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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체: 에 대해 총641,751건의 자료가 검색되었습니다.
  • 355251

    李德杓字說 29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
    이건의 字를 德杓로 짓게 된 이유를 적은 字說. 군자는 玉을 德에 비유하고 덕을 세움은 杓와 같은데, 너의 이름에 玉과 建이 있어 德杓라고 字를 지으니 切磋琢磨하기 바란다고 하였다.
    출처 : 유교넷
  • 355252

    權舜諧字說 30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
    權相皐의 字를 舜諧라고 짓게 된 이유를 적은 字說. 너의 이름 相皐에서 皐는 舜임금을 보필한 皐陶氏이고, 皐陶氏는 순임금을 보필함에 조화롭게[諧] 하지 않음이 없어 舜諧라고 자를 지으니 임금을 보필하여 조화롭게 하도록 힘쓰라고 하였다.
    출처 : 유교넷
  • 355253

    坦窩金公遺集序 31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
    金興洛의 부탁을 받아 坦窩 金鎭華(1793~1850)의 문집에 붙인 서문. 공은 州郡을 다스리며 興學과 養士 등에 힘썼고 시를 즐겨 읊으며 산수를 그리워하였다.
    출처 : 유교넷
  • 355254

    送李法祖責吳興序 32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
    法祖 李文稷이 吳興으로 유배가는 것을 전송하며 지은 서문. 근래 書院을 철폐할 때 臨川의 이문직 등 동지 14인이 서울에 가서 항소하다 돌아오자 관찰사가 이문직 등 7인을 호남에, 李絅在 등 7인을 강원도에 유배보내기로 하였다. 유배를 가더라도 뜻을 굳게 하여 독서에
    출처 : 유교넷
  • 355255

    春皐金丈六十序 34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
    春皐 金筍의 61세를 축하하는 서문. 25년 전 高山講會에서 가르침을 받았으며, 61세가 된 지금도 志節이 높다. 올가을에 아들 秉謨를 만나 11월에 생신이라는 것을 들었는데, 지금 생신을 맞이하였기에 祝壽한다고 하였다.
    출처 : 유교넷
  • 355256

    是庵任公文集序 36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
    후손 任箕鍾의 부탁을 받아 是庵 任華世의 문집에 붙인 서문. 공은 시문이 閑澹하고 溫雅하여 문채가 절로 나니 오래도록 전해질 것이라고 하였다.
    출처 : 유교넷
  • 355257

    洛江亭重建記 37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
    權 등이 洛江亭을 중건할 때 지은 기문. 7世祖 鶴林 權就福이 邑治 서쪽 搴芝山 아래 判書淵 위에 낙강정을 세웠는데, 이제 후손 권최 등이 중건하려 하기에 기문을 적는다.
    출처 : 유교넷
  • 355258

    吉軒記 38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
    金鎭明이 吉軒을 건립할 때 지은 기문. 上舍 김진명이 吉軒을 세우기에 丹書의 敬勝 및 주돈이 圖說 등을 인용하여 利害와 禍福은 敬과 怠에서 나누어진다고 하였다.
    출처 : 유교넷
  • 355259

    訒庵記 39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
    金振玉이 訒庵을 건립할 때 지은 기문. 내 친구 인암 김진옥이 인암이라 편액을 달고 기문을 청하기에 訒은 仁이니 克己復禮‧恕‧四勿 등을 행함에 힘쓰라고 당부하였다.
    출처 : 유교넷
  • 355260

    勉愚室記 40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
    金養鎭의 勉愚室에 대한 기문. 正伯 김양진은 안동 동쪽 忘智川 眠牛洞에 거처하는데, 마을 이름과 시내에서 취하여 호와 堂號를 勉愚라 하고 기문을 청하기에 愚의 의미에 대하여 쓰고 이에 힘쓰라고 당부하였다.
    출처 : 유교넷
  • 355261

    東遊十小記(幷引) 41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
    臨河縣의 명승을 유람하고 白雲亭 등 10곳의 경관과 지리, 인물과 유래 등에 대하여 적은 기문. 안동 동쪽 臨河縣 30리에 명승이 있기에 이곳을 유람하고 10곳을 뽑아 경개를 적는다고 한 뒤 白雲亭‧臨川‧泗濱‧松石‧ 仙倉‧石門‧落淵‧瓢翁遺墟‧仙遊亭‧上禪庵 등의 경관과
    출처 : 유교넷
  • 355262

    月瀾精舍重建記 46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
    金奭裕 등이 月瀾精舍를 중건할 때 지은 기문. 陶山 동쪽 5리에 月瀾庵 터가 있다. 올가을에 金奭裕와 金在裕 등이 중건하였기에 월란정사‧隱求齋‧觀善齋‧月暎軒 등의 이름을 지어주고 선배들이 弄月觀瀾하였던 뜻을 계승하자고 하였다.
    출처 : 유교넷
  • 355263

    退逸軒記 48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
    權聖游의 退逸軒에 대한 기문. 乃城縣 兎谷에 사는 권성유가 退逸軒을 짓고 살기에 그를 방문하여 退逸의 의미에 대하여 문답한 뒤 그것을 바탕을 기문을 적는다고 하였다.
    출처 : 유교넷
  • 355264

    行視長沙記(1856) 49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
    長沙里를 지나가면서 본 풍경과 느낌을 적은 기문. 直渭川 아래 長沙里가 있는데, 柳致明 선생의 거처에서 5리 떨어져 있다. 선생이 전라도 智島에서 해배되어 돌아온 이듬해인 1856년 문인들과 모여 藏修할 곳을 찾아 이곳에 들렀다.
    출처 : 유교넷
  • 355265

    鳴巖記(1856) 50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
    鳴巖을 유람하며 본 풍광과 느낌을 적은 기문. 長沙里를 유람한 뒤 藥山의 북쪽 水晶山의 서쪽에 있는 명암을 종자 30여인과 둘러보았는데, 풍광이 수려하고 農謳牧笛이 들려와 운치가 있었다고 하였다.
    출처 : 유교넷
  • 355266

    臨川書院重建記(1856) 50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
    臨川書院을 중건할 때 지은 기문. 1845년 靑城山 崦谷에 터를 잡고 공사를 시작하여 1855년 준공한 뒤 1856년에 金誠一 선생 등을 배향하였다. 선생은 퇴계의 학통을 이은 사림의 종장이다.
    출처 : 유교넷
  • 355267

    有懷堂記 52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
    晋山 姜上舍의 有懷堂에 대한 기문. 有懷는 본래 自號가 아니고 父母를 잊지 않는다는 뜻이니 강상사처럼 효성이 지극한 이에게는 알맞은 堂號라고 하였다.
    출처 : 유교넷
  • 355268

    涵養齋記 54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
    白仲陽의 涵養齋에 대한 기문. 그대는 李徽逸과 李玄逸 선생이 살았던 곳에 거주하여 涵養의 의미를 잘 알고 있으리니 장차 서로 권면하자고 하였다.
    출처 : 유교넷
  • 355269

    書懼齋金公實紀後 1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
    후손 金疇洛의 부탁을 받아 『懼齋金公實紀』 뒤에 적은 글. 공은 임진왜란 때 초야에서 의병을 일으켜 많은 공을 세웠으나 강호에서 살다가 생을 마쳤다. 이제 나라에서 襃獎을 하여 공적과 이름이 빛나게 되었다.
    출처 : 유교넷
  • 355270

    書主簿李公豎碣記事後 2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
    후손 金壽亨의 부탁을 받아 主簿 李芸大의 비갈을 세울 때의 기사 뒤에 적은 글. 1846년에 陶山의 사림들이 군자감 주부 이운대가 斯文에 공이 많기 때문에 비갈을 세워 사적을 적는다고 하였다.
    출처 : 유교넷
  • 355271

    書金仲賢西北行程記後 2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
    仲賢 金獻洛의 「西北行程記」 뒤에 적은 글. 김헌락이 포의의 몸으로 서북을 유람하며 풍속‧산수‧寺觀‧누대 등을 상세히 기록하여 가지고 돌아왔기에 글을 적는다.
    출처 : 유교넷
  • 355272

    君範 李中建이 井邑으로 가는 것을 전송할 때 退溪가 高峯 奇大升에게 보낸 別紙를 적고 그 뒤에 써서 준 글. 이중건이 정읍에 부임하는 할아버지를 따라 가기에 퇴계가 고봉에게 준 별지의 내용을 적고 풀이한 뒤 좋은 사귐을 맺기를 청하였다.
    출처 : 유교넷
  • 355273

    丹溪集跋 5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
    후손 河龍翼의 부탁을 받아 河緯地의 『丹溪集』에 붙인 발문. 선생의 문집에는 시 11편, 교서‧疏‧書‧策 각 1편이 실려 있지만 남효혼‧김성일‧장현광의 글과 『莊陵誌』 등에 사적이 자세히 실려 있다.
    출처 : 유교넷
  • 355274

    錦水書堂重建上樑文 6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
    錦水書堂을 중건할 때 지은 상량문. 안동 임하현에 금수서당을 중건하면서 주변의 풍경과 중건 내력 등을 적고 학업에 힘쓰기를 당부하였다.
    출처 : 유교넷
  • 355275

    朴進士(宗喬)哀辭(幷序) 8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
    可庵 朴宗喬의 죽음을 애도한 글. 공의 부친은 우리 할아버지의 절친한 벗으로 두 집안은 世交가 있었는데, 어려서 진사시에 급제하였고 학행이 있었다.
    출처 : 유교넷
  • 355276

    安參奉(景褘)誄文 9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
    참봉 安景褘의 죽음을 애도한 誄文. 공은 일찍이 『順庵全書』와 『李子粹語』를 보내주어 강독의 바탕으로 삼도록 하였으며, 학행과 의리가 뛰어났다.
    출처 : 유교넷
  • 355277

    柳迺宇(胥鎬)誄文 11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
    迺宇 柳胥鎬의 죽음을 애도한 뇌문. 壽靜 柳鼎文의 손자로 성품이 仁厚하고 孝悌를 잘 행했으며, 나는 그대와 40년간 교제하였다.
    출처 : 유교넷
  • 355278

    權元吉(福淵)誄辭 13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
    元吉 權福淵의 죽음을 애도한 뇌문. 우리는 사귐이 두터워서 『近思錄』‧『朱子語類』 등을 강독하고 시문을 수창하였는데, 지난해 겨울 酉山에 도착하여 그대가 몇 달 전에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슬퍼하였다.
    출처 : 유교넷
  • 355279

    金生(應模)誄文 15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
    金應模의 죽음을 애도한 뇌문. 김응모는 나의 벗 繼孟의 아들로 어질고 도량이 넓어 기대를 받았는데, 일찍 죽어 슬프다고 하였다.
    출처 : 유교넷
  • 355280

    琴隱朴公延諡告由文(代本孫作) 16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
    琴隱 朴成陽이 시호를 받을 때에 本孫을 대신하여 지은 告由文. 박성양은 정몽주의 문인으로 고려 멸망 이후 의성에 은거하여 출사하지 않다가 왜구가 침입하자 원수로 출전하여 대승을 거두고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출처 : 유교넷
  • 355281

    權花原君影幀移奉告由文 17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
    花原君 權喜學의 영정을 태백산 남쪽으로 옮겨 봉안할 때 지은 告由文. 권희학은 李麟佐의 난 때 공을 세워 奮武功臣 3등에 책록되었는데, 이제 영정을 태백산 남쪽으로 옮겨 봉안한다고 하였다.
    출처 : 유교넷
  • 355282

    河丹溪先生墓安石告由文(代本) 17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
    丹溪 河緯地의 무덤에 석물을 안치할 때 本孫을 대신하여 지은 告由文. 하위지는 사육신 중의 한 분으로 충절이 뛰어나기에 석물을 마련하여 추모의 뜻을 표한다고 하였다.
    출처 : 유교넷
  • 355283

    祭定齋先生文 18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
    스승 定齋 柳致明의 죽음을 애도한 제문. 선생이 나를 떠난 지 7개월이 지났건만 평소의 가르침을 잊을 수가 없으며 애도하는 마음이 더해간다고 하였다.
    출처 : 유교넷
  • 355284

    祭晶山權公文 19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
    晶山 權載大의 죽음을 애도한 제문. 공은 才德이 뛰어나고 大義를 천명하였는데, 하늘이 일찍 목숨을 앗아가 슬프다고 하였다.
    출처 : 유교넷
  • 355285

    祭東林柳公文 20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
    東林 柳致皓의 죽음을 애도한 제문. 공은 학덕이 높고 함양이 깊었으며, 외삼촌 유치명과 친밀하여 일찍이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었다.
    출처 : 유교넷
  • 355286

    祭外舅文 21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
    장인 權命夏의 죽음을 애도한 제문. 공께서 나의 疏坦을 기이하게 여기고 아껴주어 30년을 하루 같이 모셨는데 이제 누구를 모시고 질정을 받을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출처 : 유교넷
  • 355287

    祭金參奉(在鼎)文 23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
    참봉 金在鼎의 죽음을 애도한 제문. 공이 병이 들어 3년 동안 몇 차례 찾아갔을 때 극진하게 대접하여 주었고 평소 家法이 올곧았는데, 이제 고인의 풍모를 어디에서 찾을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출처 : 유교넷
  • 355288

    祭金承旨(鎭右)文 24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
    승지 金鎭右의 죽음을 애도한 제문. 金誠一의 후손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명성을 날리고 淸顯職을 두루 역임하였는데, 이제 죽어 슬프다고 하였다.
    출처 : 유교넷
  • 355289

    祭金士範文 25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
    士範 金在九의 죽음을 애도한 제문. 공은 일찍이 문장으로 이름을 날렸고, 나는 일찍이 율수 1수를 지어 공의 처지를 슬퍼한 적이 있었다고 하였다.
    출처 : 유교넷
  • 355290

    祭權時仲(行夏)文 26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
    時中 權行夏의 죽음을 애도한 제문. 나와 사귄 지 30년이 되고 평소 여러 책을 두루 보고 의리를 절충하여 학문의 방도가 있었다고 하였다.
    출처 : 유교넷
  • 355291

    祭姜芸甫文 27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
    芸甫 姜稷의 죽음을 애도한 제문. 우리는 강의 좌우에 거처하면서도 서로 본 것이 한두 번일 뿐이었지만 마음은 서로 통하였고 학문에 보완이 있었다고 하였다.
    출처 : 유교넷
  • 355292

    祭權淵淵(大淵)文 29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
    淵淵 權大淵의 죽음을 애도한 제문. 그대는 문단에서 이름을 떨치고 신의가 있었으며, 나는 18세 때에 그대의 집을 드나들며 사귐을 맺었는데 그대는 58년 동안 병으로 신음하다 기구하게 죽어 매우 슬프다고 하였다.
    출처 : 유교넷
  • 355293

    祭李正凝文 30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
    正凝 李重鼎의 죽음을 애도한 제문. 스승 李秉遠의 증손으로 나는 그대가 어릴 때부터 보았는데, 文才가 있었으나 평소 병으로 괴로워하다 일찍 죽어 슬프다고 하였다.
    출처 : 유교넷
  • 355294

    祭芝南再從祖文 32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
    재종조 芝南 李巖淳의 죽음을 애도한 제문. 廣瀨 李野淳의 동생으로 형제간에 우애가 있었으며 나이 90에도 학문에 매진하였다고 하였다.
    출처 : 유교넷
  • 355295

    祭宗彦兄文 33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
    宗彦 李晩浩의 죽음을 애도한 제문. 일찍이 과거를 포기하고 형제가 독서하며 이치를 궁구하여 家學의 연원을 이었다고 하였다.
    출처 : 유교넷
  • 355296

    祭再從兄(晩受)文 34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
    재종형 李晩受의 죽음을 애도한 제문. 몸가짐이 단정하고 家法을 계승하였는데, 병이 들어 醫藥을 일삼다가 갑자기 죽어 슬프다고 하였다.
    출처 : 유교넷
  • 355297

    祭甥女李孺人文 35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
    甥女 李孺人의 죽음을 애도한 제문. 너는 가난하면서도 힘써 家人들을 잘 섬기고 孝友가 있어 오래 살리라고 여겼는데, 이처럼 빨리 죽어 슬프다고 하였다.
    출처 : 유교넷
  • 355298

    祭族姪元達(中洛)文 36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
    족질 元達 李中洛의 죽음을 애도한 제문. 예전에 함께 四書를 읽은 적이 있었고, 너는 문호를 일으키려 과거에 힘쓰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어 슬프다고 하였다.
    출처 : 유교넷
  • 355299

    定齋先生墓識(1862) 1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
    定齋 柳致明(1777~1861)을 1862년(철종 13) 4월 13일 龜岫에 장례지낼 때 아들 柳止鎬의 부탁을 받아 지은 묘지. 晦文의 아들로 李象靖에게 수학하고 과거에 급제하여 三司 등을 역임하였으며 산림에서 도학을 강론하였다.
    출처 : 유교넷
  • 355300

    李在立(1798~1853)을 1853년(철종 4) 12월 20일 長鬐에 장례지낼 때 지은 묘지명. 이언적의 10세손으로 43세에 급제하여 內資寺 直長, 사간원 정언 등을 역임하였고, 1849년 모친상 이후 벼슬을 그만두고 은거하며 시문으로 自娛하였다.
    출처 : 유교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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