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思峰李公墓碣銘幷序 / 기록자료>고도서 / 이휘령思峰 李騫(1527~1592)의 墓碣을 세우면서 지은 碣文이다. 李滉의 형인 李澄의 아들로 효성이 지극해 왕으로부터 「孝經」을 하사받았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장 金垓의 휘하에서 활약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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說書李公墓碣銘幷序 / 기록자료>고도서 / 이휘령琴鶴堂 李苙(1571~1615)의 墓碣을 세우면서 지은 碣文이다. 艮齋 李德弘의 손자로 寒岡 鄭逑에게서 배웠으며, 世子侍講院 說書를 지냈다. 伯父 善迃堂 李蒔의 大北政權과 타협하지 않은 정신을 계승하고, 永昌大君 獄事와 관련해 정구의 全恩論을 지지했음을 강조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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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峰金公墓碣銘幷序 / 기록자료>고도서 / 이휘령九峰 金守認(1563~1626)의 墓碣을 세우면서 지은 碣文이다. 밀양출신으로 한강 정구에게서 배웠으며, 永昌大君 獄事가 일어나자 유생의 신분으로 홀로 伏闕上疏하며 全恩論을 지지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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主簿李公墓碣銘幷序 / 기록자료>고도서 / 이휘령聾巖 李賢輔의 曾孫인 李芸(1568~1638)의 墓碣을 세우면서 지은 碣文이다. 도산서원의 기반을 다지는데 주력했으며, 「退溪集」편찬에도 깊이 관여했다. 원래 李仁行이 도산서원 재정으로 그의 묘갈을 세우기 위해 돌을 구입하고 李野淳이 갈문을 쓰도록 되어 있었으나, 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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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南金公墓碣銘幷序 / 기록자료>고도서 / 이휘령白南 金始鑌(1564~1609)의 墓碣을 세우면서 지은 碣文이다. 世子侍講院 弼善 등을 역임했으나, 廟堂의 추천으로 大司憲에 임명되어도 사직하고 주로 外職을 돌며 民怨의 해소에 주력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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拙庵孫公墓碣銘幷序 / 기록자료>고도서 / 이휘령拙庵 孫湍(1626~1713)의 墓碣을 세우면서 지은 碣文이다. 한강 정구에게서 배웠으며, 成均館 典籍 등을 역임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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嘉善大夫漢城府左尹鄭公墓碣銘幷序 / 기록자료>고도서 / 이휘령思軒 鄭來成(1744~1835)의 墓碣을 세우면서 지은 碣文이다. 이황의 제자 芝軒 鄭士誠의 후손으로, 登科 후 承文院 正字를 시작으로 兵曹參議·漢城府 左尹 등을 거쳤다. 司諫院 正言으로 있을 때 聖學에 힘쓸 것 등을 촉구한 六條疏를 正祖에게 올려 嘉納을 받은 적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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處士李公墓碣銘幷序 / 기록자료>고도서 / 이휘령處士 李鵬齡(1673~1721)의 墓碣을 세우면서 지은 碣文이다. 일찍이 擧業을 사양하고 蒼雪齋 權斗經과 訥隱 李光庭과 교유했으며, 山川을 유람하며 많은 詩文을 남겼고 독자적 筆法을 개발하기도 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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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均進士趙公墓碣銘幷序 / 기록자료>고도서 / 이휘령成均進士 趙弘復(1773~1841)의 墓碣을 세우면서 지은 碣文이다. 검소한 생활로 이웃을 돕는데 진력했으며, 만년에는 先親의 묘 옆에 望雲亭을 지어 廬墓와 함께 학문에만 쉴 새 없는 나날을 보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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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城郡守柳公墓碣銘幷序 / 기록자료>고도서 / 이휘령柳成龍의 8세손인 柳喆祚(1771~1842)의 장사를 지내면서 지은 誌文이다. 司憲府 監察을 비롯한 내직을 거치면서 역량을 인정받았고, 高城郡守 등 외직을 두루 거치면서 勸農興學으로 백성들의 칭송을 들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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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臯李先生行狀 / 기록자료>고도서 / 이휘령東皐 李蓂(1496~1572)의 行狀이다. 중앙의 요직을 두루 거치고 左議政에 이어 領中樞府事에 올랐다. 항상 곧은 자세로 尹元衡·李芑 등의 奸凶들과 타협하기를 거부했으며, 李浚慶 등과 함께 사림정치의 기틀을 다지는데 기여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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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吏曹判書行刑曹佐郞金公行狀 / 기록자료>고도서 / 이휘령司憲府 監察과 刑曹佐郞 등을 역임한 金士文(1502~1549)의 行狀이다. 冲齋 權橃로부터 元帥의 재목으로 기대를 받았으며, 성균관에서 李滉과 함께 공부하여 잇달아 과거에 합격했다. 義理에 밝았고 出處가 분명하여 尹元衡이 동년배로 만나기를 원했지만 거부하는 등 척신정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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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山齋許公行狀 / 기록자료>고도서 / 이휘령天山齋 許千壽의 行狀이다. 일찍부터 관직을 포기하고 李滉을 從遊하며 학문에만 전념했으며, 「心統性情圖」를 비롯해 「疑禮集說」·「朱書問目」·「羲經演義」등의 저술을 남겼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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樂天堂金公行狀 / 기록자료>고도서 / 이휘령樂天堂 金慶鸞(1545~1603)의 行狀이다. 惟一齋 金彦璣의 문인으로 權春蘭·金八元 등과 교유했으며, 文字와 義理로만 배를 채웠다고 할 정도로 학문에만 매진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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錦浦金公行狀 / 기록자료>고도서 / 이휘령錦浦 金是聲(1602~1676)의 行狀이다. 慕堂 孫處訥에게 배우며 文武를 겸비했으며, 昭顯世子를 따라 瀋陽으로 扈從하기도 했다. 咸鏡北兵馬使를 비롯해 捕盜大將, 會寧府使를 역임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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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兵曹參議洛厓金公行狀 / 기록자료>고도서 / 이휘령洛厓 金夢麟(1584~1637)의 行狀이다. 武將으로서 丙子胡亂을 당하여 斥和를 주장하며 끝까지 항전하다 동생 金夢熊과 함께 순절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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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宜軒趙公行狀 / 기록자료>고도서 / 이휘령五宜軒 趙咸世(1607~1690)의 行狀이다. 生六臣 趙旅의 후손으로 旅軒 張顯光에게서 배웠다. 평생을 名利와는 담을 쌓고 학문에만 매진했으며, 鄕約을 시행하며 향촌교화에 주력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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臥遊堂朴公行狀 / 기록자료>고도서 / 이휘령臥遊堂 朴晉慶(1581~1665)의 行狀이다. 旅軒 張顯光의 문인으로, 丙子胡亂 당시 항전을 위해 義兵을 규합하기도 했다. 평생토록 스승의 학문을 금과옥조로 받아들였으며, 「脩行錄」을 남겼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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眠雲齋李公行狀 / 기록자료>고도서 / 이휘령眠雲齋 李周遠(1714~1796)의 行狀이다. 葛菴 李玄逸의 증손으로 名利를 싫어하고 處事에 엄정했으며, 평생 聖賢의 글들을 읽고 心經·理氣·太極·陰陽의 묘미만 강구하는데 진력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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省窩尹公行狀 / 기록자료>고도서 / 이휘령省窩 尹重邦(1686~1745)의 行狀이다. 崇禎處士 遯齋 尹商老의 손자로 영조 4년(1728) 戊申亂이 일어나자 黃道熙·金汝鍵·李顯忠 등과 함께 壯士를 모아 반란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웠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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謙窩沈公行狀 / 기록자료>고도서 / 이휘령謙窩 沈就濟(1752~1809)의 行狀이다. 大山 李象靖에게 배우고 癡庵 南景義와 주로 講論했으며, 先賢들의 論說과 言行 등을 발췌해 음미하며 평생 潛心窮理에만 매진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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祖考通訓大夫白川郡守府君行狀 / 기록자료>고도서 / 이휘령祖父 李龜應(1729~1789)의 行狀이다. 李滉의 8세 祀孫으로 童蒙敎官·盈德縣令·白川郡守 등을 역임했다. 성품이 단정하고 깨끗해 집 앞에 梅花 10그루를 심어두고 十梅라 自號했으며, 손수 先賢들의 글을 발췌해 「常目編」을 엮어 학문의 지침으로 삼았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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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父君通訓大夫益山郡守府君行狀 / 기록자료>고도서 / 이휘령父 李志淳(1762~1807)의 行狀이다. 李滉의 9세 祀孫으로 禧陵參奉·漢城府判官·益山郡守 등을 역임했다. 성품이 온후하면서도 엄정했으며, 正祖의 특명으로 도산서원에서 試士를 열었을 때 致祭 참가를 사양하는 등 操身하는 면모를 보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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賜祭文 / 기록자료>고도서 / 이휘령1864년(고종 1) 10월 왕이 禮曹佐郞 張仁澤을 통해 그의 魂殿에 보낸 祭文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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家狀 / 기록자료>고도서 / 이휘령그의 行狀이다. 李晩綏가 썼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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墓碣銘幷序 / 기록자료>고도서 / 이휘령그의 墓碣文이다. 李晩寅이 썼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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跋 / 기록자료>고도서 / 이휘령그의 文集을 발간하면서 쓴 跋文이다. 許薰이 썼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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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집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顧齋 李槾의 문집. 10권 5책. 서문과 발문이 없어 정확한 간행 연대를 알 수는 없으나, 저자의 현손 李海德이 柳致明(1777~1861)에게 墓誌銘을 부탁한 점으로 미루어보아 19세기 말엽 이후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문집은 退溪와 大山, 葛庵, 密庵 등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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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墨洞幽居, 赴省試留別盆菊, 謁芝山曺先生廟宇不勝景行之思謹構蕪語奉呈洞主兼示四友堂主人,贈族孫童子望翕(宇常小字), 泛海吟二絶, 有感二絶, 中秋下澣偶過陶淵乃瓢隱先生棲息之地飛瀑騰空噴洒溪壑令人左右顧瞻錯愕之不暇而精舍所在之處平岡疊障環彎迤衍曠然以舒至此而心神翛然以靜世間囂煩不期除而自除因像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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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趙方伯(顯命,1731) 5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경상감사 歸鹿 조현명(1690~1752)이 한 고을의 時術의 책임을 맡으라고 명을 내린 일에 대해 사양하는 내용을 담은 글이다. 저자는 일찍이 학문에 뜻을 두기는 했지만 지혜가 밝지 못하고 행실이 돈독하지 못하여 헛되이 밥이나 축내고 옷이나 걸치고 있는 늙은이에 불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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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趙方伯 7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위의 편지와 같은 맥락으로 감사의 명을 거두어 달라는 내용이다. 무릇 師表의 책임을 맡을 사람이라면 德業을 갖추고 時措의 마땅함을 알아야 가능할 터인데, 저자에 대해 풍문으로 떠도는 평만을 믿고 인품과 학술의 정도에 대해서는 제대로 살피지 않은 채 발탁하는 것은 사람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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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趙方伯 8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虎溪書院에 가서 諸生을 시험했던 일과 강회에 참석하는 인원의 범위에 대해 언급하였다. 호계서원에 가서 제생을 모아 「西銘」‧「太極圖說」 및 선유들의 箴銘 등 여러 편을 강론하고 四子의 疑義를 간추려 問目을 만들어 제생의 학문 정도를 시험한 사실을 먼저 언급하였다. 한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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別紙 9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大學』 傳文 10장에서 好惡와 絜矩가 이 장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한 조현명의 주장에 대한 別紙이다. 이른바 絜矩라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好惡하는 마음을 推廣하는 것일 따름이므로 『章句』와 『或問』에서 段마다 혈구라는 글자를 들어서 好惡의 뜻을 발명하고 추광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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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趙方伯 12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大學』 絜矩에 대해 다시 기록하여 보낸다는 내용이다. 앞서 보낸 편지에서 촌사람의 좌충우돌하는 내용을 적어 부끄럽기 그지없고, 誤字가 많고 文理도 통하지 않는 곳이 있어 다시 絜矩에 대한 입장을 別紙에 적어서 보낸다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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別紙 14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조현명의 『大學』 絜矩章에 대한 주장에 대한 別紙이다. 朱子가 絜矩를 財用에 소속시키고 好惡를 用人에 소속시킨 것은 曾子의 본뜻을 잃은 듯하다. 조현명의 의견을 정밀한 분석이라고 인정한 뒤, 주자가 好惡로 용인을 풀이하고 絜矩로 재용을 풀이했지만 그 뜻은 실제로 서로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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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趙方伯 15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조현명의 厚誼에 황공해하며 답장하는 편지이다. 조현명의 好才愛士하는 뜻이 성심에 나온 것으로 거기에 조금이나마 보답하려고 하지만 저자가 이미 64세의 늙은이로서 가르침을 奉行할 정력이 없음을 개탄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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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趙方伯(1732) 15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조현명의 보살핌 덕분에 『言行錄』을 간행하여 退溪선생의 평소 언행을 후세에 모두 전할 수 있게 되었으니 후학들에게 보탬이 적지 않을 것임을 먼저 말하였다. 다음에서는 앞의 편지에서 몇 차례 언급되었던 絜矩章의 疑義에 대해 別紙에 적어 보낸다는 내용이 있고, 마지막에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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別紙 16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大學』 絜矩章에 대한 別紙이다. 傳文은 好惡를 이 장의 큰 題目으로 삼아 「南山有臺」와 「節南山」 두 詩가 好惡의 뜻을 관통하고, 財貨와 用人 등의 일로 조목을 삼아 同好惡의 뜻을 발명한 반면에 章句에서는 財貨 조목에서 한결같이 好惡란 글자를 언급하지 않다가 아래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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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趙方伯 19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언행록』을 開刊하는 일은 悅卿 李浹(1663~1737)이 적임자로 판단되니 이 사람에게 전적으로 의뢰할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개진하였다. 본론은 『大學』의 明明德과 正心章 註釋에 관련된 내용으로, 振伯 金聖鐸(1684~1747)에게 보낸 글 중에서 의심나는 점에 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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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趙方伯 20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大學』의 明明德과 正心章의 疑義에 대한 물음에 답변을 해 준 것에 감사하고, 絜矩章 好惡條目의 설에 대해서는 앞 편지에서 다 말했으므로 새로운 설이 없다고 하였다. 앞 편지에서도 말했듯이 저자는 이 부분에 대해 傳文과 章句의 뜻이 거울과 같아서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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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趙方伯 21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조현명이 경상감사의 임기를 마치고 조정으로 돌아갈 날이 멀지 않았으니, 저자가 맡고 있는 일을 면직시켜줄 것을 청하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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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趙方伯 22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조현명이 충청감사로 전임되어 가는 일을 앞두고 그동안 베풀어주었던 은혜에 대해 고마움을 표시하는 한편 아쉬움을 토로한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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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金方伯(始炯,1733) 22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경상감사 金始炯(1681~1750)에게 편지를 보내주고 물건까지 하사해 준 일에 대해 고마움을 표시한 편지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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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李繡衣(宗白) 23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암행어사 牧川 李宗白(1699~1759)이 미천한 사람에게까지 예우를 베풀어주어 고맙다는 내용을 담은 편지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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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權道一(重經) 23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靜黙堂 權重經(1658~1728)에게 선조의 墓碣文을 부탁하는 내용이다. 저자는 직접 가서 부탁하는 것이 예의에 맞는 줄 알지만 형편상 그리할 수 없는 상황을 먼저 말하고, 悅卿 李浹이 저자의 처지를 불쌍하게 생각하여 대신해서 간청해주리라 허락하였으니, 이 점을 살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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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李知府(德孚,1731) 24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안동부사 李德孚(1675~1733)에게 훈장직을 사면해 달라고 요청하는 편지이다. 저자는 비록 문장을 업으로 삼기는 했으나 입으로 배우고 귀로 기뻐하는데 불과하여 몸과 마음에 터득한 바가 없으며 게다가 나이도 많아 기력이 쇠한 상태이므로 훈장직을 맡을 수 없다고 사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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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李知府 24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훈장직을 사임하는 편지이다. 저자는 의리와 마음공부에 대해서는 무지몽매하며 時文과 科程에 대해서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고, 다만 앞사람들의 글을 외우는데 급급한 사람이라며 자신은 훈장의 직임을 맡기에 적임자가 아님을 재삼 강조하였다. 더욱이 명을 어겨 죄를 짓는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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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鄭寧海(來周,1732) 25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저자는 견해가 얕고 말이 어눌하여 며칠 동안 모시며 말을 나눴지만 정래주가 바라는 바에 만분의 일도 부응할 수 없다며 겸양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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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李悅卿(浹,1731) 26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무릇 講學에 있어서는 의리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데, 의리는 본디 정해진 體가 있으며 또 그 體段은 매우 크다는 점을 제시하여, 자기의 견해만을 앞세우지 말아야 본래의 진면목을 체득할 수 있다고 하였다. 李浹(1663~1737)의 호는 東厓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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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李悅卿 27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숙부 李玄逸의 忌日에 文會에 나가는 문제에 대해 언급한 편지이다. 사또가 저자를 문회에 초대한 것은 도의로 사귀고자 함이었으므로 저자는 처음에는 초대에 응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본 결과 ‘기일에는 평소의 업무를 하지 않는다[忌日不用]’는 『禮記』의 말이 있출처 : 유교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