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宗姪能彦鳴國哀辭 22 / 기록자료>고도서 / 권방행실이 깨끗하고 뜻이 굳었던 종질 권명국의 죽음을 슬퍼한 글이다. 권명국의 글 솜씨와 재주는 넉넉했으나 겨우 知非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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族姪吉甫襆哀辭 22 / 기록자료>고도서 / 권방17세의 나이로 요절한 족질인 권복의 죽음을 슬퍼한 글이다. 권복은 죽은 지 사흘이 되었는데도 생시와 다름이 없었고, 숙부의 꿈에 나타나 ‘선조의 기일이 멀지 않으니 속히 初終의 예를 마치고 제사를 지내라’라고 부탁하였으며, 또 아내에게 현신하여 ‘나의 죽음으로 추원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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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日進東仁哀辭 24 / 기록자료>고도서 / 권방갑과에 올라 선릉 직장‧와서 별제‧기전령 등을 역임했던 이동인의 죽음을 슬퍼한 글이다. 이동인은 원래 시를 잘 하는 것으로 이름이 났으나 ‘시는 마음을 꺾고 물태를 꾸미는 것으로 심신에 도움이 되지 않고 志業에 방해만 된다’면서, 오로지 성현의 말씀이 담긴 글을 음미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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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甥哀辭 26 / 기록자료>고도서 / 권방25세에 소과에 합격하여 29세로 세상을 떠난 생질 김종의 죽음을 애통해하는 글이다. 김종은 대산 이상정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영남 선비로서 장래가 촉망되는 선비였다. 저자는 자신의 아들과 동갑인 김종을 볼 때마다 친아들같이 여기면서 노후를 의탁하고자 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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權聖爲身度哀辭 27 / 기록자료>고도서 / 권방유양옹의 아들인 육유재 권신도의 죽음을 슬퍼한 글이다. 저자는 ‘도가 떨어진 지 오래되어, 어진 자는 수를 누리지 못하고, 현자는 지위를 얻지 못하고, 덕이 있는 자도 반드시 후사가 있는 것이 아니다’ 하면서 그 원인을 氣數로 돌리고 있다. 특이하게 애사의 말미에 5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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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士能奭祚哀辭(1803) 29 / 기록자료>고도서 / 권방사십 전에 세상을 등진 유석조의 죽음을 슬퍼한 글이다. 유석조는 풍산유씨 명문가의 후손으로 이른 나이에 소과에 합격했으며 문질을 겸비한 다재다능한 수재였다. 문장에는 능하지 않은 것이 없어 육체를 구비하였으며, 잡저는 해박하였고 筆藝에도 두루 통했다. 말미에 거듭 ‘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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昌豊寢室上梁告文 31 / 기록자료>고도서 / 권방창풍의 침실을 상량할 때의 고유문으로 계축년에 지었다. 창풍은 학가산 남록에 있는 산수가 명려한 곳으로 저자는 감천에서 이곳으로 이거하여 노년을 보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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鶴巖里社湖陽權公常享祝文 31 / 기록자료>고도서 / 권방학암리사에 모셔진 호양 권익창(1562~1645)에 대한 상향 축문이다. 권익창은 유성룡·김성일·조목·권우를 사사했고, 性理의 학문에 심취했으며 벼슬하지 않고 후진양성에 몰두했던 인물이다. 축문은 4언 16자로 구성되었다. “학문은 퇴계‧서애를 소급하고 이치는 하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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涵碧堂柳公墓立石告由文 31 / 기록자료>고도서 / 권방천등산 동록에 위치한 함벽당 유경시(1666 ∼1737)의 묘소에 비석을 세울 때의 고유문으로 본손을 대신해서 지었다. 유경시는 안동 가야출신으로 1694년에 별과문시에 급제하여 장령‧양양부사 등을 역임했다. 특히 고을을 맡아 다스림에 이르는 곳마다 선정을 베풀었으며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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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雲齋權忠毅公影幀改摹後奉安文 32 / 기록자료>고도서 / 권방충의공 권응수(1546∼1608)의 영정을 새로 그린 뒤 봉안할 때의 글이다. 권응수는 영천 신녕 출신으로 1583년 별시무과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영천성을 수복하고 경주탈환전의 선봉으로 참가했으며, 산양탑전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정유재란 때는 울산전투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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玉峯權公還安道溪時告由文 32 / 기록자료>고도서 / 권방옥봉 권위(1552∼1630)의 신위를 도계서원에 다시 봉안할 때의 고유문이다. 권위는 안동 출신으로 김성일·김언기·조목의 문인이다. 동당시 별시에 합격하여 1601년에 문과 급제 하였으며, 전적·공조좌랑을 거쳐 호조좌랑·예조좌랑을 역임하였다. 노년에 고을 선비들과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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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太師貞弼祭壇常享祝文 32 / 기록자료>고도서 / 권방안동장씨의 시조인 장정필을 추모하는 제단의 상향 축문이다. 장정필은 고려 태조 왕건이 안동에서 후백제의 견훤을 토벌할 때, 활약한 공로로 대광태사란 벼슬을 받았다. 축문은 4언 16자로 구성되었는데, ‘의리는 子房을 따르고, 공은 仲父를 본받았다’고 하여, 장정필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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龜湖書院思復齋權公奉安文 32 / 기록자료>고도서 / 권방영주의 귀호서원에 사복재 권정(1353∼1411)을 봉안하는 글이다. 권정은 고려말에 괴산군수‧김해부사 등을 지냈는데, 고려의 멸망 소식을 듣고 예안에 낙향한 인물이다. 그는 고려를 회복한다는 뜻으로 반구정이란 정자를 세우기도 했다. 귀호서원은 1780년(정조 4)에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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亡子移窆時告文 33 / 기록자료>고도서 / 권방저자의 죽은 아들 육의 분묘를 이장할 때의 고유문이다. 분묘는 저자가 사는 창풍과는 10리 되지 않는 학가산 자락에 위치한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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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李稷山萬宏文(1772) 1 / 기록자료>고도서 / 권방직산 이만굉에게 바친 제문으로 아버지를 대신해서 지었다. 이만굉은 專對에 뛰어났고, 綜理에 긴밀하였으며, 문장은 실용성을 중시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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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權約齋炳文(1774) 2 / 기록자료>고도서 / 권방서후 금계에서 학봉의 학맥을 계승했던 약재 권병문(1723~1772)을 애도한 제문이다. 약재는 四書로 근본을 수립하고, 『심경』‧『주자서』로 가지를 넓혔으며, 회재와 퇴계의 글로 취향을 극대화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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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從子文(1777) 4 / 기록자료>고도서 / 권방19세로 요절한 조카 후의 영전에 바친 제문이다. 권후는 벗과 화목하게 지내되 무례하지 않았고 행실이 꼼꼼하면서도 조리가 있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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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伯兄處士府君文(1781) 5 / 기록자료>고도서 / 권방맏형 권당에게 바친 제문이다. 권당의 형제는 재주가 뛰어나 ‘馬氏五常’과 ‘荀家八龍’에 견주어졌으나 권당은 나이 30이 되지 않아 奇疾에 걸려 죽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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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亡子文 7 / 기록자료>고도서 / 권방요절한 아들 권육에게 바친 제문으로 자식을 잃은 아비의 비통한 심정이 드러나 있다. 권육은 1767년(영조 43) 환란에 6세의 나이로 아비의 원수를 갚겠다고 했고, 1769년 변고에는 8세의 나이로 유배지인 위원에 편지를 보냈으며, 15세에 지은 대책문은 뜻이 넉넉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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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姊兄金公光翊文 10 / 기록자료>고도서 / 권방30년간 형제의 의를 맺어온 자형 김광익에게 바친 제문이다. 김광익은 자상하고 근후했으며 온화하면서 소탈하여 늘 손님이 가득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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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大山先生文(1782) 11 / 기록자료>고도서 / 권방스승 대산 이상정에게 바친 두 편의 제문으로 한편은 1782년(정조 6)에 지었고 한편은 소상 때에 지었는데 도산의 정맥을 거론하였다. 참된 지식과 실천으로 도를 즐겼고 예와 악이 넉넉하여 문질을 구비했으니 옛 현인에 견줄 수 있으며, 피폐해가는 도를 붙잡아 이치를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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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金丈相玉文 13 / 기록자료>고도서 / 권방저자의 아버지와 막역한 벗인 김상옥에게 바친 제문이다. 어려움을 당해 의성에 체류할 때 오셔서 걱정했고, 서관으로 떠날 때는 정성을 다해 도와주었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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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內舅渴睡軒金公㙔文(1789) 14 / 기록자료>고도서 / 권방외숙되는 갈수헌 김위(1709∼1788)에게 바친 제문이다. 김위의 회포는 평탄하여 깊은 못과 같고 풍채는 훤칠하여 신선 같았으며, 문장과 경술, 이름과 실질을 겸비했다. 관리가 되어서는 육조의 소를 올려 시폐를 논하였으며, 세 번의 소명을 받았으나 사직하고 임천에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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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李致道文 15 / 기록자료>고도서 / 권방친우이자 스승의 아들인 이완에게 바친 제문이다. 공의 죽음으로 인해 우리의 도가 날로 그릇되고 대의가 무너지려 한다. 칠정 가운데 오직 ‘怒’를 제어하기 어려운데 공은 일찍이 노여워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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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八友軒趙丈文 16 / 기록자료>고도서 / 권방팔우헌 조보양(1709∼1788)에게 바친 제문이다. 팔우라는 호는 소나무‧대나무‧매화‧국화‧강‧산‧바람‧달에서 취하였다. 만년에까지 절의를 닦아 항상 은일을 지향하여 참으로 군자의 덕을 지켰으며, 아동들은 ‘천하문장’이라 노래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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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柳畏齋文(1795) 17 / 기록자료>고도서 / 권방4언 율격의 제문으로 서애 유성룡과 졸재 유원지의 학통을 계승하여 안팎을 닦았던 외재 유종춘을 추모하는 글이다. 저자는 유종춘을 애도하는 만시도 지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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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柳叔涵海春文 18 / 기록자료>고도서 / 권방서애의 후손인 유해춘에게 바친 제문으로, 뿌리가 깊고 근본이 굳으면 열매는 절로 무성한 법이라면서, 시서와 예악을 대대로 전한 유해춘의 가문을 기리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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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金川沙文(1797) 19 / 기록자료>고도서 / 권방천사 김종덕(1724∼1797)에게 바친 제문이다. 영남에 많은 학자가 있으나 독서와 궁행 실천은 공이 으뜸이다. 대산의 문하에 들어가 경전과 인륜을 강론하였으며 의리를 들으면 즉시 쫒았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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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李后山文(1798) 20 / 기록자료>고도서 / 권방후산 이종수(1722∼1797)에게 바친 제문이다. 대산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가장 많이 받았고 가장 정밀하게 강론한 자는 후산이다. 후산은 대산이 죽은 뒤 유문을 정리하였고 의례를 考正하였으며, 대산 이상정의 적통을 계승하였다. 저자는 이 글에서 국가에서 과거를 중시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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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金公叔文 21 / 기록자료>고도서 / 권방强仕의 나이인 쉰에 죽은 김공숙을 애도하는 제문이다. 器宇는 가지런하고 심성은 관대하며 용모는 순수하고 기미는 충만해서. 釋褐 이후로 모든 사람들이 公輔가 될 것이라 기대했다. 공의 문장은 청원하고 웅건하여 당인에 핍진하며, 필찰도 굳세고 호매하여 진준을 압도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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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金丈柱國文遷厝時 23 / 기록자료>고도서 / 권방김주국의 묘소를 이장할 때 바친 제문이다. 아버지의 친구인 공을 사모하는 마음과 그리워하는 회포를 친부형과 다를 바 없이 耿耿하게 표현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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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外舅醴泉權公文 24 / 기록자료>고도서 / 권방장인인 권각에게 바친 제문이다. 권각은 예천 권씨 명문의 후손으로 근후하면서도 돈독하고 순박하면서도 정성스러워 본성을 지키며 세상의 영리를 구하지 않았다. 松顔白髮로 80수를 누렸는데 세인들이 복이 많은 사람이라고 일컬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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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亡室淑人醴泉權氏文(1800) 25 / 기록자료>고도서 / 권방부인 예천 권씨에게 바친 제문이다. 60년간 해로한 지극한 정으로 슬픔에 겨워 글을 짓지 못할 정도라면서, 그대가 있으면 내가 있고 그대가 없으면 가정이 없다고 극언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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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李伯維文 25 / 기록자료>고도서 / 권방이백유에게 바친 제문인데 이백유는 후산 이종수(1722∼1797)의 아들로 대산 이상정의 제자이다. 저자와 세의와 척의가 있는 사이로 상주의 도남서원에서 함께 진적을 회고하고 奇文을 토로한 적이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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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內兄斗庵金公文 26 / 기록자료>고도서 / 권방외가의 형이 되는 두암 김약련(1730~1802)에게 바친 제문이다. 두암은 위세와 무력에 굴하지 않고 일을 처리함에 구차하지 않았으며, 글을 지음에는 이전의 법도를 따르지 않고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다. 두암은 1776년(영조 52) 홍인한‧정후겸의 사건에 연루되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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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族兄而瞻文 28 / 기록자료>고도서 / 권방족형되는 권이첨에게 바친 제문으로, 비어있는 듯한 흉금과 인후한 덕을 추모했다. 권이첨은 자신의 며느리가 금방 해산했음에도 불구하고 권방의 선친이 죽었을 때 달려와서 조금도 꺼리지 않고 염습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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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宋敬輔文 29 / 기록자료>고도서 / 권방사물재 송상천(1766~1804)에게 바친 제문이다. 영주 선비 송상천은 온후한 자질로 배움에 힘써 당세 소년 가운데 지주였으며, 거업을 익혀 精敏한 경지에 이르렀다. 대책에 뛰어나 화려하면서도 알찼으며 넓으면서도 정밀하였고 형식을 갖추고도 조리가 있었다. 성품이 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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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內兄金德翁文 30 / 기록자료>고도서 / 권방외가의 형이 되는 김덕옹에게 바친 제문이다. 공은 사람 가운데 옥과 같은 존재이나, 형산에 파묻히고 초택에 잠겨 그 온축한 바를 드러내지 못했다. 공은 의리가 아닌 것은 하찮은 것이라도 남에게 취하지 않았으며, 문장 필찰은 호한하면서 명변하고 간결하면서도 깊이가 있었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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奉直郞高靈申公墓碣銘幷序 32 / 기록자료>고도서 / 권방신성직의 7대조인 봉직랑 신상룡(1552~ 1615)의 묘갈명으로 서문이 병기되어 있다. 신상룡의 행적은 전하는 것이 거의 없고 『밀성지』에 사적이 몇 줄 기록되어 있다. 저자는 銘에서 ‘효자가 뜻을 두었고 현손이 이루었으니, 이 아름다운 덕을 누구에게 주며 누구에게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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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尙左道兵馬虞侯權公墓碣銘幷序 34 / 기록자료>고도서 / 권방경상좌도 병마우후를 지낸 권응심(1548∼ 1596)의 묘갈명으로 서문이 병기되어 있다. 권응심은 임진난이 일어나자 종형 권응수와 의병을 일으켜 큰 공을 세우던 중 울산의 반구정 전투에서 적의 유탄에 맞아 죽었다. 인재 김응하의 『공산회맹록』 일기에 성명이 기록되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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處士固城李公墓碣銘幷序 36 / 기록자료>고도서 / 권방이시항의 손자인 이홍보(1731~1782)의 묘갈명으로 서문이 병기되어 있다. 이홍보의 아들 이주정이 권방에게 부탁해서 작성된 글이다. 이홍보는 후배들이 학문에는 힘쓰지 않고 과거 공부에만 몰두하는 것을 탄식하였으며 자질들 교육은 성현을 목적으로 삼았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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秀才義興朴君墓碣銘幷序 38 / 기록자료>고도서 / 권방19세로 요절한 군위 의흥 파전의 수재 박재룡(1787~1805)의 묘갈명으로 서문이 병기되어 있다. 『통감』을 읽을 때는 나라의 치란과 사람의 賢否와 관련된 부분을 초하여 책자로 만들었으며, 『맹자』를 읽을 때는 의심나거나 어려운 대목을 표시하여 한권으로 묶어 대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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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考成均生員府君行狀 40 / 기록자료>고도서 / 권방아버지인 생원 권도(1709~1787)의 행적을 적은 글이다. 자호는 승헌으로 1765년(영조 41)에 생원 1등 제3인으로 합격했으며, 포헌 권덕수(1672∼1759)를 종유하여 立心과 行己의 방법을 들었다. 1769년 가을에 향인의 무고로 함경도 위원에 유배되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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處士安東權公行錄 45 / 기록자료>고도서 / 권방우묵당 權擴의 후손인 처사 權睆(1739~1803)의 행적을 적은 글이다. 처사는 자제들 교육에 힘을 쏟았고, 평생 의리에 어긋나는 것은 취하지 않았으며, 특히 상례에 익숙하여 문내 대소 喪葬에 친히 집행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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叔兄遺事 48 / 기록자료>고도서 / 권방젊은 나이로 죽은 저자의 막내 형인 權言賞(1735~1757)의 유사이다. 1754년(영조 30)에 김종협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며, 1755년에 향시에 응시했으나 실패하였다. 권숙당은 대산 이상정의 문하에서 수학했던 천사 김종덕‧김종경 형제 및 유태춘 등과 친밀하게 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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跋 / 기록자료>고도서 / 권방1844년(헌종 10)에 유치명이 썼다. 선비는 때를 만나지 못함을 한할 게 아니라, 성인의 도를 듣지 못함을 한스럽게 여긴다면서, 권방의 삶은 결코 불행한 것이 아니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남긴 글은 모두 도덕과 인의의 학설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가슴속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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序 1 / 기록자료>고도서 / 권방1899년(광무 3)에 修堂 李南珪(1855~1907)가 썼다. 1762년(영조 38) 사도세자가 8일동안 뒤주 속에 갇혀 죽은 일을 누구나 울음을 삼키며 원통해 했는데 1792년(정조 16)에 저자가 이우 등과 더불어 만인소를 올림으로써 비로소 의리가 천명되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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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 기록자료>고도서 / 권방次宋敬甫寄題昌豊淸溪韻 四言三首, 次勸元甫正三贈別韻, 登第聞喜宴罷諸先生出水落臺賦詩謹次, 昌陵直中偶題, 贈金翰之翰東, 贈金甥土溭帶恩南歸, 七月作道南行, 宿九潭曉別金萬源壽海兄弟金受而世恭, 謁道正祠, 次道湖亭韻寄申士玉光璡, 挽李后山宗洙, 挽鄭琢之璞, 挽趙梧竹軒宜陽, 挽權文見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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請罪醫院諸官疏 7 / 기록자료>고도서 / 권방1786년(정조 10) 5월에 文孝世子가 紅疹으로 죽고, 그 해 가을에 成嬪이 병을 앓다가 갑자기 죽게 되자, 학림은 金翰東‧柳光澺‧金熙稷과 상소하여 藥房提調인 徐命善과 醫官 李廷楫의 죄를 논한 것이다. 신료로서 안위를 돌보지 않은 것은 역죄에 해당하므로, 엄한 처벌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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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理辨誣疏 10 / 기록자료>고도서 / 권방영남의 유생을 대표하여 지은 것으로 사도세자의 신원과 관련된 상소문이다. 벽파의 거두 김달순의 주청으로 영남 만인소의 소수였던 이우(1739~1810)가 해도로 정배되자, 저자는 이우와 더불어 원래 소록의 首從의 차이가 없고, 실로 화와 복을 함께하는 의리가 있으며,출처 : 유교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