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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第一樓李判書(維秀)書 21 / 기록자료>고도서 / 정박莞爾 李維秀(1721∼1771)에게 올린 편지글이다. 무자년(1768)에 당시 충청도관찰사로 재직하고 있던 이유수와 雙樹亭에서 만난 뒤에 堤川, 丹陽, 永春, 淸風 등 네 고을의 명승지를 유람하였다. 몇 해 뒤에 이유수가 전에 유람을 하면서 지었던 시를 보내달라고 요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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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金川沙(宗德)書 23 / 기록자료>고도서 / 정박川沙 金宗德(1724∼1797)에게 답한 편지글이다. 宣城에 살던 從姪이 水災와 火災를 입었다는 소식과 함께 柳兄의 壽親宴에 참석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등의 사정을 언급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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慰金川沙書 24 / 기록자료>고도서 / 정박모친상을 당한 김종덕을 위로하는 편지글이다. 의리상 喪家로 달려가서 哭하고 弔喪함이 마땅하겠지만, 어버이의 병환이 깊은데다가 자신도 1개월 이상 병을 앓고 있는 처지이므로 거동하기가 어려운 형편이니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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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金川沙兄弟書 24 / 기록자료>고도서 / 정박양친을 改葬할 기일이 없어 애통하다며 김종덕 형제에게 보낸 편지글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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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金川沙書 25 / 기록자료>고도서 / 정박雲門에 밭을 개간하는 일의 전말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기는 하지만, 일의 형편이나 자신이 처한 상황 등을 감안할 때 결코 용이한 것이 아니라는 입장을 표명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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慰金川沙書 25 / 기록자료>고도서 / 정박김종덕의 季氏가 사망하자, 이를 슬퍼하고 위로하는 편지글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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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金川沙書 26 / 기록자료>고도서 / 정박김종덕이 정자의 기문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자, 정자 이름을 굳이 孺子라고 한 것에서 김종덕이 예봉을 감추려고 하는 은미한 뜻을 상상할 수 있다면서 孺子亭이라는 정자 이름과 함께 기문을 지어 보낸다는 내용이다. 자세한 내용은 권3의 「孺子亭記」에 보인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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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雨谷金進士(道行)書 27 / 기록자료>고도서 / 정박雨皐 金道行(1728~1812)에게 보낸 편지글이다. 한양에서는 邪學(天主學)의 뿌리가 아직 근절되지 않고 있으며 또 그와 관련하여 몇 사람이 죽는 일까지 벌어졌으니, 東齋에 있던 사람들이 斥邪扶正의 뜻으로 疏를 올려서 주상으로부터 비답을 받았다는 소식을 먼저 전하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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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金進士聖得(汝弼)書 28 / 기록자료>고도서 / 정박자신의 공부는 장기나 바둑에 견줄 정도의 것으로 변변치 않다고 겸양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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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李幼聞(重祖)書 28 / 기록자료>고도서 / 정박載寧人 藏窩 李重祖(1737~1806)에게 보낸 편지이다. 數咎庵 崔興遠(1705∼1786)이 사망하자, 小山 李光靖(1714~1789)이 魯林書院과 저자가 임원으로 있는 서원에서 제사를 올리는 의식을 함께 거행하자는 이야기를 꺼냈고 이에 대해서 여러 사람들이 동의를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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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金川沙書 29 / 기록자료>고도서 / 정박金宗德에게 답한 편지글이다. 먼저 한양에서 떠돌고 있는 자신의 신세를 이야기한 뒤에,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고향집으로 돌아가려고 한다는 계획을 말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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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內弟李由汝(宗和)書 29 / 기록자료>고도서 / 정박자신과 이종화의 출처에 대해 언급하였으며, 손자를 塔洞 臨淸閣으로 보내어 학업을 익히도록 해 달라고 부탁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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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柳周翰(崧祚)書 30 / 기록자료>고도서 / 정박柳崧祚가 글을 지어 보내어 평가를 해 달라고 부탁을 하자, 문장의 꾸밈이 너무 지나치고 맥락이 희미하다는 병통을 지적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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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趙學仲(友慤)書 30 / 기록자료>고도서 / 정박오랜 객지 생활에다가 매우 빈궁한 지경에 처한 자신의 처지를 되돌아보고, 이는 자신의 게으름에서 나온 것이므로 남을 탓하거나 원망하려는 마음은 없다고 말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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寄求兒輩書 32 / 기록자료>고도서 / 정박아들 世求에게 부친 편지글이다. 어머니의 병환은 어떠하며 관에 납부할 세금은 어떻게 마련하는지 등을 묻고 나서, 자신은 安義에 이르러 매장하는 일을 마친 뒤에 친척과 벗들에게 돈을 빌려서 말을 세내어 金山으로부터 秋風嶺을 넘어 초10일에 한양으로 들어온 경위를 설명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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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寄兒輩書 32 / 기록자료>고도서 / 정박집안 형편이 어렵기는 하지만 추위와 굶주림을 본래의 분수라고 여기고 학문을 닦는 노력을 그쳐서는 안될 것임을 당부하고, 떨어져나간 집의 벽에 흙칠을 잘 해서 어머니를 모시고 춥지 않게 겨울을 지내라는 말도 덧붙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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寄梅孫書 33 / 기록자료>고도서 / 정박할아버지의 사랑과 염려를 담아 보낸 편지글이다. 가난으로 인하여 고생을 하는 손자의 모습이 밥상을 대할 때나 과일을 대할 때나 서책을 대할 때나 사무치게 그립다고 한 뒤에, 謙從兄弟에게 찾아가서 가르침을 청하고 아우와 자식들을 잘 돌보아주라고 당부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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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寄梅孫書 33 / 기록자료>고도서 / 정박『小學』을 읽고 어른을 잘 섬기고 아이들과 다투지 말라는 가르침과 함께 글씨체가 너무 어지러우니 반듯하게 쓰도록 힘쓰라는 말도 곁들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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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權星耈書 34 / 기록자료>고도서 / 정박詩作을 공부하는 방법에 대해 權星耈에게 가르침을 준 편지글이다. 唐絶과 杜律을 공부하여 句法과 意趣를 익힐 것이며, 시 속에 도리를 담아낼 수 있어야 宋나라 濂洛 이후를 대강 말할 수 있게 된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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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郡烟霞錄詩序 1 / 기록자료>고도서 / 정박1768년(영조 44)에 충청도관찰사로 재직하고 있던 李維秀와 雙樹亭에서 만나 유람을 한 뒤에 충청도의 堤川, 永春, 丹陽, 淸風 등 네 고을의 명승지를 차례로 유람하였는데, 이를 통해 이 네 고을의 풍광을 靈境이라고 일컫는 것이 참된 말임을 알게 되었다. 이후 이유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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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日雙樹亭登高序 1 / 기록자료>고도서 / 정박1768년 9월에 熊州 公館에서 충청도관찰사 李維秀를 만난 뒤, 9일 重陽節에 두 세 사람의 文士와 함께 雙樹山城의 雙樹亭 인근에서 노닐면서 시를 읊조리고 술을 마셨던 일을 기록한 글이다. 쌍수정은 1624년(인조 2)에 인조가 李适의 난을 피하여 이곳에 와서 두 그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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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琴序 3 / 기록자료>고도서 / 정박셋째 외숙인 臥雪軒 李尙慶(1721~1786)이 생전에 아끼며 손에서 놓지 않았던 거문고에 대한 내력을 적은 글이다. 이 거문고는 固城李氏 집안에서 대대로 전해온 것이다. 저자의 외조부인 杏阜 李元紀(1689~1762)가 어릴 적에 줄과 기러기발이 제거된 채 다락 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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重陽後南園夜飮詩序 4 / 기록자료>고도서 / 정박韶州의 韻士인 元明氏 형제가 南園의 精舍에서 登高會를 가졌는데, 저자가 마침 그곳으로 가보니 마침 李季靈도 와 있었다. 그곳에서 저자는 거문고를 뜯고, 이계령은 노래를 부르고, 원명은 노래를 못해 무릎만 치고, 원명의 아우 寬汝는 竹枝詞를 외우고, 원명의 아들 彭哥는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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讀蘇文記(1769) 5 / 기록자료>고도서 / 정박큰 눈이 내렸던 1768년(영조 44) 겨울과 1769년(영조 45) 봄 사이에 內弟인 李宗和가 저자의 처소로 찾아와서 머물렀는데, 그의 소매에는 『東坡文抄』 1권이 있었다. 먼저 「策略」‧「任事」‧「法禁」‧「敎化」‧「材用」 등 10여 편을 읽은 이후에 大蘇와 小蘇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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孺子亭記 6 / 기록자료>고도서 / 정박川沙 金宗德이 자제들로 하여금 沙村에 정자를 짓게 하고는 저자에게 정자의 기문을 부탁하여 짓게 된 글이다. 孺子亭이란 정자 이름은 김종덕이 직접 명명한 것인데, 이는 後漢의 徐孺子 즉 徐穉를 애모한다는 의미에서이다. 서치는 자신의 힘으로 직접 농사를 지어 먹고살면서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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舟窩記 7 / 기록자료>고도서 / 정박烏川人 鄭撥이 夾室을 지어 천여 권의 책을 갈무리하고서 저자에게 室名을 청탁하여 지은 글이다. 배[舟]는 만물을 운반하면서도 수고롭다고 여기지 않고 천하의 나루터를 통행하니, 성현의 수많은 책을 읽음으로써 고금의 근원에 통달하기를 바란다는 의미에서 舟窩라는 이름을 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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某里齋重修記 9 / 기록자료>고도서 / 정박경남 거창에 있는 某里齋를 중수하면서 지은 기문이다. 모리재는 淸나라와 화의가 성립되자 자결을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서 죽을 때까지 이곳에 은거하였던 桐溪 鄭蘊(1569∼1641)을 추념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1778년에 중수를 하였는데, 같은 고을에 살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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滿月堂重建記 10 / 기록자료>고도서 / 정박경남 거창에 있는 滿月堂을 중건하면서 지은 기문이다. 만월당은 鄭贊甫라는 사람의 건물인데, 당 앞에 파놓은 연못에 달빛이 어릴 때 그 달빛이 당에 항상 가득하다는 의미에서 따온 것으로, 鄭蘊이 廢母論에 반대하다가 제주도에 유배를 가 있던 1615년에 정찬보의 부탁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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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王考遺墨跋 11 / 기록자료>고도서 / 정박외할아버지 固城人 杏阜 李元紀의 유묵 8字에 대한 발문이다. 이원기는 일찍이 그의 선조 杏村 李嵒(1297~1364)의 필법을 사모하였는데, 이암은 小學에 입학하였을 때 이미 글씨를 잘 쓴다고 일컬었을 정도였다. 하루는 꿈에 이암이 현몽하여 ‘杏樹壇邊王母城下’라는 大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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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嶺隱李戚(弘直)文 12 / 기록자료>고도서 / 정박固城人 嶺隱 李弘直(1724~1768)을 추도하는 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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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虛舟李戚兄文 12 / 기록자료>고도서 / 정박固城人 虛舟 李宗岳(1726~1773)을 추도하는 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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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三勝軒李戚祖(元靖)文 14 / 기록자료>고도서 / 정박固城人 三勝軒 李元靖을 추도하는 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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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外王考杏阜處士鐵城李府君文 14 / 기록자료>고도서 / 정박외조부인 固城人 杏阜 李元紀(1689~1762)를 추도하는 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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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第三舅臥雪軒李公(尙慶)文 16 / 기록자료>고도서 / 정박셋째 외숙인 固城人 臥雪軒 李尙慶(1721~1786)을 추도하는 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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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從父姊李氏夫人文(1786) 17 / 기록자료>고도서 / 정박1777년에 사망한 李氏夫人을 1786년에 남편과 합장할 때 지은 제문이다. 부인의 자식이 요절하여 外兄의 아우인 李宗和가 상례를 주관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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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江浦處士柳公(弘源)文 18 / 기록자료>고도서 / 정박全州人 江浦 柳弘源(1716~1781)을 추도하는 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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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烏川鄭振卿(夏宗)文 19 / 기록자료>고도서 / 정박從妹兄 烏川人 鄭夏宗을 추도하는 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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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鄭理之(撥)文 21 / 기록자료>고도서 / 정박「舟窩記」를 청탁했던 烏川人 鄭撥을 추도하는 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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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金正言直甫文 23 / 기록자료>고도서 / 정박金宗德의 아우로 義城에 거주하였던 安東人 金宗敬(1732~1785)을 추도하는 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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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李戚公直(弘榦)文 25 / 기록자료>고도서 / 정박40세의 나이로 단명한 固城人 李弘榦(1745~1784)을 추도하는 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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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大山李先生文 26 / 기록자료>고도서 / 정박韓山人 大山 李象靖(1711∼1781)을 추도하는 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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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鄭應必(重然)文(1792) 27 / 기록자료>고도서 / 정박저자보다 5~6세 적었던 鄭重然을 추도하는 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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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隨樂堂李戚叔(弘著)文 27 / 기록자료>고도서 / 정박固城人 隨樂堂 李弘著(1730~1791)를 추도하는 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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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金衛甫(弼東)文 28 / 기록자료>고도서 / 정박金弼東을 추도하는 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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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趙天賚(錫一)文 29 / 기록자료>고도서 / 정박趙錫一을 추도하는 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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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金德一(東道)文 30 / 기록자료>고도서 / 정박金東道(1734~1794)를 추도하는 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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涑水書堂上樑文 31 / 기록자료>고도서 / 정박竹溪에 涑水書堂을 건립한 뒤에 지은 상량문으로, 이곳에서 학문을 익혀서 학자들이 흥성하고 儒風이 진작되며, 事親忠君의 기풍이 배양되기를 기대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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玉氏齋舍上樑文 33 / 기록자료>고도서 / 정박安東 吉安에 宜寧玉氏의 재사를 건립한 뒤에 지은 상량문이다. 凝溪 玉沽(1382∼1436)의 不遷位와 그 후손들의 제사를 받드는 공간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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晩休亭上樑文 34 / 기록자료>고도서 / 정박安東人 寶白堂 金係行(1431~1517)이 무오사화를 겪은 뒤 관직에서 물러나 安東 吉安의 松巖 위에 세운 晩休亭을 후손들이 중수한 뒤에 지은 상량문이다. 선조의 親賢敬長의 정신을 이어받아 鄕黨의 명예를 길이 보존하기를 당부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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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南先生申公行狀 35 / 기록자료>고도서 / 정박石南 申濬(1678~1749)의 행장이다. 자는 文遠, 본관은 高靈으로, 申成用, 申包翅, 申檣, 申叔舟, 申泂 등이 그의 먼 조상이고, 拙齋 申湜, 申得滋, 申涬, 巷隱 申康濟가 고조부부터 부친이며, 어머니는 晉州人 鄭道應(1618∼1667)의 딸이다. 仲父 石軒公출처 : 유교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