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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峰皇極內篇範數之圖 / 기록자료>고도서 / 황효공이 그림은 伏羲六十四卦圖에서 圓圖와 方圖를 합친 하나의 도해로 제작한 것을 본떠서 皇極內篇의 洪範數를 그림으로 정리하고, 九峰蔡氏의 해설을 덧붙였다. 앞의 箕子洪範九疇之圖를 참작하여 圓圖와 方圖를 합한 것이다. 伏羲六十四卦方圓圖와의 차이가 있다면, 后天圖의 원리를 따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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濂溪先生太極圖 / 기록자료>고도서 / 황효공周敦頤의 太極圖說 전문을 제시하였다. 여기에 誠을 중심으로 乾元 元亨利貞 性命之原의 의미를 부연하여 설명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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伏羲六十四卦方位之圖 / 기록자료>고도서 / 황효공伏羲先天八卦圖를 근간으로 하고서, 동일한 방식으로 64괘의 방위를 표현한 도해이다. 도해의 뒤에는 1544년에 쓴 황효공의 해설이 붙어 있다. 胡方平의 설명에 근거하여 이 도해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바로 뒤이은 李滉의 後識에 의하면, 이 그림은 鮑雲龍의 天原發微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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易範圖跋 / 기록자료>고도서 / 황효공1554년에 李滉이 쓴 易範圖跋文이다. 황효공이 易範圖를 저술한 내력과 자신이 이를 보완한 과정을 기록하였다. 그에 의하면, 황효공은 啓蒙과 皇極內篇을 통하여 易學과 洪範을 깊이 연구한 뒤에 先儒들이 남긴 圖解 10개를 취하고, 太極圖와 자신이 창안하여 제작한 方圓圖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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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 기록자료>고도서 / 황효공白雲洞景濂亭次周愼齋景游世鵬壁上韻, 送李溫溪景明瀣聖節使赴燕京幷小序, 丁未仲秋謝呈退溪, 次姜相公孟卿壽瑞詩嘉靖甲辰, 輓 贈吏曹參判朴公珩妣貞夫人金氏 이상의 詩는, 모두 그가 은거한 이후에 지은 것이다. 이 가운데 李滉의 仲兄인 李瀣에게 보낸 送別詩는 1545년의 글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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拜謝玄風鈴閣時朴嘯皐爲宰 / 기록자료>고도서 / 황효공朴承任에게 보낸 글이다. 流頭節을 맞이하여 벗들과 함께 榮川의 濟民樓에서 모임을 가졌는데, 마침 현풍현감 박승임에게서 말린 붕어를 보낸다는 글을 받고서 보낸 답서이다. 박승임은 이황의 제자로서 황효공과 같은 영주 출신이었다. 박승임은 1541년에서 1547년까지 현풍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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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欽兒 / 기록자료>고도서 / 황효공아들 黃欽에게 보낸 편지이다. 犠牛가 莊子의 篇名인지를 묻는 아들의 질문에 대한 답신이다. 글의 말미에는 勤讀과 愼接에 힘쓰라는 당부를 달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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對策 / 기록자료>고도서 / 황효공卷頭의 目次에는 辛巳別試策이라는 제목으로 표기되어 있다. 1521년 12월 황효공은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 글은 바로 황효공의 과거 급제 답안인 것이다. "王若曰, 文章之盛衰云云"이라는 策題에 대한 답안을 적은 것이다. "문장은 道를 담는 수단이다. 그런데 문장이 旺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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題權陽村入學圖說後 / 기록자료>고도서 / 황효공이 글은 榮川에서 발간한 入學圖說의 後識이다. 1547년 경상감사 安玹이 순행 중에 영천을 들렀다. 이 때 황효공은 散官, 즉 전직 관원의 자격으로 감사를 예방하였다. 안감사는 조선초기의 유학자 權近의 저작 入學圖說을 구하여, 白雲洞書院에 비치하고 선비들의 講學에 활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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遺墨 / 기록자료>고도서 / 황효공황효공이 남긴 친필親筆 한 점을 목판에 새긴 것이다. 내용은 이황에게 보낸 丁未仲秋謝呈退溪 시의 원고인데, 그 본문이 이 책에 실려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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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遺諸篇 / 기록자료>고도서 / 황효공送書狀官黃敬甫赴燕京, 寄龜巖, 見黃敬甫於龜院夕向郡馬上端午, 黃小牋四十枚寄龜巖兼呈一絶求和, 孟夏二十五日入龍壽寺馬上寄黃敬甫, 辛卯秋龜巖黃敬甫赴燕京∼余亦和之. 次呈黃諫議敬甫先生.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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墓誌銘 / 기록자료>고도서 / 황효공黃익의 위촉을 받고서 李滉이 지은 黃孝恭의 墓誌銘이다. 황효공의 가계와 생전의 이력, 영천에서의 은거 생활과 인품, 학문적 업적 등을 간략히 기록하였다. 황효공 보다 5세 연하인 이황은 문과에 급제하기 이전부터 황효공과 친교를 나누었다. 벼슬살이 보다 은둔하면서 학문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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墓碣銘 / 기록자료>고도서 / 황효공李玄逸이 지은 黃孝恭의 墓碣銘이다. 이황의 묘지명에 적힌 글을 근간으로 하였는데, 특히 벼슬을 그만 두고서 은둔하면서 易學에 潛心, 불후의 저작을 남긴 黃孝恭의 학문적 공로를 칭송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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泗溪書院奉安文 / 기록자료>고도서 / 황효공權斗寅이 지은 글이다. 泗溪書院은 본시 1654년 榮川의 선비들이 세운 서당이다. 이 奉安文은 서당에 祠宇를 짓고서 영천 고을의 선현인 황효공의 위패를 모실 때의 제문이다. 이 서원은 그로부터 80여년 뒤에 서원으로 승격이 되었다. 권두인은 영천에서 가까운 奉化의 닭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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泗溪書院興敎堂重修記 / 기록자료>고도서 / 황효공豊基의 선비 黃龍漢이 지었다. 사계서원의 강당인 興敎堂의 중수 경위를 설명한 글이다. 아울러 서원이 선비 양성에 기여하는 공력을 누누이 설명하였다. 李象靖의 문인이었던 황용한은 문장이 뛰어났고, 많은 후학을 길러낸 선비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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附農皐逸稿 / 기록자료>고도서 / 황효공龜巖先生逸稿는 책의 말미에 農皐逸稿를 덧붙여 두었다. 이것은 황효공의 손자인 黃彦柱(1553∼1632)가 남긴 글을 모은 것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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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 기록자료>고도서 / 황효공次嘯皐朴先生凝石寺韻萬曆庚辰冬, 原韻, 輓李省吾堂大中介立.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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雜錄 七松亭同道會題名錄 / 기록자료>고도서 / 황효공金宇옹 등 15명의 명단이 職銜과 字號, 居住地와 함께 적혀 있다. 黃彦柱의 이름은 세 번째로 실려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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雜錄 書題名錄後 / 기록자료>고도서 / 황효공題名錄의 내력을 적은 글로서, 金大賢과 金聲久 權斗經의 글 세 편이다. 김성구는 김우옹의 從玄孫인데, 그에 의하면, 제명록은 萬曆 26년 戊戌, 즉 1598년 10월 19일, 당시 서울에서 벼슬하던 영남 출신 인사 15인이 가졌던 모임의 기록이다. 이 모임을 가졌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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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狀 / 기록자료>고도서 / 황효공黃彦柱의 평생 행적을 기록한 글이다. 黃彦柱의 부친은 상주목사를 지낸 黃欽이고, 모친 德水李氏는 參議 李거의 딸이다. 10세 때에 부친을 따라가서 李滉을 뵈운 바 있었다. 그 자리에서 황언주는 中庸首章의 주석에 대한 견해를 또렷하게 진술하여, 이황의 기대를 받았다고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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農皐精舍重建上樑文 / 기록자료>고도서 / 황효공朴時源이 지은 글로서 黃彦柱가 살던 農皐精舍를 중건하던 때의 上樑文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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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識 / 기록자료>고도서 / 황효공黃孝恭의 10代孫 黃麟八이 龜巖先生文集이 간행되기까지의 경과를 적은 글이다. 黃孝恭의 遺作은 후손들이 보관하여 오던 중에 여러 차례 화재를 만나 거의 대부분 불에 타 버렸다고 한다. 李滉이 직접 精書하고 跋文을 지은 易範圖 병풍만이 紹修書院에 보관되어 있었으나, 이것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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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암집 / 기록자료>고도서 / 이돈우肯庵 李敦禹의 문집. 19권 11책. 석인본. 서문과 발문이 없어 문집 간행의 자세한 경위를 알 수 없으나 「연보」 말미에 문집이 완성된 연도가 1934년임을 밝혀 두었다. 또한 책마다 마지막 면에 ‘昭和 9년(1934) 12월 9일 발행’이라는 말과 발행자, 인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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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 기록자료>고도서 / 이돈우述懷十七韻, 僑居有感, 擬古四首, 丙申冬季大父以太僕郞赴京王父命敦禹往侍寄一律遠戒伏次(1836),十二月訪金國元(鎭右)元陵任所,挽柳伯孝(致孝),挽金貞伯(鍍銖), 乙巳春帖三絶(1845),挽淨友軒李公(定秀), 挽海隱姜公(必孝),携諸友往德峯敬次撫松亭板上韻, 次四友社韻, 九月初與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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敎忠淸道觀察使金炳始文(1870) 1 / 기록자료>고도서 / 이돈우肯庵이 弘文館 副修撰으로 재직할 때 쓴 글인데, 충청도관찰사로 부임하는 金炳始에게 내리는 왕의 敎書이다. 관찰사를 파견하는 이유, 충청도의 지역적 특성, 관찰사의 임무와 권한, 성실한 임무 수행에 대한 당부 등이 주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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璿牒實錄移奉後啓(1869) 2 / 기록자료>고도서 / 이돈우肯庵이 63세 되던 해에 太白山 史官에 임명되어 올린 보고문으로 이두체로 쓴 글이다. 그곳에 보관되어 있는 서책 상자들의 이상 없음과 건물 보수를 위해 서책 상자들을 임시로 曝曬閣에 옮겨 두었다는 사실을 보고한 것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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還安後啓(1869) 2 / 기록자료>고도서 / 이돈우太白山 史官 재임 때에 쓴 보고문으로 내용상 위의 계문과 연결되는 글이다. 璿源閣과 實錄閣의 보수 작업이 완료되어 임시로 옮겨 두었던 서책들을 제자리로 옮겨 보관해 두었으며, 임무가 끝났으니 이곳에서 물러나겠다고 보고한 글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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經筵講義(1870) 3 / 기록자료>고도서 / 이돈우肯庵은 1870년(고종 10)에 弘文館 副修撰에 제수되었다. 그 해 긍암은 64세의 老臣으로서 경연에 참석한 적이 있었는데, 이 글은 그 날 있었던 일의 전말을 소상히 기록한 것이다. 경연에서 강의한 신하는 講官, 參贊官, 儉討官 세 사람이었는데 긍암은 儉討官으로 참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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謝弘文館副校理疏 4 / 기록자료>고도서 / 이돈우弘文館 副校理의 벼슬을 거두어 달라고 사직하는 상소문이다. 「年譜」를 참조해 보면 肯庵이 弘文館 副校理에 제수된 때가 55세이던 1861년(철종 12), 61세이던 1867년(고종 4), 62세이던 1868년(고종 5)으로 모두 세 번인데 이 사직소는 그 내용으로 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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擬請景慕宮典禮疏 6 / 기록자료>고도서 / 이돈우莊獻世子(思悼世子)를 왕으로 追尊하여 宗廟에 모셔야 한다는 뜻을 아뢴 상소문으로 高宗에게 올린 글이다. 思悼世子의 追尊 문제는 哲宗 때 肯庵의 從曾祖인 李가 상소한 바 있고, 肯庵의 스승인 柳致明이 상소했다가 잠시 유배가기도 하였는데, 결국 嶺南의 유생 만여 명이 참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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應旨陳三綱九目疏 12 / 기록자료>고도서 / 이돈우肯庵이 71세 되던 1877년(고종 14)에 쓴 상소문으로, 그 당시 국가가 당면한 재난에 대처하는 방안을 묻는 왕의 뜻에 부응하기 위하여 쓴 것이다. 肯庵은 朱子가 宋 孝宗에게 올린 상소문을 원용하여 국가의 재난에 대처하는 군왕의 덕목으로 體天道, 順天心, 畏天命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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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定齋柳先生 1 / 기록자료>고도서 / 이돈우肯庵의 스승인 定齋 柳致明(1777~ 1861)에게 보낸 편지이다. ‘率性之謂道’와 연관된 두 가지 의문점을 질문하였다. 첫 번째 질문은, 尊君, 敬長, 禮賢을 ‘義之性’이라 하였는데, ‘尊’, ‘敬’, ‘禮’는 모두 禮에 해당하는 일인에도 ‘義之性’에 소속시키는 것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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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定齋先生 2 / 기록자료>고도서 / 이돈우스승 定齋 柳致明에게 보낸 편지인데, 지난번 편지의 답서를 받고 의문이 풀리지 않은 점이 있어 다시 질문한 것이다. 禮의 德은 ‘법도를 지키며 사양하여 겸손함(撙節辭遜)’에 있으니 계절로 치면 ‘만물을 성장시켜 기르는 여름’에 속한다고 하는데 그 두 가지가 연관된 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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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定齋先生 3 / 기록자료>고도서 / 이돈우스승 定齋 柳致明에게 보낸 편지이다. 大小長短의 구별이 有限하다는 것으로 ‘撙節辭遜’의 의미를 풀이하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가르침을 청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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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定齋先生(1858) 3 / 기록자료>고도서 / 이돈우스승 柳致明에게 보낸 편지이다. 내용은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앞부분은 보내온 神道碑文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말한 것이다. 그 다음에는 『中庸』 27장의 내용을 그림으로 만들어 보았는데 근래에 勿巖 金隆(1525~1594)이 이미 그것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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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金葛川先生 5 / 기록자료>고도서 / 이돈우지난해에 한 번 친절한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는데 앞으로도 종종 가르침의 말씀을 내려달라는 뜻을 전하는 안부 편지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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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松西姜公(橒) 6 / 기록자료>고도서 / 이돈우松西 姜橒은 肯庵이 26세이던 1832년 여름에 긍암에게 글을 가르친 스승이다. 이 편지는 종종 가르침을 내려달라는 뜻을 담은 안부 편지이다. 지난겨울 高山書堂에서 鄕父老들이 後學들에게 가르침을 베푼 것에 대해 언급한 것을 「年譜」에 대조하여 참작해 볼 때 1832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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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崔止軒(孝述,1869) 6 / 기록자료>고도서 / 이돈우여름에 왕명을 받아 太白山 史閣을 보수하러 갔던 일을 전하는 안부 편지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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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李凝窩(源祚) 7 / 기록자료>고도서 / 이돈우고향 선배 관료인 李源祚(1792~1871)에게 보낸 편지이다. 고종 임금 때에 莊獻世子(思悼世子)의 追尊 문제를 영남의 유생들이 다시 거론하게 된 일에 대해 앞으로의 전망과 자신의 처지를 개진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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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韓相國(啓源) 8 / 기록자료>고도서 / 이돈우韓啓源(1814~1882)은 헌종 때 장원급제했으나, 당시 몰락해 있던 南人 출신으로 말직만을 전전하다가 흥선대원군에 의해 발탁되어 승진을 거듭하여 1872년에 우의정이 되었다. 이 편지는 고향 후배인 그의 정승 승진을 축하한 것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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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韓相國 8 / 기록자료>고도서 / 이돈우韓啓源에게 보낸 편지이다. 사촌 아우가 관직에 나갈 수 있도록 도와준 은혜에 대해 감사하다는 뜻을 전한 글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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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韓相國 9 / 기록자료>고도서 / 이돈우韓啓源에게 조부 李秉運의 묘갈명을 지어달라고 부탁한 편지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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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許尙書(傳) 9 / 기록자료>고도서 / 이돈우尙書 許傳에게 보낸 것으로 亭子의 記文을 지어준 것에 대한 감사 편지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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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許尙書 10 / 기록자료>고도서 / 이돈우尙書 許傳에게 보낸 것으로 고조 大山 李象靖의 諡狀을 청한 편지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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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金方伯(世鎬) 10 / 기록자료>고도서 / 이돈우경상도관찰사 金世鎬(1806~1884)에게 보낸 안부 편지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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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尹方伯(滋承) 11 / 기록자료>고도서 / 이돈우경상도관찰사 尹滋承(1815~?)에게 보낸 안부 편지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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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地主沈候(東臣) 11 / 기록자료>고도서 / 이돈우安東府使 沈東臣에게 보낸 편지이다. 沈東臣은 안동 지역의 선비들이 屛山書院과 廬江書院을 중심으로 분열되어 있음을 염려하고 그 해결에 긍암이 나서 줄 것을 부탁하였다. 긍암은 이 일에는 자신의 집안도 연관되어 있고 주변 사람과 오래도록 쌓아온 친분 관계도 걸려 있어 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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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地主李侯(敎鉉) 12 / 기록자료>고도서 / 이돈우安東府使 李敎鉉에게 보낸 편지이다. 보여준 殿策은 문장이 훌륭하다고 칭찬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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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姜承旨(蘭馨,1864) 13 / 기록자료>고도서 / 이돈우승지 벼슬을 하는 姜蘭馨에게 보낸 편지이다. 지난번 만남에서 토론했던 ‘仁義禮智出於性’에 대한 그간의 생각을 말한 후, 영남의 인물들이 그대에게 거는 기대가 크니 그 기대를 저버리지 말아달라고 부탁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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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鄭參判(顯德) 14 / 기록자료>고도서 / 이돈우흥선대원군의 심복이였던 鄭顯德(1810~1883)에게 보낸 안부 편지이다.출처 : 유교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