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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체: 에 대해 총641,751건의 자료가 검색되었습니다.
  • 354851

    答姜景仁(獻奎) / 기록자료>고도서 / 이휘령
    守素齋 姜獻奎(1797~1860)가 亭子의 이름을 지어줄 것을 요청한 편지에 대한 답장이다. 서리가 내리기 시작하면서 수확이 본격화되는 계절임에도 이룬 것이 없어 답답해하던 차에 편지를 접하니 크게 위안이 되었다고 반가워하면서도, 책상 앞에 앉아 이리저리 탐구를 하다
    출처 : 유교넷
  • 354852

    與奇校理(文鉉) / 기록자료>고도서 / 이휘령
    校理 奇文鉉에게 보낸 편지로, 그의 조상 奇大升의 文廟從祀와 관련한 입장을 개진한 내용이다. 李滉이 理氣互發 및 心合理氣의 관점을 토대로 하여 理氣의 分開와 渾淪을 동시에 인정한 가운데 정립한 性情理氣論은 聖賢들에게 일관되게 전승되어온 要旨였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기
    출처 : 유교넷
  • 354853

    答南薰伯(有橒) / 기록자료>고도서 / 이휘령
    南有橒의 편지에 대한 답장이다. 墓碣文을 작성해 달라는 부탁에 거절하지 못하고 외람되게 짐을 지기는 했지만 잡다한 병마에 시달리느라 쓸 여가가 제대로 없는 데다 글재주조차 없어 시일이 오래 걸렸을 뿐만 아니라, 그 내용도 빠진 부분이 적지 않아 보강하고 있기는 하지만
    출처 : 유교넷
  • 354854

    答金方伯(學性) / 기록자료>고도서 / 이휘령
    경상도관찰사 松石 金學性(1807~1875)의 편지에 대한 답장이다. 서로 만나지도 못한 처지였는데 그나마 서울에 갔다가 돌아와 보니 편지가 온지 3개월이나 지나 소식을 늦게 전하게 되었음을 사과했다. 지금 영남의 풍속이 名聲과 利祿을 좇는 풍조가 만연해 학문에 매진
    출처 : 유교넷
  • 354855

    與廬江志刊所 / 기록자료>고도서 / 이휘령
    屛山書院에서 屛派와 廬(虎)派 사이에 벌어진 是非의 전말을 병파의 입장에서 「廬江志」를 편찬한다는 소문을 듣고 중단할 것을 촉구한 내용의 편지이다. 嶺南이 영남다운 것은 先賢들이 배양하고 인도한 덕분으로 집집마다 性理를 논하고 士習이 갖추어져 禮俗을 서로 나누고 있는
    출처 : 유교넷
  • 354856

    答崔穉善(孝述) / 기록자료>고도서 / 이휘령
    자신이 東萊府使로 있을 때 조정에 천거한 止軒 崔孝述(1786~1870)의 안부편지에 대한 답장이다. 해마다 枝洞을 방문하면서도 만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한번 만날 수 있기를 희망했다. 東川의 工事는 이미 마무리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며 그곳을 배회하며 유적을 구경
    출처 : 유교넷
  • 354857

    答崔晩壽 / 기록자료>고도서 / 이휘령
    崔晩壽의 편지에 대한 답장으로, 임진왜란 당시 慶州城의 復城여부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곧 최만수 등 경주사림들이 경주성이 왜적들에 의해 함락되었다가 수복되었다는 점을 전제로 여기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 사람이 바로 永川과 新寧의 義兵將 鄭世雅와 權應銖였다며,
    출처 : 유교넷
  • 354858

    上參判族叔(彦淳) / 기록자료>고도서 / 이휘령
    族叔 李彦淳(1774~1845)에게 「退溪集」. 正本작업이 마무리되어 가고 있음을 전하면서 왕과 관료들의 허락을 얻어 館本을 수정할 수 있도록 부탁한 내용의 편지이다. 先集의 내용 가운데 고칠 부분이 적지 않았지만 이제는 板本의 수정작업까지 마무리되어 간행만을 앞두고
    출처 : 유교넷
  • 354859

    答判書族叔(孝淳) / 기록자료>고도서 / 이휘령
    族叔 李孝淳의 편지에 대한 답장이다. 判書에 제수된 것을 축하하면서 公事를 보는 과정에서 科場의 소요가 일어나 곤욕을 겪은 것에 대해 위로했다. 근래 영남에는 다시 上疏의 움직임이 있어 여러 곳에서 회합을 갖는 바람에 분열의 우려가 없지 않았으나, 다행스럽게도 川前의
    출처 : 유교넷
  • 354860

    答承宣從兄(彙圭) / 기록자료>고도서 / 이휘령
    從兄 李彙圭의 편지에 대한 답장이다. 조카가 갑자기 사망한 일은 진정 간장을 도려내고 억장을 무너지게 하는 일로서 門戶의 운세와 관련되는 일이 아닐 수 없다고 애통해 하면서 그만큼 行誼가 독실하고 學識이 깊은 사람을 어디서 얻을 수 있겠는가하고 아쉬워했다. 그런 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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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4861

    答族弟德輿(彙載) / 기록자료>고도서 / 이휘령
    族弟 雲山 李彙載(1795~1875)의 편지에 대한 답장이다. 政事에 대한 경력을 성공적으로 쌓아가고 있는데 대해 위안이 된다면서 벼슬아치의 학문을 하고 서로 교유할 수 있는 적절한 장소로 정사를 돌보는 여가에 노닐 수 있는 곳을 찾아보도록 권유했다. 자신은 병약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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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4862

    答族弟德輿 / 기록자료>고도서 / 이휘령
    族弟 雲山 李彙載의 편지에 대한 답장이다. 충청도 丹陽의 島潭 등지를 유람하며 돌아본 장소 등을 소개하고 손수 지은 시를 편지에 담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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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4863

    答從弟景民(彙秀) / 기록자료>고도서 / 이휘령
    從弟 李彙秀의 편지에 대한 답장이다. 멀리 떨어져 지내면서 보고 싶어 하던 차에 보낸 편지라 반가웠음을 전하면서, 건강하게 지낸다는 소식에 다행스러워 하면서 자신은 체증과 설사를 반복하며 고통스럽게 지내고 있음을 전했다. 아울러 동래부의 給倭米의 절반을 전년도에 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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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4864

    答從子晩翊 / 기록자료>고도서 / 이휘령
    조카 李晩翊의 편지에 대한 답장이다. 高峰 奇大升의 文廟從祀 請願과 관련해 上疏가 捧入되었는지를 물으면서, 湖南에서 그에 관한 疏草와 함께 通文이 왔을 때 四端七情說과 관련된 부분을 고칠 필요가 있어 영남에서 고친 소초를 보낸 적이 있는데 반영이 되었는지의 여부도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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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4865

    答憙兒 / 기록자료>고도서 / 이휘령
    아들의 편지에 대한 답장이다. 요즘의 근황이 어떠한지를 묻고 어머니의 元氣가 갈수록 약해져 걱정이라는 소식을 전했다. 수령으로 복무하는 사람의 소망은 집집마다 豊年이 드는 것뿐이며 邑弊가 누적되어 그것을 처리하느라 사사로운 계책을 말할 여가가 없는 사정도 알렸다.
    출처 : 유교넷
  • 354866

    答憙兒 / 기록자료>고도서 / 이휘령
    아들의 편지에 대한 답장이다. 年前에 淸凉精舍에서 講會를 열었을 때의 日記와 講錄은 鹿洞書院을 왕복하며 교감 정리하여 책으로 묶었음을 전하면서, 그것을 陶山書院에 소장해둘 생각이지만 자신이 행한 몇 가지 講說은 다소 불만스러움이 있음을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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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4867

    答憙兒 / 기록자료>고도서 / 이휘령
    아들의 편지에 대한 답장이다. 지금의 世道가 위험에 처해있는 상황에서는 수시로 讀書를 하며 가문의 規模를 잃지 않는 것이 현명한 처신임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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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4868

    大王大妃殿誕日賀箋 / 기록자료>고도서 / 이휘령
    淸州牧使로 재직할 때인 憲宗 4년(1838) 純祖妃 純元王后의 50세 생일을 맞아 올린 箋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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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4869

    大殿望六賀箋 / 기록자료>고도서 / 이휘령
    憲宗 14년(1848) 純祖妃 純元王后의 60세 생일을 맞아 忠淸道觀察使를 대신해 지은 箋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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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4870

    書筵講義 / 기록자료>고도서 / 이휘령
    世子翊衛司 洗馬로 재직할 때인 純祖 21년(1821)부터 書筵에 참석해 기록한 일기이다. 8월 5일 觀物軒 正室에서 書筵에 참석한 것을 시작으로 이듬해 6월 5일 召對에 참석했을 때까지 모두 20차례에 걸쳐 王世子와 함께 「中庸」및 「詩傳」을 강독하며 나눈 대화내용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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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4871

    世譜重刊序 / 기록자료>고도서 / 이휘령
    「退溪集」의 간행에 때맞추어 眞城李氏 上溪派의 世譜인 「陶山譜」를 重刊하면서 쓴 序文이다. 李滉을 정점으로 하는 이 족보는 처음 그의 손자 李安道가 譜略을 만든 것을 토대로 하여 趙穆·柳成龍이 주도해 1600년 「庚子譜」를 만든 이래로, 1688년 「戊辰譜」,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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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4872

    琴梅軒先生逸稿序 / 기록자료>고도서 / 이휘령
    梅軒 琴輔(1521~1584)의 遺稿를 모아 발간하면서 쓴 序文이다. 그는 스승인 李滉에게 편지로 質疑하며 師旨를 계승한 몇 안 되는 제자 가운데 한 명이자, 어릴 적부터 학문에 뜻을 두고 항상 스승의 곁에 있으면서 師說을 篤信한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는 스승과 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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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4873

    朴逍遙堂逸稿序 / 기록자료>고도서 / 이휘령
    逍遙堂 朴世茂(1487~1564)의 遺稿를 모아 발간하면서 쓴 序文이다. 그는 재능이 뛰어나고 자질이 우수했지만 擧業과는 담을 쌓고 임금이 불러도 나아가지 않은 채 淸道 雲門의 산중에서 자연을 읊조리고 道義를 講磨하면서, 晦齋 李彦迪, 南冥 曺植과 질의하며 학문의 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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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4874

    金西岡先生文集序 / 기록자료>고도서 / 이휘령
    西岡 金係錦(1405~1493)의 遺稿를 모아 발간하면서 쓴 序文이다. 西岡의 號는 그가 癸酉靖難을 일으켜 端宗을 축출하고 왕위에 오른 世祖의 신하가 되기 싫어 80여년을 은거하며 살았던 吾西山에서 유래한 것으로, 평생 단종을 위해 북쪽을 향해 앉아서는 매일 經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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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4875

    曺聚遠堂先生文集序 / 기록자료>고도서 / 이휘령
    芝山 曺好益의 형인 聚遠堂 曺光益(1537~1580)의 文集을 발간하면서 쓴 序文이다. 근본이 서야 道가 생겨나기 때문에 君子는 근본에 힘을 쏟아야 하는 법으로 道를 알지 못하고서는 그를 말할 수 없는 것으로, 그는 어릴 적부터 李滉에게서 「心經」을 배웠으며 孝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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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4876

    松溪李公文集序 / 기록자료>고도서 / 이휘령
    松溪 李亨男(1556~1627)의 文集을 발간하면서 쓴 序文이다. 그는 李滉의 三從孫으로 일찍부터 功令을 사양한 채 趙穆·柳成龍·權大器에게서 배우며 性理의 학문과 孝悌의 도리를 밝힘으로써 뒤에 퇴계학을 私淑하는 사람들의 귀감이 되었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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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4877

    權藏谷先生文集序 / 기록자료>고도서 / 이휘령
    藏谷 權泰一(1569~1631)의 文集을 발간하면서 쓴 序文이다. 그는 伯父 權春蘭의 養子이자 具鳳齡·金彦璣의 高弟로 講論을 통해 家學을 계승함과 동시에 陶山의 旨訣을 들었으며, 行義로는 金誠一의 기대를 받았고 문장으로는 柳成龍의 칭찬을 받았다. 특히 그는 程朱의 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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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4878

    全沙西先生文集序 / 기록자료>고도서 / 이휘령
    沙西 全湜(1563~1642)의 文集을 발간하면서 쓴 序文이다. 사람이 하늘로부터 곧고 바른 氣象을 부여받아 大任을 수행하지만 어려움에 처했을 때 기상만으로는 불가능한 법으로 반드시 독서 궁리를 통해 義·利, 公·私의 분별을 얻은 다음 분발하여 결단을 발휘해 光明正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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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4879

    朴舞溪文集序 / 기록자료>고도서 / 이휘령
    舞溪 朴敏樹(1792~?)의 文集을 발간하면서 쓴 序文이다. 五常의 性은 仁에 합쳐지고 仁의 실천은 孝를 근본으로 할 때 道가 생겨나는 법으로, 그가 바로 孝를 근본으로 하는 仁者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이 때문에 어머니가 병이 들어 밤중에 약을 구하러 갔을 때 猛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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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4880

    斗巖全公文集序 / 기록자료>고도서 / 이휘령
    斗巖 全榮(1609~1660)의 文集을 발간하면서 쓴 序文이다. 무릇 사람이 하늘로부터 뛰어난 재능과 성품을 부여받았다 할지라도 家庭의 敎訓과 師友의 講習이 없다면 眞知實踐이 어렵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는 천부적인 자질에다 先祖 濯溪 全致遠과 睡足堂 全雨의 家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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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4881

    守菴鄭公文集序 / 기록자료>고도서 / 이휘령
    守菴 鄭四震(1567~1616)의 文集을 발간하면서 쓴 序文이다. 그는 일찍부터 科擧에 뜻을 두지 않고 張顯光의 門人이 되어 뛰어난 학문적 능력으로 주위의 기대를 모았을 뿐만 아니라, 守庵 金熙淵과는 뒤에 그가 墓碣文을 쓸 정도로 절친하게 교유했다. 太白山의 깊은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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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4882

    孝廉齋先生李公實記序 / 기록자료>고도서 / 이휘령
    孝廉齋 李擎柱(1500~1597)의 實記를 발간하면서 쓴 序文이다. 그는 孝廉山 아래에서 生長하면서 자식으로서는 당연히 孝를 행해야 하고 선비로서는 당연히 廉恥를 알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항상 經傳을 옆에 두고 읽으면서 이치를 궁구하는 한편 德溪 吳健 및 立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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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4883

    雙槐軒辛公遺集序 / 기록자료>고도서 / 이휘령
    雙槐軒 辛守의 遺集을 발간하면서 쓴 序文이다. 成宗代 文運이 크게 떨치게 된 것은 佔畢齋 金宗直과 같은 인물이 남방에서 儒風을 창도한 것이 계기가 되었지만, 戊午士禍로 말미암아 그를 비롯한 門人들의 글들이 거의 인멸되어 찾을 수 없었었다. 그런데 그의 遺集 가운데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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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4884

    見齋李公文集序 / 기록자료>고도서 / 이휘령
    見齋 李公의 遺集을 발간하면서 쓴 序文이다. 그의 문장은 맑은 물소리처럼 단아하고 담박한 호수처럼 고고하여 이 우주에서는 더 이상 표현할 용어가 없다고 말할 정도로 중국의 董生의 그것을 방불하게 한다. 그러나 董生이 지은 적이 없는 그의 詩는 淸雅하면서도 激烈한 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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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4885

    思菴千公實紀序 / 기록자료>고도서 / 이휘령
    思菴 千萬里(1543~?)의 實紀를 발간하면서 쓴 序文이다. 중국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적부터 討賊에 뜻을 두고 弓馬에 힘쓰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鐵騎 2만을 거느리고 箕城·郭山·東萊 등지의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그는 일찍이 錢工部에게 배우며 「中庸」과 「大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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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4886

    台洞崔公實紀序 / 기록자료>고도서 / 이휘령
    임진왜란 당시 대구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한 崔誠의 實紀를 발간하면서 쓴 序文이다. 옛사람들이 장수를 선택할 때 勇將이나 智將보다 儒將을 선호한 것은, 평소 詩文과 禮說을 통해 義理를 강구하면서 生死의 선택을 마음에 두고 있다가 불행한 일이 닥치면 피눈물을 흘리면서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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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4887

    英陽金氏世譜重刊序 / 기록자료>고도서 / 이휘령
    중국 당나라 按節使 金忠을 시조로 하고 高麗 參理 忠晃을 중시조로 하는 英陽 金氏의 世譜를 重刊하면서 쓴 序文이다. 李滉이 외손으로서 世譜를 만든 적이 있음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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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4888

    龜峯權公文集序 / 기록자료>고도서 / 이휘령
    龜峯 權德麟(1529~1573)의 문집을 발간하면서 쓴 序文이다. 晦齋 李彦迪이 일찍이 大道를 밝혀 단절된 학문을 잇는데 기여했지만, 乙巳士禍를 계기로 師道를 自任하지 않음으로써 문하에서 도를 들은 사람이 드문 가운데 「海東淵源錄」에는 그만 유일하게 제자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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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4889

    孝泉朴孝子文集序 / 기록자료>고도서 / 이휘령
    孝泉 朴孝子의 문집을 발간하면서 쓴 序文이다. 그의 號가 孝泉인 것은 깊은 산속에서 廬墓를 할 때 우물이 말라 땅조차 척박한 곳임에도 그의 여막 앞에만 샘이 솟아오르는 것을 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겨 그렇게 부른데서 연유했다. 그는 崇禎處士의 후손으로 가정에서 이미 忠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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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4890

    東萊鄕校講會序 / 기록자료>고도서 / 이휘령
    동래부사로 재직할 때 儒風을 진작할 목적으로 講會를 열면서 쓴 序文이다. 鄕校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목적에서 설립되었고, 인재의 양성은 博學·審問·愼思·明辨·篤行에 있다는 것은 先賢들이 學規에서 밝힌 바가 있다. 그럼에도 근래에는 그것이 왜곡되어 선비들이 科擧와 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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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4891

    愛日堂續老會序 / 기록자료>고도서 / 이휘령
    1859년(철종 10) 7월 愛日堂에서 회합한 禮安의 60세 이상 원로 가운데 李時養·李彙壽·李彙楨·李晩受·李彙寧·李彙益·李彙冕·李彙元·李孝淳·李彙選·李彙炳·琴書述·李彙祚·李彙濟·李佐淳·李彙載·李彙蘭·李定淳·李彙廷 등 19명과, 이듬해 3월의 회합에서 들어온 金永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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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4892

    培山書院記 / 기록자료>고도서 / 이휘령
    丹城의 文益漸을 제향한 道川書院 인근에 그의 외손들인 淸香堂 李源(1501~1568)과 竹閣 李光友(1529~1616)의 위패를 봉안한 培山書院의 건립 전말과 함께 그들의 행적을 설명한 記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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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4893

    道生書院記 / 기록자료>고도서 / 이휘령
    安東府의 동쪽 30리 지점에 있는 臨淵齋 裵三益(1534~1588)을 제향한 道生書院이 그의 아들 琴易堂 裵龍吉(1556~1609)의 道生書堂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히는 등 서원 건립의 전말과 함께 그의 학문연원 및 경향을 소개한 記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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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4894

    忠孝旌閭後記 / 기록자료>고도서 / 이휘령
    임진왜란 당시 祖母와 함께 왜적에게 붙잡혀서 자신은 죽더라도 조모라도 살리려 했던 孝子이고, 郭再祐와 함께 의병활동을 전개한 忠臣인 簡齋 邊中一(1575~1660)의 旌閭閣을 重修한 것을 계기로 그의 7세손 邊正養의 부탁으로 기존 金邦杰이 쓴 序文의 내용 가운데 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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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4895

    烈婦金氏旌閭記 / 기록자료>고도서 / 이휘령
    士人 金鎭坤의 딸이자 李中鍵의 처인 烈婦 의성 김씨의 정려각을 세우면서 행적을 소개한 記文이다. 瓢隱 金是榲의 후손이기도 한 그녀는 남편이 병으로 눕자 몸을 정결하게 하여 하늘에 祝壽를 빌었고, 그럼에도 남편이 사망하자 피눈물을 흘리면서 자결하려 했으나 주위의 만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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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4896

    冶隱吉先生續集跋 / 기록자료>고도서 / 이휘령
    冶隱 吉再(1353~1419)의 문집 續集을 발간하면서 쓴 跋文이다. 李滉이 “鄭圃隱(夢周)가 東方 理學의 원조인데 비해 선생은 經傳을 토론하고 性理에 침잠하는 방법을 가르친 스승이다”고 한 말을 상기시키며 孝子·忠臣·心學·名儒의 조건을 두루 갖춘 인물로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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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4897

    徐良景公實記後識 / 기록자료>고도서 / 이휘령
    조선초기의 인물로 陽村 權近과 道義로서 교유했던 徐良景의 實記를 발간하면서 쓴 後識이다. 忠節과 勳業이 두드러졌다고 평가했다.
    출처 : 유교넷
  • 354898

    權睡軒先生文集跋 / 기록자료>고도서 / 이휘령
    戊午士禍에서 화를 입은 睡軒 權五福(1467~1498)의 문집을 다시 발간하면서 쓴 跋文이다. 그의 문집은 從孫인 草澗 權文海의 주도로 선조 18년(1585)에 발간된 적이 있으나, 세월이 오래된 데다 그의 피화사실을 알려주는 기록이 빠진 부분이 많아 보완해 재발간한
    출처 : 유교넷
  • 354899

    濯溪全公文集跋 / 기록자료>고도서 / 이휘령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킨 적이 있는 濯溪 全致遠(1527~1596)의 문집을 발간하면서 쓴 跋文이다.
    출처 : 유교넷
  • 354900

    蘆溪安公文集跋 / 기록자료>고도서 / 이휘령
    蘆溪 安遇의 문집을 발간하면서 쓴 跋文이다. 佔畢齋 金宗直의 門人으로 南孝溫 등과 道義로서 교유했으며, 慕齋 金安國의 추천으로 조정에 遺逸로 천거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출처 : 유교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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