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트맵

통합검색

멀티필터

기본_발신자_성별
더보기 +
기본_발신자_수신자와의_관계
더보기 +
기본_수신자_발신자와의_관계
더보기 +
/ 통합검색 / 전체
: 전체: 에 대해 총641,751건의 자료가 검색되었습니다.
  • 355401

    與或人(本草不詳書面故闕之耳) 4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택룡
    어떤 사람에게 보낸 것인지 자세하지 않다. 얼마 전에 찾아뵙기는 하였지만 날이 저물어 마음을 다 터놓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從弟와 『大學』 몇 조목을 서로 뽑아서 시험해 보니 깨달은 것이 상당히 많았다고 하였다. 다만 이 종제는 성품이 노둔해서 영특한 기질이
    출처 : 유교넷
  • 355402

    與權松巢(宇) 5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택룡
    松巢 權宇(1552~1590)에게 보낸 편지이다. 오랫동안 소식이 막혔다가 그 마을에서 오는 사람을 통해 소식을 듣게 되어 마음이 놓인다고 하였다. 저자 자신은 우두커니 빈 산만 지키고 있으며, 또 자질이 본래 노둔하기 때문에 서책을 읽고 있지만 갈수록 더욱 아득하기
    출처 : 유교넷
  • 355403

    上琴松溪丈(軔) 6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택룡
    松溪 琴軔에게 올린 편지이다. 금인이 저자에게 四韻詩를 써 주었는데, 지나치게 칭찬한 것을 사양하는 내용이다. 시를 받아 보고 기뻐서 손에서 놓을 수가 없다고 하며, 천금이나 아름드리 구슬로도 바꿀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나이도 많고 덕도 높은 사람이 저같이 하찮
    출처 : 유교넷
  • 355404

    與權南川(斗文) 7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택룡
    南川 權斗文(1543~1617)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제 막 湖南에서 돌아와 士恬과 함께 快賓樓에 올랐는데, 저자도 달빛 받으며 찾아올 의향이 있는지 물었다. 내일 아침이면 일찍 출발하기 때문에 만나지 못할 것 같다고 하였다
    출처 : 유교넷
  • 355405

    與李艮齋(德弘) 8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택룡
    艮齋 李德弘(1541~1596)에게 보낸 편지이다. 溫溪에서 잠시 만났다가 곧 헤어져 오랫동안 쌓인 회포를 풀지 못해 서운하다고 하였다. 呂泉에 表石하는 일은 어떻게 처리했는지 물었다. 선생님의 祥期가 임박했으니 그때 만났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출처 : 유교넷
  • 355406

    陶山書院에 月川 趙穆을 從享할 때, 元位인 퇴계에게 告由한 글이다. 퇴계선생은 道學의 宗匠으로 끊어진 道統을 이어서 동방에 태양 같은 분이다. 정자의 학문을 이어받고 자나 깨나 주자학을 연구하여 斯文의 표준이 되었고 경전의 뜻을 밝혔다고 하였다. 선생의 풍문을 들으면
    출처 : 유교넷
  • 355407

    從享位月川趙公奉安文 9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택룡
    陶山書院에 月川 趙穆의 위패를 봉안할 때 올린 글이다. 선생은 천성이 근엄하고 학문의 연원이 깊었으며, 우뚝한 지조는 남들보다 뛰어났다고 하였다. 도에 나가는 독실함은 金石처럼 굳었다고 하였다. 선생은 끊어진 학문을 천명하였으며 퇴계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눈이 오나
    출처 : 유교넷
  • 355408

    祭月川趙先生文 9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택룡
    스승인 月川 趙穆의 제사에 올린 글이다. 선생은 山岳의 정기를 타고나 학문으로는 남의 스승이 되었고 많은 선비들이 존숭하였다. 퇴계선생이 학문을 강론할 때 여러 동문들과 스승으로 모시면서 뜻이 합치되고 도가 융성해 졌다고 하였다. 성품이 중후하고 실천에 독실하였으며
    출처 : 유교넷
  • 355409

    祭月川趙先生文 11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택룡
    月川 趙穆의 제사에 올린 글이다. 확실한 자질과 의젓한 도량으로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퇴계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익혔다고 하였다. 위로 정자의 학문에서 주자의 학문에 이르기까지 자세하게 분석하고 의문점은 퇴계선생에게 질의해서 바로 잡았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
    출처 : 유교넷
  • 355410

    月川趙先生路奠祭文 11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택룡
    月川 趙穆의 노제를 지낼 때 올린 글이다. 오랫동안 교육을 받아 은혜와 의리가 깊었는데 이제 상여를 바라보니 애통하다고 하였다. 오장이 찢어지는 듯하고 불러 본 들 어찌 미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한 잔 술로 奠을 올리며 길이 영결한다고 하였다
    출처 : 유교넷
  • 355411

    祭蒙齋李公(安道)文(與同門諸賢聯名) 12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택룡
    蒙齋 李安道(1541~1584)의 제사에 올린 글로 동문들과 연명으로 지은 것이다. 이안도는 퇴계 이황의 손자이다. 부친 李寯(1523~1583)이 세상을 뜬지 1년도 되지 않아 세상을 마쳤다. 그래서 그 家統을 전할 곳이 없다고 하였다. 가정에서 가르침을 받아 확고
    출처 : 유교넷
  • 355412

    祭賁趾南義仲(致利)文 13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택룡
    賁趾 南致利(1543~1580)의 제사에 올린 글이다. 남치리는 퇴계 문하에서 동문수학하였으며, 3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마쳤다. 성품이 맑고 깨끗하였으며, 학문이 게으르지 않았고 안분자족하며 道義를 즐겼다고 하였다. 기질이 용감하면서도 삼갈 줄 알았으며 禮學에
    출처 : 유교넷
  • 355413

    祭權定甫(宇)文 14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택룡
    松巢 權宇(1552~1590)의 제사에 올린 글이다. 권우도 남치리와 마찬가지로 퇴계문하에서 동문수학하였다. 1573년(선조 6)에 사마시에 합격한 이후 世子師傅를 역임하였으나, 痘疫으로 서울에서 향년 39세로 세상을 마쳤다. 앞에서 돈독했던 우정을 열거하고, 벼슬살
    출처 : 유교넷
  • 355414

    祭李參奉(文井)文 15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택룡
    李文井의 제사에 올린 글이다. 이문정은 奉化 석평리 사람이다. 기품이 순수하고 후덕하며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었다고 하였다. 처음에는 자제들의 정분으로 후에는 姻戚이 되어 봉화에서 몇 번 만났는데, 오랫동안 충후한 정분을 나누려 하였는데 갑자기 세상을 마쳐 안타깝다고
    출처 : 유교넷
  • 355415

    座右銘(幷敍) 16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택룡
    학자의 근심은 高遠한 곳에 힘쓰는데 있다고 하였다. 아래로 人事를 배우면 자연히 위로 天理를 통달할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下學공부를 하지 않고 上達하고자 하는 것은 불교의 깨달음과 같은 것이라 하였다. 조금씩 조금씩 마음의 장애를 없애고 도리를 터득해 나간다면 마
    출처 : 유교넷
  • 355416

    氣魄 17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택룡
    氣稟의 氣와 魂魄의 魄을 합쳐서 氣魄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사람이 기품과 기백을 모두 갖추고 있으나 늘 魄만 말하는 것은 魄이 陰氣의 精靈으로 유지하고 지키고 정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사람이 복록을 누리고 사업을 담당하는 것이 모두 기백이 하는 일이라고 하였
    출처 : 유교넷
  • 355417

    參奉東老沈公墓碣銘(光佐) 17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택룡
    공의 성명은 沈光佐요, 자는 彦輔, 호는 東老, 본관은 靑松이다. 1503년(연산군 9)에 태어났다. 서울에서 大谷으로 이사하고, 깊은 산중에 살면서 남들과 상대하지 않고 자락하였다. 조목이 쓴 輓詩에 “청송은 왕비를 배출한 곳 대대로 인재 많은데, 동로는 언제 대곡
    출처 : 유교넷
  • 355418

    東征詩序贈別天朝林少庵相公(鶴齡) 18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택룡
    54세 되던 1600년(선조 33) 가을에 接伴陪臣에 선발되어 賈遊擊將 군영에 있다가 겨울에 天兵頒料都監으로 喬桐에 머물 때에 명나라 策士 林鶴齡과 헤어질 때 준 서문이다. 東征詩序를 짓게 된 경위를 적고, 아울러 임학령과 헤어지면서 여기에 적힌 시와 서문을 보면 천
    출처 : 유교넷
  • 355419

    1604년(선조 37)에 지은 것이다. 永思庵은 저자의 족조인 金欽祖가 선친의 묘소를 수호하기 위해 만든 齋舍이다. 그후 자손이 각지에 흩어져 살고 세력이 쇠퇴하여 재사가 무너지게 되었는데, 후손들이 다시 논의하여 位田을 마련해서 忌祭祀와 四季祭祀를 받들 수 있도록
    출처 : 유교넷
  • 355420

    書小白山同遊錄後 21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택룡
    1612년(광해군 4)에 쓴 것으로 小白山을 유람하고 쓴 소백산동유록의 발문이다. 앞에서는 우리나라 명산에 대해 열거하고 마지막에는 유람한 곳과 함께 유람한 사람들을 열거하여 훗날 집안의 역사로 삼는다고 하였다
    출처 : 유교넷
  • 355421

    書淸涼遊山錄後 24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택룡
    淸涼山을 유람하고 쓴 청량산유록의 발문이다. 이 청량산이 중국 명산에 비하면 하나의 언덕에 불과하지만 이곳에 오르면 하늘로 솟아오르는 기상이 있다고 하였다. 높은 곳에 오르면 소견이 쉽게 만족하지 않고 처하는 것이 낮을 수 없다고 하였다
    출처 : 유교넷
  • 355422

    上月川先生書 25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택룡
    월천 조목에게 올린 편지이다. 어제 東谷에서 돌아와서 선생을 찾아 뵈려 하였는데 마침 집에 일이 생겨서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하였다. 돌아올 때 안동부사를 만났는데, 안동부사가 선생을 찾아뵙고 싶다는 말을 전해 달라고 했다 하였다
    출처 : 유교넷
  • 355423

    答李企庵(完)書 26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택룡
    企庵 李完(1512~1596)에 보낸 답장이다. 편지를 보내 주어 감사하다고 하였다. 염려해 주신 덕분으로 객지에서 관직생활을 잘 하고 있다고 하였다. 전에 말씀하신 일은 이미 잘 진행되고 있다 하였다
    출처 : 유교넷
  • 355424

    師友贈遺 1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택룡
    師友들 간에 받은 시문을 모아 놓은 것이다. 「答金施普」는 저자가 상례에 질문한 것에 대해 退溪先生이 답변한 것이다. 親喪이 있더라도 국상에 따라 복을 입어야 하며, 神主를 改題하는 일은 대상 하루 전에 해야 하며, 曾祖位에는 曾孫으로 祖位에는 孫으로 高祖位에는 玄孫
    출처 : 유교넷
  • 355425

    嶺南同道題名卷 4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택룡
    五峯 李好閔이 1601년(선조 34)에 기록한 것이다. 영남 사람 중에 서울에서 벼슬하는 사람이 同道會를 결성하고 掌樂院에 모였는데, 이 때 모인 26명의 관직과 출신지역을 적은 것이다. 저자는 奉列大夫 行蔚山都護府判官이고 禮安 출신이라 기록되어 있다
    출처 : 유교넷
  • 355426

    祭文 7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택룡
    陶山書院의 儒生들이 저자의 제사에 올린 글이다. 선성의 정기를 모아 태어나서, 월천문하에서 경전을 공부하여 깊은 뜻에 밝았고, 퇴계문하에서 大道를 들었다고 하였다. 학문이 넉넉해져서 벼슬에 나가 그 책임을 다했다고 하였다
    출처 : 유교넷
  • 355427

    遺事 7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택룡
    金載琡이 지은 저자의 유사이다. 앞에서는 저자의 후손이 영성해서 240여 년이 지난 오늘에야 후손들의 노력으로 저자의 유고를 정리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저자는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남들보다 뛰어났으며, 8세에 월천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매우 칭찬을 들었다. 장성해서는
    출처 : 유교넷
  • 355428

    墓碣銘 12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택룡
    許傳(1797~1886)이 쓴 저자의 묘갈명이다. 앞부분에서는 저자의 선대 가계와 官歷을 기록하고, 뒷부분에는 子孫에 관한 기록과 銘文이 기록되어 있다. 그 명문에서, “역사 유구한 예안김씨! 동정공에서 시작되었네. 시중과 평장사를 지나 자손들이 번성하였네. 공이 그
    출처 : 유교넷
  • 355429

    墓誌銘 15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택룡
    柳必永(1842~1924)이 쓴 저자의 묘지명이다. 앞부분에서는 저자의 가계와 관력을 기록하였고, 뒷에는 자손에 대해 기록하였다. 묘갈명과 내용이 비슷하다
    출처 : 유교넷
  • 355430

    墓道立石告由文(代本孫作) 18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택룡
    후손을 대신해서 柳必永이 쓴 것으로 神道에 비석을 세우게 된 연유를 고한 글이다
    출처 : 유교넷
  • 355431

    寒泉精舍廟宇上樑文 18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택룡
    李級(1721~1790)이 지은 寒泉精舍 廟宇 上樑 때 지은 글이다. 寒泉精舍는 저자를 위패를 봉안한 곳이다. 상량한 후에, 터가 견교해서 천 년을 내려가기를 바라고, 문풍이 진작되어 이 고을에서 뛰어난 유학자가 나길 바란다고 하였다. 향사를 지낼 때는 사모하는 마음
    출처 : 유교넷
  • 355432

    跋 26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택룡
    저자의 문집을 간행한 전말을 기록한 것으로 후손 金載銓이 1912년에 썼다. 저자가 세상을 마친지 300여 년이 지나서 후손 金胤元‧金琪燦‧金秉義 등의 노력으로 문집을 간행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출처 : 유교넷
  • 355433

    後識 27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택룡
    저자의 문집을 간행한 전말을 기록한 것으로 후손 金宗璧과 金胤源이 쓴 두 편이 실려 있다
    출처 : 유교넷
  • 355434

    창애집 / 기록자료>고도서 / 이중광
    창애집(滄厓集) 滄厓 李重光의 문집. 木板本, 李衡相‧李文相, 4卷2冊:四周雙邊, 半郭 19.2×16.4㎝, 10行20字 註雙行, 上二葉花紋魚尾:31.0× 21.0㎝. 이중광 사후 60여년 뒤에 간행되었는데, 서문과 발문이 없어 정확한 간행연대를 알 수 없다.
    출처 : 유교넷
  • 355435

    침계집 / 기록자료>고도서 / 조병시
    침계집(枕溪集) 枕溪 趙秉時의 문집. 石印本, 6卷3冊:四周雙邊, 半郭 20.3× 14.4㎝. 界線, 10行20字 註雙行, 內向二葉花紋魚尾:29.0×19.0㎝. 序文이 없으며 부록의 형식으로 從孫 趙鉀基가 쓴 跋文이 있다. 각 冊의 끝장에 正誤表가 첨기되어 있고,
    출처 : 유교넷
  • 355436

    하계집 / 기록자료>고도서 / 이가순
    하계집(霞溪集) 霞溪 李家淳의 문집. 石印本, 李鐸, 1903, 12卷6冊:四周雙邊, 半廓 20.0×15.1㎝. 有界, 10行22字, 注雙行, 上下向二葉花紋魚尾:28.0 ×19.0㎝. 권말에 鐸의 발문이 있다. 卷1∼4는 모두 시로 卷1에 129수, 卷2에 361
    출처 : 유교넷
  • 355437

    회곡집 / 기록자료>고도서 / 권춘란
    회곡집(晦谷集) 晦谷 權春蘭의 문집. 木板本, 權曄, 1833, 2卷2冊:四周雙邊, 半郭 20.4×14.8㎝, 10行22字, 內向二葉花紋魚尾:30.3×20.3㎝. 이 문집은 본집과 속집으로 나뉘어 있다. 본집 卷1‧2는 시‧만사 146수, 疏 1편, 書 10편,
    출처 : 유교넷
  • 355438

    五言詩 / 기록자료>고도서 / 권춘란
    柏潭精舍雜詠, 柏潭, 二樂軒, 藏源峽, 逗靑峯, 飮馬峯, 悅雲臺, 玩漪臺, 濯纓巖, 桃源洞, 繫舟巖, 伴鷗巖, 玉麟峯, 風詠峯, 紅霞峯, 臨鏡峯, 漱雲峯, 坎粹峯, 仙鶴峯, 金秀峯, 仙杏峯, 留月峯, 晩翠峯, 翠屛峯, 蓼花村, 陶店峯, 高麗潭, 望芝巖, 門巖, 撼月灘
    출처 : 유교넷
  • 355439

    七言詩 / 기록자료>고도서 / 권춘란
    題崔進士(雲海)壁上, 次迂川主人李(德弘)十松淸風韻, 朝天贈行, 題玄沙寺壁上, 壽席韻, 謝采惠竹種及百日紅二首, 竹, 百日紅, 次金雪月(富倫)會話韻二首, 次前人韻二首, 次前人韻二首, 復用虛字韻以謝雪月佳貺, 敬次退溪先生韻, 次惟一齋草堂韻十章, 奉送貳城主以善政陞敍拜咸安郡守將
    출처 : 유교넷
  • 355440

    辭弼善疏 23 / 기록자료>고도서 / 권춘란
    1590년(선조 23)에 司諫院獻納에 제수되었으나 노모를 두고 관직에 나아갈 수 없다는 내용의 사직소이다. 그 내용의 대강은 다음과 같다. 臣이 義城縣令에 제수되었는데 의성현은 집과 아주 가까웠으므로 어머니께서 관청에 오셔서 지극히 총애하였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복은
    출처 : 유교넷
  • 355441

    答權某書 26 / 기록자료>고도서 / 권춘란
    권모(權某)에게 답한 편지이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僕은 문중의 慶事에 가서 참관할 마음은 간절하지만 근래에 병이 심하여 식음을 전폐하였다. 또한 大暑에 먼 길을 출행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 평소의 한이 된다
    출처 : 유교넷
  • 355442

    答子泰一書 26 / 기록자료>고도서 / 권춘란
    아들인 泰一에게 답한 편지이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心病이 한 해 전부터 발동하였는데 봄이 되면서 점점 더 깊어졌다. 豊原에 갔다온 뒤로는 고생을 해서 그런지 열흘 동안을 자리에 누워서 몸조리하지 않으면 결국 소생할 방법이 없었다. 또한 평생 한 일을 생각해 보니
    출처 : 유교넷
  • 355443

    又 26 / 기록자료>고도서 / 권춘란
    아들 泰一에게 답한 편지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면 또한 물러나는 것은 관청의 일이 본래 그런 것이다. 마땅히 형세에 따라서 잘 하여라. 姪이 낙방한 것은 부지런히 공부하지 않은 所致이니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다. 또한 金根厚과 金憲卿의 일
    출처 : 유교넷
  • 355444

    又 26 / 기록자료>고도서 / 권춘란
    아들 泰一에게 답한 편지이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이곳에도 또한 평안히 지낸다. 다만 하늘이 오래도록 비를 내려주지 않아서 곡식 싹이 타들어가 말라 죽었으니 조상께 제사지낼 제수를 마련하는 것이 걱정이라고 적었다
    출처 : 유교넷
  • 355445

    又 27 / 기록자료>고도서 / 권춘란
    아들 泰一에게 답한 편지이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겼다. 이곳에서도 평안히 지내고 있다. 그런데 僧將이 出來한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반드시 큰 거사가 있는 것이냐. 한편으로는 기쁘고 다른 한편으로는 염려가 되는구나. 지금 儒生 20여 명이 龍山에서 그들을 대접하는데
    출처 : 유교넷
  • 355446

    又 27 / 기록자료>고도서 / 권춘란
    아들 泰一에게 답한 편지이다. 근자에 金奉祖‧金是柱가 登第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축하하는 조정의 보도가 근일에 절박하였다. 모자에 부는 흥취는 옅지 않지만 시내와 산이 또한 적막하니 또한 탄식할 만하다. 또한 한번 집에 오기를 고대한다면서 그 편지는 땅에 묻어 없애거
    출처 : 유교넷
  • 355447

    又 27 / 기록자료>고도서 / 권춘란
    아들 泰一에게 답한 편지이다.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집으로 올 기약이 멀지 않으니 기쁘고 기쁘다. 茱萸가 멀리서 오는데 生意가 있으니 기뻐할 만하다. 가을 이슬이 손님과 더불어 溪堂에서 같이 罷하니 아주 즐겁다
    출처 : 유교넷
  • 355448

    又 27 / 기록자료>고도서 / 권춘란
    아들 泰一에게 답한 편지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곳도 모두 무사하니 다행이다. 금일 새로 司馬 李生이 부임하였는데, 근일에 老親이 경사스런 잔치를 베풀려고 하자, 海物을 구하여 인편으로 보내왔다. 그러므로 편지를 써서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 된다
    출처 : 유교넷
  • 355449

    與某人書 28 / 기록자료>고도서 / 권춘란
    某人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홍수가 산과 언덕을 삼켜서 그 피해가 백성과 사물에 미치고 廬江도 또한 물이 불어나서 사당이 무너졌는데 겨우 位版만 보존할 수 있었다. 이것은 만고에 없는 變故이다. 참혹하고 애통함을 어찌 다 하소연하겠는가. 영덕에서
    출처 : 유교넷
  • 355450

    答金都事(澤龍)書 28 / 기록자료>고도서 / 권춘란
    都事 金澤龍에게 답한 편지이다.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먼저 안부를 묻지 못하여 부끄러움을 느낀다. 병든 몸이 분수에 넘친 총애를 받았으니 즉시 감사를 드렸어야 하는데, 안부 인사 편지를 오늘 발행한 것은 며칠 전에 우연히 설사와 구토 증세로 아주 고생을 하
    출처 : 유교넷
ㆍ페이지 이동: / 12836 go
AI 챗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