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問月堂吳公遺集序 8 / 기록자료>고도서 / 이돈우問月堂 吳克成(1559~1616)의 문집에 대한 서문이다. 임진왜란 때 활약한 무관 오극성의 공적을 칭송하고, 그의 手錄이 남아 있어 이제 책으로 인쇄하게 되었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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眠雲齋李公遺集序 10 / 기록자료>고도서 / 이돈우眠雲齋 李周遠의 문집 서문이다. 면운재는 密庵 李栽의 조카로서 집안 대대로 이어져 오는 학문의 전통을 계승하였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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龍溪吳公遺集序 11 / 기록자료>고도서 / 이돈우龍溪 吳潝(1576~1641)의 문집 서문이다. 용계는 艮齋 李德弘의 문인으로 성리학에 밝았으며, 병자호란 후 일월산에 은거하여 조정에서 벼슬을 내려도 뜻을 바꾸지 않았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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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叟全公實紀序 12 / 기록자료>고도서 / 이돈우英叟 全霽의 시문 약간 편과 그와 관련된 여러 글을 모아 만든 책의 서문이다. 영수는 임진왜란 때 忘憂堂 郭再祐와 함께 火旺山城에서 싸우다 억울한 죽음을 당했는데 마땅히 표창되어야 한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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尤溪朴公文集序 14 / 기록자료>고도서 / 이돈우광해군과 인조 때의 문신 尤溪 朴守緖의 문집에 대한 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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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溪曺公實紀序 16 / 기록자료>고도서 / 이돈우임진왜란 때 어버이의 여막을 지키며 시묘하다가 죽은 효자인 林溪 曺公이 이제 이조참판에 추증되어 그 實紀를 고쳐 간행하게 되었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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栗里世稿序 18 / 기록자료>고도서 / 이돈우寧海(禮州) 申氏 집안의 다섯 세대, 일곱 사람의 글을 모은 문집의 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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錦浦金公實紀序 19 / 기록자료>고도서 / 이돈우병자호란 후 청에 인질로 잡혀 가는 두 왕자를 수행했던 무관 錦浦 金是聲의 實紀에 대한 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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誠齋洪公自警錄序 21 / 기록자료>고도서 / 이돈우洪貴達의 후손이요, 敬堂 張興孝의 문하생이었던 誠齋 洪公의 자경록에 대한 서문이다. 이 자경록은 誠齋가 20년 동안 자신의 일과를 반성하며 기록한 일기를 모아 만든 책인데, 이제 그의 후손 洪命疇가 출판하려고 서문을 청하였다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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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濡軒李公遺集序 22 / 기록자료>고도서 / 이돈우自濡軒 李萬白(1657~1717)의 문집에 대한 서문이다. 자유헌은 평생 산림에 은거해 있으면서 淸夷典雅한 글을 남겼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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退休齋姜公遺集序 23 / 기록자료>고도서 / 이돈우숙종 때의 문신이었던 退休齋 姜獻之(1624~1701)의 문집에 대한 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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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巖呂公遺集序 25 / 기록자료>고도서 / 이돈우道巖 呂姬弼의 문집에 대한 서문이다. 도암은 선조 때의 문신이었던 鑑湖 呂大老의 아들인데, 鄭仁弘과 李爾瞻의 횡포를 보고 출사의 뜻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학문을 연마하며 지냈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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柱江趙公遺集序 26 / 기록자료>고도서 / 이돈우인조 때의 隱士인 趙是光(1609~1680)의 문집에 대한 서문이다. 이 글에서는 그의 언행은 東方小學에 넣을 만하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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愚軒權公遺集序 27 / 기록자료>고도서 / 이돈우愚軒 權顯의 문집에 대한 서문이다. 우헌은 敬堂 張興孝 선생을 사숙하여 務實을 위주로 하였다고 평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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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窓鄭公遺集序 29 / 기록자료>고도서 / 이돈우鄭梯(1689~1765)의 문집에 대한 서문이다. 남창은 정포은의 후손으로 군자답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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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溪曺公遺集序 30 / 기록자료>고도서 / 이돈우영조 때의 학자 曺龍錫(1705~1774)의 문집에 대한 서문이다. 긍암은 北溪가 영남학파의 학문적 전통을 이어간 학자라고 하였다. 이 글 외에 그에 대한 행장을 쓴 것이 권 15에 실려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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碭村金公遺集序 31 / 기록자료>고도서 / 이돈우大山 李象靖의 문하생이었던 碭村 金公의 문집에 대한 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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夷峰黃公文集序 32 / 기록자료>고도서 / 이돈우密庵 李栽의 문하생인 夷峰 黃後幹의 문집에 대한 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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魯宇鄭公遺集序 33 / 기록자료>고도서 / 이돈우大山 李象靖의 문하생이었던 鄭忠弼(1725~1789)의 문집에 대한 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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龍泉權公遺集序 34 / 기록자료>고도서 / 이돈우大山 李象靖과 편지를 주고받은 龍泉 權鼎鉉의 문집에 대한 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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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淵鄭公文集序 35 / 기록자료>고도서 / 이돈우東淵 鄭伯休의 문집에 대한 서문인데, 그는 禮學에 뛰어났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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利見窩許公文集序 36 / 기록자료>고도서 / 이돈우利見窩 許公의 문집에 대한 서문이다. 그의 증손이 사백 리나 떨어진 먼 곳에서 찾아와 서문을 청하였는데 문집 속에 스승 柳致明이 써 준 常享文이 있어 기꺼이 이 글을 쓰게 되었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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面柳齋趙公遺集序 38 / 기록자료>고도서 / 이돈우川沙 金宗德 및 龜窩, 壺谷 등과 從遊하였던 面柳齋 趙公의 문집에 대한 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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雪巖遺稿序 39 / 기록자료>고도서 / 이돈우긍암과 동문수학한 벗인 宜春 安景玉의 문집에 대한 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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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書纂要序 40 / 기록자료>고도서 / 이돈우「사서찬요」는 大山 李象靖의 문하생인 槐潭 裵相說이 편찬한 책이다. 이 책의 편찬 의도는 『四書集註』에 대한 중국과 우리나라 학자들의 주석서들을 항목별로 간추려 찾아보기 쉽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편찬자가 중도에 별세하여 『대학』과 『중용』만 완성한 미완성본으로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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羅州丁氏族譜序 41 / 기록자료>고도서 / 이돈우羅州 丁氏가 기존에 만든 두 족보를 합하여 새로운 족보를 만들게 되었는데, 이 글은 새롭게 만든 족보에 대한 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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睡窓朴公遺集序 42 / 기록자료>고도서 / 이돈우睡窓 朴公의 문집에 대한 서문인데, 그의 시는 冲澹하고 산문은 簡古하다고 평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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送李古溪之任萊州序 43 / 기록자료>고도서 / 이돈우퇴계의 후손 古溪 李彙寧(1788~1861)이 東萊府使가 되어 떠날 때 송별의 의미를 담아 쓴 送序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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家學輯要序 45 / 기록자료>고도서 / 이돈우고조부 大山 李象靖의 문집 중에서 중요한 글을 간추려 뽑아 『가학집요』를 만들고, 그 취지를 밝힌 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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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泉金公文集序 46 / 기록자료>고도서 / 이돈우大山 李象靖의 문하생인 文泉 金熙紹(1758~1837)의 문집에 대한 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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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萊鄭氏族譜序 47 / 기록자료>고도서 / 이돈우동래 정씨가 파를 나누어 修撰公 이하의 자손만으로 새로이 족보를 만들게 되었는데, 이 글은 새롭게 만든 족보에 쓴 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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喪祭儀輯錄序 48 / 기록자료>고도서 / 이돈우柳致明의 문하생 直齋 金公이 편찬한 『喪祭儀輯錄』에 대한 서문이다. 이 책은 『家禮』의 내용 중에서 喪祭 부분만 추출하여 그것에 대한 제가의 설을 모아 덧붙인 책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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直齋金公文集序 48 / 기록자료>고도서 / 이돈우定齋 柳致明의 문하생인 直齋 金公의 문집에 대한 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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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白山璿源實錄兩閣重修記 1 / 기록자료>고도서 / 이돈우1869년(고종 6)에 긍암이 왕명에 의해 태백산 史庫의 예원각과 실록각을 重修하고 그 사실을 기록한 記文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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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淵臺記 3 / 기록자료>고도서 / 이돈우密陽에 있는 月淵臺에 대해 쓴 記文이다. 긍암은 1850년(철종 1) 2월에 과거에 급제하고 그 해 가을 남쪽 지역으로 유람을 떠나 玉山書院과 延日縣까지 이르게 되는데, 그 때에 폐허가 된 월연대를 본 적이 있다고 했다. 월연대는 한림학사를 지낸 月淵 李迨(1483~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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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裏館記 4 / 기록자료>고도서 / 이돈우죽리관은 긍암의 스승 柳致明의 조부 雪嶽선생이 머물던 옛터에 있던 것인데, 이제 그 후손들이 다시 재건하게 되어 이 글을 쓴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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臥龍亭記 6 / 기록자료>고도서 / 이돈우와룡정은 巴陵郡에 있는데 處士 檜山 黃公이 노닐던 곳이었다. 公이 별세한 후 그 손자 黃其永이 찾아와 기문을 부탁하매 朱子가 臥龍庵을 지어 제갈공명을 기린 고사에 의탁해 이 글을 쓴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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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亭記 7 / 기록자료>고도서 / 이돈우허영정은 安東府 남쪽 40리 호숫가에 있는데 宣祖 때 太僕正을 지낸 南公이 지은 정자였다(해제자 註:『교남지』에 의하면 南光淵이 지었다고 함). 세월이 흘러 터만 남았는데 그 후 南基德이 새로 지어 기문을 부탁하매 이 글을 쓴다고 하고, 許由의 洗耳 고사를 인용하여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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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亭重修記 8 / 기록자료>고도서 / 이돈우新亭은 병자호란 후 은거한 處士 申公이 지은 것인데, 이제 그 후손이 중수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글은 新亭이라는 정자의 이름을 위주로 서술하였는데, 오랑캐에 의해 晋이 망하자 江南에 新亭이 지어졌듯이 明나라가 망하자 春秋大義를 밝히기 위해 東海에 新亭이 지어졌다고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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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月軒記 10 / 기록자료>고도서 / 이돈우水月軒은 古隱縣(慶北 英陽)에 있는데, 仁祖 때에 효자로 이름난 水月 趙儉이 지은 것이다. 이 글에서는 물과 달의 쉼 없는 특성을 誠이라 보고, 趙儉의 忠孝가 그 誠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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鄕序堂記 11 / 기록자료>고도서 / 이돈우安東의 留鄕所인 鄕序堂이 낡고 허물어져 다시 자리를 옮겨 짓게 되었는데, 이 글은 그 사연을 기록한 記文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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沂川里社創建記 13 / 기록자료>고도서 / 이돈우義城 點村에 있는 沂川里社 창건기이다. 이 사당은 세조의 왕위 찬탈에 분개하여 관직에서 물러난 杏亭 權軾을 기리기 위해 그 후손들이 세운 것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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涵一堂記 15 / 기록자료>고도서 / 이돈우海隱姜必孝(1764~1848)의막내아들 上庠公이 부친의 학업을 이어 그 집을 涵一堂이라 하고 기문을 부탁하매 이 글을 쓴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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悅話堂記 17 / 기록자료>고도서 / 이돈우이웃에 사는 英山 南公이 자신의 거실을 悅話堂이라 이름 하였는데, 「歸去來辭」에 나오는 ‘悅親戚之情話’에서 뜻을 취한 말이다. 이제 그의 아들이 기문을 부탁하매 이 글을 쓴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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拳服齋記 18 / 기록자료>고도서 / 이돈우동문수학한 친구 金州 崔公이 자신의 당호를 권복재라 하였는데 『중용』 제8장에서 뜻을 취한 것이다. 이제 그의 아들이 기문을 부탁하매 이 글을 쓴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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晩晦亭記 19 / 기록자료>고도서 / 이돈우晩晦亭은 긍암의 나의 75세 되던 1881년(고종 18)에 제자들이 긍암을 위해 지은 정자이다. 이 글에서는 정자의 이름을 晩晦라고 한 취지를 풀이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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芝山曺先生文集重刊後識 20 / 기록자료>고도서 / 이돈우퇴계의 문인이었던 芝山 曺好益의 문집 중간본의 발문이다. 그 문집이 세상에 나온 지 백여 년이 되었는데, 불행하게도 목판이 화재를 입어 후손들이 중간본을 내게 되었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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潛窩崔貞武公實紀跋後叙 22 / 기록자료>고도서 / 이돈우潛窩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공을 세우고 貞武라는 시호를 받은 崔震立(1568~1636)의 호이다. 그의 實紀에 대해 大山 李象靖이 발문을 쓴 바 있었으나 목판에 새길 때에 실리지 못하였다. 이제 그 후손들이 기존의 實紀에서 밝혀져 있지 않던 호를 國乘 藝文考에서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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雲嶽先生李公文集跋 22 / 기록자료>고도서 / 이돈우鶴峯의 문하생인 雲嶽 李公의 문집에 대한 발문이다. 공의 문집은 후손인 密庵 李栽가 일찍이 교정해 두었으나 이제껏 간행하지 못하고 있다가 이제 그 후손들이 간행하게 되었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350850
後松齋先生金公文集跋 24 / 기록자료>고도서 / 이돈우西厓 柳成龍의 생질인 後松齋 金士貞의 문집에 대한 발문이다.출처 : 유교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