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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德杓字說 29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이건의 字를 德杓로 짓게 된 이유를 적은 字說. 군자는 玉을 德에 비유하고 덕을 세움은 杓와 같은데, 너의 이름에 玉과 建이 있어 德杓라고 字를 지으니 切磋琢磨하기 바란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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權舜諧字說 30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權相皐의 字를 舜諧라고 짓게 된 이유를 적은 字說. 너의 이름 相皐에서 皐는 舜임금을 보필한 皐陶氏이고, 皐陶氏는 순임금을 보필함에 조화롭게[諧] 하지 않음이 없어 舜諧라고 자를 지으니 임금을 보필하여 조화롭게 하도록 힘쓰라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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坦窩金公遺集序 31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金興洛의 부탁을 받아 坦窩 金鎭華(1793~1850)의 문집에 붙인 서문. 공은 州郡을 다스리며 興學과 養士 등에 힘썼고 시를 즐겨 읊으며 산수를 그리워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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送李法祖責吳興序 32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法祖 李文稷이 吳興으로 유배가는 것을 전송하며 지은 서문. 근래 書院을 철폐할 때 臨川의 이문직 등 동지 14인이 서울에 가서 항소하다 돌아오자 관찰사가 이문직 등 7인을 호남에, 李絅在 등 7인을 강원도에 유배보내기로 하였다. 유배를 가더라도 뜻을 굳게 하여 독서에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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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皐金丈六十序 34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春皐 金筍의 61세를 축하하는 서문. 25년 전 高山講會에서 가르침을 받았으며, 61세가 된 지금도 志節이 높다. 올가을에 아들 秉謨를 만나 11월에 생신이라는 것을 들었는데, 지금 생신을 맞이하였기에 祝壽한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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是庵任公文集序 36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후손 任箕鍾의 부탁을 받아 是庵 任華世의 문집에 붙인 서문. 공은 시문이 閑澹하고 溫雅하여 문채가 절로 나니 오래도록 전해질 것이라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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洛江亭重建記 37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權 등이 洛江亭을 중건할 때 지은 기문. 7世祖 鶴林 權就福이 邑治 서쪽 搴芝山 아래 判書淵 위에 낙강정을 세웠는데, 이제 후손 권최 등이 중건하려 하기에 기문을 적는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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吉軒記 38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金鎭明이 吉軒을 건립할 때 지은 기문. 上舍 김진명이 吉軒을 세우기에 丹書의 敬勝 및 주돈이 圖說 등을 인용하여 利害와 禍福은 敬과 怠에서 나누어진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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訒庵記 39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金振玉이 訒庵을 건립할 때 지은 기문. 내 친구 인암 김진옥이 인암이라 편액을 달고 기문을 청하기에 訒은 仁이니 克己復禮‧恕‧四勿 등을 행함에 힘쓰라고 당부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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勉愚室記 40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金養鎭의 勉愚室에 대한 기문. 正伯 김양진은 안동 동쪽 忘智川 眠牛洞에 거처하는데, 마을 이름과 시내에서 취하여 호와 堂號를 勉愚라 하고 기문을 청하기에 愚의 의미에 대하여 쓰고 이에 힘쓰라고 당부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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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遊十小記(幷引) 41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臨河縣의 명승을 유람하고 白雲亭 등 10곳의 경관과 지리, 인물과 유래 등에 대하여 적은 기문. 안동 동쪽 臨河縣 30리에 명승이 있기에 이곳을 유람하고 10곳을 뽑아 경개를 적는다고 한 뒤 白雲亭‧臨川‧泗濱‧松石‧ 仙倉‧石門‧落淵‧瓢翁遺墟‧仙遊亭‧上禪庵 등의 경관과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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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瀾精舍重建記 46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金奭裕 등이 月瀾精舍를 중건할 때 지은 기문. 陶山 동쪽 5리에 月瀾庵 터가 있다. 올가을에 金奭裕와 金在裕 등이 중건하였기에 월란정사‧隱求齋‧觀善齋‧月暎軒 등의 이름을 지어주고 선배들이 弄月觀瀾하였던 뜻을 계승하자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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退逸軒記 48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權聖游의 退逸軒에 대한 기문. 乃城縣 兎谷에 사는 권성유가 退逸軒을 짓고 살기에 그를 방문하여 退逸의 의미에 대하여 문답한 뒤 그것을 바탕을 기문을 적는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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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視長沙記(1856) 49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長沙里를 지나가면서 본 풍경과 느낌을 적은 기문. 直渭川 아래 長沙里가 있는데, 柳致明 선생의 거처에서 5리 떨어져 있다. 선생이 전라도 智島에서 해배되어 돌아온 이듬해인 1856년 문인들과 모여 藏修할 곳을 찾아 이곳에 들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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鳴巖記(1856) 50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鳴巖을 유람하며 본 풍광과 느낌을 적은 기문. 長沙里를 유람한 뒤 藥山의 북쪽 水晶山의 서쪽에 있는 명암을 종자 30여인과 둘러보았는데, 풍광이 수려하고 農謳牧笛이 들려와 운치가 있었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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臨川書院重建記(1856) 50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臨川書院을 중건할 때 지은 기문. 1845년 靑城山 崦谷에 터를 잡고 공사를 시작하여 1855년 준공한 뒤 1856년에 金誠一 선생 등을 배향하였다. 선생은 퇴계의 학통을 이은 사림의 종장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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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懷堂記 52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晋山 姜上舍의 有懷堂에 대한 기문. 有懷는 본래 自號가 아니고 父母를 잊지 않는다는 뜻이니 강상사처럼 효성이 지극한 이에게는 알맞은 堂號라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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涵養齋記 54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白仲陽의 涵養齋에 대한 기문. 그대는 李徽逸과 李玄逸 선생이 살았던 곳에 거주하여 涵養의 의미를 잘 알고 있으리니 장차 서로 권면하자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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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懼齋金公實紀後 1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후손 金疇洛의 부탁을 받아 『懼齋金公實紀』 뒤에 적은 글. 공은 임진왜란 때 초야에서 의병을 일으켜 많은 공을 세웠으나 강호에서 살다가 생을 마쳤다. 이제 나라에서 襃獎을 하여 공적과 이름이 빛나게 되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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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主簿李公豎碣記事後 2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후손 金壽亨의 부탁을 받아 主簿 李芸大의 비갈을 세울 때의 기사 뒤에 적은 글. 1846년에 陶山의 사림들이 군자감 주부 이운대가 斯文에 공이 많기 때문에 비갈을 세워 사적을 적는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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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金仲賢西北行程記後 2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仲賢 金獻洛의 「西北行程記」 뒤에 적은 글. 김헌락이 포의의 몸으로 서북을 유람하며 풍속‧산수‧寺觀‧누대 등을 상세히 기록하여 가지고 돌아왔기에 글을 적는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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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先祖所與奇高峯別紙贐君範井邑之行因書其後 4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君範 李中建이 井邑으로 가는 것을 전송할 때 退溪가 高峯 奇大升에게 보낸 別紙를 적고 그 뒤에 써서 준 글. 이중건이 정읍에 부임하는 할아버지를 따라 가기에 퇴계가 고봉에게 준 별지의 내용을 적고 풀이한 뒤 좋은 사귐을 맺기를 청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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丹溪集跋 5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후손 河龍翼의 부탁을 받아 河緯地의 『丹溪集』에 붙인 발문. 선생의 문집에는 시 11편, 교서‧疏‧書‧策 각 1편이 실려 있지만 남효혼‧김성일‧장현광의 글과 『莊陵誌』 등에 사적이 자세히 실려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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錦水書堂重建上樑文 6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錦水書堂을 중건할 때 지은 상량문. 안동 임하현에 금수서당을 중건하면서 주변의 풍경과 중건 내력 등을 적고 학업에 힘쓰기를 당부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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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進士(宗喬)哀辭(幷序) 8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可庵 朴宗喬의 죽음을 애도한 글. 공의 부친은 우리 할아버지의 절친한 벗으로 두 집안은 世交가 있었는데, 어려서 진사시에 급제하였고 학행이 있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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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參奉(景褘)誄文 9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참봉 安景褘의 죽음을 애도한 誄文. 공은 일찍이 『順庵全書』와 『李子粹語』를 보내주어 강독의 바탕으로 삼도록 하였으며, 학행과 의리가 뛰어났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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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迺宇(胥鎬)誄文 11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迺宇 柳胥鎬의 죽음을 애도한 뇌문. 壽靜 柳鼎文의 손자로 성품이 仁厚하고 孝悌를 잘 행했으며, 나는 그대와 40년간 교제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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權元吉(福淵)誄辭 13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元吉 權福淵의 죽음을 애도한 뇌문. 우리는 사귐이 두터워서 『近思錄』‧『朱子語類』 등을 강독하고 시문을 수창하였는데, 지난해 겨울 酉山에 도착하여 그대가 몇 달 전에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슬퍼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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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生(應模)誄文 15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金應模의 죽음을 애도한 뇌문. 김응모는 나의 벗 繼孟의 아들로 어질고 도량이 넓어 기대를 받았는데, 일찍 죽어 슬프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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琴隱朴公延諡告由文(代本孫作) 16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琴隱 朴成陽이 시호를 받을 때에 本孫을 대신하여 지은 告由文. 박성양은 정몽주의 문인으로 고려 멸망 이후 의성에 은거하여 출사하지 않다가 왜구가 침입하자 원수로 출전하여 대승을 거두고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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權花原君影幀移奉告由文 17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花原君 權喜學의 영정을 태백산 남쪽으로 옮겨 봉안할 때 지은 告由文. 권희학은 李麟佐의 난 때 공을 세워 奮武功臣 3등에 책록되었는데, 이제 영정을 태백산 남쪽으로 옮겨 봉안한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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河丹溪先生墓安石告由文(代本) 17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丹溪 河緯地의 무덤에 석물을 안치할 때 本孫을 대신하여 지은 告由文. 하위지는 사육신 중의 한 분으로 충절이 뛰어나기에 석물을 마련하여 추모의 뜻을 표한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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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定齋先生文 18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스승 定齋 柳致明의 죽음을 애도한 제문. 선생이 나를 떠난 지 7개월이 지났건만 평소의 가르침을 잊을 수가 없으며 애도하는 마음이 더해간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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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晶山權公文 19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晶山 權載大의 죽음을 애도한 제문. 공은 才德이 뛰어나고 大義를 천명하였는데, 하늘이 일찍 목숨을 앗아가 슬프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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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東林柳公文 20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東林 柳致皓의 죽음을 애도한 제문. 공은 학덕이 높고 함양이 깊었으며, 외삼촌 유치명과 친밀하여 일찍이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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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外舅文 21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장인 權命夏의 죽음을 애도한 제문. 공께서 나의 疏坦을 기이하게 여기고 아껴주어 30년을 하루 같이 모셨는데 이제 누구를 모시고 질정을 받을지 모르겠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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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金參奉(在鼎)文 23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참봉 金在鼎의 죽음을 애도한 제문. 공이 병이 들어 3년 동안 몇 차례 찾아갔을 때 극진하게 대접하여 주었고 평소 家法이 올곧았는데, 이제 고인의 풍모를 어디에서 찾을지 모르겠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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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金承旨(鎭右)文 24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승지 金鎭右의 죽음을 애도한 제문. 金誠一의 후손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명성을 날리고 淸顯職을 두루 역임하였는데, 이제 죽어 슬프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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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金士範文 25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士範 金在九의 죽음을 애도한 제문. 공은 일찍이 문장으로 이름을 날렸고, 나는 일찍이 율수 1수를 지어 공의 처지를 슬퍼한 적이 있었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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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權時仲(行夏)文 26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時中 權行夏의 죽음을 애도한 제문. 나와 사귄 지 30년이 되고 평소 여러 책을 두루 보고 의리를 절충하여 학문의 방도가 있었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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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姜芸甫文 27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芸甫 姜稷의 죽음을 애도한 제문. 우리는 강의 좌우에 거처하면서도 서로 본 것이 한두 번일 뿐이었지만 마음은 서로 통하였고 학문에 보완이 있었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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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權淵淵(大淵)文 29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淵淵 權大淵의 죽음을 애도한 제문. 그대는 문단에서 이름을 떨치고 신의가 있었으며, 나는 18세 때에 그대의 집을 드나들며 사귐을 맺었는데 그대는 58년 동안 병으로 신음하다 기구하게 죽어 매우 슬프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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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李正凝文 30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正凝 李重鼎의 죽음을 애도한 제문. 스승 李秉遠의 증손으로 나는 그대가 어릴 때부터 보았는데, 文才가 있었으나 평소 병으로 괴로워하다 일찍 죽어 슬프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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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芝南再從祖文 32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재종조 芝南 李巖淳의 죽음을 애도한 제문. 廣瀨 李野淳의 동생으로 형제간에 우애가 있었으며 나이 90에도 학문에 매진하였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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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宗彦兄文 33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宗彦 李晩浩의 죽음을 애도한 제문. 일찍이 과거를 포기하고 형제가 독서하며 이치를 궁구하여 家學의 연원을 이었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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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再從兄(晩受)文 34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재종형 李晩受의 죽음을 애도한 제문. 몸가짐이 단정하고 家法을 계승하였는데, 병이 들어 醫藥을 일삼다가 갑자기 죽어 슬프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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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甥女李孺人文 35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甥女 李孺人의 죽음을 애도한 제문. 너는 가난하면서도 힘써 家人들을 잘 섬기고 孝友가 있어 오래 살리라고 여겼는데, 이처럼 빨리 죽어 슬프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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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族姪元達(中洛)文 36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족질 元達 李中洛의 죽음을 애도한 제문. 예전에 함께 四書를 읽은 적이 있었고, 너는 문호를 일으키려 과거에 힘쓰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어 슬프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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定齋先生墓識(1862) 1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定齋 柳致明(1777~1861)을 1862년(철종 13) 4월 13일 龜岫에 장례지낼 때 아들 柳止鎬의 부탁을 받아 지은 묘지. 晦文의 아들로 李象靖에게 수학하고 과거에 급제하여 三司 등을 역임하였으며 산림에서 도학을 강론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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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訓大夫行司諫院正言李公墓誌銘(幷序,1853) 1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李在立(1798~1853)을 1853년(철종 4) 12월 20일 長鬐에 장례지낼 때 지은 묘지명. 이언적의 10세손으로 43세에 급제하여 內資寺 直長, 사간원 정언 등을 역임하였고, 1849년 모친상 이후 벼슬을 그만두고 은거하며 시문으로 自娛하였다.출처 : 유교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