을 가하려 하자, 군자소인에 대해 변론한 권예의 기상 등을 기술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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嘉嶽齋李公實紀序 7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임진왜란 와중에 양친을 온전히 봉양하는 한편, 黃嶺 佛舍에서 義擧하여 충과 효 두 측면에서 사람들의 귀감이 되는 嘉嶽齋 李軸(1565∼1647)의 실기에 대한 서문이다. 후손 李周燮의 요청으로 지은 것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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深衣集說序 9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晩修齋 權宅模(1774∼1829)가 深衣에 대한 제현들의 설을 모아서 1책으로 묶고, 각 학자들의 深衣의 양식을 그림으로 그려 심의집설을 만들었다. 심의집설의 편제는 예기본문을 앞에 두고 가례의절을 이어서 기록한 뒤, 중국 제현들의 주소를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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派譜序 10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1847년(헌종 13) 咸陽朴氏世譜를 續刊하였는데, 이후 영남의 同派들이 모여 전례에 따라 7책의 派譜를 만들었다. 이는 파보를 만든 경위와 내용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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德進書堂續禊序 11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이 글은 덕진서당의 창건에서 다시 繼述하기까지의 전말을 기록한 서문이다. 덕진서당은 1567년(명종 22)경에 南嶽 金復一(1541∼1591)이 창건했지만 이후 훼철되어 복원되지 못하였다. 그때 서원을 창립한 문자가 本孫에 간직되어 있었다. 南野 朴孫慶(1713∼17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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尊敬堂學禊序 13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尊敬堂은 함양박씨 종친의 家塾으로, 종친들이 모임을 갖거나 종친의 자제들을 모아놓고 강학을 하거나 예절을 익히는 장소로 쓰였다. 이 건물은 1833년(순조 33)에 허물어졌다가 1855년(철종 6)에 복구가 되었고, 이에 尊敬堂學禊를 만들었다. 종친의 뜻으로 저자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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宗禊序 14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종법의 중요성과 宗禊를 만든 이유를 설명한 글이다. 저자의 선조인 吏郞府君이 金谷으로 옮겨온 이후, 嘉靖 연간(1522)에 종택을 세워 대대로 전해오다가 불행하게 宗嗣가 가운데서 끊어지고 종택도 지키지 못하였다. 그래서 여러 후손들이 1855년(철종 6)에 宗子를 세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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謙菴玉淵兩亭同遊錄序 16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1868년(고종 5) 4월 갑신일에 貞簡公 柳相祚(1763∼1838)의 諡牒이 내려졌다. 다음 날 70여 인과 함께 평소 학문을 닦고 기거한 謙菴亭과 玉淵亭에 올라 예를 거행하고 유람한 일에 대해 기록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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族叔味山翁重牢宴詩帖序 17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족숙인 味山 朴得寧(1808∼1886)이 78세인 1885년(고종 22) 10월에 일가친척이 모인 가운데 회혼연을 올리고, 당시의 축시들을 모은 시첩에 쓴 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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旌忠錄序 18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忠毅公 嚴興道(1404∼1474)에 대한 列聖의 褒典과 제현들의 논술 등을 모아 1책으로 만든 것이 정충록이다. 1867년(고종 4) 후손 嚴啓胄·嚴性浩·嚴性矩·嚴啓衡 등의 요청으로 지은 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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醴泉鄕校明倫堂重修記 20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예천향교 명륜당을 중수한 것에 대한 기록이다. 예천향교가 위치를 바꾸고 增修를 했지만 향교를 통한 교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惠山 李晩綏(1823∼1886)가 예천에 부임한 2년 동안 고을 선비들을 이끌고 명륜당에서 강회를 하고 예를 행하였다. 그리고 선비들과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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肯構堂記 21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金商學의 부탁으로 긍구당의 전말에 대해 기록한 것이다. 竹日齋 金光燁(1561∼1610)은 홍문관, 사헌부, 사간원에서 이름을 드날리다가 광해군 난정에 예천군 殷山의 愚谷으로 옮겨 살았다. 김광엽이 세상을 떠난 뒤 겸암 류운룡(1539∼1601)·息庵 黃暹(1544∼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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左湖草廬記 23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左湖草廬의 전말에 대한 기록이다. 좌호초려는 稚運 李彙暻의 집으로 낙동강 북쪽 宜仁里 동쪽에 자리 잡고 있다. 이휘경이 저자에게 보낸 편지에 “나는 左海의 나라에 태어나서 領左의 고을에서 성장하였고, 살고 있는 곳이 또한 「도산잡영」 가운데 ‘左翠屛’의 밑이다……내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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權孝婦旌閭閣記 25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권효부의 효성에 관한 전말을 기록한 것이다. 1867년(고종 4) 경상도 암행어사 朴瑄壽(1823∼1899)가 예천 권효부의 효성은 하늘을 감동시켰으니 장려하여 풍속을 권면토록 해야 한다고 장계를 올리자, 1870년(고종 7) 조정에서 정려의 명이 내려졌다. 당시 예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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孝烈婦崔氏旌閭碑陰記 26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최씨 정려에 대한 기록이다. 예천 서쪽 德達里에 사헌부감찰 月城 李章瑞의 처 崔氏㫌閭碑가 있다. 이장서 역시 효자로 이름이 났으나 27세에 요절하였다. 최씨는 중풍으로 사지를 움직이지 못하는 시아버지를 정성껏 봉양하였다. 그 뒤 시아버지의 장례를 치르자마자 최씨 역시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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麒麟驛石鍾窟記 37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1859년(철종 10)경에 기린역 북쪽 석종굴을 유람하고 느낀 감회를 적은 것이다. 기린역과 석종굴의 유래와 전설을 기록하고, 이 같은 승경은 국중의 보덕굴·성류굴 등과 이름을 나란히 할 수 있으며, 나아가 중국의 會稽의 穴과 彭蠡의 鍾에 비견된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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甁山金先生遺集跋 29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甁山 金鸞祥(1507∼1570)의 유집에 쓴 발문이다. 그는 퇴계와 막역한 사이였으며, 을사사화 때 회재 이언적·충재 권벌·소재 노수진·미암 류희춘 등과 함께 화를 입었다. 선조 때 재상 동고 이준경과 고봉 기대승의 천거를 통해 조정에 다시 나아갔다. 저자는 이 글에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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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求堂先生金公遺集跋 30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5대손 金光一의 청에 의해 不求堂 金迬(1606∼1681)의 유집에 대해 쓴 발문이다. 그는 어려서 문학에 자질이 뛰어났고, 문강공 장현광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특히 저자는 이 발문에서 병자호란 때 척화신으로 활약했던 金迬의 절의충절은 동계 정온·청음 김상헌과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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龍浦李公文集跋 31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龍浦 李濰(1669∼1742)의 문집에 쓴 발문이다. 이유는 懶隱 李東標(1644∼1700)를 사사했으며, 또한 갈암 이현일·고산 이유장·하당 권두인에게 執贄하기도 했다. 그의 학문은 청대 권상일과 눌은 이광정 등에게 인정을 받았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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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河先生林公遺集跋 33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西河 林椿의 유집에 쓴 발문이다. 임춘은 고려 중기 혼란한 시대에 태어나 정중부의 난 때 화를 당해 포의지사로 세상을 마쳤다. 그러나 임춘의 문집은 사후 500여년이 지난 뒤 청도 운문사의 銅塔에서 나왔다. 그 뒤 1773년(영조 49)에 문집이 간행되었는데 간행 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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抄啓文臣金公(熙洛)故寔後叙 34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초계문신 金熙洛(1761∼1803)이 정조의 명에 의해 편집한 故寔 뒤에 쓴 글이다. 편차는 국조보감과 경국대전에 기재된 것을 취해 앞부분에 싣고, 편말에는 김희락의 시문를 비롯한 여러 작품을 첨부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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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勿箴 34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오언으로 된 ‘百勿’에 대한 箴이다. 저자는 ‘백물’은 인사에 절실한 것이니 한 가지라도 능하지 않으면 부끄러워하여 부디 노력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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深和堂銘 35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深和堂에 대한 銘이다. 저자는 어버이를 섬길 때는 온화한 낯빛으로 부모의 마음을 즐겁게 해 드려야 함을 강조하면서, ‘깊이 온화한 기운을 사랑한다[深愛和氣]’는 뜻을 취해 당의 이름을 ‘深和’라고 하고, 「심화당명」을 지어 자신의 경계로 삼았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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思政殿重建上樑文(仲君知製敎時代作) 1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사정전을 중건할 때의 상량문으로, 사정전은 왕이 평소에 거처하며 政事를 보던 곳이다. 이곳을 중수하였으니 하‧은‧주 삼대의 至治가 이루어지고, 덕으로 가르쳐 풍속이 행해질 것이라고 말하였다. 또한 여러 왕들이 聖學을 이어오고, 列朝의 정령이 오르내리는 곳이니 영원히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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醴泉鄕校齋所重建上樑文 3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예천향교 재소 중건 상량문이다. 예천은 이름난 고장이며 예천향교는 태학의 제도를 갖추어 儒風을 받든 곳이다. 그러나 多士들이 경영하지 않은 지 오래되어 고을의 수치가 되었는데 이곳 옛터에 새롭게 건물을 일으켰으니 다시 風敎가 이루어지길 바란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