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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魯仲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佳川의 선영 묘표를 세우는 일에 관한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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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再從姪弼夏弼成(1805)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이천에 재임할 때 보낸 것으로 보인다. 일상의 안부와, 강회를 열었으나 미흡했던 점, 慶科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 등을 적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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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再從弟族孫進洙(1798)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공부에 독실하지 못하다는 내용의 편지를 받고 답한 편지이다. 걱정을 하고 있다는 것이 좋은 소식이라고 하면서 서책을 착실하게 읽도록 권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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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進洙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자신의 단점에 대하여 자책하는 편지를 받고 답한 것이다. 立志를 하여 매진하면 병통이 절로 소진될 것이라고 하고 스승의 지도에 따라 부지런히 공부할 것을 권하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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寄兒弼熙(1799)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산중에서 공부하는 맏아들에게 뜻을 굳게 하여 독서에 매진할 것을 권하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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寄兒弼熙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서울에서 고향에 있는 맏아들에게 보낸 편지이다. 가사에 대한 걱정과 「변무소」를 올리고 난 뒤의 심경을 고하고, 절대로 사람들에게 이 일을 말하지 말라고 경계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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寄兒弼秉(1785)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타처에서 공부하고 있는 둘째아들에게 안부를 묻는 편지이다. 스승의 안부를 묻고, 「대학」을 정밀하게 읽을 것과 허송세월하지 말고 착실하게 공부할 것을 권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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寄兒弼秉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외지에서 공부하는 둘째아들에게 좋은 친구와 상종하면서 잡념을 버리고 몸가짐을 잘 하라는 당부의 편지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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記聞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27세 때인 1765(정조 11) 가을에 아우 東厓公과 더불어 大山書堂에서 「논어」를 강독하였는데, 이때 스승 大山으로부터 들은 바를 기록한 것이다. 연보에는 「師門記聞」이라 하였다. 과거공부와 순수학문의 의미, 독서하는 법, 大山의 과거공부와 학문 편력 등에 관하여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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辯庸學或說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中庸」과 「大學」의 혹자의 설에 대하여 나름대로 변증한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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諭一邑大小民人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60세 때인 1798년(정조 22) 정월에 단양군수로 부임하면서 군민들에게 내린 유시이다. 처음 외직으로 부임하면서 선비들은 오직 독서와 修身을 급선무로 하고, 농민들은 각자 농사에 진력해야 한다는 뜻으로 격려하고 경계한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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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邑勸學下帖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66세 때인 1804년(순조 4) 10월에 伊川都護府使로 부임하여 내린 帖文이다. 오륜을 강명하여 의리를 알아야 하므로 독서를 해야 한다는 뜻과, 향중의 원로 중에 지식이 있는 자를 가려 訓長으로 의망하면 직접 만나서 의논하여 학문을 권장할 계획을 세우겠다는 뜻을 알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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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義契完議後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연보」에 의하면, 44세 때인 1782년(정조 6) 저자가 주관하여 從祖兄弟들과 義契를 창설하였다. 그 취지는 종족의 길흉사에 상조하기 위함이었고, 세월이 오래 가면 폐단이 나올 것을 염려하여 完議를 작성하고 그 뒤에 발문을 지어 붙였다고 한다. 이는 바로 그 발문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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龜厓李公遺集後序(1804)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66세 때인 1804년(순조 4)에 지은 李琓(1650∼1732)의 「龜厓遺集」의 서문이다. 李琓이 종부 松月齋의 가학을 이어받고, 荷塘 權斗寅, 蒼雪 權斗經, 茅山 李棟完과 더불어 유림의 重望을 받으며 ‘川城四老’로 일컬어졌던 점을 일컬었다. 訥隱 李光庭이 지은 행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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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直提學成公實紀序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두문동 성선생(成思齊) 후손 상사 孝兢이 실기를 가지고 와서 발문을 부탁하여 짓게 된 것이라고 하였다. 성선생을 비롯한 두문동 72현의 충절, 1783년(정조 7)에 왕명으로 개성의 성균관에 表節祠를 세워 배향한 일, 曺義生·林先味·孟好誠 등과 더불어 그 자취가 드러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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遯峯金公逸藁序(1809)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遯峰 金寧의 문집 서문이다. 후손 尙元의 요청으로 쓰게 되었다고 하였다. 1809년(순조 9)에 후손들이 편집, 간행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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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巖權先生續集後序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저자의 중요한 시문이 많이 빠졌다는 이유로 1809년(순조 9) 후손 權宅孚와 金弘奎가 續集 6권 2책을 편차하여 저자의 序文을 받아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이는 그 서문이다. 權好文(1532∼1587)의 자는 章仲, 호는 松巖, 본관은 안동이다. 퇴계의 제자로서 같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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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潭金公逸藁序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金廷龍(1561~1619)과 동생 金廷堅(1576~1645)의 시문집인 「月潭菊園聯芳逸藁」중 「月潭金公逸藁」의 서문이다. 후손 相驥가 편집하였다. 金廷龍의 자는 時見, 호는 月潭. 본관이 의성이다. 金宇顒·鄭逑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1585년(선조 18) 별시문과에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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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西朴公遺集序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朴善長(1555∼1616)의 시문집인 「수서집」의 서문이다. 이 문집은 1810년(순조 10)에 현손 齊顔 등이 편집·간행하였다. 朴善長의 자는 汝仁, 호는 水西, 본관은 務安이다. 장인 南夢鰲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05년(선조 38) 문과에 급제하여 禮安縣監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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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求堂遺事後序(1811)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金迬(1606∼1681)의 시문집인「불구당집」의 서문이다. 1867년(고종 4) 5대손 光一이 편집·간행했다. 김왕의 자는 汝定, 호는 不求堂, 본관은 의성이다. 張顯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39년 文科에 급제하여, 典籍·五衛將 등을 역임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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開谷李公遺集後序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李爾松(1598~1665)의 시문집 「개곡집」의 서문이다. 이이송의 자는 壽翁, 호는 開谷이다. 외숙인 金應祖의 문인이다. 「개곡집」은 1811년(순조 11)에 목판본 5권 2책으로. 간행되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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柏潭具先生續集序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柏潭 具鳳齡의 시문집 「柏潭具先生續集」의 서문이다. 손서 李埈이 選定하면서 別集의 형태로 남기고자 하였던 시문을 다시 安東 儒生 李裕垂·金成九 등이 정리하고, 1811년 金의 校正을 받고 序文을 받아 목판으로 續集 4권 2책을 간행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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敬堂張先生續集序(1811)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경당 張興孝의 문집인 「敬堂張先生續集」의 서문이다. 이는 1818년(순조 18)에 가서 후손 張世奎 등이 鏡光書院 山長 河錫中의 도움을 받아 간행하였다. 張世奎는 5대손 張翊韓과 함께 1809년에 저자의 墓碣을 세우고 李㙖에게 碣銘을 부탁하여 받은 바 있었다. 그리고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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訥翁宋公遺事序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宋碩忠(1454∼1524)의 유사 서문이다. 송석충의 자는 元老, 호는 訥翁, 본관은 야성이다. 金宏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477년(성종 8)에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무오사화 이후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성리학과 역학을 깊이 연구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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景玉李公文集序(1813)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李簠(1629∼1710)의 시문집 「경옥선생문집」서문이다. 1813년(순조 13) 경 후손 寅綱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이보의 자는 信古, 호는 景玉, 본관은 진성이다. 金應祖에게 수학하여 1676년(숙종 2) 문과에 합격했으나 파방되었다. 그 후에도 한두 번 응시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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晦谷權先生文集序(1816)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權春蘭(1539∼1617)의 시문집 「晦谷集」의 서문이다. 1845년(헌종 11) 후손 曄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춘란의 자는 彦晦, 호는 晦谷, 본관은 안동이다. 退溪의 문인으로서 1570년(선조 3) 사마시에 합격하고, 1573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檢閱·監察·正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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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峯趙公遺藁序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趙錫晦(1727~1802)의 시문집 「一峯集」의 서문이다. 이 책은 1812년경 후손 泰淵·鎭夏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조석회의 자는 而晟, 호는 一峯, 본관은 한양이다. 향시에서 장원하고, 1773년(영조 49)에 숙부와 함께 문과에 급제하여 1776년에 친상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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玉峯權公遺集序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權暐(1552∼1630)의 시문집 「玉峯集」의 서문이다. 이 책은 1847년(헌종 13) 자손들에 의하여 편집, 간행되었다. 권우의 자는 叔晦, 호는 玉峯, 본관은 안동이다. 金誠一·金彦璣·趙穆의 문인이다. 어려서 東堂試 별시에 합격하였으며 1601년 문과에 급제하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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鳳巖精舍記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안동시 풍산읍 매곡리에 있는 봉암서원의 기문이다. 1802년(순조2) 10월 봉암사를 창건하여 허영정, 난재, 유유헌, 고암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였고 다시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이 서원의 창설에 저자가 직접 참여하였다. 1868년(고종5)에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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記書筵事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저자가 1800년에 세자시강원 문학으로 書筵에 입시하여 강의하였을 때의 정황에 대한 기록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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龜巖精舍記事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안동시 一直面 龜尾에 있는 의성김씨 입향조인 五友堂 金近(1597∼1656)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6세손인 저자가 1791년(정조 15)에 건립한 의성김씨 오우당파의 문중 사우이다. 주향자인 김근의 자는 性之, 호는 五友堂이며 雲川 金涌의 문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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判書淵記(1809)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낙동강이 안동부 搴芝山 절벽 아래에서 못을 이루고 있고 강 건너에는 鳳停山과 鶴駕山이 뻗으면서 건지산과 대를 이룬다. 고려 때 上洛 김공이 절벽 사이에 대를 쌓고 유식하여 ‘上洛臺’라 하였다. 조선조에 磨厓 權公이 이조판서를 지내고 물러나와 대 위에 정자를 짓고 여생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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雲溪里社記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인조 때의 性理學者 權杠(1567~1626)을 제향한 사우의 기문이다.「方潭集」권4 부록에는 「講堂記」로 표제되어 실려 있으며, 저작 연대는 1810년(순조 10) 중추로 되어 있다. 權杠의 자는 公擧, 호는 方潭, 본관은 安東으로 柳成龍의 문인이다. 1589년(선조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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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坊日記後識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저자가 정조에게 발탁되어 1800년 세자시강원 문학으로 書筵에 입시하여 강의하였는 바,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등극한 이후 향리에 돌아와 그 당시의 일기를 보면서 느낀 감회를 적어 뒤에 붙인 발문이다. 「春坊日記」는 「龜窩續集」권4에 실려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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敬書先祖五友堂遺集後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저자의 6대조 金近(1579∼1656)의 시문집 「오우당집」의 발문이다. 이 문집은 9대손 道和등이 편집·간행하였다. 金近의 자는 性之, 호는 五友堂이다. 1642년(인조 20)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학문연구와 후학 교육에 전념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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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二樂樓老先生詩板後(1799)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저자가 1799년 단양군수로 재임하면서 퇴계선생이 재임할 때의 유적을 찾았으나 남아있는 것이 없었다. 이에 퇴계문집 속에서 ‘二樂樓’, ‘島潭’, ‘龜潭’, ‘仙巖’에서 지은 시를 발췌하여 목판에 새겨 걸고 이 발문을 덧붙인 것이다. 이 시는 「퇴계선생문집」권1에 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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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李進汝朱子書問目彙編後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晩覺齋 李東汲(1738∼1811)이 편한 「朱子書問目彙編」의 발문이다. 주자전서 중에서 문목을 類別로 분류 편집한 것이다. 저자가 서울에 있을 때 직접 가지고 와서 발문을 청하였다고 하였다. 李東汲의 자는 進汝, 호는 晩覺齋, 본관은 廣州이다. 蔡弘遠·李象靖을 사사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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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安章仲德文三山院序後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宜菴 安德文(1747~1811)의 「三山院序」의 발문이다. 安德文의 자는 章仲, 호는 宜菴, 본관은 耽津이다. 如石의 아들이며 宜寧사람이다. 그는 父親의 命으로 두 차례 應試했으나 곧 과거를 폐하고 경전 연구에 힘썼다. 「宜菴集」권4 잡저에「三山圖誌序」, 권5에 「三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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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卞孝子廷八行錄後(1808)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孝子 卞廷八의 아들 之恭이 그의 효행 이력과 다른 분들이 쓴 글을 모아 가지고 찾아와 발문을 청하였는데, 변효자가 여묘살이를 할 적에 저자가 직접 가서 보고 감동을 받은 적이 있어 쓰게 되었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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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籬金公遺集後跋(1811)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東籬先生文集」권5 부록 말미에 실려 있다. 저작 연도는 1811(순조 11)년 12월이다. 「동리문집」은 金允安(1562∼1620)의 시문집으로, 1773년 이상정의 교정을 거쳐, 1812년 후손 世奎·世瑜 등에 의하여 편집, 간행되었다. 이 발문은 이 때 지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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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楬伊川東閣小識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저자가 1800년 이천도호부사에 재임할 때 지은 글이다. 伊川 서쪽에 明道巖이 있어 송나라 학자 程伊川·程明道에 견주고, 정명도의 말 중에, “視民如傷, 存心愛物”이라고 한 훈계를 생각하여 목민관의 본보기로 삼기 위하여 ‘愛濟’ 두 글자로 편액을 걸고 여덟 글자를 벽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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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高山講會題名錄後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柳範休가 고산서당의 堂任을 맡아 강회를 열었는데, 1백여 명이 모여 대산선생의 문집 속에서 ‘率性之謂道’, ‘一性具四德’, ‘心無出入’ 네 구절을 뽑아 강론하였다. 강회를 마치고 서당의 節目을 걸고 저자에게 ‘題名錄’을 쓰게 하였다. 이는 그 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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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堂朴先生神道碑後小識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미수 허목이 지은 松堂 朴英(1471(성종∼1540)의 신도비에 붙인 후지이다. 증직과 시호를 받은 사실이 신도비에 실려 있지 않아 보충한 것이다. 朴英의 자는 子實, 호는 松堂이다. 무예에 뛰어나 1487년(성종 18) 李世弼의 幕下에 있을 때 명나라에 다녀왔으며,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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退陶書節要跋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大山 李象靖이 편찬한 「退陶書節要」의 발문이다. 동문들이 간행하려 할 때 대산의 손자 李秉運이 청하여 쓰게 된 것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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鶴川李公遺藁跋(1813)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鶴川 李逢春(1542∼1625)의 시문집 「鶴川遺藁」의 발문이다. 후손들이 간행하려 하면서 교감과 함께 발문을 청하였다. 이 시문집은 이미 大山 李象靖, 小山 李光靖, 后山 李宗洙의 교정을 거쳤다고 하였다. 이봉춘의 자는 根晦, 호는 鶴川, 본관은 진보이다. 퇴계선생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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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幼聞(重祖)哀辭(1807)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藏窩 李重祖(1737~1806)의 애사이다. 이중조의 초명은 馥遠. 자는 幼聞. 호는 藏窩이다. 李玄逸의 伸寃을 위해 일생을 바쳐, 정조가 조상을 중히 여긴다 하여 ‘重祖’란 이름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蔡濟恭과 교유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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崑山書院常享文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眞靜先生 申祐德(1581~1653)와 克齋를 제향한 약목의 崑山書院의 상향 축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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鳳巖精舍常享文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봉암정사 상향 축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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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山精舍常享文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안동시 일직면 망호리에 있는, 魯厓 南太白, 雲澗 南太華, 晴川 南太別 등 3형제의 위패를 봉안한 公山精舍의 상향 축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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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山書院常享文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蘭皐 南慶薰(1572∼1612), 安分堂의 위패를 봉안한 光山書院의 상향 축문이다.출처 : 유교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