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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체: 에 대해 총641,751건의 자료가 검색되었습니다.
  • 353851

    冥棲庵創建時土地告辭爲士林作 / 기록자료>고도서 / 이주원
    冥棲庵을 創建할 때 土地神에게 드리는 고유문이다. 寧海 士林들을 위하여 지었다.
    출처 : 유교넷
  • 353852

    武毅公延 謚後九峯書院改題告由文 / 기록자료>고도서 / 이주원
    武毅公(朴毅長)이 諡號를 받은 뒤에, 九峰書院에서 位牌를 改題할 때의 고유문이다.
    출처 : 유교넷
  • 353853

    明溪書院의 廟宇를 重修할 때, 位牌를 移安하면서 바친 고유문이다. 箕城(蔚珍의 古號) 士林들을 위하여 지었다.
    출처 : 유교넷
  • 353854

    祭守窩族兄文 / 기록자료>고도서 / 이주원
    저자의 족형이면서 스승인 守窩公(李仁封)에게 드린 제문이다. 부친처럼 섬기면서 배운 것이 이년이었다. 공이 月朔講會를 주재하니, 寂廖하였던 故里가 다시 예전의 懿範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하늘이 공에게 壽命과 함께 地位를 내리지 않아, 끝내 窮谷에서 생애를 마쳤으
    출처 : 유교넷
  • 353855

    祭朴表兄熙民文 / 기록자료>고도서 / 이주원
    표재종형 박희민공에게 드리는 제문이다. 공의 상여가 집 앞을 지난다. 공은 이곳이 楮谷임을 아는가? 공의 先塋이 있고, 존재선생이 講道하시던 곳이다. 10여년 전에 伯氏, 從氏와 공이 相從하여 두 집 조상의 友好를 잇고 黃券의 깊은 뜻을 탐구하였다. 지난 일을 회고하
    출처 : 유교넷
  • 353856

    祭康衢族兄文 / 기록자료>고도서 / 이주원
    강구 족형에게 드리는 제문이다. 공과 백씨는 우리 家門 盛時의 故事를 更張하였다. 梅竹堂에서 우리 후생을 교도하였으니, 문호가 다시 일어날 듯 하였다. 그러나 하늘이 우리 문중을 돌보지 않아, 災害가 잇따르고 친척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공은 月城으로 떠났고 우리 형제
    출처 : 유교넷
  • 353857

    祭族姪皆彦宇宏文 / 기록자료>고도서 / 이주원
    족질 李宇宏의 죽음을 애도하는 제문이다. 지난 해 斗天(李宇鎭)의 장례 시에 군은 나에게, "우리 세 사람은 骨肉 중의 知己인데, 지금 하나를 잃었네."라고 말하면서 슬퍼하더니, 지금 군이 또 이렇게 되었구나. 하늘이 나에게서 앗아감이 하나도 이미 혹독한데, 거듭 이
    출처 : 유교넷
  • 353858

    祭南谷權公尙吉遷葬時文 / 기록자료>고도서 / 이주원
    저자의 선배인 南谷 權尙吉의 遷葬 때에 드린 제문이다.
    출처 : 유교넷
  • 353859

    祭仲氏遷葬時文 / 기록자료>고도서 / 이주원
    저자의 중형 遷葬 時에 드린 제문이다. 공이 세상을 떠났을 때 아우는 12살이었다. 어려서 무엇을 알겠는가. 반은 잊고 반만을 기억한다. 伯氏의 말씀에 의지하여 유사를 서술하였다. 옥설같은 모습에 총명하였다고 한다. 密菴叔祖도 칭찬하여 손수 글을 써서 보내 주셨는데,
    출처 : 유교넷
  • 353860

    祭宗從姪子敬宇鏡文 / 기록자료>고도서 / 이주원
    종손인 조카 李宇鏡을 애도하는 제문이다. 병신년 이후 금일까지 상하 37년 간, 세 번이나 종사에 주인이 없구나. 우리 조상의 深仁積德에 이런 일이 어찌 있는가. 癸甲 사이에 故里에 큰물이 들자, 너는 먼저 楮谷으로 들어갔고 나는 삼년을 流轉하다가 뒤따라 만났었다.
    출처 : 유교넷
  • 353861

    祭族兄晩窩公文 / 기록자료>고도서 / 이주원
    족형 晩窩公에게 드린 제문이다. 骨肉 중에도 世誼가 있다고 知己가 있다고 말한다. 공과 내가 그러하다. 우리 두 집은 선대로부터 학문을 주고받았다. 공은 나의 백씨와 함께 석포에서 지냈다. 조석으로 만나 憂欣을 함께 하였다. 先稿를 校勘하고 世譜를 編次하며, 舊墟를
    출처 : 유교넷
  • 353862

    祭伯氏冷泉公文 / 기록자료>고도서 / 이주원
    저자가 伯兄 冷泉(李猷遠)공을 애도하는 제문이다. 공은 後生의 先導를 자신의 책무로 알았으며, 先代의 遺文을 정리하여 세상에 전하도록 하였다. 葛菴先生의 遺集年譜와 密菴叔祖의 遺文 및 朱書刊補 등을 교정하였다. 洪範衍義도 여러 차례 講討를 마치고, 작년 봄에는 大山
    출처 : 유교넷
  • 353863

    祭雨溪金丈命錫文 / 기록자료>고도서 / 이주원
    金命錫公을 애도하는 제문이다. 밀암선생의 문인 중에, 공이 가장 오래 배웠다. 仁山書院이 훼철 당하고 錦里에는 풀이 무성하건만, 공만이 홀로 우뚝하게 옛일을 읊으며 탄식을 하였다. 하늘이 이 분을 태어나게 한 것은 기약하는 바가 있을 터인데, 팔순에 이르도록 초야에
    출처 : 유교넷
  • 353864

    祭權公載巽文 / 기록자료>고도서 / 이주원
    權載巽公을 애도한 제문이다. 우리 兩家는 世誼가 중하니, 어찌 감히 遺勅을 추락시킬까. 冥棲庵 초창기에 미처 두서가 없었고, 洪範衍義는 정리를 마쳤으나, 篇帙이 부담이다. 百壽를 바라보니, 영광이 三世를 미쳤다. 이제 향리에 耆德이 없어졌으니, 누구에게 의지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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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3865

    祭申周伯相宣遷葬時文 / 기록자료>고도서 / 이주원
    申相宣 遷葬時의 제문이다. 나와 君은 대대로 世誼가 돈독하였다. 증왕고에게는 군의 조부가 명서암에서 종학하였고, 군은 나를 梧谷에서 따른 지 몇 해였던가. 내가 먼저 가고, 군이 뒤에 남아야 마땅하거늘, 어찌하여 팔십 暮境을 이토록 蕭索케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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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3866

    祭長侄僉樞宇鏻文 / 기록자료>고도서 / 이주원
    저자의 長侄 李宇鏻을 애도하는 제문이다. 어려서 양친을 여읜 나는 군과 함께 백씨의 양육을 받으며 자랐다. 東西로 漂迫하면서 추위와 주림을 함께 견뎠다. 伯氏를 찾아오는 賓朋이 집을 가득 채웠건만, 군은 주선하며 응접하기에 정성을 다 하였다. 백씨의 調適이 貧家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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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3867

    祭孫季心國濟文 / 기록자료>고도서 / 이주원
    경주 양좌동에 살았던 孫國濟를 애도하는 제문이다. 공은 가학을 이어 문장이 뛰어났다. 팔십의 暮年에 이르도록 독서로 소일하여, 중망이 있었건만 그대로 생을 마쳤네. 나는 남으로, 군은 북으로, 신라 도읍의 유적과 丹丘의 景勝을 함께 찾고자 약속하였건만, 이제 빈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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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3868

    祭鄭丈磼文 / 기록자료>고도서 / 이주원
    鄭磼丈을 애도하는 제문이다. 공과 헤어진 것이 어제 같은데 갑자기 돌아가시다니. 더구나 공의 장례를 마치자, 禍變이 더욱 酷毒하다니. 공의 遺孤가 迸落하여 거처가 없으니, 공이 아신다면 눈을 감지 못하리니. 공이 돌아가신 뒤로 세상이 적막해지니, 지금 궤연을 철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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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3869

    漁溪權公正始誄辭 / 기록자료>고도서 / 이주원
    權正始를 애도하는 誄辭이다. 충齋先生이 唱導하고, 荷堂 蒼雪 두 선생이 이어받은 가문, 酉谷의 權門에서 태어난 공은 江左, 觀行 諸老의 뒤를 이어 사우간에 衆望이 있었다. 周遠이 追陪한지 삼십년이 되었는데, 갑자기 一場의 꿈이 되었구나. 삼가 草堂八哀詩를 취하여 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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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3870

    金夢弼相說誄文 / 기록자료>고도서 / 이주원
    金相說을 애도하는 誄文이다. 나의 삼십년 교우인 군은 문소김씨의 수재로서, 대가의 풍도가 있었다. 九思翁(金樂行) 芝谷叟(金正漢) 같은 중망이 있는 분들이 세상을 떠난 뒤, 川上의 주인이 된 이는 군이었다. 금년 봄 서울에 가던 길에 松津의 뱃전에서 만났었는데, 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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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3871

    朴望之師周誄文 / 기록자료>고도서 / 이주원
    朴師周를 애도하는 誄文이다. 나와 姻婭瓜葛인 박군은 道義로도 世誼가 있다. 나의 증대부 이후 대대로 학문을 주고받았다. 무안박씨가 家聲을 유지하기는 박군이 있었기 때문이다. 군은 나의 우거지 梧里 가까운 곳에서 만년을 보냈다. 명서암에서 선대의 문적을 함께 교정하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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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3872

    成均生員權公墓誌銘 / 기록자료>고도서 / 이주원
    成均生員 權重載(1647∼1691)의 墓誌銘이다. 권공은 겨우 십세에 부친을 여의었다. 공은 존재선생로부터 君子의 立身行己의 方을 배웠다. 정묘년에 사마시에 합격한 뒤로는 모친을 떠나 遠遊하지 않았다. 신미년에 모부인이 병환이 들자, 주야로 扶護하였다. 大故를 당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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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3873

    孝子黃公墓誌銘 / 기록자료>고도서 / 이주원
    孝子 黃命圭(1661∼1708)의 墓誌銘이다. 공은 箕城의 溫泉洞에서 태어났다. 7세에 선공을 여읜 공은 편모를 모시기에 정성을 다하였다. 모친은 일찍이 奇疾에 걸려 기거가 불편하였다. 공은 음식 봉양을 손수 하였다. 모친의 머리에 이가 성하자, 자신의 머리털에 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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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3874

    處士李公墓誌銘 / 기록자료>고도서 / 이주원
    處士 李宇鍵(1684∼1746)의 墓誌銘이다. 영해 인량리 재령이씨의 종손으로 태어난 이공은 가문의 典訓을 이어받았다. 제사에 정성을 다하였음은 물론이고, 諸宗들을 보살핌에도 힘을 기울였다. 문내의 일이 많은데도 항상 諸書를 手抄하여 玩□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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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3875

    守門將熊川朱公墓碣銘 / 기록자료>고도서 / 이주원
    수문장을 지낸 朱楗(1556∼1637)의 墓碣銘이다. 공은 寧海사람이다. 임진년 島夷가 침범하자, 大駕가 義州로 播遷을 하였다. 府倅 韓孝純이 적을 물리치고서 보고를 할 때, 공이 험로를 뚫고 行在所로 달려갔다. 임금은 공에게 수문장을 제수하였으나, 사흘을 供職한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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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3876

    成均進士三陵李公墓碣銘 / 기록자료>고도서 / 이주원
    李龜煥(1677∼1738)의 墓碣銘이다. 조부는 恒齋(李嵩逸)이고, 先公은 李樴이다. 영양 석보리에서 태어났다. 십세에 선공을 여읜 공은 종조숙부 弘庵공에게서 배웠다. 아직 아이일 때 벌써 朞三百解를 풀었다. 禮學과 아울러 時程文字도 旁通하여, 당세의 創手巨擘도 앞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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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3877

    懈軒黃公墓碣銘 / 기록자료>고도서 / 이주원
    黃命河(1651∼1715)의 墓碣銘이다. 平海의 溫洞里에서 태어난 공은, 그곳에 謫居 중인 姜錫圭공에게서 배웠다. 문장, 특히 詩歌의 律格에 뛰어났다. 향시에는 12차례나 합격하였지만, 대과에는 실패하였다. 진취의 뜻을 버린 뒤에는 箕城에 懈軒이라는 편액을 달고서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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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3878

    高祖妣贈貞夫人光州金氏墓表 / 기록자료>고도서 / 이주원
    저자의 高祖妣인 贈貞夫人 光州金氏(1589∼1614)의 墓表이다. 부인은 近始齋(金垓)공의 따님이다. 부인은 석계 이시명공에게 시집을 와서, 갑인 추에 불행히도 세상을 떠났다. 七子 중의 長子가 부인의 소생인데, 삼자(李玄逸)가 높은 벼슬을 하여 정부인으로 追贈을 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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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3879

    從曾大父恒齋先生碑陰追補 / 기록자료>고도서 / 이주원
    저자의 從曾大父인 恒齋先生의 碑陰記에 追補한 글이다. 지난 갑신년 荷堂(權斗寅)공에게 비명을 받았으나, 세우지 못한 지, 85년이 지났다. 玄孫 宇一이 諸孫들과 合謀하여 일을 마치므로, 자손들을 追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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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3880

    曾王考存齋先生碣陰識 / 기록자료>고도서 / 이주원
    存齋先生의 碣陰記이다. 선생의 휘는 徽逸, 효종 때에 慶基殿 參奉을 제수 받았으나, 나가지 않았다. 정묘(1687)년에 사림들이 인산서원을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으나, 신유(1741)년에 신설을 금지하는 國命에 混入되어 撤享되었다. 자세한 행적은 葛菴先生이 지은 행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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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3881

    堂兄處士公墓表 / 기록자료>고도서 / 이주원
    저자의 堂兄인 李宗遠(1698∼1738)의 墓表이다. 공은 호군공의 사손으로서 인량리에서 태어났다. 병신(1716)년 이후 家禍가 이어졌다. 나의 백형 냉천공이 저곡산 중으로 들어가자, 공도 祠廟를 받들고 따라갔다. 이로부터 世念을 끊고 家事에 열중하였다. 先籍을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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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3882

    守窩李公行實記 / 기록자료>고도서 / 이주원
    守窩 李仁封(1686∼1744)의 行實記이다. 인량리에서 태어난 공은 일찍이 문사를 성취하였으나, 신사 계미 간에 연이은 喪禍로 인해 漂轉하여, 한 곳에 십년 이상 定居한 적이 없었으나, 항상 서적을 정리하여 강구하기를 폐한 적이 없었다. 중년에 魯谷에 우거하고서 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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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3883

    伯氏冷泉公遺事 / 기록자료>고도서 / 이주원
    저자의 伯氏 冷泉 李猷遠(1695∼1773)의 遺事이다. 공은 외가인 醴泉 渚谷里에서 태어났다. 존재 갈암 두분 증조부와 밀암선생의 가학을 이어, 典則을 익혔다. 그러나 가문이 陽九를 맞아 巨禍가 연이어 닥쳤다. 당시 공은 겨우 약관이었고, 여러 아우는 아직 成立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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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3884

    通政大夫熊川縣監李公行錄 / 기록자료>고도서 / 이주원
    通政大夫熊川縣監을 지낸 李之각(1652∼1730)의 行錄이다. 십세에 부친을 여윈 공은 백씨에게서 詩禮의 가르침을 받았다. 병진년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계유년에 웅천현감으로 나가 勤敏하게 다스렸다. 그 해에 기근이 심하였는데, 海邑이 더욱 심하였다. 공을 좋아하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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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3885

    三守李公行實記 / 기록자료>고도서 / 이주원
    저자의 족형 三守 李輝遠(1706∼1785)의 실기이다. 영양 석보에서 태어난 공은 종조 弘庵公에게 배운 이후, 80평생을 고향에서 산림처사로 살았다. 족형 冷泉公(李猷遠) 晩窩公(李仁壎) 등과 함께 문중의 가학을 이끌었다. 당대의 학자 大山(李象靖) 九思堂(金樂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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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3886

    僉知中樞府事李公遺事 / 기록자료>고도서 / 이주원
    저자의 족질 李宇成(1688∼1773)의 遺事이다. 영해 인량리에서 一松 李仁培의 아들로 태어났다. 공은 가학을 이어 經史를 두루 탐구하였다. 특히 人物의 得失과 歷代 善惡의 典故에 밝았다. 만년에는 생활이 군색하였으나, 문을 닫아걸고 조용히 앉아 흔들림 없이 평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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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3887

    宗從姪李君行錄 / 기록자료>고도서 / 이주원
    저자의 재종질 李宇鏡(1721∼1752)의 行錄이다. 이우경은 존재선생의 嗣玄孫이고, 李宗遠公의 아들로 梧里에서 태어났다. 15 6세에 이미 四子二經詩騷 諸篇을 익혔고, 製述도 능하여 문중 어른들의 큰 기대를 받았다. 원근의 친척 중에 상화로 인하여 표전하다가 의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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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3888

    宗從嫂孺人南陽淇氏行錄 / 기록자료>고도서 / 이주원
    저자의 종형수 남양홍씨(1698∼1770)의 행적을 기록한 글이다. 孺人은 존재선생의 증손인 이종원공의 부인이고, 이우경군의 모친이다. 부인은 사헌부 지평을 지낸 洪瑋榘공의 4세손이고, 처사 洪有구공의 따님이다. 18세에 시집온 이래, 일가의 宗婦로서 擧止周旋이 法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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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3889

    四止窩李公行錄 / 기록자료>고도서 / 이주원
    李馨遠(1701∼1778)의 주요 행적을 기록한 글이다. 四止窩는 공의 당호이다. 석계공의 맏아들 靜默齋(李尙逸)공의 증손자이다. 부친은 처사 李之각이다. 안동 천전리 외가에서 태어난 공은 어려서부터 밀암 고재선생 등 종조부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1706년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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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3890

    梅竹堂李公行錄 / 기록자료>고도서 / 이주원
    李仁載(1684∼1741)의 行錄이다. 매죽당은 공의 호이다. 영해의 인량리에서 李傅逸공의 曾孫이며, 李之衡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문의 典則을 薰習한 공은 經訓을 몸에 익혔다. 四世朝家의 胄孫으로서 평생 族親을 위한 정성이 懇側하였다. 先代의 古蹟이 멀어지고 敎訓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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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3891

    李君斗天行錄 / 기록자료>고도서 / 이주원
    李宇鎭(1715∼1747)의 行錄이다. 군은 매죽공의 작은아들이다. 그는 10여세에 이미 結句를 할 정도로 夙成하였다. 약관 당시 인량리에는 月朔講會가 盛況을 이루었다. 군은 新進 妙齡으로서 학업에 정진하였다. 특히 저자인 개언(이우굉) 이주원 등과 동지가 되어, 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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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3892

    晩窩李公行錄 / 기록자료>고도서 / 이주원
    李仁壎(1713∼1771)의 行錄이다. 그의 호는 晩窩이다. 做溪公(李榕)의 손자이고, 默窩公(李彦煥)의 아들이다. 주계공은 존재 갈암 두 선생에게 배웠고, 묵와공은 밀암선생에게 배웠다. 공은 자라면서 家學을 잇겠다는 뜻을 품었다. 부친이 魯溪, 守窩 등 족친과 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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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3893

    嘉義大夫同知中樞府事說樂齋朴公遺事 / 기록자료>고도서 / 이주원
    朴泰斗의 사적을 기록한 遺事이다. 공의 본관은 무안, 영해 인량리에서 태어났다. 11세에 존재선생의 문인 權尙任公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뒤에는 갈암선생에게서 군자가 立身行己하는 방도을 배웠다. 기묘(1699)년 공은 과거에 응시하여 수석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이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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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3894

    秀才李君萬初行錄 / 기록자료>고도서 / 이주원
    李光一(1747∼1774)의 행적을 기록한 글이다. 그는 李宇章의 외아들로서,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문에 힘써 문중의 기대를 받았다. 그러나 1774년 과거에 응시하고 돌아온 뒤에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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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3895

    族兄處士公仁擇遺事後敍 / 기록자료>고도서 / 이주원
    李仁擇公의 遺事에 덧붙인 발문이다. 공의 유사는 본시 晩窩(李仁壎)공이 지었으나, 미처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저자가 마무리한 것이다. 이 글에서 저자는 소년 시에 듣고 보았던 이공의 인품과 학문을 기술하였다. 이어서 한 수재의 죽음을 안타까와하는 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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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3896

    亡室孺人漢陽趙氏紀蹟 / 기록자료>고도서 / 이주원
    저자의 79세 되던 해에, 그보다 46년 앞서 세상을 떠난 그의 부인 유인 한양조씨(1711∼?)의 행적을 기록한 글이다. 유인의 조부는 趙是剛공이고, 부친은 趙信圭공, 모친은 義城金氏로서 瓢隱(金是榲)공의 후손인 金萬重공의 따님이다. 1732년 혼인을 하여, 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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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3897

    處士李公行錄 / 기록자료>고도서 / 이주원
    저자의 사종형인 十哥處士 李仁執(1694∼1740)의 행적을 기록한 것이다. 처사의 부친은 李之燧이다. 세 살에 부친을 여읜 처사는 季父의 가르침 아래 성장하였다. 言行擧止에 常度가 있었다. 벗들과 함께 산사나 고을의 학교에서 오래 학업을 닦기도 하였지만, 그에만 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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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3898

    康衢李公行錄 / 기록자료>고도서 / 이주원
    李仁樹(1692∼1761)의 행록이다. 康衢는 공의 호이다. 守窩 李仁封의 아우이다. 어려서부터 병약하였고, 조금 자라면서부터는 집안에 재난이 연달았다. 10여세에 부모가 연이어 세상을 떠난 뒤에는 생도가 막막한 지경이었다. 그러나 극심한 艱難 중에도 수와공의 지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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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3899

    通德郞朴公行錄 / 기록자료>고도서 / 이주원
    朴性善(1702∼1739)의 일생을 적은 글이다. 공의 관향은 무안, 說樂齋 朴公의 嗣子이다. 영해 인량리에서 태어났다. 7세에 就學하였는데, 가르침을 받지 않고도 뜻을 이해하였다. 정사(1737)년에 부친이 과거 무장현 시절의 일로 서울에 압송 당하자, 공은 주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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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3900

    秀才李君行錄 / 기록자료>고도서 / 이주원
    李光緝(1746∼1778)의 일생을 적은 글이다. 石保의 魯谷에서 태어난 군은 가정의 恪訓을 이어받아 실행에 힘썼다. 문자가 평실하고 필획도 단정하였다. 詩書正文과 屈賈韓歐의 문장을 手寫하여 潛心하여 보았다. 이밖에도 초록하여 엮은 책이 매우 많았다. 石川 門親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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