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滄洲書院常享文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滄洲書院 상향 축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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杏溪里社常享文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행계리사 상향 축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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雲山書院常享文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雲山書院 상향 축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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泗溪書院常享文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泗溪書院의 상향 축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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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大山先生文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저자의 스승 大山 李象靖에 대한 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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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李丈(宜寅)文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저자의 아우 墩의 장인인 處士 宜寅에 대한 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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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約窩李公(顯靖)文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約窩 李顯靖(1721∼1789)에 대한 제문이다. 이현정의 자는 孟休, 호는 約窩. 목은 李穡의 후손이다. 1763년(영조 39)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교리가 되었다. 弘文錄에 올랐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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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內舅南公()文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저자의 외삼촌 南에 대한 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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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李小山先生文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저자의 스승 이상정의 아우 小山 李光靖(1714~1789)에 대한 제문이다. 이광정의 자는 休文, 호가 小山이다. 밀암 李栽의 문인이다. 학행으로 천거되어 참봉·동몽교관·사과·승의랑·사포서별제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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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李致道文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李致道에 대한 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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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金弘輔(宗燮)文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濟庵 金宗燮(1743~1791)에 대한 제문이다. 김종섭의 자는 弘輔, 호는 濟庵이다. 川沙 金宗德의 동생으로 李象靖의 문인이다. 1768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출사의 뜻을 끊고 성리학에 전념하여, 대산이 이루지 못한 「心經請錄刊補」편찬에 치력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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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東巖柳公(長源)文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東巖 柳長源(1724∼1796)에 대한 제문이다. 유장원의 자는 叔遠, 호는 東巖, 본관은 전주이다. 참의 觀鉉의 아들로 金樂行·李象靖에게 수학하였다. 1763년(영조 39)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출사의 뜻을 끊고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東巖亭을 지어 후진교육에 힘썼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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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川沙金公(宗德)文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川沙 金宗德(1724∼1797)에 대한 제문이다. 김종덕의 자는 道彦, 호는 川沙, 본관은 안동이다. 李象靖을 사사하여 학문에 전념하였다. 1789년(정조 13) 금부도사가 되고, 1794년에 수직(壽職)으로 첨지중추부사에 올랐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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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后山李公(宗洙)文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后山 李宗洙(1722∼1797)에 대한 제문이다. 이종수의 자는 學甫. 호는 后山, 본관은 진성이다. 李象靖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과거에 뜻을 끊고 爲己의 학문에 전념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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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金文叟(熙稷)文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金文叟에 대한 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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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鄭伯恭文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鄭伯恭에 대한 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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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族叔行之文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족숙 行之에 대한 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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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族弟子器(甄)文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족제 金甄에 대한 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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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再從弟誠用(圭)文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제종숙 金圭에 대한 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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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族弟伯春文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족제 金伯春에 대한 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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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伯父文(1783)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저자의 백부에 대한 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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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族弟子極文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족제 金自極에 대한 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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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舍弟子厚文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저자의 아우 金墩(1742~1799)에 대한 제문이다. 김돈의 자는 子厚, 호는 東厓이다. 李象靖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771년 생원시에 합격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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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亡子弼秉文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저자의 장자 金弼秉(1769~1806)에 대한 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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浣亭李公遺墟碑銘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浣亭 李彦英(1568∼1639)의 유허비명이다. 후손 굉, 집 등이 유집과 묘갈명을 가지고 와서 청하였다. 이언영의 자는 君顯, 호는 浣亭, 본관은 碧珍이다. 공조좌랑 鄧林의 아들이다. 1603년 식년문과에 장원을 하였다. 전적, 호조정랑, 太僕寺僉正, 정언을 역임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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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軒崔公遺墟碑陰記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竹軒 崔恒慶(1560~1638)의 유허비 음기이다. 최항경의 자字는 德久, 호는 竹軒이다. 鄭逑의 문인이다. 1606년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길에 뜻을 끊고 鰲巖精舍를 지어 經史와 禮說 연구에 전력하였다. 川谷書院·檜淵書院 원장을 역임하였다. 通訓大夫 濟用監正에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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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司成眞一齋柳公墓誌銘(1808)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眞一齋 柳崇祖(1452)∼1512)의 묘지명이다. 후손 永時·宜胤 등이 종자 養周를 보내 부탁하였다. 유숭조의 자는 宗孝, 호는 眞一齋. 서령 之盛의 아들이다. 1489년(성종 20)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교서관정자에 발탁되고, 師儒錄에 들었다. 그 뒤 정언·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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同知中樞府事金公墓誌銘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金始東(1731~1811)의 묘지명이다. 아들 金熙周가 유사를 가지고 와서 청하였다. 김시동의 자는 季源, 본관은 의성이다. 조부는 汝鐸이고, 부는 景學이고, 모는 선성김씨 行秋의 딸이다. 부인은 소고 박승임의 후손 孝述의 딸이고, 아들은 熙周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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觀察使牛川鄭公墓誌銘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牛川 鄭玉(1694∼1760)의 묘지명이다. 鄭玉의 증손이자 저자의 사위인 光柱가 章簡이 쓴 가장을 가지고 와서 묘지명을 청하였다. 정옥의 자는 子成, 호는 牛川, 본관은 청주이다. 부는 碩濟이다. 1727년 문과에 급제하여,栗峯道察訪·감찰·병조좌랑·黃海道都事를 역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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塤叟鄭公墓誌銘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塤叟 鄭萬陽(1664∼1730)의 묘지명이다. 후손 始燮의 청으로 쓰게 되었다. 鄭萬陽의 자는 景醇, 호는 塤叟·企菴·定齋. 본관은 迎日이다. 부는 생원 碩胄이고, 모는 義城金氏 邦烈의 딸이다. 종조부 時衍과 李玄逸의 문하에서 아우 葵陽과 함께 수학하여, 경사·성리학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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忘窩金公墓誌銘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忘窩 金榮祖(1577∼1648)의 묘지명이다. 후손 상사 宗鳳이 묘지명을 청하였다. 김영조의 자는 孝仲, 호는 忘窩이다. 산음현감 大賢의 아들이며 학봉 金誠一의 사위이다. 1612년(광해군4)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를 거쳐 전적·정언·지평·부수찬·대사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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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司憲李公墓誌(1810)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李鼎揆(1735~1810)의 묘지명이다. 弟子 海祥이 家狀을 가지고 와서 묘지명을 부탁하였다. 이정규의 자는 公宅이고, 본관은 여주이며, 회재 이언적의 8세손이다. 부는 憲一이고, 모는 풍천임씨 정랑 華世의 딸이다. 1768년(영조 44)에 급제하여 승정원주서·부교리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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處士鄭公墓誌銘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鄭一鎭(1713~1752)의 묘지명이다. 鄭一鎭의 아들 夏浚이 아들 復休를 보내 묘지명을 청하였다. 鄭一鎭의 자는 安仲, 호는 鶴皐이다. 부는 重善이고, 모는 함안 조씨 漁溪 후손 文夏의 딸이다. 일찍이 梅山公에게서 수학하였고, 鄭萬陽·鄭葵陽 형제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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處士沙川徐公墓誌銘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徐昌鏡(1726~1799)의 묘지명이다. 아들 弘胤이 가장을 가지고 와서 묘지명을 부탁하였다. 자는 正甫, 호는 沙川, 본관은 달성, 영주 사천 출신이다. 부는 童豁齋 萬維이고, 모는 경주이씨 의 딸과 반남 박씨 世範의 딸이다. 徐昌鏡은 박씨 소생이다. 대산 이상정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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鶴峯先生墓碣銘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鶴峯 金誠一(1538∼1593)의 묘갈명이다. 최초 묘갈명은 사후 27년이 지난 1619(광해군 11)년에 세워졌다. 그후 1676년(숙종 2)에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1679년(숙종 5)에 文忠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는데, 그 사실이 기왕의 묘갈명에 실리지 못하여 당시에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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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盡亭趙公墓碣銘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趙參(1473~)의 묘갈명이다. 후손 基永의 요청에 따라 지었다. 趙參의 자는 魯叔, 호는 無盡亭, 본관은 함안이다. 조부는 漁溪先生 旅이고, 부는 군수 銅虎이고, 모는 고성이씨 增의 딸이다. 1507년(중종 2)에 문과에 급제하여 내직으로 지평과 외직으로 다섯 고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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惟一齋金公墓碣銘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金彦璣(1520~1588)의 묘갈명이다. 후손 星九 등이 묘갈명을 지어달라고 요청하였고, 저자의 선조 梅隱公이 그 문하생으로서 문인록에 들어 있어 짓게 되었다고 하였다. 金彦璣는 柏潭 具鳳齡과 청량산에 들어가 10년을 기약하고 공부를 하였고, 48세에 사마시에 합격한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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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司僕正萬嶺柳公墓碣銘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柳益輝(1629~1698)의 묘갈명이다. 후손 道文·進文가 가장을 가지고 와서 묘갈을 청하였고, 저자도 외손이어서 지어주었다고 하였다. 과거에 뜻을 접고 ‘萬嶺草堂’을 짓고 유유자적한 행력에 대하여 李簠가 지은 「萬嶺草堂記」를 인용하면서 기술하였다. 柳益輝의 자는 爾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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葛峯金公墓碣銘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金得硏(1555~1637)의 묘갈명이다. 후손 星九의 요청으로 지었다. 金得硏이 당대의 학자 惟一齋 彦璣의 장자로 태어나, 임진란에 사우들과 의병을 일으켰고, 58세에 生進 양과에 합격한 이후로 과거에 뜻을 접고 經書를 보면서 소요하였으며, 金溪巖·裵琴易堂·琴守靜,權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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風雷軒金公墓碣銘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金是樞(1580~1640)의 묘갈명이다. 후손 虎壽가 가장을 가지고 와서 부탁하여 짓게 되었다고 하였다. 金是樞가 어려서 湖陽 權益昌에게서 수학하고 이어서 柳成龍·鄭逑 문하에 나아가 많은 장려를 입었고, 1621(광해군 13)년에 영남유생들이 李爾瞻을 탄핵하는 상소를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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顧齋李公墓碣銘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李(1669∼1734)의 묘갈명이다. 증손 宇啓가 俛庵이 지은 행장을 가지고 와서 청하여 짓게 되었다고 하였다. 陶山書院에서 독서하였고, 副提學 權瑎와 孫德升이 그의 강론을 듣고 감탄한 사실, 趙顯命의 천거로 永禧殿參奉에 제수하였으나 부임하지 않은 사실, 성리서를 깊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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下枝李公墓碣銘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李象辰(1710∼1772)의 묘갈명이다. 손자 楨漢이 權可軒이 지은 행장을 가지고 와서 묘갈명을 청하여 향리의 후생으로서 짓게 되었다고 하였다. 李象辰은 權榘·權相一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1756년(영조 32) 사마시에 합격했으나 문과에 응시해 여러 번 실패하자 벼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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剛窩任公墓碣銘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任必大(1709~1773)의 묘갈명이다. 士友들이 사당을 세워 모시고 遺文을 간행하려고 하면서 묘갈명을 청하여 짓게 되었다고 하였다. 任必大는 어려서 小學·四書·心經·近思錄 등을 깊이 연구하고 退溪文集을 탐독하였으며, 학사를 두고 후학을 가르쳤다. 부사 徐命敏이 훈장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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聾睡齋崔公墓碣銘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崔光翊(1731~1795)의 묘갈명이다. 아들 鴻羽가 剛齋 李承延이 쓴 행장을 가지고 와서 청하였다고 하였다. 저자가 직접 방문하여 보고 느낀 점, 1753년(영조 29)에 사마시에 합격하고서, 당호를 ‘自知’, ‘聾睡’라 하고 세간의 명리에 뜻을 끊고 유유자적한 행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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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訓大夫工曹佐郞李公墓碣銘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李遂漸(1713~1783)의 묘갈명이다. 아들 恒祿이 청하여 지었다고 하였다. 李遂漸이 청빈한 가문의 전통을 이어 지조를 가지고 살았던 행실과, 1759년(영조 35)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공조좌랑·울진현령 등을 역임한 관력 등을 기술하였다. 李遂漸의 자는 士鴻,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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族曾祖處士公墓表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金孝兼(1672~1740)의 묘표이다. 사손 弼冕이 유사를 가지고 와서 청하였다고 하였다. 剛毅·寬厚한 성품, 宗事에 진력한 점, 1728년(영조 4)의 변란에 부사 朴師洙가 軍務都監을 맡겼던 일 등을 기술하였다. 金孝兼의 자는 汝則, 본관은 의성이다. 조는 四休居士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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族叔梅雪堂公墓表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저자의 족숙 金光復(1722~1768)의 묘표이다. 손자 弼冕이 저자의 선친이 지은 제문을 가지고 와서 묘표를 청하였다고 하였다. 家系와 평소 직접 보고 느낀 바 安貧樂道의 행력을 기술하였다. 金光復의 자는 陽甫, 호는 梅雪堂, 본관은 의성이다. 조는 孝兼, 부는 鼎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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七代祖考宣務郞主簿梅隱府君墓表(1804)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저자의 7대조 金安繼(1556~1599)의 묘표이다. 저자가 홍문관교리가 되어 묘표가 없는 것을 걱정하여 짓게 되었다고 하였다. 唯一齋 金彦璣 문하에서 수학하여 학업에 치력한 점, 근엄한 행실, 癸巳年 왜란에 군량을 모집하여 특별히 군자감주부에 제수된 점 등을 기술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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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一代祖考知文院事府君墓表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저자의 11대조 金漢啓(1414~1461)의 묘표이다. 행력에 대하여 자료가 없어 자세히 살필 수 없다고 하고, 모 廣州李氏의 묘지명에서, “1남이 成三問·河緯地와 동방으로 급제하여, 文宗·端宗 때에 요직을 두루 거쳤다.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벼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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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均進士樂山李公行狀(1807)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李完(1512~1596)의 행장이다. 후손 學時가 청하여 짓게 되었다. 숙부 퇴계선생 문하에서 수학하여 1540(중종 35)년에 사마시에 합격한 이후로 과거에 뜻을 끊고 예천 金谷에서 소요하였다. 만년에 石橋에 樂山亭을 짓고 書史를 일과로 삼고, 동문인 雪月堂 金富倫출처 : 유교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