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트맵

통합검색

멀티필터

기본_발신자_성별
더보기 +
기본_발신자_수신자와의_관계
더보기 +
기본_수신자_발신자와의_관계
더보기 +
/ 통합검색 / 전체
: 전체: 에 대해 총641,751건의 자료가 검색되었습니다.
  • 349101

    剡溪 安東權公(壽元) 墓碣銘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예천문화원
    <HXMLPIC ID="001"></HXMLPIC> 섬계 안동권공(수원) 묘갈명 小白山이 서쪽으로 우뚝솟아 兜率峯이 되었고, 또다시 西南으로 굴러내려와서 鳴鳳山이 되었으며, 또다시 서쪽으로 떨어져 왼쪽을 돌면서 龜洛峴이 되었는데 艮坐原을 베고서 剡溪權公의 墓所가 있다
    출처 : 유교넷
  • 349102

    醴泉의 金石文 凡例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예천문화원
    예천(醴泉)의 금석문(金石文) 범례(凡例) ▣취지(趣旨) 전통문화가 송두리째 무너져 내리는 첨단 정보화시대에 살고 있으면서 현대인에게 서먹하게 여겨지는 한문으로 이루어진 전통적 정신 유산인 금석문을 현대감각에 맞게 재조명하여 문화 예천의 자부심을 살리고자 금석문 편
    출처 : 유교넷
  • 349103

    正庵 安東權公(經夏) 墓碣銘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예천문화원
    <HXMLPIC ID="001"></HXMLPIC> 정암 안동권공(경하) 묘갈명 公의 휘는 經夏요, 字는 濟享이니, 權氏는 高麗太師였던 휘 幸이 그 시조이시고, 本朝에 들어와서 휘 靷께서는 禮儀判書였으며, 後에 휘 檥가 계셨는데 義興縣監이고, 號는 野翁인 冲齋와 霽村
    출처 : 유교넷
  • 349104

    不求堂 義城金公(迬) 墓碣銘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예천문화원
    <HXMLPIC ID="001"></HXMLPIC> 불구당 의성김공(왕) 묘갈명 옛날 우리 족증조인 부윤 지헌공은 지론이 강직하고 곧으며 영수(領袖)로 당료(黨僚)들과 함께 어울렸는데, 고 불구당 김공은 나의 조부인 치정공께서 매번 공의 관후함을 칭찬하였고, 장자(長
    출처 : 유교넷
  • 349105

    孝子 也溪 都先生(始復) 旌閭碑銘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예천문화원
    <HXMLPIC ID="001"></HXMLPIC> 효자 야계 도선생(시복) 정려비명 옛 사람은 특이한 행실로 지극한 효행에 있으면 반드시 이를 드러내어 나라에서 상을 주고 그로써 백성을 교육하는 모범을 세워 인간의 기강을 장려했는데 근래를 돌아보건대 이 법이 시행되
    출처 : 유교넷
  • 349106

    郡守 密城朴公(致溫) 墓碣銘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예천문화원
    <HXMLPIC ID="001"></HXMLPIC> 군수 밀성박공(치온) 묘갈명 공의 휘는 치온이요 성은 박씨라 신라 시조 혁거세의 후이다. 세대를 지나 밀성대군 휘 언침이 비로소 밀양으로 본관을 하고 고려때 이르러 휘 언부는 밀성부원군이 되었고, 육세에 휘 영균은
    출처 : 유교넷
  • 349107

    縣監 密城朴公(由元) 墓碣銘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예천문화원
    <HXMLPIC ID="001"></HXMLPIC> 현감 밀성박공(유원) 묘갈명 박씨의 본관은 밀양이라 태사공(太師公)의 먼 후손으로 벼슬이 세상에 알려지고 그 위풍유운(蘶風遺韻)이 기록에 남았으며 고려 충혜왕 때 휘에 문경(文卿)은 호가 송재(松齋)이며 벼슬이 이
    출처 : 유교넷
  • 349108

    定略將軍 密城朴公(天祿) 墓碣銘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예천문화원
    <HXMLPIC ID="001"></HXMLPIC> 정략장군 밀성박공(천록) 묘갈명 공의 휘는 천록(天祿)이요 성은 박씨이니 본관은 밀성(密城)이다. 고려 충혜왕때 휘 문경(文卿) 호 송재(松齋) 시호(諡號) 충간(忠簡)의 후손이니, 휘에 민(敏)은 호가 성헌(惺軒)
    출처 : 유교넷
  • 349109

    漢惺 江陵劉公(景聖) 墓碣銘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예천문화원
    <HXMLPIC ID="001"></HXMLPIC> 한성 강릉유공(경성) 묘갈명 고려 문종 때의 병부상서이던 휘 荃은 시호가 文襄公인데 漢惺公의 시조이다. 어느 날 그 후손 海日군이 門事를 함께하는 二得, 載善, 載赫으로 더불어 나를 찾아와서 인사를 나눈 다음 그 조
    출처 : 유교넷
  • 349110

    野翁 安東權公(檥) 墓碣銘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예천문화원
    <HXMLPIC ID="001"></HXMLPIC> 야옹 안동권공(의) 묘갈명 우리나라에 지체 높은 氏族이 甚히 많으나 그 가장 盛한 門은 그 數를 可히 헤아릴 만하니, 安東權氏가 그 중에 하나이다. 權은 本是 金姓이요, 新羅王族이다. 太師幸이 高麗初에 있어서 百姓에
    출처 : 유교넷
  • 349111

    居昌縣監 安東權公(審言) 墓碣銘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예천문화원
    <HXMLPIC ID="001"></HXMLPIC> 거창현감 안동권공(심언) 묘갈명 公의 휘는 審言이요, 字는 仲擇이요, 姓은 權氏라. 安東大姓이니, 高麗太師 幸의 後孫이라. 其後로 더욱 昌顯하여 世世로 名公 鉅卿者가 輩出됨을 史冊에서 보았다. 曾祖의 휘 琨은 贈吏曹
    출처 : 유교넷
  • 349112

    碧洞 安東權公(時) 墓碣銘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예천문화원
    <HXMLPIC ID="001"></HXMLPIC> 벽동 안동권공(시) 묘갈명 삼가 延谷翁의 所撰한 公의 墓表를 상고해보니 平實簡當하여 含蓄味와 남은 뜻이 있어 읽는 자가 能히 깊이 窮究한 然後에 百世를 傳케되는 信筆임을 알수 있다. 대개 公은 우리 權 全盛한 날에
    출처 : 유교넷
  • 349113

    梅堂 安東權公(旭) 墓碣銘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예천문화원
    <HXMLPIC ID="001"></HXMLPIC> 매당 안동권공(욱) 묘갈명 襄陽의 權生이 조심스럽게 손수 冊 한권을 德鄰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우리 先祖께서는 숨겨진 德業과 純粹한 行實이 있었음은 蘆洲이신 金兌一氏가 이미 行狀을 지었으나, 오직 이 墓道에 顯刻하
    출처 : 유교넷
  • 349114

    咸溪 安東權公(曇) 墓碣銘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예천문화원
    <HXMLPIC ID="001"></HXMLPIC> 함계 안동권공(담) 묘갈명 公의 휘는 曇이요, 姓은 權氏요, 安東人이다. 高麗太師 權幸의 후예이며, 曾祖의 휘는 士彬, 벼슬은 贈領議政이며, 祖의 휘는 檥, 벼슬은 義興縣監이며, 考의 휘는 審言, 벼슬은 居昌縣監이다
    출처 : 유교넷
  • 349115

    延谷 安東權公(聖翊) 墓碣銘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예천문화원
    <HXMLPIC ID="001"></HXMLPIC> 연곡 안동권공(성익) 묘갈명 豐基郡의 남쪽 芙蓉山에 乾坐를 베고 있는 두던에 높다랗게 四尺의 封墳이 있는 것은 옛날 通訓大夫로서 司僕寺의 正을 贈職받으신 延谷 權公의 墓所이다. 公께서는 元陵(英祖) 乙卯 (一七三五)
    출처 : 유교넷
  • 349116

    叅議 安東權公(世彦) 墓碣文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예천문화원
    <HXMLPIC ID="001"></HXMLPIC> 참의 안동권공(세언) 묘갈문 殷豐面은 所와 五十里距離에 氷城山이 있으니 대개 小白山以南의 絶壁인 곳이고 동으로 굴러가서 鐵谷이 되었으며, 그 뒤의 左右로 펼쳐진 볼기에 壬坐丙向의 두던이 있으니, 바로 우리 王考(祖)
    출처 : 유교넷
  • 349117

    晩隱 平山申公(仲全) 墓碣文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예천문화원
    <HXMLPIC ID="001"></HXMLPIC> 만은 평산신공(중전) 묘갈문 府君의 諱는 仲全인데 高麗史에는 仲佺이라 하고 그의 字는 史乘에 傳함이 없다. 號는 晩隱이며 申氏이니 平山에서 系出하고 高麗太師 壯節公 諱 崇謙의 後孫이다. 忠惠王 元年 己卯에 과거에 장
    출처 : 유교넷
  • 349118

    靜觀 平山申公(允恭) 壇碑文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예천문화원
    <HXMLPIC ID="001"></HXMLPIC>
    출처 : 유교넷
  • 349119

    晩圃 信川康公(光胤) 墓碣銘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예천문화원
    <HXMLPIC ID="001"></HXMLPIC> 만포 신천강공(광윤) 묘갈명 강씨의 관향은 신천(信川)이고 모두가 조상을 신라 성골 장군 호경(虎景)으로 한다. 조선 태조 때에 신덕왕후가 중전이 되니 왕후의 일가들로서 귀족이 되었으나 두 왕자에게 화가 미치자 왕후
    출처 : 유교넷
  • 349120

    石溪 信川康公(瓛) 墓碣銘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예천문화원
    <HXMLPIC ID="001"></HXMLPIC> 석계 신천강공(헌) 묘갈명 공의 휘는 헌이요 字는 수옥이고 석계로 호를 삼은 강공의 조상은 신라 때의 성골장군인 虎景을 시조로 하여 고려조에 이르러서 侍中信城府院君인 之淵이 훈공이 있었으므로 자손들이 드디어 信川으로
    출처 : 유교넷
  • 349121

    開心寺址 五層石塔 記文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예천문화원
    <HXMLPIC ID="001"></HXMLPIC> 개심사 석탑기 상원 갑자년으로부터 47년이 되는 통화 27년 경술(1010)년 2월 1일에 정골(사리)이 개심사에 이르렀기에 3월 3일에 돌을 깨어서 조탑공사를 시작했다. 이 공사는 10칸의 부지에 광군 46대(1대
    출처 : 유교넷
  • 349122

    進士 禮安金公(著一) 晩巖臺 遺蹟碑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예천문화원
    <HXMLPIC ID="001"></HXMLPIC> 진사 예안김공(저일) 만암대(晩巖臺) 유적비 하늘은 차마 거칠지 못하고 땅은 차마 황폐하지 못하므로 오늘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옛 감문현 화곡촌의 언덕과 석관(石串)의 산과 물의 경치를 사랑하며 일찍이 노후
    출처 : 유교넷
  • 349123

    甘泉君 文先生(龜) 神道碑銘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예천문화원
    <HXMLPIC ID="001"></HXMLPIC>
    출처 : 유교넷
  • 349124

    敬差官 驪興閔公(三山) 墓碣銘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예천문화원
    <HXMLPIC ID="001"></HXMLPIC> 경차관 여흥민공(삼산) 묘갈명 閔氏들이 여흥으로 본관을 삼은 적은 매우 오래이고 고려와 조선조에 걸쳐서 名公巨卿이 대대로 이어져서 세상에 크게 그 이름들을 떨쳤으니 三韓甲族이다. 三山으로 이름 쓰는 어른도 그 집안인
    출처 : 유교넷
  • 349125

    參奉 驪興閔公(世俊) 壇碑銘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예천문화원
    <HXMLPIC ID="001"></HXMLPIC> 참봉 여흥민공(세준) 단비명 예천의 운산(雲山) 오향(午向) 언덕에 우뚝 솟은 저 봉분은 조선 기자전 참봉(箕子殿參奉) 여흥(驪興) 민공(閔公) 부부의 단(壇)이다. 공의 휘(諱)는 세준(世俊)이다. 시조는 고려조
    출처 : 유교넷
  • 349126

    晩隱 延安宋公(樀) 墓碣銘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예천문화원
    <HXMLPIC ID="001"></HXMLPIC> 만은 연안송공(적) 묘갈명 백성들의 德이 사라진지 오래 되었다. 아비가 아들을 보는 것이 자기 자식처럼 보지 않고 急難을 당하면 어린 아이로 여겨 슬퍼하는 일도 적은데, 하물며 아우를 위하여 죽음을 代身한다는 일이야
    출처 : 유교넷
  • 349127

    成均進士 春川朴公(纁) 墓碣文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예천문화원
    <HXMLPIC ID="001"></HXMLPIC>
    출처 : 유교넷
  • 349128

    竹屋 寧越辛公(義立) 墓碣銘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예천문화원
    <HXMLPIC ID="001"></HXMLPIC> 죽옥 영월신공(의립) 묘갈문 公의 諱는 義立이요 字는 子方이며 竹屋은 호이다. 辛氏는 멀리 하우씨에서 근원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평장사인 경(鏡)을 시조로 하고 그 다음부터 벼슬이 빛났다. 諱에 몽삼(夢森)이
    출처 : 유교넷
  • 349129

    成均生員 江陵劉公(熙) 墓碣銘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예천문화원
    <HXMLPIC ID="001"></HXMLPIC> 성균생원 강릉유공(희) 묘갈명 공의 휘는 熙이고 자는 爾和요 芳泉은 호이며 성은 劉氏이다. 그 조상에 兵部尙書로 휘에 荃이요 호가 竹諫이며 시호에 文襄公이 있으니 宋나라에서 우리나라로 건너온 8학사 중의 한 분이고
    출처 : 유교넷
  • 349130

    雙栢堂 江陵劉公(應鐸) 墓碣銘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예천문화원
    <HXMLPIC ID="001"></HXMLPIC> 쌍백당 강릉유공(응탁) 묘갈명 예천군 감천면 벌방동 뒤에 있는 栢嶺山 손좌 언덕에 큼직한 봉분이 있으니 곧 가선대부 호조참판인 휘에 應鐸이요 字는 循伯이며 號에 雙栢堂의 묘소이다. 하루는 公의 후손인 海日과 石鍾이
    출처 : 유교넷
  • 349131

    孝子 城隱 醴泉林公(騭) 墓碣銘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예천문화원
    <HXMLPIC ID="001"></HXMLPIC> 효자 성은 예천임공(즐) 묘갈명 성은(城隱) 임(林)공의 산소가 예천군 관내 덕율산 경좌의 언덕에 있고 배위(配位)를 합부(合祔)하였다. 오랜 세월에 비갈이 깎이어 알아볼 수가 없게 되었더니 후손들이 이것을 안타깝게
    출처 : 유교넷
  • 349132

    縣監 安東權公(輊) 墓碣銘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예천문화원
    <HXMLPIC ID="001"></HXMLPIC> 현감 안동권공(輊) 묘갈명 권씨의 본관은 永嘉이며 동방에서 이름난 姓으로 高麗太師 諱 幸이 그 시조이다. 累代 내려와서 中門祗侯 贈 吏曹參判 封永嘉君 諱奕, 門下侍中 贈 左參贊 謚號 僖敬公 諱用一, 監察 贈左議政 諡
    출처 : 유교넷
  • 349133

    幽溪 漢陽趙公(鳳徵) 墓碣銘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예천문화원
    <HXMLPIC ID="001"></HXMLPIC> 유계 한양조공(봉징) 묘갈명 공(公)의 휘(諱)는 봉징(鳳徵)이요 자(字)는 휴중(休中)이며 호(號)는 유계(幽溪)이니 본관은 한양(漢陽)이다. 시조의 휘 지수(之壽)는 고려조에 벼슬이 첨의중서사(僉議中書事)이며 그
    출처 : 유교넷
  • 349134

    山谷 漢陽趙公(元益) 墓碣銘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예천문화원
    <HXMLPIC ID="001"></HXMLPIC> 산곡 한양조공(원익) 묘갈명 내가 일찍이 팔우헌선생(八友軒先生)의 문집을 읽었는데 그 선부군(先府君)인 동추공(同樞公) 행의(行義)의 기록을 보고 깊이 감탄했으며 무릇 의방(義方)의 가르침이 자손들로 하여금 현귀(顯
    출처 : 유교넷
  • 349135

    鈍巖 漢陽趙公(葵陽) 墓碣銘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예천문화원
    <HXMLPIC ID="001"></HXMLPIC> 둔암 한양조공(규양) 묘갈명 한양조씨(漢陽趙氏)는 바로 동방(東方)의 대성(大姓)이며 유산(酉山)의 한 파(派)는 또한 영남(嶺南)의 이름난 문벌(門閥)이 되었으나 문장(文章)과 행의(行誼)와 대과(大科)와 소과(小
    출처 : 유교넷
  • 349136

    八友軒 漢陽趙公(普陽) 墓碣銘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예천문화원
    <HXMLPIC ID="001"></HXMLPIC> 팔우헌 한양조공(보양) 묘갈명 공의 휘는 보양(普陽)이요 자는 인경(仁卿)인데 조씨니 한양인이다. 고려 첨의중찬 휘 지수(之壽)의 후손으로 대마다 벼슬아치가 계승하였다. 조선조에 들어와서 휘 연(涓)이 우의정으로 시
    출처 : 유교넷
  • 349137

    梧竹齋 漢陽趙公(宜陽) 墓碣銘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예천문화원
    <HXMLPIC ID="001"></HXMLPIC> 오죽재 한양조공(의양) 묘갈명 나는 늘 돌아가신 아버지 하계부군(霞溪府君)께서 오향(梧香) 조동추장(趙同樞丈)께 올린 시나 편지를 읽으면 일찍이 몇 번이나 옷깃을 여미지 않은 적이 없으니, 선생을 아버지께서 공경하고
    출처 : 유교넷
  • 349138

    甘隱軒 漢陽趙公(顯佐) 墓碣銘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예천문화원
    <HXMLPIC ID="001"></HXMLPIC> 감은헌 한양조공(현좌) 묘갈명 양양(襄陽:예천의 별명)의 주마산(走馬山) 아래 돈산(敦山) 뒷 산록 유좌묘향 언덕에 성균생원(成均生員) 조(趙)공의 묘가 있으니 풀이 돋아나고 나무가 자라기를 150여 년이 지났다.
    출처 : 유교넷
  • 349139

    松隱 漢陽趙公(顯常) 墓碣銘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예천문화원
    <HXMLPIC ID="001"></HXMLPIC> 송은 한양조공(현상) 묘갈명 증자께서 이르기를 “자손된 자가 조상의 내력을 모르면 소경 같고 알고도 드러낼 줄 모르면 몸을 가누지 못하는 사람과 같다”고 했거니와 진실이다. 공손히 생각컨대 우리 할아버지는 세상을 떠
    출처 : 유교넷
  • 349140

    甘山 漢陽趙公(奎榮) 墓碣銘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예천문화원
    <HXMLPIC ID="001"></HXMLPIC> 감산 한양조공(규영) 묘갈명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한양조공(漢陽趙公) 규영(奎榮)의 묘갈명 서문과 함께 공(公)의 휘(諱)는 규영(奎榮)이요 자(字)는 사공(士恭)이며 호(號)는 감산(甘山)이니 한양(漢陽)을
    출처 : 유교넷
  • 349141

    運齋 缶林洪公(永錫) 墓碣銘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예천문화원
    <HXMLPIC ID="001"></HXMLPIC> 운재 부림홍공(영석) 묘갈명 공의 휘는 영석이요 자는 명삼이요 성은 홍씨요 호는 운재요 그 앞서는 남양 사람으로 고려 때 재상 벼슬하신 난이란 분이 있어 부림 땅을 봉하여 주었고 자손이 인하여 거기 살았다. 다음에
    출처 : 유교넷
  • 349142

    정언신 / 유교문화>인물 / 정언신
    조선 선조 때의 대신이다. 1566년(명종 21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국(史局)에 들어가니 그 명성이 높았으며 당시 영의정이던 이준경(李浚慶)이 지인지감으로 있었는데 통천서각(通天犀角)을 증정하면서 장래에 나를 대신하리라고 하였다. 1579년(선조 12
    출처 : 유교넷
  • 349143

    김락춘 / 유교문화>인물 / 김락춘
    천성이 효성이 지극하여 친상을 집행함에 수요질(首腰絰)을 벗지 않았고, 여막을 묘 아래에 짓고 조석으로 울고 상식하셨다. 그의 배위는 신씨 인데 일찍이 병색 위급한데 한번 보기를 청하니 공이 단절하고 삼년지례를 마치도록 보지 아니 하셨다. 평생에 자기를 법답게
    출처 : 유교넷
  • 349144

    신잠 / 유교문화>인물 / 신잠
    신잠은 시서화(詩書畵)에 모두 능하여 삼절(三絶)이라 불렸다. 『병진정사록(丙辰丁巳錄)』에 의하면 문장에 능하고 서화를 잘하여 3절(三絶)로 일컬어졌다고 한다. 『패관잡기(稗官雜記)』에는 묵죽에 뛰어났다고 하며,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는 묵죽과 포도그림도 잘 그
    출처 : 유교넷
  • 349145

    권극해 / 유교문화>인물 / 권극해
    본래 과거에 뜻이 없었으나 부모를 위하여 내키지 않음을 무릅쓰고 향시에 응시하여 여러 번 합격하였으며, 때로는 장원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끝내 예부와 정시에서 떨어지고 말았고, 뒤늦게서야 때를 잘못 만났음을 알았다. 이에 과거공부를 폐하고 귀향하여 거처 주변의 연
    출처 : 유교넷
  • 349146

    채헌 / 유교문화>인물 / 채헌
    채헌의 삶은 한마디로 산수와 함께 한 삶이었다. 일찍이 생원시에 일등으로 합격할 만큼 자질이 뛰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관직상의 이력은 찾아볼 수가 없다. 그 대신에 그는 오직 산림에 묻혀 누구보다도 곡진한 풍류를 즐기며 살았으니, 그가 만년에 석문정을 짓고 아울러
    출처 : 유교넷
  • 349147

    고상안 / 유교문화>인물 / 고상안
    고상안은 1553년 경북 용궁의 왕태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이조정랑을 지낸 강제(姜霽)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후에 벼슬이 정랑에 이르렀다. 그리고 일시 귀향하여 선묘(先墓)에 배소하던 중 임진왜란이 발발하게 된다. 이때 그는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어 상당한 공을
    출처 : 유교넷
  • 349148

    정방시 / 유교문화>인물 / 정방시
    정방시는 평생을 고절한 은사(隱士)적 삶을 살았던 것으로 짐작될 뿐 괄로의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당시 사림에서 상당한 명망을 누렸던 것으로 보이는 바, 훗날 「죽림재」를 중수하고 「죽림정」을 올릴 당시 사림이 유계를 형성하여 물자를 조달했다
    출처 : 유교넷
  • 349149

    엄흥도 / 유교문화>인물 / 엄흥도
    단종은 1457년 10월 24일 금부도사 왕방연이 가지고 온 사약을 받고 17세의 어린 나이로 숨을 거두었고 그 시신은 동강에 버려졌다. 삼족이 멸할 후환이 두려워 그 누구도 시신에 손을 대지 못하였다. 이 때 엄흥도는 영월 관아의 호장으로 있었다. 그는 날이 어두워
    출처 : 유교넷
  • 349150

    임춘 / 유교문화>인물 / 임춘
    생몰년 미상. 고려 의종∼명종 때의 문인. 예천임씨의 시조. 자는 기지(耆之), 호는 서하(西河)다. 문헌을 상고하여 보면 대략 의종경에 태어나 30대 후반까지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건국 공신의 후예로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할아버지 중간(仲幹)과 상서(尙書
    출처 : 유교넷
ㆍ페이지 이동: / 12836 go
AI 챗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