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快賓樓重修上樑文 5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예천의 快賓樓를 중수할 때 지은 상량문이다. 군수 兪建煥이 鄕儒들과 함께 쇠락한 쾌빈루를 법식을 갖추어 중수하고, 백년토록 俯仰流覽하는 곳이 되길 바란다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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屛山書院重修上樑文 8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문충공 서애 류성룡을 배향한 병산서원의 중수 상량문으로, 조정을 경영하고 지방을 향도한 공훈이 있는 선생을 모신 곳이니 국학의 표본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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魯峯書院廟宇上樑文 10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竹林 權山海(1403∼1456)를 제향한 노봉서원의 묘우 상량문으로, 집현전 학사였던 권산해는 단종 복위 운동 때 죽음을 당한 사육신이다. 묘우가 완성되었으니 예를 다해 제향하고 丹心을 기리자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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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堂洞齋舍重建上樑文 12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명당동 재사 중건 상량문이다. 저자의 선조 朴紹宗과 朴訥(1448∼1528)은 인덕을 쌓아 가문을 열었고, 박눌의 다섯 아들들은 나란히 과거에 올라 가문의 영화를 더했다. 청암 자락에 이 선조들을 모시는 재실을 갖추었으니 후손들은 독실하게 집안을 숭상하고, 더욱 창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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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烈婦丁氏傳(附鄭氏傳) 14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정씨 부인은 부친 丁泰燮과 모친 안동권씨 사이에서 1846년(헌종 12)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어버이의 병환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간호하였고, 항상 女書를 읽으며 옛 열부들의 의리를 익혔다. 스무 살에 金鎭海에게 시집가서 아녀자의 도리로써 시부모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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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祖考贈通訓大夫通禮院左通禮行奉列大夫蔚珍縣令兼勸農團練判官官山萬戶府君墓所改封告由文 17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선조고 관산만호 朴漢通의 묘소를 改封할 때 올린 고유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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從先祖病栢堂先生墓所立石告由文(代本孫作) 18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종선조 病栢堂 朴蕓(1535∼1606)의 묘소에 입석할 때 올린 고유문이다. 본손을 대신하여 지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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瀼西先生李公(光胤)墓所安石告由文(代本孫作) 19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瀼西 李光胤(1564∼1637)의 묘소에 안석할 때 올린 고유문이다. 본손을 대신하여 지었다. 자는 克休, 본관은 경주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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柱峯李公(崍)墓所立石告由文(代本孫作) 19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柱峯 李崍(1588∼1649)의 묘소에 입석할 때 올린 고유문으로 본손을 대신하여 지었다. 자는 彦瞻, 본관은 진보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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族曾祖南野先生墓所立石告由文(代本孫作) 20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족증조 南野 朴孫慶(1713∼1782)의 묘소에 입석할 때 올린 고유문으로 본손을 대신하여 지었다. 자는 孝有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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司諫權公(迪)墓所安石告由文(代本孫作) 20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鳩谷 權迪(1626∼1679)의 묘소에 안석할 때 올린 고유문으로 본손을 대신하여 지었다. 자는 啓卿, 본관은 안동이며, 학사 김응조의 문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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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愍壇秋享祝文 21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義愍壇 추향 때 올린 축문이다. 의민단은 저자가 문중(함양박씨)의 묘역에 설치한 祭壇으로, 함양박씨들 중에 후손이 끊어져 제사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한데 모아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만든 것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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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谷主山禳厲文 21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예천 금곡 주산에서 厲祭를 지낼 때 올린 글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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賜祭刑曺判書李羲發文(代知製敎作) 22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형조판서 雲谷 李羲發(1768∼1849)에게 賜祭할 때 지은 글이다. 이희발의 초명은 英發, 자는 又文, 본관은 영천이다. 鄭東弼의 문인이며, 문과급제 후 대사간‧승지‧형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이 글은 지제교를 대신하여 지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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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雲谷李公文 22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운곡 이희발을 추모하는 제문이다. 특히 영해부사 시절에는 백성의 교화에 힘을 쏟았고, 병조참판으로 국방을 튼튼히 하고 언로를 개방하여 민초들의 소리를 상달하였으며, 기로소에 들어가서는 국정쇄신의 상소를 올렸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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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古溪李公文 23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古溪 李彙寧(1788∼1861)을 추모하는 제문이다. 자는 君睦, 본관은 진성이다. 퇴계 이황의 10대 종손으로 퇴계의 학풍을 계승, 성리학에 전심하였다. 1816년(순조 16) 진사가 된 후 밀양·동래 부사를 역임했고, 1853년(철종 4) 동부승지, 1861년(철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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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柳高城公(喆祚)文(代家庭作) 24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疎軒 柳喆祚(1771∼1842)를 추모하는 제문으로, 가정을 대신하여 지었다. 자는 重吉, 본관은 풍산이다. 사마시에 합격하고 고성군수를 지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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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霞溪李公(家淳)文 25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霞溪 李家淳(1768∼1844)을 추모하는 제문이다. 자는 學源, 본관은 진성이다. 이황의 후손으로, 사간원정언·홍문관수찬·사헌부장령 등을 역임하였으며, 時弊를 구제하는 데 노력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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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族父梅翁公(台寧)文 26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족부 梅翁 朴台寧을 추모하는 제문이다. 특히 淸高篤守한 삶을 지향한 박태녕의 인품과 아우 朴箕寧(1779∼1857)과의 우애를 담아내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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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金承旨(龍洛)文 27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승지 金龍洛(1795∼1864)을 추모하는 제문이다. 자는 汝雲, 호는 春皐, 본관은 의성이다. 학봉 김성일의 11세손이며, 1819년(순조 19) 문과급제 후 정언·교리 등 청환직을 거쳐 병조참의와 부승지을 지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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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洛坡柳相公(厚祚)文(代屛山士林作) 28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洛坡 柳厚祚(1798∼1876)를 추모하는 제문이다. 자는 載可, 본관은 풍산이다. 서애 류성룡의 8대손이며, 江皐 柳尋春(1763∼1834)의 아들이다. 1858년(철종 9) 문과에 급제한 후, 이조참판·공조판서를 지냈으며, 1866년(고종 3) 우의정에 이르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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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箕疇鄭公文 29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箕疇 鄭民秉(1800∼1882)을 추모하는 제문이다. 자는 文好, 본관은 晉陽이다. 우복 정경세의 후손이며, 谷口園 鄭象觀(1776∼1820)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제자백가서에도 정통하였다.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이 내렸을 때 반대하였고,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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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族父荷叟先生文 30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족부 荷叟 朴箕寧(1779∼1857)을 추모하는 제문이다. 자는 穉承이다. 저자는 이 글에서 박기녕의 부모에 대한 효성과 형제간의 우애, 그리고 청고한 삶을 특기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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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雲山李公文 32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雲山 李彙載(1797∼1875)를 추모하는 제문이다. 자는 德輿, 본관은 진성이다. 퇴계의 후손인 李林淳의 아들이다. 1827년(순조 27) 문과에 급제한 후 사헌부감찰·청풍부사·호조참의·한성부우윤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경산현령 때 文會齋를 창건하여 문풍을 진작시켰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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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上舍金丈(輝鍾)文 33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上舍 金輝鍾을 추모하는 제문이다. 그의 학문은 상고의 經史典墳에서부터 선진 및 한당송, 그리고 명유들의 학문에 이르기까지 상고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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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李參議(益文)文(代家庭作) 34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參議 李益文을 추모하는 제문이다. 본관은 전주이고, 아버지는 李秉誠이다. 1816년(순조 16) 문과에 급제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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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外舅金公(載熙)文 35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外舅 金載熙를 추모하는 제문이다. 불운한 가정사와 그런 가운데 자신에게 주어진 본분을 다하는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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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外舅金公(樂愚)文 36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外舅 金樂愚을 추모하는 제문이다. 김낙우의 守己와 효우에 초점을 맞추어 기술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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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林丈(熙運)文 37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林熙運을 추모하는 제문이다. 69년 동안 林泉에서 忠厚誠實한 삶을 살다 간 것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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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金丈(輝宅)文 38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金輝宅을 추모하는 제문이다. 그의 학문과 속세를 떠나 松雲에 누워 圖書를 접하며 살고자하는 심사를 그려내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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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姨叔權公(筞)文 39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姨叔 權筞를 추모하는 제문이다. 일찍부터 가학을 통해 학문과 문장을 전수받았지만, 결국 고향으로 돌아와 자연과 벗하며 사는 삶을 택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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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外從大父柳公(祚)文 39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외종 대부 柳祚를 추모하는 제문이다. 서애 류성룡과 졸재 류원지의 가학을 이어받고, 일찍이 벼슬길을 사양하고 世事를 뜬구름처럼 여겼다. 그래서 초야에서 孝悌敦厚하고 忠信하는 것을 삶의 지향으로 삼았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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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柳穉能(道弘)文 40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穉能 柳道弘을 추모하는 제문이다. 순박하고 검소한 그의 삶을 기술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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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李聖淵(秉魯)文 41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聖淵 李秉魯를 추모하는 제문이다. 守己가 확고하여 심중에 鐵剛이 있는 듯, 어려움을 만나더라도 평온하게 대처하는 삶을 조명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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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族兄(周綱)文 42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족형 朴周綱을 추모하는 제문이다. 유가경전을 비롯하여 제자백가 및 복술, 패설에까지 두루 능통하였으며, 임종 직전에 繼先의 도리를 강조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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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柳仲車(致任)文 1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柳致任(1805~1876)을 추모하는 제문이다. 류치임의 자는 仲車, 호는 起軒, 본관은 全州이며, 定齋 柳致明의 제자이다. 평소에 도량이 넓고 志行이 올발라서 모든 이들이 본보기로 삼을 정도였는데, 이제 几筵을 철거한 뒤에는 風儀가 날로 멀어지게 되지 않을까 안타까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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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姨叔李公(升運)文 2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姨叔(이모부) 李升運을 추모하는 제문이다. 젖먹이 나이에 아버지를 여읜 뒤에 홀어머니를 모시면서 뜻을 받들고 몸을 봉양하는 등 자식으로서의 본분을 지극하게 행했던 일을 떠올리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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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表叔柳公(進瑗)文 3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表叔(외숙) 柳進瑗을 추모하는 제문이다. 祥祭를 지낼 때 지은 것으로, 이제는 인편이 있어도 편지를 보낼 수가 없고 의논할 일이 있어도 아뢸 곳이 없게 되었다고 탄식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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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柳謙叟(光睦)文 4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柳光睦(1813∼1846)을 추모하는 제문이다. 류광목의 자는 謙叟, 호는 蓉洲, 본관은 豐山이며, 1843년(헌종 9) 문과에 급제, 홍문관교리‧성균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묘갈명은 遊軒 張錫龍(1823~1907)이 지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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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族兄晩圃翁文 4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族兄인 晩圃翁 朴周鏞의 祥祭 전날 저녁에 아뢴 제문이다. 근래에 南野 朴孫慶(1713∼1782)의 문집과 朱書講錄刊補箚疑를 교정하여 대강 두서를 갖추기는 했지만, 일포옹이 사망하였기 때문에 상세한 부분을 상의드릴 수 없다고 안타까워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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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族叔(秉寧)文 5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族叔 朴秉寧(字 文彦)을 추모하는 제문이다. 종족 간에 화목하고 孝友가 뛰어났다고 칭송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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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族兄(周勳)文 6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族兄 朴周勳을 추모하는 제문이다. 심지가 확고부동했으며, 질박하고 어눌하게 처신하였다고 평가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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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族兄(周燮)文 7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族兄 朴周燮을 추모하는 제문이다. 支子로서 宗家의 일을 충실하게 도와준 것을 회상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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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族兄(周源)文 8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族兄 朴周源을 추모하는 제문이다. 저자와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아서 어려서부터 함께 공부하고 장성해서는 교분이 두터웠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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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金叔精(鸞奎)文 9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저자의 姊兄인 金鸞奎(字 叔精)를 추모하는 제문이다. 누나를 잃은 뒤로 公에게 의지하면서 백 리를 멀다고 여기지 않고 출입하였는데, 사망 후 祥祭를 당하니 슬픈 마음을 가눌 수 없다고 탄식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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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蔡聖夏(鏞禹)文 10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저자의 매부인 蔡鏞禹(字 聖夏)를 추모하는 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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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金輅彦(商鎭)文 11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金商鎭을 추모하는 제문이다. 소나무 숲속에 집을 지어두고 시렁에는 책을 가득 채우고서 시속의 시끄러움을 멀리한 채 담박한 생활을 했던 일을 회상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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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宋正叔文 12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松皐 宋程欽(1839∼1883)을 추모하는 제문이다. 송정흠의 자는 敬叔, 호는 松皐, 본관은 冶城이다. 孝悌의 실천에 힘을 쏟았으며, 문예에도 뛰어났다고 칭송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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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權輔卿(羲相)文 13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權羲相을 추모하는 제문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스스로 학문에 힘써서, 유가 경전의 깊은 뜻까지 철저하게 연구하였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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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權君性天(太永)文 13 / 기록자료>고도서 / 박주종表姪(아내의 형제의 자식)인 權太永을 추모하는 제문이다. 관례를 치르고서 혼인한 뒤에 어진 아내를 얻어 살다가 3세의 어린 자식을 두고 요절한 것을 슬퍼하였다.출처 : 유교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