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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체: 에 대해 총641,751건의 자료가 검색되었습니다.
  • 357101

    上仲兄(桱,1724) 1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
    날씨가 화창한 시절 산빛이 더욱 푸르고 물빛이 더욱 짙어질 때에 중형이 배를 타고서 선비들과 함께 단란하게 먼저 하루 이틀 보내고 나면, 이후에 저자가 찾아가 함께 즐기겠다는 내용이다.
    출처 : 유교넷
  • 357102

    上仲兄(1726) 2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
    연장자로서 부형의 반열에 올라 자제들을 제대로 가르치고 감독하지 못해 정오에 가까울 무렵에 이르렀는데도 參禮하는 사람이 없음을 반성하였다. 뿐만 아니라 자제 가운데 본분에 의거하여 지난날의 규범을 지키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집안의 법도가 무너질 것임을 안타까워하였다
    출처 : 유교넷
  • 357103

    上仲兄(1734) 2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
    저자가 사망한 해에 작성된 것으로, 저자의 얼굴과 모습이 초췌해지는 것일랑 염려하지 말고, 도의가 넉넉하지 않음을 근심함이야말로 진정으로 아우를 사랑하는 것임을 말하였다.
    출처 : 유교넷
  • 357104

    答士直弟(栐) 2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
    비가 내린 뒤에 매화가 더욱 자태를 뽐내고 있는데, 주위를 돌며 감상하고 있노라니 다른 꽃들은 절대로 그에 견줄 바가 아님을 깨달았다. 몇 년 전에는 나무도 어리고 꽃도 드물더니 이제 와서 제대로 꽃을 피우니 너무나도 사랑스러워 볼 수는 있어도 꺾을 수는 없다고 하였
    출처 : 유교넷
  • 357105

    答從侄(復煥) 3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
    從侄 魯溪 李復煥(1692~1727)이 성리학의 내용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의심나는 부분에 대해 10조목에 걸쳐 저자에게 문의한 것에 대한 답변이다. 저자는 자신의 이 답변에 대해서 다시 의심나는 부분이 있으면 연장자라고 해서 어려워하지 말고 다시 질문하라고 다독이면서
    출처 : 유교넷
  • 357106

    答從侄寅煥問目(1732) 12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
    종질 寅煥의 喪禮에 대한 問目에 답한 내용으로 모두 열 조목이다. 문목의 내용을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先妣의 祠宇에 晨謁禮를 오래도록 그만두었는데, 지금 衰服을 이미 벗었으니 禫服을 입고 신알 예를 행한다면 예에 어긋남이 없는가? ◦신주를 사당에 들일 때
    출처 : 유교넷
  • 357107

    寄子天煥(1711) 15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
    讀書法은 오직 책 속에 담긴 의미를 완상하는데 온 마음을 기울여서 터득함이 있기를 기대하는 데 있다. 바라는 바는, 성현의 말씀을 착실하게 체험하되 다만 기억하고 외우는 데에서만 그칠 것이 아니라 평소에 말하고 행동할 때도 항상 이러한 마음을 보존하여 도를 굳게 지키
    출처 : 유교넷
  • 357108

    寄子天煥(1716) 16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
    세상의 모든 일이란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뒤로 후퇴하기 마련이고, 아홉 길이나 높이 쌓은 흙무더기도 한 삼태기의 흙이 부족하면 산을 이루지 못하고 끝내는 무너지는 법이니, 공부를 소중하게 생각하여 느슨하게 하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한편 철을 따라 지내는 제사를 해마
    출처 : 유교넷
  • 357109

    寄子天煥猷煥 17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
    국화가 이미 安土에 장대하지만 초췌해질까 우려되니 故土로 옮겨 심어 뿌리가 드러나지 않게 하라는 내용이다.
    출처 : 유교넷
  • 357110

    寄子侄(1719) 17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
    咸興에 거주하는 朱炯遠이라는 사람이 司馬試에 합격하고 마침 저자와 같은 집에 거처하여 만났는데, 그가 이따금씩 북쪽 지방의 風謠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고서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서울에서 날마다 그와 사귀어본 결과 세속 일에 휩쓸리는 보잘 것없는 사람일 뿐이었다.
    출처 : 유교넷
  • 357111

    寄子天煥 17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
    箕城으로 가는 행차는 仲氏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에 저자가 모시고 가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라 하고, 천환의 나이가 이미 30세가 넘었으니 한가로이 자질구레한 일에 몰두하지 말고 잡된 생각을 제거하여 학문을 하는데 마음을 두어 일가를 이루기를 기대한다는 내용이다.
    출처 : 유교넷
  • 357112

    寄子天煥猷煥 18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
    『大學或問』을 보내니 정밀하게 읽고 외우기를 바란다 하고, ‘온갖 책을 대충 훑어보려는 것보다는 한가지 책에 정신을 집중하는 것이 낫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중요한 책을 선택하여 沈潛 玩索하여 요점을 파고들어야 한다’는 등 독서법과 관련한 黃山谷과 朱子의 말을 곁들
    출처 : 유교넷
  • 357113

    寄侄子文煥 19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
    저자는 넷째 동생, 두 아들과 함께 마침내 어떤 곳에 도착하여 주위의 자연경관을 두루 살펴보고는 편히 살 만한 곳을 정하였다. 뒷날 이곳에 집을 짓고서 늙어 죽을 때까지 머무르고 싶은데, 事力이 변변치 않아 바람을 이룰 수 있을지 근심스럽다는 소회를 드러내었다. 말미
    출처 : 유교넷
  • 357114

    答侄子絅煥台煥(1723) 19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
    조카 絅煥과 台煥의 喪禮에 대한 질문에 답하는 편지이다. 먼저 柩衣는 禮에서 이른바 侇衾이니 곧 위는 검은색이요, 아래는 분홍색이다. 愚伏 鄭經世의 설을 따라 밖은 검은색, 안은 분홍색으로 한다면 크게 잘못되지는 않을 것이다. 다음으로는 고을 원님이 와서 조문할 때
    출처 : 유교넷
  • 357115

    桑村金先生遺蹟跋 20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
    김자수의 본관은 慶州, 자는 純中, 호는 桑村이다. 1374년 문과에 장원하였으며, 고려가 망하자 廣德山 기슭 杜門洞에 숨었다가 安東에 은거하였다. 조선 세종 때 형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고려의 멸망을 비관하여 자결하였다.(『永嘉誌』) 이 글은 저자가 1727
    출처 : 유교넷
  • 357116

    奉諭諸生文 21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
    학교의 학생들에게 올바른 학문의 길에 대해서 일깨우는 글이다. 이 글은 학생들을 훈계하여 인도하는 일을 맡아달라는 관찰사 趙顯命의 요청에 부응하여 작성되었다. 지금의 학문 풍조가 국가에서 선비를 발탁하거나 부형들이 자제들을 가르치거나 사우 간에 일깨울 때 모두 문장을
    출처 : 유교넷
  • 357117

    學規 23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
    위의 「奉諭諸生文」과 연장선상에 있는 글로서 학교에서 거행해야 할 여섯 조목을 나열하였는데, 저자는 이 학규를 잘 실천하여 어진 관찰사와 고을 원님의 정성스러운 뜻을 저버리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학규의 조목 중 세 가지 정도만 열거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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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7118

    朱子註參同契論(科作) 25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
    科作이란 부기로 보아 과거 시험의 답안으로 작성한 것이다. 朱子가 『周易參同契』에 註를 내었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하는 혹자의 의문을 제시한 뒤, 저자는 후세 학자들이 제대로 알지 못하여 이러한 의심을 갖게 된 것이라며 주자가 주를 낸 것이 명확하다고 답변하
    출처 : 유교넷
  • 357119

    傅說爲列星論(科作) 28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
    위와 마찬가지로 科作이란 부기로 보아 과거 시험의 답안으로 작성한 것이다. 傅說이 죽어서 列星이 되었다는 논의에 대하여 저자는 그러한 허망한 말을 듣고서 웃지 않을 수 없었다며 이치를 상세히 살피지 못한 소견을 비판하였다.
    출처 : 유교넷
  • 357120

    謾錄 29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
    저자가 학문을 연마하면서 틈틈이 기록한 내용으로, 모두 세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항목은 存養에 대한 내용으로 朱子, 退溪, 愚伏 등이 존양에 대해 언급한 설을 인용한 뒤 뒷부분에 저자의 입장을 밝혔다. 둘째 항목은 『朱書』에 있는 ‘比較祖父年甲’이란 말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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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7121

    京行雜錄 31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
    1714년 가을에 벗들과 과거를 보기 위해 상경할 때에 겪었던 일을 적은 기록으로 모두 13항목이다. 죽령을 지나면서 죽령과 조령이 국방의 요처이니 차라리 각 군영을 없애고 여기에다 진영을 두고 兵農의 임무를 함께 맡겨 평시와 전시를 동시에 대비함이 더욱 능률적이라고
    출처 : 유교넷
  • 357122

    玉溪書院常享祝文 1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
    玉溪書院에 봉향된 桑村 金自粹(1351~1413), 惟一齋 金彦璣(1520~1588), 芝山 金八元(1524~1605), 芝軒 鄭士誠(1545~1607) 등 네 분에 대한 상향축문이다.
    출처 : 유교넷
  • 357123

    祭再從兄護軍(杓)文 1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
    護軍을 지낸 재종형 李杓에 대한 제문이다. 집안에서는 자식의 직분을 다하였고, 재능이 있어 일을 만나면 능히 처리하여 숙부 存齋 李徽逸의 칭찬을 자주 받았다.
    출처 : 유교넷
  • 357124

    祭成參奉(文夏)文 2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
    參奉을 역임한 成文夏에 대한 제문이다. 어려서부터 도량이 뛰어났고 성장해서는 거동이 더욱 발랐으며, 文藝를 餘事로 여겨 힘쓰지 않고 좌우에 書史를 두고 簞食瓢飮의 생활에 만족했다.
    출처 : 유교넷
  • 357125

    祭金上舍(璍)文 3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
    上舍 金璍(1644~1718)에 대한 제문이다. 先子께서 돌아가신 뒤 저자 형제들을 자식같이 돌보아준 점에 대해 감사하고 있다. 李光庭이 行狀을 지었다.
    출처 : 유교넷
  • 357126

    祭伯從兄(梴)文 4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
    백종형(李玄逸의 장자) 李梴에 대한 제문이다. 李梴(1646~?)의 자는 伯修, 통덕랑을 역임하였으며, 珍寶 新漢 거주하였다.(『錦陽及門錄』) 祖考의 행실이 李梴을 통해 이어졌고, 저자 형제들의 행동거지가 李梴의 가르침에서 말미암았다.
    출처 : 유교넷
  • 357127

    祭金參奉(台重)文 5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
    참봉을 지낸 金台重(1649~1711, 호 適庵)에 대한 제문이다. 김태중은 雲谷에 은거하며 琴書로 自娛하였는 바, 저자는 가까운 거리에 살면서 일찍이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는지라 그의 죽음을 매우 비통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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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7128

    祭金校理(世欽)文 6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
    교리를 지낸 七灘 金世欽(1649~1720)에 대한 제문이다. 저자가 찾아뵈었을 때, 김세흠은 別墅의 승경에 대해 말하고, 병에 차도가 있으면 찾아가겠노라고 하였지만 결국 이루지 못하고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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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7129

    祭從兄密庵先生文 7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
    종형 密庵 李栽(1657~1730)에 대한 제문이다. 종형의 죽음을 두고 ‘하늘이 나를 버렸으니 뒤돌아봐도 아득하기만 하다’며 안타까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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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7130

    祭五弟長卿(槮)文 8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
    다섯째 아우 李槮에 대한 제문이다. 李槮(1672~?)의 자는 長卿, 호는 藥泉, 통덕랑을 지냈으며, 英陽 魯谷에 거주하였다. (『錦陽及門錄』) 妄言과 慍色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으며 남과 다툰 적이 전혀 없었고, 어버이와 형들을 잘 받들었으며 친척과 화목하고 벗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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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7131

    祭外甥李宗式(憲祖)文 9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
    外甥 李憲祖에 대한 제문이다. 어려서부터 이름을 떨쳤으니 그것은 바로 효성이었다.
    출처 : 유교넷
  • 357132

    祭李世卿文 10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
    李廷萬이 成人이 되기 전부터 알고 지냈던 사이로, 저자의 山墅를 방문하여 聖人의 말씀[心學]을 함께 토론했고, 이별할 때는 서로 은근한 마음으로 뒷날 다시 만날 약속을 했지만 지금 그럴 수 없게 된 점을 안타까워 하였다.
    출처 : 유교넷
  • 357133

    龜翁李公(琓)敍述 11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
    龜厓 李琓(1651~1732)에 대한 哀辭이다. 李玄逸의 문인으로 川城四老의 한사람으로 꼽히며, 저자가 모년에 배운 바 있다. 이현일은 영남에서 德義가 높은 인물로 이완을 자주 일컬었고, 이조에 있을 때는 벼슬에 천거하기도 하였다. 또한 荷堂 權斗寅과 蒼雪齋 權斗經과
    출처 : 유교넷
  • 357134

    金望之(南重)哀辭 12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
    金南重에 대한 애사이다. 김남중은 瓢隱 金是榲의 후손으로 詩로써 명성이 있었다. 향시에서는 누차 합격하였으나 대과에는 번번이 실패했다. 평생토록 산수자연을 벗하며 떠나지 않았는데, 그를 바라보면 인욕에 물들지 않고 세상사에 찌든 그런 사람이 아님을 알았다며 지난날의
    출처 : 유교넷
  • 357135

    鄭箎叟叔向(葵陽)敍述 13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
    篪叟 鄭葵陽(1667~1732)에 대한 애사이다. 정규양은 永陽의 大姓으로, 그의 從父인 鶴巖선생은 篤行君子로서 저자의 숙부인 이현일이 墓銘을 짓기도 하였다. 정규양의 학문은 진실로 가정에서 터득한 것으로서 天人性命의 근원에 마음을 집중하고 義理公私의 분별에 관통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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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7136

    李息山仲舒敍述 14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
    息山 李萬敷(1664~1732)에 대한 애사이다. 저자는 일찍이 일 때문에 이만부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짧은 기간이었지만 학덕을 닦아 나아가는 차례에 대해서 대략 들은 바 있었다. 또한 지난해 여름에 선비들과 모임을 가질 때 이만부가 자리에 참석하게 되어 「太極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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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7137

    鄭洛瑞(游蓮)敍述 16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
    鄭游蓮에 대한 애사이다. 정유련은 藥圃 鄭琢(1526~1605), 淸風子 鄭允穆(1571~1629)의 후손으로 遺風과 餘韻을 간직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소과에는 합격하였으나 대과에는 실패하였으며, 집이 가난하여 죽으로 연명하였으나 개의치 않았다. 계모를 섬기는 데 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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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7138

    安羲仲(瑞駿)哀辭 17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
    安瑞駿에 대한 애사이다. 저자는 안서준과 아주 가까운 곳에 거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世故에 시달리느라 제대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점을 아쉬워하고, 뿐만 아니라 안서준의 뜻은 장대했지만 수명이 짧았기 때문에 학업을 窮究하지 못한 점을 거듭 안타까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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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7139

    朴君(文赫)哀辭 18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
    朴文赫에 대한 애사이다. 丹山人으로 본래 저자와 同鄕이다. 일찍이 詩로 명성이 있었으며, 소과에는 합격하였으나 대과에는 실패하였다. 가난하여 죽조차 먹지 못할 정도였고, 만년에는 日月山 아래로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일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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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7140

    李和國(萬寧)哀辭 19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
    李萬寧에 대한 애사이다. 이만령은 延安人으로 서울에 세거하다가 아버지 侍直公을 따라 저자의 고을에 와서 우거한 인물이다. 마지막 詞 부분에서 몸은 비록 오래 살더라도 마음은 이미 요절한 ‘壽而不仁’보다는 차라리 몸은 요절하더라도 명성은 오래도록 전해지는 ‘夭而有得’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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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7141

    先妣恭人金氏壙誌 21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
    저자의 어머니인 恭人 金氏(1637~?)의 생애를 기록한 壙誌이다. 김씨는 본관이 光山으로, 가계는 孝盧(호 聾叟)→緣(호 雲巖)→富儀(호 山南)→垓(호 近始齋)→光實(호 溪厓)→礎→공인 김씨로 이어진다. 김씨는 아버지 礎와 어머니 진주 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재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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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7142

    族侄監察李君墓碣銘 22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
    族姪 李之燦(1650~1702)의 世系와 생애를 기록한 묘갈명이다. 이지찬의 묘갈명을 앞서 密庵 李栽에게 부탁하여 짓겠다는 허락을 받았지만 이루지 못한 채 사망하였고, 이후 이지찬의 아들 李仁增, 李仁重 형제가 저자에게 부탁하여 완성을 보게 되었다. 이지찬의 자는 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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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7143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
    伏次家兄見寄韻, 道淵書院贈權樂夫(藼), 墨庄雜詠五絶, 虎溪洞主柳達夫(顯時)見招同金振伯(聖鐸)諸人往赴留款數日臨罷聊賦一絶奉呈求和, 挽蔡晉州, 挽鄭塤叟皆春(萬陽), 挽金德三(尙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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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7144

    與趙豊原君(顯命,1732) 2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
    경상감사 趙顯命의 遞職을 아쉬워하며 보낸 편지이다. 경상감사의 임기가 만료되어 돌아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저자뿐만 아니라 영남지역 士民들의 실망이 크다며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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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7145

    答趙豊原君 3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
    역시 조현명의 체직을 아쉬워하며 보낸 답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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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7146

    與權參判(重經) 3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
    權重經에게 선조의 墓碣文을 짓는 일에 대해 보내는 편지이다. 이곳에서는 이미 돌을 마련하여 새길 준비를 마쳤으니, 지은 글을 그곳으로 간 柳升鉉에게 부쳐 주어 일을 마칠 수 있도록 살펴줄 것을 요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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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7147

    與李知府(德孚,1731) 4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
    안동부사 李德孚에게 훈장직을 사면해 달라고 요청하는 편지이다. 古人들은 辭受와 進退에 있어서 大小와 尊卑를 막론하고 사양해야 할 때는 사양했고 물러나야 할 때는 물러났다는 점을 들고서, 저자에게 훈장직을 맡기는 것은 소경에게 단청을 보여주고 귀머거리에게 음악을 들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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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7148

    答金適庵(台重) 5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
    金台重의 편지에 답한 글이다. 지난번 김태중의 마을 앞을 지나면서도 날이 저물고 다음날에 科行이 있다는 이유로 들러서 안부를 여쭙지 못한 점에 대해 죄송스러워하고 있다.
    출처 : 유교넷
  • 357149

    與權台仲(相一,1724) 6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
    權相一에게 보낸 안부 편지이다. 가까운 친척의 喪을 당한 이래로 마음이 혼란하였다가 차츰 안정이 되어 다시 서책을 보면서 전날 의심이 가고 몰랐던 부분에 대해 조금씩 깨닫고 있다고 하면서도 도움을 받을 만한 師友가 없어 깨달은 바를 미루어 넓히지 못함을 아쉬워하였다.
    출처 : 유교넷
  • 357150

    答曺仁伯(善長,1717) 7 / 기록자료>고도서 / 이만
    曺善長에게 답한 안부 편지이다. 저자는 집안에 喪을 비롯한 좋지 못한 일들이 있어 애통해하는 마음으로 그저 산골 집에 머물고 있다고 하였다.
    출처 : 유교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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