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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체: 에 대해 총641,751건의 자료가 검색되었습니다.
  • 357501

    陽泰書塾上梁文 / 기록자료>고도서 / 김계광
    陽泰書塾의 상량문이다. 연보에 따르면, 김계광은 33세(1653년) 되던 해 가을 거주할 곳을 물색하다 陽泰에 자리를 잡고 書塾을 지었는데, 이 때 쓴 상량문이다. 내용상으로 볼 때 양태라는 곳은 鳳城 인근으로 추정된다. 앞부분에 집 한 채 없이 의지할 곳 없던 자신
    출처 : 유교넷
  • 357502

    紙牕銘 / 기록자료>고도서 / 김계광
    빛은 투과시키고 바람은 막는 종이창문의 기능을 비유로 삼아, 正心修身의 뜻을 세우고자 하는 내용의 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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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7503

    短檠銘 / 기록자료>고도서 / 김계광
    어두운 곳을 스스로 밝히는 등불걸이를 비유로 삼아, 학문에 뜻을 세우고자 하는 내용의 銘이다.
    출처 : 유교넷
  • 357504

    呈方伯文(1671) / 기록자료>고도서 / 김계광
    方伯들을 상대로 기근 구휼책의 실효성 있는 시행을 호소한 呈文이다. 기근을 구제하기 위하여 賦稅를 탕감해주라는 왕명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일관성 있게 집행되지 않는 현실을 비판하고 이의 개선을 촉구한 내용이다. 근래 10여 년간 흉년이 들지 않은 해가 없긴 했
    출처 : 유교넷
  • 357505

    行狀 / 기록자료>고도서 / 김계광
    金世洛이 지은 행장이다. 公의 이름은 啓光이고 자는 景謙이며, 안동 사람이다. 시조는 고려 때 太師를 지낸 金宣平이고, 고조는 퇴계에게 수학한 蒼筠軒 箕報이며, 증조는 克, 조부는 希孟, 부친은 愚伏 鄭經世에게 수학한 南厓 이다. 모친은 全州柳氏 友潛의 딸로서, 16
    출처 : 유교넷
  • 357506

    行錄 / 기록자료>고도서 / 김계광
    관련 내용이 좀더 풍부하다는 차이만 있을 뿐, 줄기는 行狀과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김계광의 先代 世系에서부터 성장과정, 官歷, 평소의 품덕과 好學하는 모습, 풍기군수 재직시의 일들을 비롯한 각종 일화, 교유관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四七論辨과 理氣心性情圖를 초
    출처 : 유교넷
  • 357507

    宣城邑誌 / 기록자료>고도서 / 김계광
    {宣城邑誌}의 김계광에 관한 기록을 수록한 것이다. 주로 김계광의 재질과 학덕을 언급한 짧은 내용인데, 끝에 {鳩齋遺集}이 전한다는 내용이 보인다.
    출처 : 유교넷
  • 357508

    墓表 / 기록자료>고도서 / 김계광
    張璶이 쓴 墓表이다. 墓誌이므로 내용은 행장과 거의 중복된다. 家系에 대한 내용에서 친어머니는 完山柳氏이고 계모는 月城李氏라는 내용이 보인다. 장례는 김계광이 죽은 해(1675년) 3월 15일에 치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문집에서 김계광의 가계를 언급하고 있는 여타
    출처 : 유교넷
  • 357509

    墓碣銘(幷序) / 기록자료>고도서 / 김계광
    權相翊이 쓴 墓碣銘이다. 김계광의 묘소가 위치하고 있는 산의 이름이 다른 곳의 기록과는 달리 邀聖山이 아니라 堯聖山으로 되어 있다. 마지막 부분에 김계광의 7대손 滸圭가 선조의 遺文이 흩어져 있는 것을 애통히 여겨 世交가 있는 자신(相翊)에게 유문을 수습케 하였는데,
    출처 : 유교넷
  • 357510

    輓詞 / 기록자료>고도서 / 김계광
    김계광의 죽음을 애도한 輓詞이다. 저자는 다음과 같다(게재순). 李觀徵(字 國賓, 號 芹翁:1618∼1695), 李溟翼(字 萬里, 號 反招堂:1617∼1687), 柳世長, 柳世鳴(字 爾能, 號 寓軒:1636∼?), 金聲久(字 德休, 號 八吾軒:1641∼1707), 羅
    출처 : 유교넷
  • 357511

    祭文 / 기록자료>고도서 / 김계광
    金憲이 지은 제문이다. 又 柳宜河가 지은 제문이다. 又 內弟 柳昌輝가 지은 제문이다.
    출처 : 유교넷
  • 357512

    / 기록자료>고도서 / 김계광
    柳東濬이 지은 발문이다. 발문에 들어가는 통상적이 내용과 더불어 {구재집}의 간행 경위에 대한 좀더 상세한 내용도 들어 있다. 여기에 따르면, 김계광의 7대손 滸圭가 문집 간행 작업을 마치지 못하고 죽자, 그의 아들 東鎭이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宗兄인 宗鎭과 從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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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7513

    / 기록자료>고도서 / 김계광
    李濟相이 지은 발문이다. 역시 의례적인 내용과 함께 {구재집}이 간행된 경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언급하고 있다. 자신이 외람되게 발문을 짓게 된 것은 김계광과 자기 先代와의 돈독한 인연에 힘입은 것임도 밝히고 있다. 끝에 1870년(庚午) 7월에 발문을 썼다는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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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7514

    後識 / 기록자료>고도서 / 김계광
    문집을 간행한 8대손 東鎭이 썼다. 자신의 아버지 滸圭가{鳩齋集}의 간행을 준비하다 중도에 죽었을 때, 자신이 어렸던 관계로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으나 그 뒤 다행히 士林의 도움을 받아 간행작업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음을 뒷부분에서 술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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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7515

    귀와집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
    귀와집(龜窩集) 龜窩 金의 시문집. 14권 7책. 목판본. 序跋이 없어 편집·간행의 자세한 경위는 알 수 없다. 다만, 「龜窩續集」「연보」에서“1834년(순조 34) 上이 문집을 속히 완성하라는 분부를 내렸고, 1846년(헌종 12) 문집이 완성되었다”라고 하였고
    출처 : 유교넷
  • 357516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
    伏次大山李先生玉蓮講席韻(1758), 謹次高山亭韻, 管城別李致道(埦)道中口占(1780), 記行兼述懷奉呈宗友文叟(熙稷)且欲歸示致道以敘中途分攜之懷, 旅舘卽事四首, 輓權孟明(講). 輓族叔梅雪堂(光復)(1769), 中夜無寐追思四十年光陰倏已鬢髮蒼然而環顧其中無一善可道不覺愧懼交拜遂
    출처 : 유교넷
  • 357517

    倡義辯誣疏(1788)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
    士林을 대신하여 지었다. 李麟佐의 난 때 경상도 일원에서 창의한 사람이 많았는데 도신이 사실대로 계문하지 않아 한 사람도 義士로 포상되지 않았음을 지적하였다. 「年譜」에 의하면 상공 樊巖 蔡濟恭이 이 글을 보고 극찬하였고, 立齋 鄭宗魯도 사람들에게 “戊申疏는 明白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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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7518

    應旨疏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
    60세 때인 1798년(정조 22) 정월 丹陽에 부임하여 겨울에 올린 상소이다. 7월 27일 교지에서 도내 수령들에게 백성들의 고통에 대하여 들은 바를 진소하라는 명에 따른 것이다. 이는 양적으로 6,800여자에 이르는 장문으로서, 年譜에서는 「應旨萬言疏」라 명명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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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7519

    辭司憲府掌令疏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
    1800년(순종 즉위) 6월에 지은 것이다. 小注에서 “바로 체직되어 올리지 않았다” 하였다. 노쇠한 몸으로 風憲의 막중한 자리를 감당할 수 없다고 하였다. 말미에서 새로 등극한 純祖에게 성궁을 잘 보존하고 성덕을 기를 것, 인물에 대한 銓衡을 바르게 할 것, 언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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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7520

    辭弘文館校理疏(1802)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
    1802년(순조 2) 3월 17일에 부름을 받고 상경하다가 聞慶縣에서 올렸다고 하였다. 64세의 나이로 노쇠하여 그 직책을 감당할 수 없는 처지이나, 명을 어길 수 없어 22일 상경하다가 문경에 이르러 병세가 재발하여 사직 상소를 올리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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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7521

    辭司憲府執義疏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
    연보에 의하면, 1802년(순조 2) 4월, 6월 두 차례 司憲府執義에 제수되었고, 6월에 龍宮縣에 이르러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병세가 심하여 도저히 소명에 응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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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7522

    辭弘文館校理疏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
    1803년(순조 3) 5월 19일 상경 길에 올랐으나 延豊에 이르러 병세가 다시 나타났고, 다시 억지로 길을 떠났으나 忠原邑에 이르러 병세가 악화되어 더 이상 나아갈 길이 없어 사직 상소를 올리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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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7523

    辭弘文館副校理疏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
    1803년(순조 3) 6월 속히 올라오라는 명을 받고 올린 상소이다. 지난 5월 忠原邑에서 상소하고 돌아온 이후로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도저히 명에 응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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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7524

    辭弘文館校理疏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
    지난 5월에 충원에서 사직상소를 올리고 돌아온 이후로 병세가 더욱 위중하여 문 밖을 나가지 못한 지가 이미 수개월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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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7525

    辭弘文館校理疏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
    66세 때인 1804년(순조 4) 3월 弘文館副修撰에 제수되어 4월에 조정에 들어갔는데, 이달 19일에 다시 홍문관 교리에 제수되자 올린 상소이다. 말미에 순조에게 군왕으로서 마음을 바르게 가지고 학문에 독실하라는 충고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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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7526

    辭同副承旨疏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
    연보에 의하면 66세 때인 1804년(순조 4) 7월에 동부승지에 제수되었다. 일전에 추국에서 돌아온 후로 이질 증세가 나타났고, 승정원은 한가한 관사가 아니므로 도저히 명에 부응할 수 없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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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7527

    辭兵曹參知疏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
    연보에 의하면 66세 때인 1804년(순조 4) 6월에 병조참지에 제수되었다. 질병이 아니라 하더라도 과분한 관직 제수를 감당하기 어렵고, 더욱이 설사와 구토 등으로 도저히 부임할 수 없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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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7528

    辭護軍副摠管疏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
    연보에 의하면 74세 때인 1812년(순조 12) 龍驤衛 都摠府副摠官에 제수되었으나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영광이 비할 데 없어 달려가 숙배하고 싶으나, 고질이 여전하여 도저히 부응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출처 : 유교넷
  • 357529

    辭禮曹參判疏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
    연보에 의하면, 77세 때인 1815년(순조 15) 10월에 禮曹參判兼同知經筵春秋館事에 제수되어 「一綱六條疏」를 올렸다. 이는 사직을 겸하여 정사에 대하여 건의한 내용으로서 5,600여 자의 장문이다. 주된 내용은, 군왕으로서 心學을 근본으로 하고 ‘輔春宮·明正學·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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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7530

    惠慶宮服制擬疏(1816)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
    小注에는 지은 연도가 78세 때인 1816년(순조 16)인 ‘丙子’로 되어 있고, 연보에는 77세 때인 1815년(순조 15) 12월에 지은 것으로 되어 있다. 혜경궁 홍씨가 서거하였을 때 조정에서 의례와 服制를 소략하게 한 것을 비판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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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7531

    屛山書院請額擬疏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
    선조조의 大賢 문충공 서애 유성룡을 모신 병산서원이 건립된 지 수백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사액이 되지 않은 것은 국가로 볼 때 대우가 미흡한 것이라고 하였다. 유성룡의 家廟에 치제하고 家帖에 발문을 지어준 일, 영남은 邪學에 물들지 않았다고 하면서 도산서원과 옥산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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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7532

    書筵講義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
    62세 때인 1800년(정조24, 순조 즉위) 정월에 世子侍講院文學에 제수되어 24일 숙배하였고, 3월 2일에서부터 윤4월에 걸쳐 書筵에 입시하여 강의한 내용이다. 주로 「맹자」와 「대학」의 구절에 대한 세자의 하문과 저자의 해설이다. 말미에 「書筵講義」를 정리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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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7533

    經筵講義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
    66세 때인 1804년(순조 4) 3월 弘文館副修撰에 제수되어, 4월 18일 熙政堂 晝講과 夕講, 19일 晝講에 입시하여 강의한 것이다. 강의 내용은 「시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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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7534

    上大山先生(1766)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
    연보에서 “28세(1766) 봄에 부친 參判公을 모시고 醴泉郡 多仁里로 이사하다. 「西銘」을 가지고 大山先生에게 질문하다” 하였는 바, 이 때 보낸 편지로 보인다. 학업에 전념하려고 하나 여러 가지 사고로 이루지 못하고 있는 실정을 고하고, 글을 보는 사이에 이해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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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7535

    別紙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
    小注에 ‘西銘問目’이라 하였다. 남송의 학자 張載의 「西銘」의 구절과 諸家의 설에 대한 11개 항목의 질의와 大山의 답변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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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7536

    上蔡相國(濟恭,1789)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
    上蔡相國(濟恭,17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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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7537

    與李判書(益運)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
    판서 李益運(1748∼1817)에게 올린 편지이다. 내용은 안부와 함께 승진 발탁하였으나 노환으로 숙배하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소명하는 것이다. 李益運의 자는 季受이다. 蔡濟恭의 문인이다. 벼슬은 예조판서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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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7538

    與百弗庵崔公(興遠,1785)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
    崔興遠(1705∼1786)에게 보낸 편지로서, 대산선생 문하에서 곁에서 배울 때의 추억담과 일상의 안부이다. 최흥원의 자는 太初·汝浩, 본관은 경주이다. 학행으로 천거되어 참봉·교관·장악원주부·세자익위사좌익찬을 지냈다. 세상에서 ‘漆溪先生’이라 일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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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7539

    與后山李公(宗洙,1786)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
    李宗洙(1722∼1797)에게 보낸 편지로서, 고산정사의 중수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대처해달라는 내용이다. 李宗洙의 자는 學甫. 호는 后山, 본관은 진성이다. 李象靖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權榘·權德秀·金樂行·權相一 등과 교유하면서 후진교육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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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7540

    與后山李公(1794)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
    조카 편으로 편지를 받고서 보낸 것이다. 모종의 사안에 대하여 虎溪書院에서 통문을 내는 문제와 도산서원에서 통문을 내는 문제에 대하여 의견을 개진하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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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7541

    與川沙金公(宗德,1785)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
    金宗德(1724∼1797)에게 보낸 편지이다. 일상의 안부와 문하에 아들의 교육을 맡겨 누를 끼치는 것에 대한 감사의 뜻과, 大山 생전에 선생이 기대하였던 것으로 기대한다는 뜻을 표하고 있다. 金宗德의 자는 道彦, 호는 川沙, 본관은 안동이다. 李象靖을 사사하여 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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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7542

    答川沙金公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
    이전에 金宗德이 ‘主忠信’을 내용으로 한 경계의 편지를 보내와서 이에 대하여 감사하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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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7543

    答川沙金公(1788)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
    객지에 있을 때 편지를 받고 보낸 안부 답서이다. 아울러 세상 사람들 속에서 처신하면서 同和와 自守를 조화하기가 어려운 점에 대하여 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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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7544

    與川沙金公(1796)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
    일전의 질문에 대한 토론 형식의 편지이다. 道心·人心, 性命·形氣와 관련하여 「刊補」에 실린 것을 주제로 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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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7545

    答雨谷族叔(道行,1792)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
    「倡義辯誣疏」를 올려 임금의 비답을 받은 뒤에 그 결과를 가지고 논하는 내용이다. 말미에 「永嘉志」를 수정해 준 것에 대하여 감사하는 뜻을 표하였다. 金道行(1728∼1812)의 자는 中立, 호는 雨皐, 본관은 의성이다. 霽山 金聖鐸의 조카로서 그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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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7546

    答匏山族丈(龍普,1785)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
    이 해 2월에 저자의 부친 장례식을 거행하였는데, 그 즈음에 문상한 것에 대하여 감사하는 편지이다. 金龍普(1722~1787)의 자는 德中, 호는 匏山, 본관은 의성이다. 雲巖 明一의 후손이고, 李象靖에게 수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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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7547

    答趙晩谷(述道,1800)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
    수년 만나지 못한 감회와 일상의 안부, 아우를 먼저 보낸 슬픔, 관직에 제수되어 황송한 마음 등을 표하고 있다. 말미에 대산선생 문집 간행에 대한 논의가 있는 것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趙述道(1729∼1803)의 자는 聖紹, 호는 晩谷, 본관는 漢陽이다. 李象靖·金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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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7548

    與金丈君楫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
    고산정사 중수에 관한 것으로서 중수의 범위에 異論이 있어 강하게 항의하는 뜻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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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7549

    與李師魯(宗學,1799)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
    서울 관소에 있으면서 일상의 안부와 함께 평소 따끔한 충고를 해준 것에 대하여 감사하는 뜻과 함께, 관직생활이 고통스러워 집으로 돌아가 친구들과 본분에 맞는 대화나 하면서 지내고 싶다는 고충을 토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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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7550

    答李善述(述靖,1804)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
    만났다가 헤어지고 나서 보낸 답서이다. 헤어진 이후의 섭섭함, 병마의 고통, 책을 빌려준 것에 대한 감사의 뜻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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