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체: 에 대해 총641,751건의 자료가 검색되었습니다.
-
355901
答元兒(1805) 3 / 기록자료>고도서 / 서활보내온 편지로 무사함을 알겠다고 하고서 무리 속에 어울려 지낼 때 쉽게 몸가짐을 무너뜨리기거나 병이 나기 쉬우니 절실히 경계하라고 했다.출처 : 유교넷 -
355902
答元兒 3 / 기록자료>고도서 / 서활가능하면 마을 밖으로 나가지 말고 한 곳에 앉아 정신을 집중하고 의리를 이해하게 되면 잡된 생각도 자연히 사라지게 된다고 했다.출처 : 유교넷 -
355903
寄元兒 4 / 기록자료>고도서 / 서활문자 상의 공부 외에 나쁜 습관을 제거하고 마음을 공경히 하는 등의 실천 공부도 중요함을 강조했다.출처 : 유교넷 -
355904
寄元兒季兒允模 5 / 기록자료>고도서 / 서활먼 길을 떠난 아들 형제들의 안부를 묻는 서간인데, 여정에서 육체적인 건강을 유지하는 방법은 물론 마음가짐에 대해서도 아울러 충고했다.출처 : 유교넷 -
355905
寄兩兒 5 / 기록자료>고도서 / 서활선비의 자식된 이가 지켜야 할 처세와 관련해 규중의 처녀와 같이 진실되고 타당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했다.출처 : 유교넷 -
355906
答元兒(1882) 6 / 기록자료>고도서 / 서활성균관 앞의 마을에서 보낸 두 통의 편지가 같은 날에 도달했다고 했고 천리 여행길에서도 매일 해야 할 공부를 폐하지 않고 있다니 기특하다고 했다.출처 : 유교넷 -
355907
寄允兒 6 / 기록자료>고도서 / 서활유학의 공부는 고원함을 추구하지 않고 평이한 일상 가운데 마땅한 도리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했다.출처 : 유교넷 -
355908
答允兒 6 / 기록자료>고도서 / 서활스스로를 반성하는 내용의 편지에 대해 잘못을 제거하려는 생각이 있으면 곧 그것을 제거할 약을 찾을 수 있다고 했고, 형이 보내온 中庸에 관한 질문을 참고하라며 함께 부쳤다.출처 : 유교넷 -
355909
答允兒(1834) 7 / 기록자료>고도서 / 서활사람 사는 세상에서 병과 근심은 때로는 피할 수 없는 것이 있으니 그것을 자신의 향상을 위한 바탕으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출처 : 유교넷 -
355910
答孫達熙(1824),寄孫達熙,答孫達熙,寄孫達熙 7 / 기록자료>고도서 / 서활長孫인 徐達熙와 주고받은 서간 4통이다. 첫 번째 서찰에서는 첫술에 배부른 이치는 없으므로 灑埽應對부터 시작해 차근차근 배워 나아가면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라고 했고, 두 번째 서찰에서는 金幼澄이 후학들의 사표가 되기에 충분하므로 그에게 나아가 배우라고 했으며, 세출처 : 유교넷 -
355911
寄孫運熙,寄孫運熙秉熙 11 / 기록자료>고도서 / 서활매일 서로 면려하고 위로해 주면서 독서하고 사색할 것을 당부하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355912
厚庵先生言行私箚 12 / 기록자료>고도서 / 서활저자가 스승인 후암 권렴의 언행을 적은 글이다. 1773년(영조 49) 후암이 홍역을 피해 주왕산으로 들어가자, 12살의 어린아이로써 후암 모시고 공부를 배웠는데, 이때 후암의 나이 73세였다. 후암은 學問의 단계를 아는 데는 大學만 한 것이 없으며, 受用에 요긴한출처 : 유교넷 -
355913
草廬聞見錄 15 / 기록자료>고도서 / 서활서활이 1791년(정조 15) 11월 3일 川沙 金宗德(1724∼1797)의 문하에 들어간 이래 스승에게서 들은 학문방법, 인사의 도리와 의절 등에 관련된 내용들을 적은 것이다. 따라서 이를 통해 천사 김종덕의 인품과 학문경향을 잘 살펴볼 수 있다. 김종덕의 학문상출처 : 유교넷 -
355914
師門記聞 22 / 기록자료>고도서 / 서활이 글은 서활이 스승의 문하에서 배운 학문의 요체를 적은 것으로서 자신의 핵심 사상에 대한 천명이기도 하다. 즉, 스승인 川沙 金宗德(1724∼1797)이 『大學』을 학문방법의 핵심으로 둔 것을 계승해 『大學』 서문에 대한 분석을 시작으로 明德‧新民‧知止 등 핵심 개출처 : 유교넷 -
355915
闡幽錄 25 / 기록자료>고도서 / 서활이 글은 지극한 효성을 실천한 徐益彩, 형제 간의 도리를 실천한 南啓溟, 70평생 동안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조상의 묘소를 살핀 黃台澄 등 세 사람의 행적을 간략히 적은 것이다.출처 : 유교넷 -
355916
兒元模冠日書示成人說 31 / 기록자료>고도서 / 서활이 글은 아들 元模의 冠禮시 적어서 준 어른됨(成人)의 의의에 관한 설이다.출처 : 유교넷 -
355917
族譜序 34 / 기록자료>고도서 / 서활새로 간행하는 달성서씨 족보에 실은 서문이다. 인륜을 밝혀 일족의 화목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라는 간행 목적에 대한 소개를 시작으로 달성서씨의 유래, 그간의 족보간행 경과 현달한 인물 등을 언급했다.출처 : 유교넷 -
355918
送表弟趙學仲序 36 / 기록자료>고도서 / 서활50년간 교유한 表弟인 趙學仲을 보내며 지은 글이다. 처음에는 1년에 한두 번 혹은 2~3년에 한 번쯤 만나보다가 나이가 들고 몸이 쇠약해지고 나서는 4‧5년에 1번을 만나다가 금년 여름부터 자주 교유를 했는데 이제 다시 헤어지게 됨에 그를 보내면서 이 글을 짓는다고출처 : 유교넷 -
355919
南溪草堂記 37 / 기록자료>고도서 / 서활삼종형 徐學源이 지은 草堂의 유래를 적은 기문이다.출처 : 유교넷 -
355920
蒙山弊廬 38 / 기록자료>고도서 / 서활자신의 당호 유래를 적은 글이다. 집 뒤에 童山을 蒙山으로 이름을 바꾸고 집의 이름을 그렇게 부쳤는데, 그것은 주역 山下出泉의 蒙卦 象傳의 “果行育德”의 뜻을 취해 자신을 면려하려는 것이라고 했다.출처 : 유교넷 -
355921
邁埜堂記 38 / 기록자료>고도서 / 서활매야당의 유래를 적은 글로서, 邁埜라는 이름은 스승인 천사 김종덕이 일찍이 사용했던 말인데다 마을 이름과도 가까우며 힘써 노력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어 취한 것이라고 했다.출처 : 유교넷 -
355922
記蘇湖行 39 / 기록자료>고도서 / 서활1806년(순조 6) 1월 14일과 15일 蘇湖를 다녀온 일을 적은 일기이다. 蘇湖에 살고 있던 俛庵 李㙖(1739~1810)가 정조 연간에 올린 사도세자 추존 만인소 사건으로 섬으로 유배 간다는 소식을 듣고 벗들과 찾아가서 작별인사를 나누고 온 과정을 적었다. 이출처 : 유교넷 -
355923
遊白雲洞記 / 기록자료>고도서 / 서활1818년(순조18) 2월 22일 소수서원을 유람할 뜻을 정하고 그 다음날 20여 명과 함께 다녀온 전말을 기록한 일기이다. 소수서원은 주자의 백록동서원의 규정과 건물양식을 본떴다고 했다. 특히 바위에 새겨진 ‘白雲洞' 세 글자는 퇴계 이황이 썼고 그 밑의 ‘敬'자출처 : 유교넷 -
355924
遊玉溪記 / 기록자료>고도서 / 서활백운동을 다녀 온 며칠 후인 1818년 3월 26일에 옥계 일대를 유람한 일기이다. 함께 유람한 사람은 말을 탄 사람이 20명이고 걷는 자가 10여 명이 되었다고 한다. 저자가 두 번째 찾아간 곳인 玉溪는 경주에서 내려오는 물과 청송에서 내려오는 물이 합쳐서 못을 이출처 : 유교넷 -
355925
書先祖貞平公鶴巖先生遺錄後 1 / 기록자료>고도서 / 서활저자의 선조인 鶴巖의 遺錄에 붙인 후서이다. 학암은 포은 정몽주와 동갑내기 벗으로 立朝의 전말도 비슷하며, 포은이 선죽교에서 순절하기 3년 전에 죽었다고 했다. 학암은 역성혁명 당시에 27세의 나이로 언관으로서 이성계를 주살할 것을 청하였는데 공민왕이 일찍이 그 말을출처 : 유교넷 -
355926
書金白村遺集後 1 / 기록자료>고도서 / 서활白村 金文起(1399∼1456) 『백촌유집』의 후서이다. 김문기는 사육신과 더불어 단종을 향한 충성을 지키다 목숨을 잃었다. 서활은 여기서 南孝溫 『秋江集』의 「六臣傳」에 실린 사육신과 그렇지 않은 김문기의 같은 점과 차이점에 대해 이야기 했는데, 上王을 위한 自靖의출처 : 유교넷 -
355927
敬書曾祖考濯滄軒詩後 2 / 기록자료>고도서 / 서활從弟인 徐潑이 흩어진 시를 모으고 여러 선비들의 次韻 수십 편을 함께 모아 엮은 증조부의 시고를 간행하면서 지은 후서이다.출처 : 유교넷 -
355928
書洪君輓誄後 3 / 기록자료>고도서 / 서활洪河範이 輓祭를 보이면서 그의 아버지와 막내 삼촌 사이의 지극한 우애를 말한 데 감명받아 적은 글이다.출처 : 유교넷 -
355929
誄李春伯文 5 / 기록자료>고도서 / 서활北亭 李宗周(753∼1818)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로서, 형제간에 우애가 있었고 일가들에게 은혜로웠으며 자식을 가르침에 법도가 있었다고 회고했다.출처 : 유교넷 -
355930
誄柳景韓文 5 / 기록자료>고도서 / 서활雅谷 柳斗文(1761∼1822)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로서, 망자의 인품을 기린 후에 남은 아들이 사람됨이 뛰어나고 文學에서 빼어남이 있으니 반드시 좋은 결과로 나타날 것이라고 했다.출처 : 유교넷 -
355931
誄權尹若(商美)文 6 / 기록자료>고도서 / 서활고결한 뜻과 단정한 용모를 지녔고 문장에도 뛰어나 머잖아 명성을 얻을 것으로 기대되었는데, 겨우 2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며 안타까워했다.출처 : 유교넷 -
355932
誄鄭叔顒文 6 / 기록자료>고도서 / 서활집에서 시와 예의 가르침을 받았고 스승으로부터 계발을 받아 원래 남들과 달랐으며 제자백가의 책도 널리 보았던 사람을 영원히 볼 수 없게 되었다면 애도했다.출처 : 유교넷 -
355933
誄柳伯孝(致孝)文 7 / 기록자료>고도서 / 서활壺谷 柳範休(1744∼1823)의 손자인 유치효를 애도하는 글이다.출처 : 유교넷 -
355934
祭先師厚庵權先生文 8 / 기록자료>고도서 / 서활스승인 후암 권렴에게 올린 제문인데, 어릴 적 사제의 연을 맺어 스승 가까이서 배움을 받던 일을 회고했다.출처 : 유교넷 -
355935
祭先師川沙金先生文 9 / 기록자료>고도서 / 서활스승인 천사 김종덕에게 올린 제문인데, 고매한 인품과 학덕을 칭송했다.출처 : 유교넷 -
355936
祭東巖柳先生文祭 9 / 기록자료>고도서 / 서활東巖 柳長源(1724∼1796)에게 올린 제문이다. 湖門의 高足이자 큰 道와 큰 德을 추구하고 공부의 노력이 깊었고 배움을 추구함이 넓었다고 했다.출처 : 유교넷 -
355937
祭晩谷趙公文 9 / 기록자료>고도서 / 서활晩谷 趙述道에게 올린 제문이다.출처 : 유교넷 -
355938
祭二可堂趙公文 9 / 기록자료>고도서 / 서활趙公은 좋은 가문에 태어난 호걸로서 문학에 조예가 깊었다며 고인을 추모했다.출처 : 유교넷 -
355939
祭季舅玉井趙公文 11 / 기록자료>고도서 / 서활어머니의 누이로서 외삼촌이면서 저자의 고모가 공의 부인이서 고무부가 되므로 특히 골육의 정이 더욱 깊어 추모의 정이 더하다고 했다.출처 : 유교넷 -
355940
祭金龜窩文 11 / 기록자료>고도서 / 서활龜窩 金宏(1739년~1816)의 영전에 올린 제문이다. 대산 이상정 문하에 들어 학문과 벼슬이 모두 높았던 저자를 기리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355941
祭晩洲權公文 12 / 기록자료>고도서 / 서활스승인 후암 권렴의 아들인 晩洲 權以復(1740~1819)의 영전에 바친 제문이다.출처 : 유교넷 -
355942
祭李廣瀨健之文 12 / 기록자료>고도서 / 서활廣瀨 李野淳(1755~1831) 영전에 바친 제문이다. 자신과는 사귐이 가장 밀접했고 총명함과 우둔함의 차이는 있었지만 서로가 마음이 맞아 함께 절차탁마했다고 적었다.출처 : 유교넷 -
355943
祭權叔尊文 13 / 기록자료>고도서 / 서활가식이 횡횡하는 末俗에 물들지 않고 天眞을 간직하고 허식이 없으며 말이 질박했다며 고인을 추모하는 제문이다.출처 : 유교넷 -
355944
祭族叔(思默)文 14 / 기록자료>고도서 / 서활집안 어른의 영전에 올린 제문으로 밖으로의 꾸밈보다 내면을 가꿈에 치중한 고인의 덕을 기렸다.출처 : 유교넷 -
355945
先妣孺人咸陽朴氏墓誌 15 / 기록자료>고도서 / 서활어머니 咸陽朴氏의 묘지명이다. 1752년(영조 28) 1월 5일 태어나 저자의 아버지에게 繼室로 시집와 근검함으로 집안을 잘 다스렸고 자녀들을 양육하다 1781년(정조 5) 향년 30세로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출처 : 유교넷 -
355946
叔弟處士君墓誌 16 / 기록자료>고도서 / 서활막내 동생인 徐瀅의 묘지명이다. 1768년(영조 44) 4월 11일 태어나 1825년(순조 25) 12월 1일 1남 2녀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출처 : 유교넷 -
355947
通政大夫濟州牧使松窩李公行狀 17 / 기록자료>고도서 / 서활濟州牧使를 지낸 松窩 李從允의 행장이다. 본관이 경주인데, 1431년(세종 13) 慶州 月南里에서 태어났다. 1462년(세조 8)에 司馬兩試에 합격하고 1468년 문과에 급제해 벼슬에 나아간 후 내외직을 두루 거쳤다. 향년 64세로 세상을 떠났고 靑松 文居驛 북쪽 산출처 : 유교넷 -
355948
德溪李公行狀 20 / 기록자료>고도서 / 서활李俊成의 행장이다. 본관이 경주이고 1570년(선조 3) 정월 13일 태어났다. 여헌 장현광이 기거한 立巖과 屛巖을 찾아 배웠으며 東溪 趙亨道, 方壺 趙遵道, 河陰 申楫 등과 막역하게 사귀었다. 1633년(인조 11) 4월 11일 향년 63세로 3남 2녀를 남기고 세출처 : 유교넷 -
355949
成均進士玉井趙公行狀 22 / 기록자료>고도서 / 서활玉井 趙相震은 安德縣에서 1727년(영조 3) 정월 12일 태어났다. 같은 마을의 厚庵 權濂에게 나아가 배웠다. 1795년(정조 19) 1월 11일 향년 69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后配 善山金氏 金景玉의 따님과의 사이에 2남 5녀를 두었다.출처 : 유교넷 -
355950
先祖制處使龜溪先生行狀 25 / 기록자료>고도서 / 서활선조인 龜溪 徐沈의 행장이다. 아버지는 鶴巖 徐鈞衡으로 1360년(공민왕 9)에 등제하여 관직이 政堂文學에 이르렀고 어머니는 光山郡夫人 金氏로 文敬公 金遠鳴의 따님이다. 나면서 비범했고 성격이 仁厚했으며 자라서는 圃隱先生의 문하에 나아가 君子의 학문을 배웠다. 외직을출처 : 유교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