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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蔡樊巖濟㳟 14 / 기록자료>고도서 / 권방사도세자의 신원과 관련되어 번암 채제공(1720∼1799)에게 답한 글이다. 1792년(정조 16) 상소 이후로 6년 동안 끝내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한 점은 영남 사람으로서 죽어도 여죄가 있다고 하면서, 소임을 그대로 맡되 도회의 날짜를 미루어서 중론을 모아 모든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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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李承旨世澤 15 / 기록자료>고도서 / 권방승지 이세택이 禮疑 서너 조목을 질문한 것에 대해, 저자는 상고할 만한 서책이 없어 감히 臆說로 답한다는 내용이다. 예의의 구체적인 답변은 별지에 기록된 듯 편지에는 언급되지 않았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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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金川沙宗德 15 / 기록자료>고도서 / 권방천사 김종덕(1724~1785)에게 답한 서간문으로, 홍보의 시험 합격이 사기를 돋게 한다는 것과, 하남의 행차는 아직 일정을 잡지 못했다는 것과, 이치도의 疑義 강론에 대해 묻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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闡揮錄序 16 / 기록자료>고도서 / 권방『천휘록』의 서문으로 가상의 인물을 설정하여 저자와의 문답식으로 구성하였다. 『천휘록』은 사도세자의 폐위와 죽음 등의 전말, 신원 상소와 관련된 疏會와 校變 등의 기록을 엮은 것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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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公東征辨 17 / 기록자료>고도서 / 권방『서경』의 ‘주공이 동쪽을 정벌하다’는 구절에 대해 채침의 집전에서는 ‘居東’과 ‘東征’ 두 가지로 구분하여 해석했는데,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 주자의 설을 인용하여 비판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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完璧論 19 / 기록자료>고도서 / 권방송대의 학자 귀산 楊時는 인상여의 ‘완벽’에 대해 논하면서, 작은 것으로써 큰 것을 섬기지 못한 것에 대해 비판했는데, 저자는 이글에서 귀산이 인상여를 비난한 것은 잘못이라고 논증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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折屐齒論 21 / 기록자료>고도서 / 권방사안석의 극치가 부러진 것에 대해 비판한 것을 변론하는 글로, 저자는 이글에서 사람을 논하는 도리는 마땅히 그가 평소에 실행한 바의 여하를 살펴야 하며, 한때의 우연한 것으로써 그 시비를 성급하게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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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孝子傳 23 / 기록자료>고도서 / 권방안동 부성 서쪽에 세거하였던 김한창의 지극한 효성을 기록한 전기로, 저자는 이글의 끝에서 조정에서 정려가 내리지 않은 것을 개탄하면서도, 효자의 행적이 문자에 의탁하여 오래도록 널리 알려지게 되는 것으로 위안을 삼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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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權方叔(1725) 20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孟子』 「盡心(上)」편 13장의 ‘過化存神’의 해석과 관련한 편지이다. 저자가 앞서 권구와 만났을 때 ‘과화존신’에 대해 답변한 적이 있던 바, 돌아와서 『집주』와 『주자어류』를 살펴본 결과 자신의 답변이 本旨를 잃었다고 판단하고 견해를 수정한다는 내용이다. 아울러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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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權台仲(相一,1727) 21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淸臺 權相一(1679~1760)에게 『중용』 首章의 ‘戒懼’는 動과 靜을 겸하여 말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앞서 저자가 조덕린과 위와 관련하여 논쟁한 것에 대하여 권상일은 조덕린의 손을 들어 주었다. 이에 저자는 朱子뿐만 아니라 愚伏 鄭經世(1563~1633)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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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權台仲(1731) 22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감사의 명으로 訓士의 직임을 맡아 학생들에게 한 번 강설하였지만 능력이 부족하여 얼굴에 땀이 날 뿐이라며 부끄러움을 토로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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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李會徵(成全,1696) 23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新塘 李成全(1669~1737)이 보여준 疑義에 대해서, 저자가 미심쩍게 생각하는 부분에 대해 소견을 적어 보낸다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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別紙 23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張載가 지은 「西銘」에 대한 葉氏가 註를 해석하는 문제와 관련한 글이다. 이성전은 섭씨의 주 가운데 ‘隨遇而感, 蹶然而動’이란 말은 언어의 밖에 나아가 그 기상을 논한 것이지 본문의 뜻을 풀이한 것이 아니라고 한 바, 이에 대한 저자의 이견을 제시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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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李會徵 25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위의 별지 내용과 관련한 이성전의 회신에 답한 글이다.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隨感과 蹶動 등의 말은 결코 언외의 뜻이라고 볼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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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李會徵(1697) 28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안부를 물어온 데 대한 일상적인 답장이다. 친척들과 멀리 떨어져 외롭게 거처하며 안으로는 부형의 가르침이 없고 밖으로는 사우들의 경계가 없어 학문이 부진함을 토로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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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曺仁伯(善長,1718) 28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屛厓 曺善長(1661~1726)이 안부를 물어온 데 대한 일상적인 답장이다. 집에서 10리 가량 떨어진 아름다운 강산을 바라볼 수 있는 지역에 몇 칸 띠집을 짓고 거처하는 저자의 안온한 생활을 담박하게 토로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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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柳允卿(升鉉) 29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종형 密庵 李栽가 사망하여 저자뿐만 아니라 동료들도 귀의할 곳이 없음을 한탄하고 있다는 아쉬움을 언급하였다. 柳升鉉(1680~1746)의 호는 慵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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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柳汝三(緯河) 30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柳緯河가 先大父 修巖 柳袗(1582~1635)의 문집을 간행하기 위해 편집에 참여해주기를 부탁한 데 대한 답장이다. 저자는 학식이 모자라 이 일을 감당하기에 부족하지만 유진의 언행이 전해지지 못할까 염려되는 점, 처가 집안인 점, 일찍이 사숙한 바가 있다는 점 등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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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柳伯胤(後宗) 30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柳後宗의 자식이 20세에 사망한 바, 그에 따른 服制와 관련한 답장이다. 저자는 『儀禮』 註疏에서 말한 家統을 계승했어도 3년복을 입지 않는 네 가지 경우 즉, 四種服制를 들어 기년복이 마땅함을 제시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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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李巨源(濰) 31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李濰에 보낸 짤막한 편지로, 洛瑞 鄭游蓮이 내방하여 안부를 전해준 덕분에 오래도록 소식을 접하지 못해 아쉬웠던 마음이 위로되었다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357021
與柳達夫(顯時) 32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지난번에 보냈던 시구는 앞뒤가 없어 체제를 이루지 못해 부끄럽기 짝이 없지만, 그 시구를 振伯(金聖鐸)에게 보여주고 아울러 允卿(柳升鉉)‧君七(柳錫斗) 등에게 화답시를 청해주면 좋겠다는 내용을 담았다. 柳顯時(1667~1752)의 호는 壺窩이다.출처 : 유교넷 -
357022
與柳台彦(元鉉) 32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月會堂 柳元鉉(1674~1755)이 평소 건강에 유념하지 않고 墳庵을 수리하는 일을 수개월 동안 몸소 감독하고 있으며 때로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서, 지금은 당장 괜찮더라도 이런 일이 오래되면 몸에 병이 날 수 있으니 걱정스럽다는 내용을 전하고 있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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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金振伯(聖鐸) 1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虎溪書院 洞主와 『중용』의 戒懼章에 대해 논의하는 과정에서 서로간의 의견이 맞지 않았던 바, 동주와 왕복한 서찰을 보내 비평을 부탁했다.출처 : 유교넷 -
357024
與金振伯 1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謝恩肅拜를 위해 곧 서울로 갈 金聖鐸에게 안부와 경계의 말을 전하는 한편, 墨洞에 경관이 좋은 곳을 보아두었으니 내달에 작은 집을 지어 왕래하며 소요하고자 하는 바 함께 즐길 수 있기를 기원했다.출처 : 유교넷 -
357025
答金振伯 2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붕우 간에 서로 만났을 때는 서로 권면하여 격려하는 것이 도리인 만큼 저자의 나이가 조금 많다고 하여 꺼려하지 말고 편달해 줄 것을 당부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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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金振伯 3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陶山言行錄』 교정 모임을 東厓(李浹)는 鄕校에서 하자는데, 그 보다는 城市와 떨어져 있고 또 경치를 감상하기 좋은 西岳이 나을 듯하니 동애에게 저자의 뜻을 전해주기를 부탁했다.출처 : 유교넷 -
357027
別紙 4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대학』의 絜矩好惡에 대해 조현명에게 보냈던 별지이다. 요지는 好惡와 絜矩는 본디 先後와 體用이 다르니 아울러 제목으로 삼을 수 없는 바, 이는 雲峯胡氏와 北溪陳氏의 언급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출처 : 유교넷 -
357028
別紙 7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대학』의 絜矩好惡에 대한 의견이다. 김성탁은 同好惡를 財貨와 用人의 소제목으로 보고 絜矩를 대제목으로 보는 반면에, 저자는 同好惡는 바로 絜矩와 실상은 같고 이름만 다른 것에 불과하다는 입장 차이를 제시했다.출처 : 유교넷 -
357029
別紙 11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대학』의 絜矩好惡에 대한 김성탁의 의견에 저자가 견해를 달리하는 부분 8조목을 제시하여 토론하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357030
與金振伯 20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絜矩에 대한 질문에 답장을 주어 고루함을 계발시켜줄 것을 희망하고, 好惡와 絜矩에 대한 저자의 다른 시각을 다시 밝히고 있다.출처 : 유교넷 -
357031
答金振伯 21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五臟이 각각 五行의 이치를 구비하고 있는가 하는 논의이다. 편지 끝에서 追錄 형식의 글이 첨부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지난날의 저자의 견해가 그릇되었음을 시인함과 아울러 어진 사람과 반복해서 논의하지 않았다면 얻지 못했을 결과였다는 것이다.출처 : 유교넷 -
357032
答金振伯 25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김성탁이 말한 바 主理와 主氣는 리와 기가 각각 주장하는 뜻이 있다는 것인데, 주리와 주기의 구분은 있지 않다고 논박했다.출처 : 유교넷 -
357033
別紙 26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五性(五行)을 五臟에 나누어 配屬시키는 것에 대한 논의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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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金振伯(1734) 28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새해에 얻은 것은 ‘魗老’ 두 글자 뿐이라며 늙음을 한탄하고, 벼슬 사양이 이루어져 늘그막을 잘 수습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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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金振伯 29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산 속에 거처하며 남과 접촉하는 기회도 없고 耳目에 특별히 들어오는 것도 없는 한가로운 삶을 구가하고 있음을 언급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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別紙 29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前妣와 後妣의 신주를 一櫝에 幷配하는 문제에 대한 金聖鐸의 언급에 이의를 제기하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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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金振伯 30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弟婦의 상을 당해 상심이 컸다는 말과 溪院의 모임 자리에 갔던 일을 언급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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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金振伯 31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임금을 세 번이나 접하는 특별한 대우를 받았으므로 반드시 좋은 말씀과 계책으로 임금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으리니 士林의 바램을 위로하기에 충분하다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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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鄭洛瑞(游蓮) 32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일상적인 안부 편지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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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權一甫(1724) 1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자식의 요절을 슬퍼하는 저자에게 위로의 편지를 보내준 江左 權萬(1688~1749)에게 답장한 것이다. 말미에서는 권만의 건강이 좋지 못한 점을 걱정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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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權一甫 1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온 식구들을 데리고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는 계획은 그리 좋지 못하다며 충고하고 있다. 다만 그곳에 작은 집을 지어놓고 이따금씩 혼자서나 또는 친구들을 데리고 가서 잠시 풍광을 즐기고 심성을 기르는 것이 좋을 듯하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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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權昌言(謩)(1724) 3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자식의 요절을 슬퍼하는 저자에게 위로의 편지를 보내준 琅玕軒 權謩(1690~1751)에게 답장한 것이다.출처 : 유교넷 -
357043
答權企仲(芨,1732) 4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權芨(1698~1781)에게 問學之道에 대해 일러주고 있다. 問學之道는 반드시 큰 뜻을 먼저 세워야 하는 법이니, 큰 뜻이 먼저 서지 않으면 비록 여러 경전에 통달했다 하더라도 책은 책이요, 나는 나일뿐이어서 결국에는 아는 것이 내 것이 되지 않음을 주지시켰다. 말미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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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權企仲 5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논어』와 『맹자』에서 仁을 언급한 부분에 대한 질의에 답변한 것이다. 愛之理는 體를 가리켜 말한 것이지 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니, 雲峯胡氏가 愛之理를 用이라 한 것은 朱子의 뜻을 살피지 못한 오류임을 지적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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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權企仲 6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앞 편지에서 미진했던 부분을 다시 보내는 것이다. 『논어』에서는 仁만을 말하였기 때문에 愛之理를 먼저 말하였고, 『맹자』에서는 仁義를 겸하여 말하였으니 仁이 義를 포함하는 바 먼저 心之德을 말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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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權企仲 7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內外를 골고루 수양하여 한쪽으로 치우치지 말라는 가르침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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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金善餘(慶錫,1732) 7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三溪書院의 학생 수가 늘어나고 많은 이들이 학문에 힘쓰고 있으니, 분발 맹진하여 기대에 부응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출처 : 유교넷 -
357048
答琴君澤(后烈) 8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사당의 祧遷과 관련한 답장이다. 先府君의 신위와 이하 兩位를 동쪽과 서쪽 벽 아래에 나누어 안치했다가 훗날 立後하기를 기다려 조천을 행할 때 正位에 들이는 것이 낭패를 보지 않을 것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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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裵澄源(晸,1724) 9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重喪을 당하여 장례를 치르지 않은 상태에서 輕喪의 장례에 나아가는 것은 禮에서 금하는 것이다.출처 : 유교넷 -
357050
與金退甫(晉行,1732) 9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九思堂 金樂行(1708~1766, 退甫는 초자, 晉行은 초명)에게 日用動作이 모두 배우는 것임을 강조하였다.출처 : 유교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