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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隱宋公永慕稧帖序 / 기록자료>고도서 / 김홍락총명한 재질과 원대한 器局으로 인조 때에 과거에 오르고 현종 때에 세 번이나 교수가 되었으며 沙斤道 察訪을 지내다가 벼슬을 버리고 안동의 二松川으로 卜居한 송은 송공을 위해 후손들이 永慕稧를 만들었는데 그 후손 仁壽가 稧帖의 서문을 요구하기에 써서 준 서문이다.출처 : 유교넷 -
354002
傅巖白公實紀序 / 기록자료>고도서 / 김홍락임란에 동생과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피난을 가서 적 30여 인을 베고 갑오년에 무과에 올라 훈련원 봉사에 除授되고 정유재란에 적을 무찌르다가 전사한 부암 백공의 실기를 후손 南喜가 책으로 펴낼 때 써서 붙인 서문이다.출처 : 유교넷 -
354003
晦山文集序 / 기록자료>고도서 / 김홍락뛰어난 자질로 세상 다스림에 뜻을 두고 과거에 열중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爲己之學에 전심하여 깊은 경지에까지 나아갔는데 만년에 자연에 묻혀 지내며 晦山齋를 짓고 자적한 밀양 손공의 저작을 아들 允憲이 책을 펴낼 때 써서 붙인 서문이다.출처 : 유교넷 -
354004
晩喜堂權公文集序 / 기록자료>고도서 / 김홍락총명한 자질로 학문에 힘써 百家에 통달하고 서예에 뛰어났으며 「周易」의 先天數와 後天數, 인심과 도심의 分辨에 대한 소설을 지었으며 시에도 뛰어난 만희당 권공의 문집을 玄孫인 寧世가 책을 펴낼 때 붙인 서문이다.출처 : 유교넷 -
354005
樂山裵公文集序 / 기록자료>고도서 / 김홍락인자한 성품과 총명한 자질을 타고나 문사가 일찍 성취되어 이름이 알려졌으나 어버이를 위해 과거를 보았고 결국 실패하여 자연에 묻혀 몸을 닦고 학문을 하며 지내다가 세상이 혼란한 즈음에 慷慨한 심정을 작품으로 표현하였다. 그의 후손 秀煥이 문집으로 펴낼 때에 써서 붙인출처 : 유교넷 -
354006
西岡朴公文集序 / 기록자료>고도서 / 김홍락英敏한 재주와 淸秀한 자질로 가정의 훈계를 이어받아 문사가 이미 성숙되었고 拓菴 선생의 문하에 나아가 열심히 경전을 공부하여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벼슬길에 나아가 포부를 펴지 못하고 만년에 마을 서쪽에다 西岡精舍를 짓고 후생들을 훌륭히 기른 서강 박공의 문출처 : 유교넷 -
354007
東溪徐公文集序 / 기록자료>고도서 / 김홍락빼어난 자질로 어려서부터 부지런히 배워 마음에 얻고 몸으로 체험하며 실질을 숭상하고 當世에 자랑하지 않아 古人作者의 풍모가 있었다. 「天人合一說」과 「理氣心性論」은 이면을 혁파하여 자기 견해를 발명하였고 「碧山論」과 「薇山記」는 世道를 근심하여 뜻을 나타내어 보통의출처 : 유교넷 -
354008
草湖許公遺稿序 / 기록자료>고도서 / 김홍락특이한 재질로 勸勉과 감독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부지런히 공부하여 문사가 날로 진보하였고 어버이를 위해 과거에 열중했으나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당대에 여러 名賢들과 道義로 사귀었고 특히 「理氣心性情意辨」과 「四書疑義辨」등의 저서는 공의 학문적 성과를 알 수 있는 저작출처 : 유교넷 -
354009
錦溪文集序 / 기록자료>고도서 / 김홍락단아하게 군자의 용모를 갖추고 篤信하게 高士의 風格을 지녀서 이 浮華한 말세에 쉽게 얻을 수 없는 금계처사 손공의 문집을 아들 亮敃이 책으로 펴낼 때 써준 서문이다. 금계의 문집은 일반 음풍농월의 그것과는 상당히 다르다는 내용을 특히 강조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354010
三省齋遺集序 / 기록자료>고도서 / 김홍락悅軒 선생의 후손으로 군의 북쪽 龍湖의 위에 三省亭을 지어놓고 자연 속에서 유유하게 吟詠하며 자기 분수를 지킨 삼성재 이공의 遺集에 써준 서문이다.출처 : 유교넷 -
354011
海巖序 / 기록자료>고도서 / 김홍락옛날 壬申年에 선고 司諫公이 時政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그 일로 뭇 소인배들의 미움을 사 흑산도로 귀양 갔을 때에 從伯氏와 함께 配所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경험한 사실로 海巖이란 호를 가지게 된 친구 朴鎬九의 號說을 쓰게 된 경위를 나타낸 서문이다.출처 : 유교넷 -
354012
邊景春之金谷序 / 기록자료>고도서 / 김홍락晩隱里에 사는 친구 晩洲處士 변경춘은 東湖 선생의 후손이다. 그는 부모를 섬김에 있어서 대단한 효성을 보여 산 꿩이 장막 속으로 날아 들어온 일이 있었고 아버지 초상에 나라의 명령으로 당시에 바로 장사지낼 수 없어서 10여 년 후에 장사를 지내고 그 10여 년 사이에출처 : 유교넷 -
354013
贈李華允序 / 기록자료>고도서 / 김홍락宜寧郡 曾山里에 사는 益齋 선생의 후예인 이화윤은 나이 60이 되어서도 마음가짐이 독실하고 처사를 올바르게 하는 숨은 군자라 할 수 있다. 물건에 비유하자면 荊山의 백옥과 鄧林의 재목 같은데 끝내 卞和와 輪扁 같은 사람을 만나지 못해도 후회하지 않으니 저자가 한 번출처 : 유교넷 -
354014
愛軒遺集序 / 기록자료>고도서 / 김홍락龜山君의 후손인 애헌 처사 李汶華는 뛰어난 자질로 일찍이 가정의 훈계를 이어받아 어린 나이에 성인의 풍모가 있었고 또한 과거를 단념하고 자연에 은거하여 학문의 연마에 전심전력을 쏟았다. 그의 학문은 孝友에 근본을 두어 도의가 아닌 것은 과감하게 배척하여 三公도 그 절출처 : 유교넷 -
354015
石菖蒲記 / 기록자료>고도서 / 김홍락정미년 봄에 서울에서 侍講으로 벼슬살이 할 적에 玉堂 서쪽 계단에 있는 석창포를 두고 지은 기문이다. 이 석창포에는 세도가의 흥망성쇠와 관련된 고사가 있는데 이것을 인간의 절개와 아부에 견주어 기록하고 있다. 그리하여 석창포를 처음에는 사랑하다가 그 다음에는 공경하다출처 : 유교넷 -
354016
高麗右司議大夫鹵簿判官順興安公壝壇記 / 기록자료>고도서 / 김홍락順興의 동쪽, 竹溪의 위에 고려 우사의대부 노부판관 순흥 안공의 壇所가 있는데 공은 여말에 조선에 출사하지 않고 절개를 지킨 인물로 행적이 유실되고 묘소도 망실되었다. 이에 후손 承國 등이 공의 貫鄕인 이곳에 정결한 땅을 선정하여 壇所를 설치하고 비석을 세워 祭享할출처 : 유교넷 -
354017
忠孝堂移建記 / 기록자료>고도서 / 김홍락鶴城의 下亭村에 松菴 김선생을 모신 충효당이 있다. 본래 이 충효당은 충청도의 魯城縣에 있었는데 중간에 환난을 겪어 오래도록 제사도 받들지 못해 宗中에서 相澈씨에게 實紀를 중간에 반포하고 충효당을 현재의 위치로 移建케하였다. 松菴 선생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인물출처 : 유교넷 -
354018
鳳松亭重建記 / 기록자료>고도서 / 김홍락歧山의 아래에 있던 봉송정은 고려 명신 遯翁 박선생이 벼슬을 버리고 은거한 곳에 있는 정자이다. 그 이름은 그의 선조 忠烈公의 말에서 ‘鳳松’ 두 글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退溪 선생도 시를 지어 칭송한 바가 있다. 세월이 흘러 묵은 터가 됨에 후손들이 다시 商山의출처 : 유교넷 -
354019
玉溪亭記 / 기록자료>고도서 / 김홍락拙川의 물가에 옥계 선생 김공을 위한 정자를 지었는데 주위의 경관이 몹시 빼어났다. 玉峯이 동쪽에 솟고 羅水가 앞을 흘러가며 御風臺, 大汀巖, 印月巖이 늘어서 있다. 후손인 鎭魯씨와 定洛이 기문을 청하기에 써준 글이다.출처 : 유교넷 -
354020
追慕齋記 / 기록자료>고도서 / 김홍락안동부의 동쪽 4리쯤 되는 송천동에 石門 선생 정공을 위해 춘추로 墓祭를 할 때에 자손들이 齋宿하는 재실이 있으니 이것이 바로 추원재이다. 松川洞에는 臥龍과 葛羅山이 마주하고 虎溪와 龍江이 흘러가며 旗山이 높이 솟고 仙魚臺가 있는 등 풍광이 빼어나다. 본래 재실이 있출처 : 유교넷 -
354021
洛巖亭記 / 기록자료>고도서 / 김홍락낙동강변 搴芝山의 아래에 옛날 관찰사 배공을 위해 지은 낙암정이 있다. 배공은 國朝의 名臣으로 벼슬길에 나아가 많은 치적을 남겼으나 오래 머물러 있는 것이 결코 좋은 일이 아니라고 판단하여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온 인물이다. 이곳에 본래 정자가 있었으나 세월이출처 : 유교넷 -
354022
景節齋記 / 기록자료>고도서 / 김홍락赤羅 동쪽 십여 리에 老杏洞이 있고 이 노행동에 端宗 때의 節臣인 松湖 선생 김공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경절재가 있다. 이 경절재는 후손인 泳化가 선조의 자취가 세월이 오래 지남에 따라 흔적도 없이 사라질까 염려하여 여러 宗人들과 힘을 합쳐 지은 것인데 저자도 旁後孫출처 : 유교넷 -
354023
狎鷺亭重建記 / 기록자료>고도서 / 김홍락중종 때에 일찍이 司馬試에 급제하였으나 더 이상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경전 연구에 몰두하여 세간의 명리에 초연했던 松潭 선생 蔡公이 琴湖江 위에 압로정을 지었는데 을해년에 후손들이 다시 頹落한 정자를 중건하고 기문을 요청하기에 써준 글이다.출처 : 유교넷 -
354024
追遠齋記 / 기록자료>고도서 / 김홍락鰲山의 서쪽, 豊水의 동쪽에 耳谷里가 있고 그 오른쪽 곁에 의성 김씨 府使公 金慶元을 위한 재실 추원재가 있다. 이 재실은 철종 병진년에 후손 泳禹가 집을 지으려고 했다가 이루지 못하고 아들 龜洛이 뜻을 이어 완성하고 저자는 旁孫의 의리로 기문을 써서 붙인다는 내용의출처 : 유교넷 -
354025
九山亭記 / 기록자료>고도서 / 김홍락영양의 九溪里에 구산정이 있는데 이는 구산 김공이 자연 속에 은거하며 지내던 곳이고 후손들이 祖先을 추모하여 중건한 것이다. 세월이 오래되어 頹落한 것을 후손 圭珀, 燦瑱 등이 여러 宗人들과 힘을 모아 옛터에 중건하고 저자에게 기문을 요청하기에 지어준 글이다.출처 : 유교넷 -
354026
拙陋亭重修記 / 기록자료>고도서 / 김홍락안동의 서쪽 杜陵里에 졸루정이 있는데 이 정자는 조선 명종 선조 연간에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자연에 숨어서 세상에 이름이 나기를 구하지 않은 龍巒 선생 권공이 만년에 숨어살던 집이다. 세월이 흘러 頹落한 것을 후손 相宅이 수선하고 기문을 청하기에 졸루의 뜻을 설명하출처 : 유교넷 -
354027
悠然亭記 / 기록자료>고도서 / 김홍락萊州의 新川里에 유연정이 있는데 이 정자는 곧 聽寒齋 안공의 위해 지은 것이다. 안공은 文成公 安珦의 후예로 일찍이 나이 20에 아버지를 따라 임란에 의병으로 참여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고 부친이 순절한 후 모친을 정성으로 모셨다. 그 뒤에 자연에 숨어 「下城錄」을 짓출처 : 유교넷 -
354028
山翁草廬記 / 기록자료>고도서 / 김홍락英山의 九通里에 대대로 훌륭한 가업을 이어받아 벼슬길을 단념하고 자연에 묻혀 유유자적하여 노인 우대정책으로 통정의 벼슬을 받은 산옹 처사 김공의 草廬가 있다. 그 후손 樂振이 이 草廬의 기문을 요청하기에 써준 글이다.출처 : 유교넷 -
354029
友松亭記 / 기록자료>고도서 / 김홍락안동 북쪽 松亭里에 端宗 때의 충신인 충청절제사 충주 지공을 위한 우송정이 있다. 그는 安平大君의 일에 연루되어 配所인 靈巖에서 賜死된 안타까운 일이 있다. 계유년에 후손인 熙德, 龍鎭 등이 여러 宗人들과 함께 우송정을 짓고 기문을 요청하기에 써준 글이다.출처 : 유교넷 -
354030
竹林齋重修記 / 기록자료>고도서 / 김홍락鰲山郡 元塘里에는 죽산 박씨 禁衛公과 그 아들 小菴公의 무덤이 있고 그 아래에 꽃과 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는 곳이 박씨가 사는 마을이고 마을 동쪽 수십 걸음쯤에 죽림재가 있다. 이 재실은 대나무가 많은 까닭에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 세월이 오래되어 頹落한 것을 참봉인출처 : 유교넷 -
354031
寓慕齋記 / 기록자료>고도서 / 김홍락丹湖里의 권씨들이 그 선조인 참봉공을 위해 우모재를 지었다. 참봉공은 성명의 세상에서 德義와 문학으로 세상을 교화하고 경전의 연구와 孝友로 사람들을 가르쳤으며 시세의 흐름에 따라 흘러가지 아니하고 만년에 자연 속에 은거한 인물이다. 후손 相八, 相達 등이 평소에 참봉출처 : 유교넷 -
354032
永慕亭記 / 기록자료>고도서 / 김홍락안동 동쪽 古谷里에 있는 영모정은 참의인 醴泉 林公을 위한 재실이다. 후손인 和燮, 秉九, 秉暉 등이 冑孫인 在殷과 더불어 여러 宗人들이 힘을 합쳐 이 재실을 지었는데 和燮이 기문을 요청하기에 써준 글이다.출처 : 유교넷 -
354033
慕省齋重建記 / 기록자료>고도서 / 김홍락赤羅의 錦賣洞에 모성재가 있는데 이 재실 이름은 鄭公이 「論語」를 읽을 적에 曾子가 말씀하신 三省章에 이르러 세 번이나 反復詠嘆한 사실에서 유래한다. 옛날에 재실이 있었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頹落한 것을 후손인 龜洛, 範洛, 大洛, 學洛 등이 중건하고 宇洛과 恒洛 등이출처 : 유교넷 -
354034
褒孝閣記 / 기록자료>고도서 / 김홍락醴泉의 淡叢里에는 옛날 종사랑 永陵 叅奉 儉巖과 徐巖 두 張公의 棣孝閣이 있고 이 포효각은 후손들이 두 공을 위해 지은 것이다. 두 공은 특히 부모에 대한 효성이 뛰어나 어버이의 질병에 대변을 맛보고 모친의 병에 얼음에서 잉어를 얻고 동생과 함께 물오리를 잡아 바치는출처 : 유교넷 -
354035
黙齋記 / 기록자료>고도서 / 김홍락豊山의 素山里에 묵재 김공의 재실이 있다. 묵재란 호는 八洛의 金文獻公이 공을 한 번 보고 簡黙寡言함을 우대하게 여겨 黙이란 이름을 주고 尙書 晩齋 김공에게 글씨를 쓰게 하였는데 이것으로 자신의 집 이름을 삼고 더욱 부지런히 공부하였다. 후에 공의 손자인 宅根이 재실출처 : 유교넷 -
354036
舞鼓臺記 / 기록자료>고도서 / 김홍락鶴山의 산허리, 三溪의 위에 무고대가 있는데 이 대는 蒼溪 박공이 평소 서식하던 곳이다. 蒼溪는 벼슬길에 대한 뜻을 단념하고 자연에 숨어살면서 여러 동지들과 이 무고대에서 逍遙吟詠하며 지냈는데 저자가 이 대에 富春山의 嚴子陵 고사로 기문을 지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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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隱亭記 / 기록자료>고도서 / 김홍락靑松의 寒泉에 송은 처사 김공을 위해 지은 정자가 바로 송은정이다. 송은공은 인조 병자호란 때에 오랑캐 청에 항복한 사실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이곳 한천으로 남하 은거하고 호를 송은이라 했다. 후손 東燮이 송은정의 기문을 요청하기에 써준 글이다.출처 : 유교넷 -
354038
敬慕齋記 / 기록자료>고도서 / 김홍락赤羅의 동쪽 수십 리에 新梅里가 있는데 이 마을에 경모재가 있으니 바로 樵隱 鄭公을 위해 지은 재실이다. 초은공은 愼齋 周世鵬의 문인으로 명종 때에 士禍가 일어날 것을 예견하고 귀향하여 화를 면하였다. 寒岡 선생이 추천했으나 부모님 때문에 사양했고 경상도 관찰사 鳴谷출처 : 유교넷 -
354039
松慕齋記 / 기록자료>고도서 / 김홍락禮安의 松谷에 있는 송모재는 申應仁이 정미년에 그의 부친 通德郞公을 이곳에 장사지내고 재계하기 위하여 세운 재실이다. 그리고 저자에게 기문을 부탁하기에 소나무의 의미로 풀이하여 지어준 글이다.출처 : 유교넷 -
354040
竹林精舍記 / 기록자료>고도서 / 김홍락龍城의 佳野里에는 죽림 선생 전공이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와 서식하면서 지은 죽림정사가 있다. 죽림공은 이곳에서 宦路에 나갈 생각을 접고 경전의 연구에 몰두하면서 특히 「中庸」과 「大學」, 天人性命의 근원, 用舍行藏의 사이에 크게 주목하였다. 戊申의 난이 일어남에 고성출처 : 유교넷 -
354041
小學堂記 / 기록자료>고도서 / 김홍락車城의 북쪽 30리 백운산 아래에 소학당이 있는데 이것은 곧 海蒼 김공이 은거하면서 講學하던 곳이다. 그 후 冑孫인 참봉 鍾復이 편지로 소학당의 기문을 요청하기에 김공의 생전 이력과 소학의 의미를 풀이하여 써준 글이다.출처 : 유교넷 -
354042
百源亭記 / 기록자료>고도서 / 김홍락鶴駕山의 동쪽 臥龍의 위에 있는 長壽里는 지형이 窈窕하고 정숙한 기운이 모인 곳이어서 碩人君子가 은거할 만한 곳인데 이곳에 思谷處士 洪公이 일찍이 세상에 나아가지 아니하고 부모에게 효도를 하며 지내고 있었다. 그 뒤에 후손 主政, 鍾升이 사곡공이 살던 옛터에 백원정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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雲泉亭記 / 기록자료>고도서 / 김홍락龜山의 북쪽, 雲浮의 남쪽에 梨花村이 있고 거기에 운천정이 있으니 곧 雲齋 박공이 은거하면서 講學하던 집이다. 후생들이 옛터의 곁에다 두어 칸 집을 지어 운천정이라 이름하고 그 손자 澋祖가 조카 泰幹, 泰黙 등과 함께 와서 기문을 청하기에 지어준 글이다.출처 : 유교넷 -
354044
廣巖亭記 / 기록자료>고도서 / 김홍락만년에 金陵의 龜城에서 道藏山 아래, 廣水의 위로 돌아와 두어 칸 집을 지어 廣巖이라 이름하고 날마다 여기에서 후학들을 지도하고 산수의 사이에서 吟詠自娛하던 이가 바로 광암 呂公이다. 그 손자 永達이 여러 宗人들과 정자 하나를 지으려고 하다가 완성하지 못하고 그 동생출처 : 유교넷 -
354045
天淵亭記 / 기록자료>고도서 / 김홍락임란에 많은 공을 세웠으나 불행하게도 요절한 천연재 선생 권공이 講學하던 곳에 후손들이 선생을 위해 지은 정자가 바로 천연정이다. 그 뒤 세월이 오래되어 황폐한 것을 정묘년 봄에 후손들이 옛 터전 동쪽 수백 보 정도에 새로 정자를 짓고 10세손 重協이 기문을 청하기에출처 : 유교넷 -
354046
桂山亭記 / 기록자료>고도서 / 김홍락西山 선생의 문인이요 저자의 친구인 邊國衡이 계림산중에 두어 칸 집을 지어 독서하고 학문을 닦는 장소로 삼으니 西山 선생이 小山幽桂의 뜻으로 이름을 지어주고 저자가 기문을 지었는데 계수나무의 의미를 자세히 풀이하여 친구를 勸勉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출처 : 유교넷 -
354047
松隱亭記 / 기록자료>고도서 / 김홍락안동 서쪽 20리에 송은정이 있으니 곧 송은 처사 정공이 서식하던 곳이다. 송은공은 圃隱 선생의 후예로 어버이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만년에 송은정 두어 칸을 지었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頹落한 것을 曾孫 義淵이 다시 짓고 기문을 요청하기에 지어준 글이다.출처 : 유교넷 -
354048
孝婦閣記 / 기록자료>고도서 / 김홍락龍宮의 楓井里에 蘿菴 선생 13세손인 李挺華에게 시집온 錦溪 黃俊良의 후예요 億周의 따님인 효부 평해 황씨의 효부각이 있다. 황씨는 조부모에게 효성을 다했는데 남편이 요절함에 혼자서 별난 조부의 봉양을 정성껏 담당했다. 신유년의 난리에도 효성 때문에 무사히 넘겼다.출처 : 유교넷 -
354049
信舊窩記 / 기록자료>고도서 / 김홍락豊東에 있는 신구와는 저자의 친구인 李友卿이 은거하면서 의리를 행하던 곳이다. 사람들이 이우경에게 屈原과 같은 의미가 있는 것 아니냐고 물으니 그 물음에 대답하는 형식으로 자기의 옛 것을 믿는 의미를 설명하는 기문이다.출처 : 유교넷 -
354050
雲皐亭記 / 기록자료>고도서 / 김홍락안동에서 40여 리나 되는 雲谷洞에 운고정이 있는데 이 정자는 운고 처사 권공이 은거한 곳이요 그 후손들이 공을 추모하여 지은 것이다. 운고공은 세간의 名利와 顯達을 구하지 아니하고 오로지 자연 속에서 자연을 벗삼아 유유자적하는 것을 추구하였다. 그 증손인 重學이 여출처 : 유교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