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寄玄休 21 / 기록자료>고도서 / 유도원부자 사이에 서로 보지 못한 지 여러 달이 되고 보니 늙은이의 마음이 우울하다는 소회를 전하면서, 선비된 사람은 서책과 文房을 좌우에 가까이 한 뒤에야 정신이 정갈해질 것이라고 적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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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大山李先生文 22 / 기록자료>고도서 / 유도원大山 李象靖(1711~1781)에게 올린 제문이다. 이상정은 퇴계 이황을 사숙하고 주자의 학문을 공부하여 학문이 고명하였고, 30년간 시골에 거처하면서 학문과 사색으로 일관된 생을 유지하였으며, 경서의 뜻을 發揮하고 옛 현인의 유업을 계승하여 후인들을 계발하여 유학에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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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李山小文 23 / 기록자료>고도서 / 유도원小山 李光靖(1714~1789)에게 올린 제문이다. 이광정은 용맹하고 굳건한 지조와 절차탁마의 공부를 통하여 학문과 식견이 고명하고 고금의 사적에 능통하였음을 찬양하고 선생이 아니었다면 유학이 무너질 위기에 처했을 것이라고 적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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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金蘭谷文 24 / 기록자료>고도서 / 유도원蘭谷 金時傑(1653~1701)에게 올린 제문이다. 김시걸은 공자와 주자의 학문에 전념하였고, 忠孝의 큰 절개와 性理의 바른 학문을 신봉하여 평생토록 부끄러움 없는 삶을 영위하였으며, 주자의 문집과 퇴계의 문집을 학문의 근기로 삼았노라고 적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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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權連山(正宅)文 24 / 기록자료>고도서 / 유도원連山 權正宅에게 올린 제문이다. 권정택은 『周易』에 근거하여 늙을 때까지 배우기를 좋아하였고, 선인의 경전을 탐구하여 후생에게 은혜를 끼쳐서 영남 사림의 원기를 북돋워 주었다고 칭송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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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表兄芝谷金公文 25 / 기록자료>고도서 / 유도원表兄인 芝谷 金公에게 올린 제문이다. 지곡은 일생동안 만권의 옛 경전에 정력을 기울였고 의리를 숭상하였으며, 문장이 뛰어나 당시의 붓을 잡은 인물들의 호평을 받았으며, 학문을 통해 정진하고 문장을 통해 세상에 이름이 났다고 적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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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李山甫文 27 / 기록자료>고도서 / 유도원李山甫에게 올린 제문이다. 이산보는 고성이씨 집안의 훌륭한 인재로서 조상의 유업을 계승하여 자질이 훌륭하고 흉금은 활달하였으며, 고금의 사적에 환하였는데, 불행히도 단명하여 벗들의 슬픔을 자아내고 있다고 적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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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考慵窩府君焚黃文 29 / 기록자료>고도서 / 유도원부친인 慵窩 柳觀鉉에게 올린 제문이다. 유관현은 충의로운 성품으로 역적들을 토벌하는 데 主盟이 되어 큰 공을 세워 윤리를 보존하고 의리에 부끄러움이 없었노라고 부친의 위업을 칭송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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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省錄 1 / 기록자료>고도서 / 유도원자신의 일상생활을 반성하고서 그 중요한 부분들을 짧은 문장으로 서술해 놓은 기록이다. 총 152항목에 달하며, 그 내용은 크게 학문, 언행, 경서의 학습방법 등으로 구분된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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知非十戒 17 / 기록자료>고도서 / 유도원자신의 잘못 열 가지를 경계하고자 그의 나이 50세에 자신의 지난 삶을 반성하려고 지은 글이다. 그 경계의 조목은 말, 술, 여색, 아첨, 노름, 자긍, 분노, 요구, 조급함, 나태함 열 가지인데, 조목별로 짤막한 단문으로 적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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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莫箴 20 / 기록자료>고도서 / 유도원視, 聽, 言, 動 네 가지를 삼가라는 명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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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當箴 20 / 기록자료>고도서 / 유도원視, 聽, 言, 動 네 가지가 이치에 맞도록 해야 한다는 명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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童子問 20 / 기록자료>고도서 / 유도원성리학의 기본명제와 성리학적 수신의 방식, 경서의 중요한 부분들에 대하여 조목별로 서술한 글이다. “形而上, 形而下”, “理”, “氣”, “理氣先後”, “理氣不相雜不相離”, “理無不善而氣有善惡”, “心”, “性 ”, “氣質之性, 本然之性”, “情”, “情, 意”, “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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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山李先生言行私箚 22 / 기록자료>고도서 / 유도원大山 李象靖(1711~1781)의 言行을 자신의 기억에 따라 적어놓은 글이다. 총 30항목에 걸쳐서 이상정에 대한 기억 가운데 인상적인 언행을 적고 있다. 유도원이 처음 이상정을 만난 시기는 경신년(1740) 여름이다. 당시 이상정은 瓢溪의 慵窩에 기거하던 유도원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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觀察使牛川鄭公事行記聞 7 / 기록자료>고도서 / 유도원觀察使 牛川 鄭公의 행적을 총 17개 항목에 걸쳐 간략히 적고 있는 글로서, 우천 정공의 관직생활의 치적과 집안에 거처할 때의 바른 행적, 작가의 부친인 유승현의 증언 들을 짤막한 단문으로 기술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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忍齋權公行略 10 / 기록자료>고도서 / 유도원忍齋 權大器의 행적을 간략하게 적은 글이다. 공의 諱는 大器이고 자는 景受이며 본관은 安東이다. 嘉靖 癸未年(1523)에 태어나 萬曆 丁亥年(1587)에 향년 65세에 운명하였다. 아들 宏이 原從功臣이 되었으므로 司憲府執義에 추증되었다. 그는 성품이 간결하고 맑으며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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孝子金大用殉父事蹟略 11 / 기록자료>고도서 / 유도원孝子 金大用이 부친의 장례를 치르다가 운명하게 된 사적을 간략하게 적은 글이다. 김대용은 蘭谷處士 金江漢의 아들이다. 처사가 기해년에 집에서 운명하자 김대용은 발인하던 날 상여를 옮기다 폭포에 떨어져 죽었는데, 죽는 순간까지 상복을 흐트리지 않고 관을 안은 채 사체로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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權處士傳 12 / 기록자료>고도서 / 유도원權載運의 일생을 적은 傳이다. 권재운의 자는 景厚이며 본관은 안동이다. 그는 젊은 시절 아전 일을 하다가 깨달은 바 있어 李顧齋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에 전념하여 당대의 선비들로부터 칭송을 받았고, 顧齋가 돌아가자 심상 3년을 입고 매번 기일을 만나면 소식을 하면서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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烈婦崔氏旌閭記 13 / 기록자료>고도서 / 유도원烈婦 崔氏의 旌閭에 걸어놓기 위해 지은 기문이다. 최씨는 鏡城에 거주하던 幼學 鳳翔의 딸로 10세에 결혼하여 어려운 살림을 유지하면서 시부모에 대한 효성이 대단하였고, 병든 남편을 위해 머리카락을 잘라 약을 장만하였으며, 남편이 운명하자 손수 남편의 염을 하고 소복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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蘆厓土室記 13 / 기록자료>고도서 / 유도원유도원이 蘆峯 아래에 土室을 지어놓고서 그 내력을 적어놓은 기문이다. 벗 蘭谷 金濯以가 매번 평생 동안 하나의 土室을 지어놓고 수천 권의 서적을 소장하고서 그 안에 살면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는 말을 하는 것을 들었는데, 자기 또한 그렇게 하기를 바랐지만 그동안 겨를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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玉假山記 17 / 기록자료>고도서 / 유도원옥가산에 이주하게 된 후 옥가산의 면모를 적고 있는 글이다. 본래 산수를 매우 사랑하는 병이 있던 차에 만년에 거처한 곳에는 아름다운 경치가 없는 것이 불만이었는데, 옥가산에 이주한 후 이런 불만이 씻겨지고 산 속에서 붓과 벼루를 가까이 하여 翰墨을 즐기는 여유를 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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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澗集和門記 18 / 기록자료>고도서 / 유도원集和門은 南澗草屋에 있는 작은 문이다. 유도원에게는 3명의 며느리가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성품이 훌륭하였다. 집화문을 출입하는 며느리들이 이러한 성품을 계속 유지하여 화평한 집안의 가풍을 유지해 나가기를 바란다는 당부의 글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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送金汝通歸覲序 18 / 기록자료>고도서 / 유도원사위인 金汝通이 歸覲할 때 써 준 送序이다. 부형들은 자제들이 魯鈍한 것을 걱정하는데, 노둔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 큰 병통이라고 하였다. 그 이유는 예를 들어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영민하지만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고 한 사람은 노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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枕澗亭同約帖序 19 / 기록자료>고도서 / 유도원枕澗亭同約帖에 쓴 서문이다. 유도원의 부친은 만년에 溪上에 정자를 지어놓고 편액을 枕澗亭이라고 달아놓고서 여생을 보낼 계책을 세웠는데, 후생 중에서 책을 끼고 와서 가르침을 청한 자들이 많았다. 유도원의 부친은 가르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아 후생들을 열심히 가르쳤으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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斂灰說 20 / 기록자료>고도서 / 유도원농사를 잘 짓는 농부는 날마다 부뚜막에 재를 가져다 거름을 주어 농작물을 풍성하게 수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학자들 또한 공부를 게을리 하지 말고 계속하여야 한다는 경계의 글이다. 재를 버리는 자는 농사를 게을리 하고 재를 거두는 자는 농사에 부지런하니, 농사일에 부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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病窩說 21 / 기록자료>고도서 / 유도원실수와 후회를 반복하곤 하자 이것을 고치고자 자신의 거처에 悔窩라는 편액을 달았다가 다시 病窩로 편액을 고쳐달게 된 내력을 상세히 적은 글이다. 평생 동안 실수를 잘 저지르고 후회하는 일이 많아, 일 하나를 처리하면 일 하나의 후회가 생기고 말을 한마디 꺼내면 말 한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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榾柮齋記 22 / 기록자료>고도서 / 유도원작가가 榾柮이라는 자호를 지은 다음 지은 기문이다. 榾柮은 쓸모없는 물건이지만 또한 쓸모 있을 데가 있다는 말을 통하여 자신의 처지를 비유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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捕蝎說 23 / 기록자료>고도서 / 유도원上瓢山에 집을 짓고 고서 천권을 보관하고서 생활하였는데, 좀 때문에 고생한 일을 적은 글이다. 좀을 잡아 죽이는 일이 잔인하다는 손님의 의론을 먼저 제시한 후 자신이 해가 되는 좀을 다 죽이는 것이 仁義의 도리에 하등 문제될 것이 없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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敎兒說 25 / 기록자료>고도서 / 유도원소시적에 마을의 아이들을 모아서 경서와 역사서를 읽히곤 했던 추억을 먼저 말하고, 일흔의 나이에 다시 마을의 아이들을 가르치게 된 경위를 서술하면서 학문 전수의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글이다. 유도원은 소시적에 마을의 여러 아이들을 모아서 『史略』을 읽히다가 경서까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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老農說 26 / 기록자료>고도서 / 유도원瓢谷里에 사는 늙은 농부 金五元의 농사짓고 산 이력을 통하여 선비로서의 직분을 이야기한 글이다. 농부가 농사짓기를 탐하듯이 선비 역시 책을 탐한다고 하고서, 하늘이 사람을 낼 때 각각 직분이 있으니 농부의 직분은 농사이듯이 선비는 선비로서의 직분을 지켜야 한다는 내용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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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新譜後 27 / 기록자료>고도서 / 유도원새로 족보를 만든 후 붙인 발문으로 집안의 내력을 간단히 적고 있는데, 이 책에 근거한다면 근거없이 나도는 집안의 잘못된 내력들이 교정될 것이라고 적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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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從高祖拙庵先生文集後 28 / 기록자료>고도서 / 유도원從高祖 拙庵先生의 文集에 붙인 발문이다. 졸암의 문집은 난리통에 그 전질이 제대로 전해지지 못하던 차에 증손인 樸齋가 전해오던 글들을 수습하였고, 5대손인 鳳來와 昌來 등이 문집을 간행하고자 하였으며, 종현손인 長源이 교정을 담당하였다. 특히 이 문집에서 특징적인 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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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泉亭庚子小會後識 29 / 기록자료>고도서 / 유도원을축년 봄에 유도원의 부친이 石泉亭에서 인근의 선비들과 함께 여러 날 동안 학문을 강론하고 시를 읊고서 그 내력을 기록해 놓은 적이 있는데, 유도원이 우연히 석천정에 와서 그 때의 기록들을 보고 옛날 일을 추억하며 다시 시를 지어 하나의 책자를 만든 일을 적은 글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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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李來甫寅泰人物通攷後 29 / 기록자료>고도서 / 유도원李寅泰가 엮은 『人物通攷』에 붙인 발문이다. 이인태는 본관이 眞城이다. 일찍이 성균관에 입학하였다가 林下에서 조용히 살면서 書史로 소일하면서 고금의 인물을 수집하였다. 그 내용은 중국에 있어서는 三代에서 명나라까지, 우리나라의 경우는 신라시대부터 조선조까지 활동한 훌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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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家傳雜錄後示兒輩 30 / 기록자료>고도서 / 유도원집안에서 내려오던 잡록에 붙인 발문이다. 자신의 집안은 대대로 청빈했던 유풍을 계승하였는데, 자신이 이제 집안일을 아들에게 맡기고 물러나 선조의 유적을 보호하는데 시간을 보내고자 하니, 아들은 조선의 유업을 계승하여 학문에 진력하라는 당부의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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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退溪先生文集攷覽凡例下 31 / 기록자료>고도서 / 유도원퇴계 이황의 문집을 교정한 후 범례 아래에 붙인 글이다. 퇴계의 문집을 접했을 때 고사와 명언, 동방의 문헌 들을 몰라서 문집을 읽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고백한 후,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주석을 달아 퇴계의 문집을 용이하게 볼 수 있도록 이 책을 만들었다고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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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外孫聃慶李輔延小字小帖子後 31 / 기록자료>고도서 / 유도원外孫인 李輔延의 작은 帖子에 써준 글로서, 주자의 격언을 끌어와서 외손이 학문에 진력하기를 바란다는 당부를 적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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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巖書齋上樑文 32 / 기록자료>고도서 / 유도원東巖書齋에 걸어놓은 상량문인데, 여타의 상량문과 큰 차이는 보이지 않는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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焚黃時儀節 33 / 기록자료>고도서 / 유도원焚黃禮의 절차를 적은 글로, 아마도 그의 부친 柳升鉉이 추증될 때 거행한 분황례에 소용된 것으로 보인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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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山先生墓誌銘(幷序) 1 / 기록자료>고도서 / 유도원大山 李象靖의 생애를 정리한 묘지명이다. 이상정은 자가 景文이며, 본관은 한산이다. 숙종 정묘년(1687) 1월 29일 안동의 蘇湖里에서 태어나 14세에 외조부인 密庵 李栽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25세에 소과와 대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을 시작하였다. 신축년(1726)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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處士金公墓誌銘(幷序) 6 / 기록자료>고도서 / 유도원處士 金公의 생애를 적은 묘지명이다. 처사는 문장이 정갈하고 글씨는 단정하였으며, 고문에 있어서는 굴원과 송옥의 문장을 좋아하였는데, 만년 이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仲氏와 함께 학업을 닦으며 생활하였다고 적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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孺人義城金氏墓誌 9 / 기록자료>고도서 / 유도원孺人 義城金氏의 생애를 정리한 墓誌文이다. 김유인은 丹砂 김선생의 셋째 딸로 19세에 李東殷과 결혼하였다. 26세에 남편이 운명하자 예절에 따라 장사지낸 후 자식 교육을 엄격히 하여 모두 훌륭히 키워내었다고 적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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姪孫秀士完山柳載文墓誌銘(幷序) 11 / 기록자료>고도서 / 유도원族姪 柳載文의 생애를 정리한 묘지문이다. 유재문은 字가 器甫로서, 학봉 김성일의 후손 金中柱의 딸과 혼인한 다음 해에 병으로 인해 一善의 처가에서 17세의 나이로 요절한 인물이다. 그의 문장은 흩어진 채로 있기 때문에 그 전모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지만 유학의 정수를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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孺人義城金氏墓誌銘(幷序) 12 / 기록자료>고도서 / 유도원孺人 義城金氏의 생애를 기록한 묘지명이다. 孺人 金氏는 金定之의 셋째 딸로, 權思奎와 혼인하였는데, 혼인한 12년 후인 경자년 겨울에 歸覲가서 해산하다가 병으로 인하여 운명하자 시아버지인 上舍公이 염을 하여 春陽縣 羅福堂에 안장하였다. 그녀는 용모가 단정하고 기질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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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童子聃學墓誌銘(幷序) 14 / 기록자료>고도서 / 유도원金聃學의 생애를 적은 묘지명이다. 그의 본관은 聞韶이며 金始吉의 유복자로 출생하였다. 그가 落淵의 上仙庵에서 거처할 때 책을 끼고 유도원 자신에게 글을 배우러 온 적이 있었음을 회상하는 한편, 그의 사람됨은 효경스러웠다고 칭송하면서 17살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 점에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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伊湖處士金公墓碣銘(幷序) 15 / 기록자료>고도서 / 유도원伊湖處士 金世鏞의 생애를 적은 묘갈명이다. 김세용은 자가 鳴于이며, 부친은 金學培이다. 현종 14년(1673) 3월 6일 臨河縣의 琴召에서 태어나 학업을 위해 雲谷으로 이주하여 조석으로 適庵公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고, 경진년(1700)에는 적암공의 명으로 갈암 이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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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均生員李公墓碣銘(幷序) 20 / 기록자료>고도서 / 유도원成均館의 생원 李憲復의 생애를 적은 묘갈명이다. 이헌복의 자는 章仲이며, 본관은 鐵城이다. 숙종 경진년(1700) 정월 30일에 출생하였다. 삼대의 休退한 유적을 엮어서 『重建錄』이라 이름하였고, 역대의 시문과 행장, 묘갈명 등을 엮어서 『趾美錄』이라 이름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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處士柳公墓碣銘(幷序) 22 / 기록자료>고도서 / 유도원處士 柳의 생애를 정리한 묘갈명이다. 공은 일찍이 과거공부를 폐기하고 집안에 거처하면서 어버이를 모시고 사는 것을 낙으로 여기고 살았으며, 사람들로부터 山林宰相이라 불렸다 한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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承訓郞安東判官三陟金公遺墟碑銘(幷序) 24 / 기록자료>고도서 / 유도원承訓郞 安東判官인 三陟 金公의 遺墟에 세운 비석이다. 이 유허비는 안동의 大野洞에 있었는데, 이 글에서는 삼척 김공의 공적과 생애를 간단히 언급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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從仕郞行健元陵參奉金公先生行狀 1 / 기록자료>고도서 / 유도원健元陵의 參奉을 지낸 金景溫의 생애를 정리한 행장이다. 김경온의 자는 光甫이며, 본관은 義城이다. 부친은 홍문관의 수찬으로서 문장과 기절로 이름난 汝鍵이며, 어머니는 宣敎郞 李休命의 딸이다. 김경온은 14~15세에 靑巖亭에서 荷塘, 蒼雪과 교류하였고 연이어 대과와 소출처 : 유교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