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送權錘山聖循序 1 / 기록자료>고도서 / 이중균錘山子 權翰模가 1911년 가을 宜上으로 찾아와서 “자네가 무신년(1908)에 나를 찾아왔지만 못 만난 것이 4년이나 되었는데 그 사이에 세상사가 많아 나와 자네의 얼굴과 수염이 옛날에 비할 바가 없고 천운은 위에서 변하고 인사는 아래에서 변하였으나 오직 마음은 변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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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晦夫南遊詩序 2 / 기록자료>고도서 / 이중균金煥奎의 남유시에 서를 한 것이다. 4월 초에 金煥奎가 나와 全秀璣가 남으로 유람을 간다는 소식을 듣고 같이 가기로 하였는데 나는 집에 일이 있어 도중에 돌아오고 두 친구만 가게 되었다. 金煥奎가 돌아와 편지를 주면서 여행 중의 唱酬詩 31편도 보내왔는데 읽어보니 모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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我石詩藁序 4 / 기록자료>고도서 / 이중균全秀璣의 『我石詩藁』에 서문을 쓴 것이다. 全秀璣는 나의 畏友로 利를 숭상하지 않고 가난을 근심하지 않고 권세가에 아부하지 않기는 옛날이라도 어려울 것인데 지금이 말해 무엇하겠는가마는 전수기가 그러한 사람이며, 시는 성정의 발로인데 全秀璣의 시는 맑고 우아하여 우뚝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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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吟石契帖序(1919) 5 / 기록자료>고도서 / 이중균淸吟石은 퇴계집에 여섯 번 보이는데 그 중 상세한 것은 제1권 詩序에서 알 수 있고, 송재 이우선생이 처음 퇴계선생에게 品題를 내어 吟詠하였는데 이로 보아 淸吟石이 우리 집안의 물건이 된 것이 오래였음을 알 수 있는데 돌이 개울가에 있어 해가 오래되면서 이끼가 끼고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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愚广全公遺稿序(1923) 6 / 기록자료>고도서 / 이중균全鳳錫이 아버지의 愚广 全公의 유고를 가져와 서를 청하자 지어준 글이다. 愚广은 철종조 진사로 계당 유주목과 성재 許傳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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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卯名賢錄序 8 / 기록자료>고도서 / 이중균진주 硯山의 鄭誾敎와 동지 몇 명이 『기묘명현록』을 중간하고 서를 청하므로 지어준 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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桂谷秦孝子實紀序(1927) 9 / 기록자료>고도서 / 이중균秦龍見의 『桂谷秦孝子實紀』에 秦龍見의 8세손 秦應彰의 부탁을 받고 서를 붙인 것이다. 내가 일찍이 소학을 읽을 때 老萊子가 나이 일흔에 색동옷을 입고 어린아이처럼 했다고 하는데 효자의 부모사랑을 이와 같은 것이며, 王祥이 얼음을 깨고 잉어를 얻어 어머니를 봉양하였으니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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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村實紀序(1929) 10 / 기록자료>고도서 / 이중균金溶夏가 白村 金文起의 冑孫 金炯錫의 뜻을 받들어 『白村實紀』 序를 부탁하자 지어준 것이다. 金文起의 『白村實紀』 3卷이 세상에 나온 지는 오래되었으나 김문기의 저술은 시문 수편을 제외하고는 전하지 않았는지에 근래 內閣 史草에 실려 있는 7편의 疏, 41편의 啓 그리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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草溪卞氏文獻綠序 11 / 기록자료>고도서 / 이중균卞大燮·??卞昌燮이 『草溪卞氏文獻綠』을 가져와 序를 청하자 지어준 것이다. 나라에는 나라의 문헌이 있고, 一鄕에는 一鄕의 문헌이 있는데 집에 어찌 문헌이 없겠는가만은 사대부들이 이에 힘쓰지 않아 가승과 족보를 편찬하는데 그치고 있다. 草溪卞氏는 성을 얻은 지 오래되었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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心窩遺稿序 13 / 기록자료>고도서 / 이중균全遇喬가 『心窩遺稿』를 가져와 서를 청하자 지어준 것이다. 心窩는 性齋 許傳의 문인으로 이름은 菌錫, 자는 舜馨이고 본관은 沃川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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族叔斗瞻回巹詩軸序 14 / 기록자료>고도서 / 이중균족숙인 斗瞻氏의 回巹宴에 참석하지 못하고 그 아들 中基가 詩軸을 만들어 序를 청하자 지어준 것이다. 回巹宴은 결혼한지 60년이 되어야 하는 것으로 지방과 나라에서 드문 것이다. 비록 回巹에는 예가 없으나 그 자손은 반드시 경사로 색동 옷을 입고 술잔을 드리고 친척과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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卑窩遺稿序 15 / 기록자료>고도서 / 이중균卑窩 鄭重岱의 遺稿에 序를 써준 것이다. 鄭重岱는 숙종 41년(1975) 문과에 급제하고 副正字를 역임하였고, 현감을 지냈다. 벼슬에서 물러나 청대 권상일, 대산 이상정과 교유했다. 정중대의 7대손 司諫 鄭玄謨가 그의 유고를 모아 책을 만들었으나 上梓하지 못하고 죽었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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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村遺稿序 16 / 기록자료>고도서 / 이중균水村 吳始壽(1632~1681)의 유고에 序를 써준 것이다. 오시수는 효종·현종·숙종 3朝의 지우를 받았고, 관찰사와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청나라의 사신이 왔을 때 역관이 ‘臣强’ 두 글자가 없었다고 하여 공이 극력 변명하였으나 비난을 면치 못하였으니 공에게는 불행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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鶴皐遺稿序 17 / 기록자료>고도서 / 이중균鶴皐 鄭一鎭의 유고에 후손의 부탁으로 서문을 써준 것이다. 오천 정씨는 영천의 閥閱로 塤叟 鄭葵陽·箎叟 鄭萬陽·梅山 鄭重器·鳴皐 鄭幹의 4군자를 배출하였는데 鄭一鎭은 문중의 후손으로 鄭重器에게 수학하고 塤叟 鄭葵陽·箎叟 鄭萬陽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학문이 출중하여 기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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反求齋遺稿序 18 / 기록자료>고도서 / 이중균反求齋 申在壽(1828~1895)의 유고에 서문을 써준 것이다. 申在壽는 龜山의 처사로 과거에 나아가지 않고 독서에 힘썼으며, 촌의 아이들을 모아 가르쳤으니 그 뜻이 굳은 바를 가히 알 수 있다. 젊었을 때 서울에 과거를 보러 갔는데 문중의 한 재상이 그 재주를 사랑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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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梧堂遺稿序 19 / 기록자료>고도서 / 이중균月梧堂 安晉石의 유고에 서문을 써준 것이다. 安晉石의 자는 士雅며 본관은 順興이다. 유고를 수습해 보니 詩 20수, 文은 1편뿐이었다. 그러나 그 글을 음미해보니 그 말은 우아하고 깨끗하여 세고의 기교를 부리는 것과 달랐다. 젊었을 때 목재 洪汝河에게 수학하여 예학에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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家弟稚會回甲詩序 20 / 기록자료>고도서 / 이중균1932년 동생 李中埰의 回甲 때 詩를 2수 짓고 서문을 쓴 것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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雲谷書堂記(1895) 21 / 기록자료>고도서 / 이중균葵軒 曺秉萬의 부탁을 받고 雲谷書堂의 기문을 쓴 것이다. 조병만의 조부 老稼亭 曺某가 공부하던 곳에 공자와 주자의 진영을 봉안하고 날마다 우러러 보면서 공경하였으니 이는 성심으로 공경하는 것이다. 내가 듣기로 조병만은 젊었을 때 공자와 주자의 책을 수만 권 외웠을 뿐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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花砌記 22 / 기록자료>고도서 / 이중균이중균이 화단을 만들고 그에 대하여 기를 쓴 것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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玉洞觀瀑記 23 / 기록자료>고도서 / 이중균1907년 이중균이 영주의 북쪽 梧溪村에 있는 玉洞瀑布를 보고 기를 쓴 것이다. 오계촌에 갔다가 鄕人이 폭포가 좋다고 해서 金若欽과 같이 가서 보고 돌아와 쓴 것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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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望峰記 24 / 기록자료>고도서 / 이중균禮安의 龍頭山 남쪽 溫村 서쪽 7·8리 쯤 되는 곳에 국망봉이 있다. 이는 이계양이 이름붙인 것인데 이계양은 매년 10월 24일 국망봉에 올라 영월을 향해 절했지만 행적이 미미했다. 퇴계 이황이 그 행적을 조술하여 거동이 담담하고 조용하였으나 이 일에 미치지는 못하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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兢齋記(1914) 25 / 기록자료>고도서 / 이중균姜麟元이 法溪 동쪽에 齋를 짓고 기문을 청하자 지어준 것이다. 학자는 앞선 성현의 가르침을 외우고 익히나 그것을 체득하여 힘써 행하는 것은 예로부터 어려운 일인데 姜麟元이 “戰戰兢兢”에서 취하여 그 재의 이름으로 삼으니 옛 군자가 몸소 실천하는 것과 비슷하다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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德谷書堂記(1915) 26 / 기록자료>고도서 / 이중균姜秉熙가 향내의 인사들과 더불어 덕곡서원을 중건하여 덕곡서당으로 재건하고 기문을 청하자 지어준 것이다. 영남은 어진 현인의 교화를 입은 곳으로 선조 퇴계 이황이 가장 공부가 깊어 그 교화를 접한 지역이나 유람한 곳에 서원을 세워 향사지내지 않는 곳이 없는데 의령의 덕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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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隱亭重修記 28 / 기록자료>고도서 / 이중균大隱庵 옆에 海愚堂 金樂灃이 세운 大隱亭이 허물어지자 손자 金秉奎가 중수하고 기문을 청하자 지어준 것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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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岳祠記 30 / 기록자료>고도서 / 이중균金庾信의 후손 金居晉이 김유신의 진영을 얻어 봉안하려 하자 鄕人이 모여 김유신·설총·최치원 三賢을 같이 봉안해야 한다고 하여 경주의 남쪽 40리 金山 아래 새로이 祠堂을 세우고 기문을 청하므로 1925년 지어준 글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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追遠齋記 31 / 기록자료>고도서 / 이중균순천인 金秉益이 친족 金燦在 등과 더불어 16대조 현감공을 추모하기 위하여 追遠齋를 짓고 기문을 청하자 지어준 것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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尊承齋記(1928) 32 / 기록자료>고도서 / 이중균忍百堂 金樂春을 모신 서원이 1869년 훼철되자 주손 金祚永이 그 집안의 장로들과 의논하여 서원 옆에 墓齋를 짓고 기문을 청하자 지어준 글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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念修齋記(1929) 33 / 기록자료>고도서 / 이중균사천의 崔曾憲은 옛 친구로 30여 년 동안 얼굴을 보지 못하였는데 어느 날 찾아와 동족 崔孝禎의 효도를 말하고 최효정이 사천의 萬竹山 아래 先塋이 있는 곳에 집을 짓고 念修라고 齋의 이름을 지었으니 기문을 지어달라고 하므로 지어준 것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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信舊窩記(1930) 34 / 기록자료>고도서 / 이중균李會文이 풍산의 種松里에 信舊窩라고 편액을 올리고 기문을 청하자 지어준 글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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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氏表烈閣記(1931) 35 / 기록자료>고도서 / 이중균裵在衡의 처 義城 金씨의 表烈閣에 대한 기문을 지은 것이다. 裵在衡은 대대로 안동 읍치 동쪽 登峴에 살았는데 1910년 서간도로 이주했다가 1919년 천연두에 걸려 죽자 김씨가 남편의 시신을 返柩하여 안동으로 돌아오자 안동 유림이 1931년 登峴에 한 칸의 집을 짓고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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顧南齋記 37 / 기록자료>고도서 / 이중균申泰慶이 조상을 위하여 顧南齋를 짓고 기문을 청하자 지어준 글이다. 承政院 右承旨 南崗 申모의 묘는 缶林縣의 顧南에 있는데 顧南은 현의 작은 언덕으로 이름은 있었으나 齋는 없었다. 공의 후손 申泰慶이 종족과 의논하고 묘아래 한간의 집을 짓고 그 땅 이름에 인하여 편액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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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亭記(1932) 38 / 기록자료>고도서 / 이중균鄭箕壽의 청으로 지은 것이다. 新亭은 梅塢 鄭榮後가 공부하던 곳이다. 鄭榮後는 학봉 김성일·한강 정구의 문하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집을 짓고 新亭이라 편액하였다. 정자는 용궁 남쪽 浦內에 있었는데 후손들이 세거하는 곳이다. 300여 년 뒤 주손 鄭箕壽가 집을 옮기고 근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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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贈齡千字冊後(1899) 1 / 기록자료>고도서 / 이중균아들의 공부를 위하여 직접 쓴 천자문에 발문을 써준 것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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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朴道亨唐詩別裁抄後(1900) 1 / 기록자료>고도서 / 이중균朴鳳來이 抄集한 唐詩를 보고 발문을 지어준 것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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退溪先生言行錄贈李肇卿識 2 / 기록자료>고도서 / 이중균먼 길을 떠나는 李基一에게 『退溪先生言行錄』을 주면서 공부를 권면하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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性理遺編重刊跋(1902) 2 / 기록자료>고도서 / 이중균龜巖 李楨의 『性理遺編』은 이정이 순천의 수령으로 있을 때 판각하였지만 병화로 인해 민멸되어 학사들이 이 책이 있는 것은 알지만 보지 못하였는데 李楨의 후손 李泰煥이 川前의 金氏家에서 구하여 重刊 跋文을 써달라고 청탁하자 써준 글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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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聖耈(李祈鎬字)抄誦謄冊後 3 / 기록자료>고도서 / 이중균族姪 李祈鎬가 공부하기 위하여 경전을 베껴 책을 만들어 외우고자 하는 것을 보고 공부를 권면하기 위하여 1913년 지어준 글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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鶴西遺稿跋(1914) 4 / 기록자료>고도서 / 이중균趙鎭春의 부탁으로 鶴西 趙秉相의 유고에 발문을 써준 것이다. 趙秉相은 龜窩 金의 문인으로 증손자 趙鎭商이 문집을 출간하려 할 때 이중균에게 교감을 부탁하여 책 뒤에 써서 보냈는데 그 堂弟 趙鎭春이 발문을 부탁하므로 써주었다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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谿棲遺稿跋(1922) 5 / 기록자료>고도서 / 이중균李鳳鎬의 청으로 谿棲 李모의 遺稿에 발문을 써준 것이다. 『谿棲遺稿』는 1900년 선배들의 교감으로 중간 준비를 마쳤으나 간행되지 못하고 미루어지게 되었는데 공이 죽은 지 거의 50년이 지나 교감을 보아 달라는 청을 받고 상하 2권으로 나누었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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吾家山誌跋(1923) 6 / 기록자료>고도서 / 이중균吾家山은 淸凉山을 지칭하는 것으로 퇴계가 주세붕과 더불어 청량산을 유람할 때 오가산이라고 하여 후인들이 그렇게 부른 것이다. 『吾家山誌』는 族叔 李晩輿가 편찬한 것으로 퇴계가 청량산을 유람하면서 지은 것과 도산잡영을 엮은 것이다. 나의 5대조 釣隱公이 『淸凉志』를 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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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院世眞錄跋(1927) 7 / 기록자료>고도서 / 이중균星州 安山書院은 농서공 李長庚의 影堂으로 후손들이 名位가 있으면 眞像을 추가로 들였는데 정조 20년(1796) 서원으로 승격되었다가 74년 후 고종 6년(1869) 훼철되고 堂으로 되었다. 59년 후인 1927년 『安院世眞錄』이 이루어졌다. 실려 있는 사실은 농서공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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守坡遺稿跋 9 / 기록자료>고도서 / 이중균安相源과 安渭相의 청으로 守坡 安孝濟의 유고에 발문을 써준 것이다. 安孝濟는 性齋 許傳·西山 金興洛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眞靈君이 고종의 총애를 받아 위복을 천단하자 상소를 올려 규탄하였고, 服制變更에 대하여 사임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로 인하여 1911년 압록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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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鄭斯文最源家先烈孝狀草後 10 / 기록자료>고도서 / 이중균나주에 거주하는 鄭最源이 보관하고 있던 조상 鄭伯奎 妻 坡平尹氏의 효행과 열녀행을 포장하기 위해 올린 狀草를 읽고 발문을 쓴 것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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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旅遺稿跋 11 / 기록자료>고도서 / 이중균安景烈의 청을 받고 1925년 봄 東旅 安昌烈의 遺稿를 교감하고 1927년 발문을 써준 것이다. 안창열을 계당 柳疇睦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5곳의 지방관을 역임하고 돌아와 학문에 힘썼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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缾山金先生行狀後敍(1928) 12 / 기록자료>고도서 / 이중균缾山 金鸞祥의 행장을 읽고 쓴 後敍다. 김난상이 사망한 지 183년 만인 영조 29년(1753) 행장이 나왔고 그로부터 170여 년이 지나 내각의 사초가 나와 선생의 입조언행을 후인들이 알 수 있게 되었다. 선생의 유고는 자못 엉성하였으나 이제 개간하면서 앞의 내각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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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烈婦李氏傳後 13 / 기록자료>고도서 / 이중균孫永達의 妻 驪江李氏의 열부행을 적은 전기를 보고 後를 쓴 것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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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中建(圻洛)十梅詩帖跋(1930) 13 / 기록자료>고도서 / 이중균松窩 鄭圻洛이 지은 十梅詩帖을 읽고 발문을 쓴 것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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響山稿跋(1931) 14 / 기록자료>고도서 / 이중균響山 李晩燾의 문집에 발문을 쓴 것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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雍山亭上樑文(亭在義興梨花村,1925) 15 / 기록자료>고도서 / 이중균雍齋 朴모를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세운 雍山亭의 상량문을 쓴 것이다. 의흥 梨花村에 있고 拓庵 金道和와 西坡 柳必永의 기문과 銘이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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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湖亭上樑文(1926) 16 / 기록자료>고도서 / 이중균東湖 邊永淸(1516~1580)의 東湖亭의 중건상량문이다.출처 : 유교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