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체: 에 대해 총641,751건의 자료가 검색되었습니다.
-
357701
松庵盧公行狀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盧守諴(1516~1573)의 행장이다. 후손 廷燁이 유사를 가지고 와서 행장을 청하였다. 盧守諴은 松堂 朴英 문하에서 冶川 朴紹, 龍巖 朴雲 등과 같이 공부하였다. 진사에 합격한 이후로 벼슬에 뜻을 접고 경사에 침잠하였다. 眞樂 金就成, 后溪 金範, 企村 宋純, 久庵출처 : 유교넷 -
357702
野塘南公行狀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南宗衡(1650~1731)의 행장이다. 저자의 內兄인 範龜가 유사를 가지고 와서 청하였다. 南宗衡 자는 伯維, 호는 野塘 본관은 남양이다. 조부는 현감 無妄齋 碝, 부는 新豊主人 天斗, 모는 청주한씨 도사 復胤의 딸이다. 孤山 李惟樟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수차례의출처 : 유교넷 -
357703
中直大夫行兵曹佐郞李公行狀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李柱世(1671~1711)의 행장이다. 손자 恒祿이 종손 秉天에게 遺事를 보내 행장을 청하였다. 李柱世의 자는 爾安, 호는 五一軒, 본관은 벽진이다. 증조는 浣石亭 彦英, 조부는 斗鎭, 부는 海亮, 모는 盆城許氏 塤의 딸이다. 7세에 숙부 滄洲 昌鎭(1619∼1684출처 : 유교넷 -
357704
靜窩趙公行狀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趙錫喆(1724~1799) 의 행장이다. 손자 述謙이 형 述師의 편지를 가지고 와서 청하였다. 趙錫喆의 자는 明仲, 호는 靜窩, 본관은 豊壤이다. 黔澗 趙靖의 후손이다. 조부는 疎軒 瀣, 부는 善經, 모는 밀양박씨 聖任의 딸이다. 백부 中厓公에게서 수학하였고, 종형출처 : 유교넷 -
357705
成均生員金公行狀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金柱雲(1707~1789)의 행장이다. 아들 宛燦이 와서 평소 행적을 잘 아는 처지라 하여 부탁하였다. 金柱雲의 자는 昌國, 본관은 의성이다. 학봉의 7세손이다. 조부는 以鏡, 부는 夢海, 모는 진주 강씨 必亨의 딸이다. 1744년(영조 20)에 사마시에 합격한 이후출처 : 유교넷 -
357706
鶴林權公行狀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權訪(1740∼1808)의 행장이다. 형 上舍公이 遺事를 가지고 와서 청하였다. 자는 季周, 호는 鶴林, 본관은 안동이다. 조부는 진사 可正이고, 부는 繩軒 濤이고, 모는 예안김씨 元烈의 딸이다. 사마시에 합격하여 李象靖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783년(정조 7)에출처 : 유교넷 -
357707
厚庵權公行狀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權濂(1701∼1781)의 행장이다. 아들 以復이 가장 초고를 가지고 와서 청하였다. 權濂의 자는 希元, 호는 厚庵, 본관은 안동이다. 조부는 聖時, 부는 后準, 모는 의성김씨 適庵 台重의 딸이다. 외가에서 金聖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密庵 문하에 나아가 小學疑目을출처 : 유교넷 -
357708
覺齋河公行狀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河沆(1538∼1590)의 행장이다. 자는 浩源, 호는 覺齋. 본관은 晋州이다. 조부는 현감 瀅이고, 부는 麟瑞이다. 后溪·南冥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67년(명종 22) 사마시에 합격한 이후로 과거에 뜻을 끊고 평생 학문과 독서에 전념하였다. 천거로 참봉에 임명되출처 : 유교넷 -
357709
大司諫李公行狀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李鼎德(1752~1801)의 행장이다. 사자 耆祥이 가장을 가지고 와서 청하였다. 李鼎德의 자는 象汝, 본관은 여주이다. 晦齋 李彦迪의 8세손이다. 조부는 述中, 부는 憲燾, 모는 영천이씨 秀時의 딸이다. 1783년(정조 7)에 문과에 급제하여 說書·正言·부교리·수찬출처 : 유교넷 -
357710
成均生員權公行狀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權進道(1737~1803)의 행장이다. 아들 鼎相이 가장을 가지고 와서 청하였다. 權進道의 자는 希晉, 본관은 예천이다. 睡軒 權五福의 후손이다. 조부는 坫이고, 부는 致大이고, 모는 광산김씨 光鉉의 딸이다. 족대부 仙溪 權墉, 李賢汲에게서 수학하였고, 南野 朴孫慶에출처 : 유교넷 -
357711
通德郞鄭公行狀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저자의 사위 鄭光柱의 조부 鄭崇簡(1729~1768)의 행장이다. 사위 鄭光柱가 遺事를 가지고 와서 청하였다. 鄭崇簡의 자는 敬德, 본관은 서원이다. 조부는 碩濟이고, 부는 관찰사 牛川 玉이고, 모는 연안이씨 溟의 딸이다. 부인은 안동권씨 의 딸이고, 아들은 사자 必출처 : 유교넷 -
357712
同知中樞府事黃公行狀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黃受夏(1719~1808)의 행장이다. 외손 朴鎭翼이 가장을 가지고 와서 청하였다. 黃受夏의 자는 師甫, 본관은 평해이다. 조부는 塾, 부는 世元, 모는 청주한씨 世愈의 딸이다. 수직으로 가선대부에 올랐다. 부인은 野城尹氏 徵三의 딸이고, 아들은 有仁이다.출처 : 유교넷 -
357713
俛庵李公行狀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李㙖(1739~1811)의 행장이다. 이우의 아들 秉鐸의 요청으로 쓰게 되었고, 동갑 나이로서 大山·小山 문하에 함께 출입하여 일생 행력에 대하여 잘 아는 처지라고 하였다. 4천여 자의 長文이다. 李㙖의 자는 穉春, 호는 俛庵, 본관은 韓山이다. 父는 小山 李光靖이고출처 : 유교넷 -
357714
方壺趙公行狀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趙遵道(1576~1665)의 행장이다. 후손 基永의 요청으로 지었다. 趙遵道의 자는 景行, 호는 方壺, 본관은 咸安이다. 漁溪 趙旅의 5대손이다. 증조는 사헌부집의 無盡亭 參이고, 祖는 예빈시별제 廷柏이고, 父는 부사직 介이고, 母는 善山金氏 부제학 就文의 딸, 尙州출처 : 유교넷 -
357715
磨泉柳公行狀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柳大時(1657~1738)의 행장이다. 손자 源澈의 부탁으로 지었다. 柳大時의 자는 子猷, 호는 磨泉, 본관은 全州이다. 고조는 증좌승지 岐峯 柳復起, 증조는 陶軒 柳友潛, 조는 부호군 柳橚, 부는 증사복정 萬嶺 柳益輝, 모는 權壐의 딸이다. 부인은 陜川宋氏 처사 時출처 : 유교넷 -
357716
聾啞處士金公行狀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金樸(1696~1743)의 행장이다. 아들 光緖가 그의 아들 弘奎를 보내 부탁하여 짓게 되었다고 하였다. 金樸은 평소 기개가 높아 1728년(영조 4) 호남의 변란이 일자 안동부에 들어가 기병을 독촉한 사실, 1740년(영조 16)에 부내에서 행한 일족의 花樹會에 대출처 : 유교넷 -
357717
兩宜堂權公行狀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權紓(1698~1780)의 행장이다. 아들이 청하여 짓게 되었다고 하였다. 權紓가 1727년(영조 3)년에 사마시에 합격한 이후로 학문과 操行, 전원생활로 소요한 사실, 屛谷·密庵·霽山 등을 사사하고 大山 李象靖과 이웃에 살아 교화를 입었다는 사실 등을 중심으로 기술출처 : 유교넷 -
357718
雨皐金公行狀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金道行(1728∼1812)의 행장이다. 그의 아들 始幹이 상을 마치고 아들 祚運을 보내 행장을 청하였다고 한다. 金道行의 자는 中立, 호는 雨皐, 본관은 義城이다. 藥峯 金克一의 6세손이자 芝村 金邦杰의 증손이다. 아버지는 正鐸이며, 어머니는 眞城李氏 齊泰의 딸이다.출처 : 유교넷 -
357719
龍岡處士黃公行狀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黃壽一(1666∼1725)의 행장이다. 저자가 伊川都護府使로 있을 때에 黃壽一의 외손 南龍燮이 丁範祖·李象靖의 문집 서문과 행록 1책을 보내와 행장을 청하였다고 하였다. 黃壽一이 출세의 길을 버리고 평생 禮學을 연구한 사실을 중심으로 기술하였다. 黃壽一의 자는 用五,출처 : 유교넷 -
357720
弦庵權公行狀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權以肅(1725~1787)의 행장이다. 사자 儆이 가장을 가지고 와서 행장을 청하였다고 하였다. 대산 문하에 출입하면서 평생 操行과 학문에 종사한 이력을 기술하였다. 權以肅의 자는 支國, 호는 弦庵, 본관은 안동이다. 조는 后準, 부는 진사 菊軒 淳, 모는 고성이씨출처 : 유교넷 -
357721
嘉義大夫行全羅按廉使琴隱朴公行狀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여말선초의 무신 朴成陽(생몰연대 미상)의 행장이다. 그의 후손 朴忠漢이 상사 朴春培의 서찰과 가장 초고, 泰齋 柳方善의 贈詩 1편 등을 가지고 와서 행장을 청하였다고 하였다. 朴成陽이 고려가 망하자 절의를 지켜 은둔하다가 국난의 방어를 위하여 부르자 다시 나아가 벼슬출처 : 유교넷 -
357722
高麗忠臣忠介公白巖金公遺事(1800)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고려 遺臣 金濟(생몰년 미상)의 유사이다. 후손 聲國이 전후 사실을 수집하여 와서 유사를 지었다고 하였다. 金濟가 고려 신하로서의 충절을 지킨 것을 伯夷·叔齊의 행적에 비하면서 종적을 감춘 시말과 이후 遺文의 발견, 선양 사실을 등을 기술하였다. 金濟의 호는 白巖,출처 : 유교넷 -
357723
珍山縣令李公遺事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李坽(1653~1700)의 유사이다. 李坽의 손자 永德이 부탁하였고 저자가 바로 曾孫壻여서 지어주게 되었다고 하였다. 평소 저자가 장인에게서 들은 바로서 李坽의 자질이 특출하고 기개가 높았던 점, 문장이 뛰어나고 관직생활에서 공정하였던 점 등을 기술하고, 특히 「金剛출처 : 유교넷 -
357724
嘉義大夫同知中樞府事二可堂趙公遺事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趙相抃(1714~1805)의 유사이다. 손자 基永이 아들 錫九를 보내 부탁하여 사양하였으나 基永이 상중에 찾아와 간절히 부탁하여 지어주게 되었다고 하였다. 趙相抃이 夢蕉 權濂 등과 학문을 한 사실, 향중의 교육에 힘쓴 사실 등을 중심으로 기술하였다. 趙相抃 자는 悅卿출처 : 유교넷 -
357725
從五代祖四休居士府君遺事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金爾聲(1609~1677)의 유사이다. 평생 樂天知名의 자세로 일관한 행력을 중심으로 기술하였다. 金爾聲의 자는 子宣, 호는 四休居士, 본관은 의성이다. 조는 주부 梅隱 安繼이고, 부는 진사 五友堂 近이고, 모는 안동 권씨 좌랑 暐의 딸이다. 부인은 재령이씨 생원 時출처 : 유교넷 -
357726
族叔處士公遺事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金光翰(1727~1751)의 유사이다. 金光翰의 아들 堡가 부탁하고 손자 弼淳이 만사와 제문 등을 주어 유사를 짓게 되었다고 하였다. 대산 李象靖와 后山 李宗洙의 誄文을 인용하면서, 단정한 용모와 자질을 갖추고 進取에 골몰하지 않고 학문에 힘써 장래가 촉망되었으나 요출처 : 유교넷 -
357727
先考府君遺事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저자의 부 金光憲(1720~1784)의 유사이다. 일상 가정에서 행한 이력을 기술하고, 특히 저자에게, “大山은 백세에 드문 賢者이다. 젊어서는 알아보지 못하였고 중년에는 세사에 골몰하느라 이루지 못하였다. 너희들이 가서 공부하여 나의 뜻을 이루라”라고 한 것을 인용출처 : 유교넷 -
357728
先妣英陽南氏遺事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저자의 모 영양남씨(1713~1773) 부인의 유사이다. 부인의 조부는 용양위부호군 宗衡이고, 부는 以路이고, 모는 선성이씨 처사 晦身의 딸이다. 1736년에 남편 金光憲(1720~1784)에게 출가하였다.출처 : 유교넷 -
357729
仲弟成均生員遺事 / 기록자료>고도서 / 김굉저자의 아우 金墩(1742~1799)의 유사이다. 저자와 함께 대산 李象靖 문하에 출입하면서 공부한 내력, 笙潭의 정자에서 독서한 일 등을 중심으로 기술하였다. 金墩의 자는 子厚, 호는 東厓, 본관은 의성이다. 아버지는 光憲이며, 어머니는 英陽南氏로 以老의 딸이다.출처 : 유교넷 -
357730
기암집 / 기록자료>고도서 / 김우창起菴 金禹昌의 문집. 3권 2책. 목판본. (沈相勳) 이 문집은 1928년 김우창의 아들인 冀相이 편집·간행했으며, 金鎬相·金世相 등이 발문을 섰다. 권 1에는 시 73수, 疏 2편이, 그리고 書 7편, 잡저 4편, 序 2편, 기 2편, 발 3편, 잠 2편, 명 1출처 : 유교넷 -
357731
詩 / 기록자료>고도서 / 김우창伏次伯父元朝韻, 次溪深臺契會韻(三首), 九日偶吟, 留泮時贈李參判聖建(啓魯)歸覲, 禽語(八首), 暮春卽事, 十二月雪, 傷田婦, 族叔萬拙齋(鎭漢)挽, 柳承旨(光睦)挽, 次邵康節冬至吟(二首), 伏次退逸軒權公(泳夏)壽筵韻(二首), 族祖萬松軒(基黙)挽, 長夜吟, 憶朴夢坡邦彦(출처 : 유교넷 -
357732
請文莊公愚伏鄭先生陞祀聖廡疏 20 / 기록자료>고도서 / 김우창愚伏 鄭經世(1563~1633)의 文廟從祀를 청원한 상소이다. 자신이 疏頭가 되어 1883년(고종 20) 올린 것이다. 退溪 李滉의 嫡傳인 西厓 柳成龍의 門下에서 배운 정경세는 명실상부한 眞儒이자 百代의 師表가 되는 인물이라 전제하면서, 독실한 格致·誠正의 공부와 博출처 : 유교넷 -
357733
請文敬公敬菴許先生琴湖書院復設疏 26 / 기록자료>고도서 / 김우창文敬公 敬菴 許稠(1369~1439)의 위패가 봉안된 琴湖書院의 復設을 청원한 상소이다. 河陽에 있는 금호서원은 숙종 10년(1684) 건립되었으나, 고종 8년(1871) 興宣大院君의 서원 毁撤令에 의해 없어졌다. 그의 후손 許寅斗가 복설을 청원했으나, 復院여부는 本출처 : 유교넷 -
357734
與李龍山(晩寅) 1 / 기록자료>고도서 / 김우창龍山 李晩寅(1834~1897)에게 보낸 편지이다. 추운 날씨에 건강한 지를 묻고 자신은 원래 몸이 약한 나머지 추위가 무서워 집에서 칩거하면서 아이들이 병이 들지 않은 것으로 위안을 삼으며 지내고 있다고 전했다. 鄕約은 한 번 시행해 보기는 했지만, 文具가 갖추어지출처 : 유교넷 -
357735
與李龍山 1 / 기록자료>고도서 / 김우창龍山 李晩寅에게 보낸 편지이다. 눈 내리는 歲暮의 추운 날씨에 건강한지를 묻고, 자신의 저술이 봄에 제대로 모양을 갖추도록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음을 전했다. 그러나 교정을 담당하고 있는 아이들이 병이 잦아 일에 차질이 빚어질까 걱정이 되는 바이며, 책의 제목은 지출처 : 유교넷 -
357736
與李子翼(正鎬) 2 / 기록자료>고도서 / 김우창李正鎬에게 보낸 편지이다. 지난달 방문해 많은 가르침을 준데 대해 감사의 뜻을 표시하는 한편, 山寺에서 유유자적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자신이 저술한 책 한 짐을 맡기게 됨으로써 罷寂으로 초래한데 대해 송구스런 마음을 표시했다. 자신이 모아 편집한 책은 한가로운출처 : 유교넷 -
357737
與冰洞齋舍課業諸君 3 / 기록자료>고도서 / 김우창冰洞齋舍에서 공부하고 있는 집안의 자제들에게 공부의 방법을 당부하면서 보낸 편지이다. 무릇 문장은 학문 가운데 하나일 뿐이고 時文은 문장의 末技에 해당하지만, 조정에서 선비를 선발할 때 時文을 위주로 하고 있는데다 그것이 반드시 배움에 해가 되는 것은 아닌 만큼 거기출처 : 유교넷 -
357738
與丁從甥而建(大稙) 3 / 기록자료>고도서 / 김우창從甥姪 丁大稙에게 보낸 편지로, 더욱 공부에 매진할 것을 촉구한 내용이다. 지난번 편지에 답장하지 못한 것을 사과하면서, 자신은 아침저녁 빈소에서 哭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천식과 나쁜 기운으로 고생하고 있음을 전했다. 그리고는 편지 가운데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다출처 : 유교넷 -
357739
與柳士悅(進憙)別紙 4 / 기록자료>고도서 / 김우창柳進憙에게 보낸 편지로, 柳成龍의 『西厓集』 9冊 18卷에 수록된 내용 가운데 誤字를 지적하며 수정을 요구한 내용이다. 여기에는 유성룡이 蘇東坡(軾)의 편지를 보고 자신의 처지와 비슷하다는 취지로 지은 跋文이 있는데, 거기에 유성룡이 소개한 「東坡與人書」 원문 가운데출처 : 유교넷 -
357740
與柳田園(道獻) 5 / 기록자료>고도서 / 김우창柳道獻에게 보낸 편지이다. 평소 향촌에서도 많은 감화를 받았지만 지난번 서울을 방문했을 때 다시 高風을 경험할 수 있었다며 존경의 마음을 표시한 다음, 다시 한 번 방문하고 싶지만 추위가 두려운데다 병마저 겹치는 바람에 포기하게 된 것을 아쉬워했다. 지난번 疏任들이출처 : 유교넷 -
357741
五倫衍義(附師弟) 6 / 기록자료>고도서 / 김우창父子有親·君臣有義·夫婦有別·長幼有序·朋友有信의 五倫과 師弟의 윤리에 관해 그 의미를 자신의 관점에서 해석한 글이다. 첫째, 부모가 자식에게 효도를 요구하지 않는 것이 사랑이고, 자식이 부모에게 사랑을 바라지 않는 것이 효도이다. 그러므로 부모가 사랑하고 자식이 효도하출처 : 유교넷 -
357742
三年喪至小祥衰服練不練 8 / 기록자료>고도서 / 김우창삼년상을 치루는 과정에서 小祥 때 입는 衰服을 세탁해야 하는지의 여부에 대한 시각차를 고증하고 자신의 관점에서 조정의 방안을 제시한 내용이다. 『檀弓練衣』의 章註에는 小祥 때 練冠·練中衣를 착용하되 正服은 변함이 없다고 했고, 『朱子家禮』에도 소상 때 練服을 冠으로출처 : 유교넷 -
357743
記聞 9 / 기록자료>고도서 / 김우창先祖인 白南 金始鑌(1684~1729)의 燒失된 筆寫遺稿인 『景區謾錄』 9책 가운데 일부가 金剛山에서 발견된 소식을 전해 들으면서 原集에 포함되지 않은 나머지 저술들을 찾아 續集을 편찬하겠다는 의지를 다진 내용이다. 집안에 보관되어 오던 유고는 1784년(정조 8)출처 : 유교넷 -
357744
與石竹稗說(應魯號藍石宣叔號竹坡) 10 / 기록자료>고도서 / 김우창交友인 藍石 朴應魯(奎陽), 三從姪 竹坡 金宣叔(鎬相)과 함께 자신의 포부와 소회에 대해 설명한 내용이다. 고슴도치의 털이 부드럽고 하고 노래기가 하천을 거슬러 올라가려는 것은 순리라고 전제하면서, 자신은 자질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잊은 채 四民(士·農·工·商)의 선출처 : 유교넷 -
357745
花樹契帖序 11 / 기록자료>고도서 / 김우창咸昌金氏 精勇公派·錄事公派(順興)·評理公派(比安)를 주축으로 花樹會를 결성하면서 만든 명부인 『花樹契會帖』에 쓴 序文이다. 宗族 사이에서 일어나는 吉·凶·嫁·娶 등을 서로 돕고 자주 만나 정을 나누기 위한 목적으로 조직하게 되었음을 밝히면서, 春·秋에 정기적으로 회합출처 : 유교넷 -
357746
南極會帖序 13 / 기록자료>고도서 / 김우창자신이 商山(尙州)의 仙津에 살고 있던 몇 년 동안 正言을 지낸 雲皐 朴遇賢이 菖坪에 집을 짓고, 廣翁 鄭之悳이 藥泉洞에 임시 거처를 마련하고, 進士 九仙 安鎬重이 昌郵에 옮겨온 것을 계기로 서로 왕래하며 교유하다 네 사람의 나이가 모두 합쳐 256년이 되던 해 함께출처 : 유교넷 -
357747
南澗書堂重修記 15 / 기록자료>고도서 / 김우창咸昌邑治 서편 芙蓉臺 위쪽에 있었던 泗溪書院 자리의 南澗書堂을 중수하면서 지은 記文이다. 일찍부터 後學의 공부를 독려하는 장소로 활용되어 왔으나 건물이 凋落하여 원래의 의미가 퇴색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자신을 주축으로 李潤秀·權大鍵 등이 重修를 담당하게 되었음을출처 : 유교넷 -
357748
三峯書堂記 16 / 기록자료>고도서 / 김우창新川의 남쪽 斗巖 앞에 자리 잡고 있는 三峯書堂의 연혁과 전말에 대해 지은 記文이다. 이 서당은 1654년(효종 5) 사림들의 公議에 의해 건립되었으며, 처음에는 廟宇를 갖추어 三路 金爾音, 溫溪 李瀣, 勿巖 金隆의 위패를 봉안해 里社로 기능했다. 그러나 그것이 17출처 : 유교넷 -
357749
書內賜御筆屛後 18 / 기록자료>고도서 / 김우창景宗代 弼善을 역임한 先祖 金始鑌이 尊崇都監의 郞廳에 근무할 때 왕으로부터 하사받은 병풍에 붙인 跋文이다. 그는 蔚山 任所에서 사망했는데, 사위 李遂煥이 그 병풍을 서울로 가져갔다. 1855년(철종 6) 여름 집안의 형이 서울에 가 그 병풍이 있는 곳을 수소문했더니출처 : 유교넷 -
357750
書崇禎處士孤松朴公(成範)遺事後 19 / 기록자료>고도서 / 김우창崇禎處士로 일생을 보낸 孤松 朴成範의 遺事의 뒤에 붙여 쓴 跋文이다. 1896년(광무 1)에 지었다. 선비가 세상에 태어나 學問을 우선하고 거기에 節義를 연결하는 것이 상식이다. 절의가 학문 가운데에서 따라 나오려면 志操를 견고하게 지키고 義理를 분명하게 밝혀야 할출처 : 유교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