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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政大夫刑曹參議柳公墓誌銘(幷序,1870) 3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柳致好(1808~1870)을 1870년(고종 7) 9월 안동에 장례지낼 때 지은 묘지명. 1852년(철종 3)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모친상 이후 세상의 영리를 멀리하고 학문에 매진하였으며 2남 2녀를 두었다.출처 : 유교넷 -
355302
黃處士墓誌銘 5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黃有永 등의 부탁을 받아 지은 勉齋 黃慶霖(1566~1629)의 묘지명. 黃喜의 후손으로 임진왜란 때에 兵糧을 모집하고 의병장으로 전투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으며, 전쟁이 끝난 뒤 禮山 安芳谷에 은거하여 孫處訥‧崔東集 등과 교유하였다. 1820년(순조 20) 鄕人들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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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舅權公墓誌(1858) 8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장인 權命夏(1796~1856)의 묘지. 權秉淵의 부탁을 받아 1858년(철종 9) 봉화 古世村에 이장할 때 짓는다. 공은 載經의 아들로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과거를 포기하고 시와 바둑을 즐겼고, 仁義勇量을 모두 갖춘 사람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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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姑孺人眞城李氏墓誌銘(幷序) 10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權秉淵의 모친이자 장모인 진성이씨(1790~?)의 무덤을 在沙洞에서 다른 곳으로 이장할 때 지은 묘지명. 19세에 권명하에게 출가하여 집안사람들을 잘 섬겼고, 평소 이황의 陶山曲을 즐겨 낭송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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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表兄文老墓誌(1872) 11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表兄 金壽翼(1815~1872)의 묘지. 夔裕의 아들로 李秉遠에게 수학하였으며 38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슬하에 3남을 두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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權禹弼墓誌(1868) 13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權定夏(1814~1868)의 묘지. 載球의 아들로 홀어머니를 효성으로 모시고 14세에 四書三經을 외웠으며, 1868년(고종 5) 5월 春陽縣 文幕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産繪의 딸 한양조씨로 슬하에 5남을 두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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恭人義城金氏墓誌銘(幷序,1867) 14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李彙根의 부인인 의성김씨(1783~1867)의 묘지명. 의성김씨는 弼模의 딸로 시부모를 잘 모시고 가산을 잘 경영하였으며 슬하에 4남을 두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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權禮仲墓誌銘(幷序) 16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權復淵의 묘지명. 泳夏의 둘째아들로 아버지가 1855년 상소를 올렸다가 전라도 荏子島에 유배되자 배종하여 가서 머물다가 유배에서 풀려 돌아온 지 2년만에 죽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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孺人延安李氏墓誌銘(幷序) 17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張鎭邦의 부인 연안이씨(1812~1837)의 묘지명. 建儒의 딸로 시집가서 임신했을 때 시어머니와 남편이 염병에 걸리자 지성으로 간호하였으나 끝내 남편이 죽자 35일 뒤에 목을 매어 죽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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孺人韓山李氏墓誌銘(幷序,1872) 19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李庭臣의 부인 한산이씨(1817~1872)의 묘지명. 所庵 秉遠의 손녀이자 秀德의 딸로 품행이 방정하였으며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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嘉善大夫工曹參判經筵特進官晶山先生權公墓碣銘(幷序) 20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晶山 權載大(1778~1859)의 묘갈명. 恒度의 아들로 靑山縣監‧掌苑署別提‧禮山縣監 등을 역임하였고, 1855년(철종 6) 1월 공조참판에 제수된 뒤 柳致明과 함께 연달아 상소하다 荏子島에 유배되었고 해배되어 돌아와 지내다 1859년 5월 25일 82세로 임종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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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興白氏世墓碑銘(幷序) 26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大興白氏의 世墓에 대해 白灝運의 편지를 받고 적은 비명. 佛母洞에는 珩‧文輔‧受廉 3世의 무덤이 있지만 비갈이 없어 이제 세우고자 한다는 청을 듣고 백씨의 世系 등을 적고 가문의 융성을 기렸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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肯構堂金公墓碣銘(幷序) 27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金商學의 부탁을 받고 지은 肯構堂 金瑞景(1693~1754, 자 天輝)의 묘갈명. 金冑衍의 아들이자 屛谷 權榘의 사위로 효성이 있고 학문에 매진하였으며, 부인은 醴川權氏로 3남2녀를 두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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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士贈主簿金君墓碣銘(幷序) 29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9세손 貞佑의 부탁을 받아 지은 사도시 주부에 추증된 의사 金得民(1585~1637)의 묘갈명. 어려서 武를 배우기로 결심하고 병서를 읽어 1621년(광해군 13)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병자호란으로 임금이 몽진하자 雙嶺에서 淸軍과 싸우다가 1637년(인조 15) 1월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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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餘堂裴公墓碣銘(幷序) 31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裴善源의 부탁을 받아 지은 三餘堂 裴行儉(1673~1632)의 묘갈명. 裴冕의 아들로 李光庭 등과 교유하여 문장으로 이름을 날렸고 부인은 文興의 딸 西原鄭氏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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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均進士寒皐李公墓碣銘(幷序) 33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성균관 진사 寒皐 李源祜(?~1859)의 묘갈명. 문재가 있었으나 42세에 성균관 진사가 된 뒤 두문불출하며 어버이를 섬기고 자식을 교육하는 데에 진력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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處士李公墓碣銘(幷序) 35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養歡亭 李寬儒(1802~1855)의 묘갈명. 어려서부터 예의가 바르고 집안의 여러 상을 예법에 맞게 치렀으며 利害에 담박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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處士安公墓碣銘(幷序) 37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殷溪 安國章(1685~1733)의 묘갈명. 부모를 정성껏 모시고 형 德章과 우애가 깊었으며 이웃에 吉凶事가 있으면 땅을 떼어서 도와주었다. 저술은 제목만 있고 글은 없는데, 說 7편과 箴 2편이 있다.출처 : 유교넷 -
355319
處士李公墓碣銘(幷序) 40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처사 李章儒(?~1849)의 묘갈명. 공은 子史‧金石‧法書‧名畵 등을 두루 알고 詩書에 능하였는데, 공이 죽은 지 21년 뒤에 아들 載基의 부탁을 받아 짓는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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醴泉郡守贈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鄭公墓表 42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예천군수로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에 추증된 昌臺 鄭大任(1553~1594)의 묘표.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權應銖‧朴毅長 등을 지원하여 永川‧龍宮‧比安‧蔚山 등지의 전투에서 승리하였고, 1593년(선조 26) 醴泉郡守에 임명되고 1594년 무과에 급제하여 적과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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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均進士定庵金公墓表(1864) 45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성균관 진사 定庵 金養楨(1785~1847)의 묘표. 어버이를 극진히 섬기고 李秉殷과 친교가 있었으며, 성균관 진사가 되었으나 경륜의 재주를 시험하지 못하고 죽었다. 1864년(고종 1) 아들 魯善의 부탁을 받아 짓는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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姜氏婦李孺人墓表 46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姜의 부인인 眞城李氏(1835~1860)의 묘표. 진성이씨는 종형 懲庵의 둘째딸이자 강면의 부인으로 시집간 뒤 10여 년 동안 규방의 행실이 있었으나 26세로 죽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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再從姪中明墓表 47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재종질 李中明(1829~1851)의 묘표. 文擧 李晩遇의 아들로 행실이 돈독하였으나 반년 동안 병을 앓다가 죽어 上里 田頭山에 장사지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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亡女柳氏墓表 47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柳淵愚의 부인이자 장녀 李氏(1840~1867)의 묘표. 나의 큰딸은 19살에 유연우에게 시집가서 부부생활을 한 지 10년 만에 죽었고 어린 자식 하나가 있으니 매우 슬프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355325
成均進士東里李公行狀 49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성균관 진사 東里 李五秀(1783~1853)의 행장. 어려서 문재가 있었고 1822년(순조 22) 성균관 진사가 된 뒤 이후 학문과 후진 양성에 진력하였다.출처 : 유교넷 -
355326
綯窩裴公行狀 54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綯窩 裴冕(1771~1838)의 행장. 어려서 재예가 있어 師友들에게 칭송을 받았고 1799년(정조 23) 향시에 합격하였으며, 부인은 絢의 딸 밀양박씨로 2남을 두었다.출처 : 유교넷 -
355327
再從祖考廣瀨先生家狀 59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재종조 廣瀨 李野淳(1755~1831)의 家狀. 龜烋의 아들로 李象靖‧金宗德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1783년(정조 7) 과장에 나갔다가 이후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心經』, 『退溪書』 등에 심혈을 기울였다. 1796년 潄石亭을 짓고 학문과 강학으로 소일하출처 : 유교넷 -
355328
挽詞 1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權璉夏‧姜晋奎‧金道和‧李銓‧姜 등이 저자의 죽음을 애도하고 그의 학행과 시문의 뛰어남에 대하여 읊은 13편의 만사가 차례로 실려 있다.출처 : 유교넷 -
355329
祭文 3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柳致任‧李文稷‧權璉夏‧姜楗‧金獻洛‧金興洛‧李晩運 등 7명이 저자의 죽음을 애도하며 지은 7편의 제문. 이만각은 退溪의 家學 연원을 계승하고 師友들에게 인정받은 나라의 뛰어난 선비로 쇠퇴한 世道를 만회할 만하였으나 병으로 갑자기 죽어 매우 애통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권출처 : 유교넷 -
355330
家狀 12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族弟 李晩燾(1842~1910)가 지은 李晩慤(1815~1874)의 家狀. 退溪의 11세손으로 彙運과 全州柳氏 사이에서 1815년(순조 15) 10월 10일 禮安 下溪里 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定齋 柳致明 선생에게 수학하고, 1865년(고종 2) 繕工監 假監役에 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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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狀 22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문인 柳廷鎬가 지은 李晩慤(1815~1874)의 行狀. 저자가 죽은 지 30여 년 뒤에 문인 李中轍과 堂姪 李中弘 등의 부탁을 받아 짓는다. 공은 퇴계의 11세손으로 1815년 10월 10일 예안 下溪里 집에서 태어났다. 외삼촌 定齋 柳致明 선생에게 수학하고, 183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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跋 1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각문인이자 族子인 李中轍이 지은 발문. 문인 李載基가 선생의 문집을 편집하였으나 간행하지 못하고 죽었으며 이어서 內弟 柳止鎬가 간행을 준비하던 중 일을 마치지 못하고 죽었다. 유지호의 장자 柳淵博이 간행을 주간하고, 柳廷鎬가 선생의 시문을 刪削하고 만사와 제문, 가장과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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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우당집 / 기록자료>고도서 / 김근오우당집 (五友堂集) 五友堂 金近의 문집. 木板本, 金道和, 1863, 4卷2冊:四周雙邊, 半郭 20.2×16.7㎝, 10行20字 註雙行, 內向二葉花紋魚尾:31.4×21.8㎝. 오우당집은 저자인 金近의 사후 100여년 뒤에 5대손인 檜村 金光雨(1714~1772)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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次幽悔賦(1598) 1 / 기록자료>고도서 / 김근7년간의 전쟁인 임진왜란의 참상을 술회하고 있다. 아울러 군주가 더욱 면려하시어 백성들을 보살펴 줄 것을 바라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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次悶己賦 1 / 기록자료>고도서 / 김근國事의 그릇됨과 王業의 위태로움에 대한 자신의 슬픈 탄식과 번민을 술회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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關王廟賦(1601) 2 / 기록자료>고도서 / 김근적벽대전에서 보인 관우의 굳세고 웅건한 기상에 비해 자신의 나약하고 보잘것없는 모습에 自嘲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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次別知賦憶亡友柳叔正(褍)(1613) 3 / 기록자료>고도서 / 김근柳成龍의 넷째아들이자 修巖 柳袗의 막내 동생인 친구 柳褍이 25세의 젊은 나이에 죽게 된 것을 슬퍼하면서 簞食陋巷에도 군자다운 풍모를 잊지 않은 모습에 경도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355338
詩 / 기록자료>고도서 / 김근禹知府(伏龍)見索構呈(丙申), 聞天將戰死述懷(戊戌), 偶成, 憶南施夫(憲), 雨後聞篴, 次老杜韻寄汝晦, 夜聞松聲, 新燕, 偶吟, 雨中書懷, 夢侍外王考寘酒松隱堂有感, 無題雜體, 病鷹, 述懷, 別權維重(克載)維遠(克堪)兄弟, 王父壽席, 秋夜懷友, 自歎二首, 敬次金河西勸學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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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 기록자료>고도서 / 김근敬次徐四佳居正漢都十詠(莊義尋僧, 濟川翫月, 盤松送客, 楊花踏雪, 木覓嘗花, 箭郊尋芳, 麻浦泛舟, 興德嘗蓮, 鐘街觀燈, 立石釣魚), 哀柳叔正(褍)三首, 春日途中有感, 病臥漢村有感三絶, 雨後書懷二絶, 述懷二絶, 修稧南庵敬次李西澗韻, 秋日潭上卽事, 更次, 次謝金義精, 次古출처 : 유교넷 -
355340
詩 / 기록자료>고도서 / 김근寓居內龜, 奉別咸平倅李壽翁(爾松)還郡, 孫淸遠(浣)挽, 琴處士子開(橃)挽, 金君平(壆)挽, 金尼山孝吉(慶祖)挽, 李直長伏龍挽二絶, 李君獻(瑛)挽, 權湖陽(益昌)挽, 金敎官(以志)挽, 春聲兒及龜孫赴南省思而賦之(丙戌), 申汝涵(詠道)挽, 次李宜仲新年老人詠, 李掌令彦瞻(崍출처 : 유교넷 -
355341
憂中答金義精(得礒)書 26 / 기록자료>고도서 / 김근金得礒(1570~1625)에게 답장한 편지이다. 여름에 抄해 놓은 글은 이미 李濂에게 부탁해서 金得礒에게 전해 달라고 했는데, 李濂이 南寭의 집에 들렀다가 몇 개월째 돌아오지 않아 전해주지 못한 것임을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金得礒가 후학들을 애쓰는 모습에 존경을 표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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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金義精書 27 / 기록자료>고도서 / 김근金得礒에게 답장한 편지로, 부친 金安繼가 金得礒에 부친인 金彦璣의 문하에서 수업하였음을 언급하면서 자신도 많은 가르침을 받은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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代府伯上方伯書(1605) 28 / 기록자료>고도서 / 김근安東府使를 대신하여 慶尙監使에게 올린 편지이다. 홍수가 나서 낙동강의 제방이 붕괴되어 큰 피해를 당한데다가 제방을 복구하는 일로 인하여 유언비어까지 횡행하자 이를 해명하는 내용으로 적절한 비유와 人心의 常道를 들어 安東人이 감사를 배척한다는 소문이 근거 없음을 밝히고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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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柳雲甫(嵒)文(1610) 29 / 기록자료>고도서 / 김근柳嵒의 죽음을 애도한 제문이다. 타고난 자질이 영특하고 덕행이 아름다웠음을 기리면서 亡者에 대한 자신의 북받치는 감정을 이루 다 형언할 수 없음을 전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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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柳洗馬叔正(褍)文(1614) 29 / 기록자료>고도서 / 김근柳成龍의 넷째아들이자 修巖 柳袗의 막내 동생인 柳褍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제문이다. 孝友와 信義를 몸소 실천하는 훌륭한 덕행을 지녔고, 簞食陋巷속에 즐거움을 찾는 인자의 면모를 지녔지만, 25세의 젊은 나이에 短命하였음을 애통해하고 있다. 柳褍은 旅軒 張顯光의 사위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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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李種善文(1615) 31 / 기록자료>고도서 / 김근李種善의 죽음을 안타까워 하고 있다. 친구였던 申謳는 고향으로 돌아왔고, 金允安은 서울에서 벼슬하고 있는데, 혼자서 이렇게 죽게 되어 애통하다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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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岐峯柳公(復起)文(1617) 32 / 기록자료>고도서 / 김근柳復起(1555~1617)의 죽음을 애통해 하는 제문이다. 유복기는 본관이 全州, 자는 聖瑞, 호는 岐峯이며, 城의 아들이다. 외조는 義城 金璡, 金誠一의 문인이며 鄭逑와 교유하였다. 임란에 金垓‧裵龍吉과 함께 倡義하였다. 대장 김해가 경주에서 전사하여 軍勢가 위태롭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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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族侄以立(是柱)文(1619) 32 / 기록자료>고도서 / 김근族侄인 金是柱(1575~1617)의 小祥을 맞아 지은 제문이다. 김시주는 본관이 義城, 자는 以立, 호는 開湖이며, 璡의 증손이자 涌의 아들이다. 외조는 眞城 李寯이다. 35세에 사마시 장원하였고, 4년 뒤인 39세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承政院注書를 거쳐 兵曹佐郞 역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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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弟婦完山柳氏文 33 / 기록자료>고도서 / 김근동생의 아내인 제수씨 全州柳氏의 죽음을 애통해하는 글이다. 집안에서는 孝悌를 실천하였고 친족들에게는 敦睦을 행하여 福德을 받을 것이라고 칭찬이 자자했는데, 시집 온지 6년 만에 癘疾에 걸려 죽게 됨에 마음이 너무 아프다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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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舍弟弘之文(1621) 35 / 기록자료>고도서 / 김근27세의 젊은 나이에 죽은 동생 金遠(1595~ 1621)을 슬퍼하면서 지은 제문이다. 5명의 형제에서 1602년(선조 35)에는 權氏에게 시집간 여동생이 죽고, 그 다음해에 막내인 남동생이 죽고, 1614년(광해군 6)에는 趙氏에게 시집간 여동생이 죽었는데, 이제출처 : 유교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