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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先考通德郞蒼葭軒府君遺稿後 20 / 기록자료>고도서 / 김우창先親인 通德郞 蒼葭軒 金鎭泌(1807~ 1841)의 遺稿에 붙여 쓴 跋文이다. 남다른 자질과 탁월한 行誼로 鄕村儒林의 모범이 되었으나, 불행히도 35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 그럼에도 그동안 저술한 것이 적지 않았지만 대부분 잃어버리고 겨우 詩·賦를 비롯한 祭文·日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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讀書箴 20 / 기록자료>고도서 / 김우창讀書를 할 때 스스로 경계하고 지켜야 할 바를 제시한 내용이다. 聖人의 원대한 道는 사람들에게 전승되지 않았는데, 다행스럽게도 그 말씀들은 책의 각 편에 기록되어 있다. 그 때문에 旨訣이 밝게 빛나고 계책이 넓어지게 되어 후세사람들에게 끝없이 이어져 왔던 것이다. 그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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笠室箴 21 / 기록자료>고도서 / 김우창자신의 書齋를 笠室이라 정하면서 경계하고 지켜야 할 바를 스스로에게 적시한 내용이다. “거울에 먼지가 끼었을 때 新玉을 생각하기 마련이고, 때가 묻었을 때는 닦은 삿갓을 생각하게 된다. 더러운 집이 마음을 비호할까 걱정하고, 마음이 흩어져 감히 막지 못할까 두려워한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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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器銘(幷小序) 21 / 기록자료>고도서 / 김우창先親이 사용하던 유품으로 보관하다 훼손된 几·書案·硯匣·硯滴·寢屛을 수리하고 깨진 벼루[硯]를 땅에 묻으면서 조상에 대한 愛慕의 마음을 더욱 굳히고 스스로를 경계하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각각의 器物이 갖는 의미와 자신의 의지를 담은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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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刑部尙書廉義鄭公墓齋重修上樑文 22 / 기록자료>고도서 / 김우창고려시대 刑部尙書를 역임한 廉義 鄭云敬(1305~1366)의 묘를 수호하는 齋室을 重修하면서 지은 上樑文이다. 뛰어난 재주와 예리한 통찰력으로 관료로서의 업무처리에 발군의 능력을 발휘했을 뿐만 아니라 높은 학문적 수준을 바탕으로 稼亭 李穀(1298~1351) 등과 깊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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雙竹亭上樑文 24 / 기록자료>고도서 / 김우창伯父 篁巖 金鎭河(1786~1865)가 거주하던 터와 가까운 곳에 정자를 건립하고 지은 上樑文이다. 李氏들이 世居하던 땅을 매입해 건립하게 되었음을 밝히면서, 후손들이 산 좋고 물 맑은 이곳에서 독서하면서 관직에 나아가서는 忠으로 일관하고 은거할 때에는 義理·性情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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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考府君周甲日告由文 26 / 기록자료>고도서 / 김우창35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한 先親 蒼葭軒 金鎭泌(1806~1840)의 회갑이 되는 1866년(고종 3)에 추모의 마음을 담아 지은 告由文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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陵洞先祖壇所告由文 27 / 기록자료>고도서 / 김우창조선 초 監司로 재직할 때 至行·旌閭·祭社로 重望을 얻어 三路先生으로 불렸던 先祖 金爾音의 墓壇을 수리하면서 지은 告由文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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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再從大父槐川公(基一)文 27 / 기록자료>고도서 / 김우창再從祖父 槐川 金基一의 영전에 올린 祭文이다. 文章·德業으로 명망이 높았으며, 순박하고 독실한 자질과 실용적이고 도타운 예의로 사람들의 귀감이 되었다고 회고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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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伯考篁巖府君文(大祥時) 29 / 기록자료>고도서 / 김우창伯父 篁巖 金鎭河(1786~1865)의 再朞年 大祥 때 영전에 올린 祭文이다. 세월이 지날수록 더욱 애통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다는 심정을 토로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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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仲父府君文(小祥時) 29 / 기록자료>고도서 / 김우창仲父의 朞年 小祥 때 영전에 올린 제문이다. 11세 때 아버지를 잃은 이래 오로지 의지한 가운데 많은 감화를 받았음을 일화를 통해 회고하면서 애통한 마음을 표시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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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族叔(鎭崇)文 32 / 기록자료>고도서 / 김우창族叔 金鎭崇의 영전에 올린 제문이다. 단순한 혈족의 절친한 관계를 同門으로서 학문적 교감을 가졌던 점을 강조하면서 애통한 심정을 표현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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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權君(聲國)文 33 / 기록자료>고도서 / 김우창妹弟 權聲國의 영전에 올린 제문이다. 禮法과 文學을 갖춘 집안에서 태어나 溫雅하면서도 확고한 신념으로 志行이 있었다고 회고하며, 자신보다 14살이나 아래면서 먼저 사망한데 대해 비통한 마음을 전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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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安參議恥齋公(潤蓍)文 1 / 기록자료>고도서 / 김우창參議 恥齋 安潤蓍의 영전에 올린 제문으로, 伯兄을 대신해 지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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哭從弟文欽(禹濬)文 2 / 기록자료>고도서 / 김우창從弟 金禹濬의 죽음을 애도하며 지은 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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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族大父觀卜齋(騏獻)文 3 / 기록자료>고도서 / 김우창族祖父 觀卜齋 金騏獻의 영전에 올린 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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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再從兄(汝益)文 4 / 기록자료>고도서 / 김우창再從兄 金汝益의 영전에 올린 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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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鄭霞巖(昌翼)文 6 / 기록자료>고도서 / 김우창霞巖 鄭昌翼의 영전에 올린 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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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伯兄文 7 / 기록자료>고도서 / 김우창伯兄의 朞年 小祥을 맞아 영전에 올린 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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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內舅松塢權公(載珽)文 9 / 기록자료>고도서 / 김우창장인 松塢 權載珽의 영전에 올린 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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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宗兄(汝綸)文 11 / 기록자료>고도서 / 김우창宗兄 金汝綸의 영전에 올린 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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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三從弟周彦(汝奭)文 12 / 기록자료>고도서 / 김우창三從弟 金汝奭의 죽음을 애도하며 지은 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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哭從弟聖欽(禹泳)文 13 / 기록자료>고도서 / 김우창從弟 金禹泳의 죽음을 애도하며 지은 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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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族叔(鎭宇)文 14 / 기록자료>고도서 / 김우창族叔 金鎭宇의 영전에 올린 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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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校理文汝(道昌)誄辭 16 / 기록자료>고도서 / 김우창校理 柳道昌의 상을 맞아 지은 弔文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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誄金汝若(天欽) 18 / 기록자료>고도서 / 김우창金天欽의 상을 맞아 지은 弔文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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再從兄(汝明)改葬時誄辭 19 / 기록자료>고도서 / 김우창再從兄 金汝明의 묘를 이장할 때 지은 弔文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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伯考嘉善大夫行兵曹參判兼同知義禁府春秋館事五衛都摠府副摠管簧巖先生府君家狀 20 / 기록자료>고도서 / 김우창伯父 篁巖 金鎭河(1786~1865)의 家系를 비롯해 行蹟 및 학문적 성향 등을 기록한 내용이다. 1881년(고종 18)에 지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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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資憲大夫成均館祭酒吏曹判書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行嘉善大夫戶曹參判江原道觀察使徐公諡狀 30 / 기록자료>고도서 / 김우창徐仁元(1504~1590)의 諡號를 조정에 청원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은 行狀이다. 11대손 徐光一의 부탁을 받고 지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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從先祖長笑公遺事 36 / 기록자료>고도서 / 김우창從先祖 長笑 金遇秋(1581~1642)의 행적을 기록한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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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考通德郞府君遺事 39 / 기록자료>고도서 / 김우창先親 蒼葮軒 金鎭泌(1806~1840)의 행적을 기록한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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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烈婦傳 47 / 기록자료>고도서 / 김우창愼在永의 딸이자 許模의 부인 咸陽의 烈婦 愼氏의 공적을 기록한 전기이다. 아들 許寅斗에게서 듣고 지었다. 절제된 자세와 온유한 성품으로 밤늦도록 시부모를 극진하게 모셔 주위의 칭송을 받았으며, 남편이 사망하자 3년 상을 치룬 다음 시동생이 장성할 때까지 돌보는 등 집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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遺事 / 기록자료>고도서 / 김우창從姪 金命相이 지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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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狀 7 / 기록자료>고도서 / 김우창1911년 李中錕이 지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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墓碣銘(幷序) 11 / 기록자료>고도서 / 김우창金世洛이 지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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跋 / 기록자료>고도서 / 김우창1911년 三從姪 金鎬相, 1928년 從姪 金世相이 각각 지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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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곡집 / 기록자료>고도서 / 김강한난곡집(蘭谷集) 金江漢의 문집. 4권 2책. 목판본. 조선 후기의 학자. 序文과 跋文이 없어 편찬·간행 경위는 미상이다. 내용은 권1∼3에 書, 권4에 雜著·祭文, 附錄으로 行狀·墓碣銘·哀詞·輓詞·祭文이 수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書는 그의 스승인 金聖鐸과 여러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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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霽山先生(1739) / 기록자료>고도서 / 김강한이 글은 齊山 선생에게 학문의 진전이 없음을 걱정하며 올린 편지이다. 1개월 전에 찾아뵙던 자리에서 받았던 中庸의 오묘한 구절을 펴보지 않다가, 근일에 반복해서 탐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생각이 흐려서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고 이와 같이 취사선택하였으니 어찌 학문의 진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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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霽山先生(1741) / 기록자료>고도서 / 김강한喪中의 선생님을 위로하고, 자신은 몸이 좋지 못하여 공부가 잘 안된다고 호소하는 편지이다. 어려운 일을 당하여 이치를 밝히고 학식이 나아가는 것은 안으로는 ‘敬’을 주로 삼아야 하지만 그 방법을 알지 못한다. 어려운 科擧 공부에 힘쓰기 보다는 고요한 곳에 들어가서 고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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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霽山先生(1743) / 기록자료>고도서 / 김강한제산선생에게 喪禮에 대하여 질문한 편지이다. 맏며느리가 죽어 시아비가 主喪이 되면 소상 대상도 주관을 해야 하나, 시아비가 며느리에게 1년 상도 없는데, 축문에는 소상 대상이란 말이 있으니 맞지 않는다. 祔祀는 3년이 되어야 지내는데 1년 상의 경우에는 바로 부사를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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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霽山先生(1746) / 기록자료>고도서 / 김강한주로 학문과 실천을 밝힌 편지이다. 제산 선생이 유배를 가게 됨을 ‘患亂’이라고 위로하였다. 학문의 두 가지 문제는 講學과 實踐이지만, 여기에는 先後와 輕重이 있다. 講學이 먼저고 실천이 뒤이며, 강학은 가볍고 실천이 소중하다. 그러나 강학이 정밀하여 실천을 兼全할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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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霽山先生 / 기록자료>고도서 / 김강한四·七論의 몇 가지 문제점에 대하여 견해를 밝힌 글이다. 退溪와 高峰의 四七論辨은 끝내 朱子의 ‘四端은 理之發, 七情은 氣之發’로 돌아갔다. 그렇게 되는 이유를 궁리해보았으나 아직도 투명하지 못한 데가 있어, 퇴계 선생의 論을 바탕으로 그 의혹을 풀어보고자 한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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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霽山先生 / 기록자료>고도서 / 김강한講學을 소홀히 한다는 책망과 학자들이 실천이 부족하다는 지적은 제산선생 자기 스스로에게 하는 말로 받아들였다. 이에 대한 변명으로 강학이 먼저고 실천이 뒤임을 밝히고 “知行倂進”을 못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반성하는 것이다. 周敦頤가 太極위에 無極을 넣은 것은 形이 없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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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訥隱李先生(光庭) / 기록자료>고도서 / 김강한當代의 명사 이광정선생께 先代 墓誌文을 받고 보충을 요청하는 편지이다. 간곡한 안부 끝에 자신은 독서를 해도 안목이 트이지 않음을 개탄하고, 이어 선대의 묘지문을 받게 되어 큰 영광이라 하였다. 묘지문의 내용에서 몇 가지 빠진 것을 보충하고 수정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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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訥隱李先生 / 기록자료>고도서 / 김강한李선생께서 沈生에게 허락한 存心說은 求·覺 에만 專心하고 堅持를 하지 않으면 日用工夫가 得半失半이 될 것이라 하였다. 朱子께서 李處謙에게 ‘但當堅守 常自警覺’을 주장하셨고, 吳斗南에게 ‘持敬存體 窮理致用’라 하셨고, 何叔京에게는 覺處에 “敬以操之 以覺爲存”이라 하셨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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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權逋軒(德秀) / 기록자료>고도서 / 김강한권덕수에게 안부를 묻고 나서, 日前에 읽어보라고 권하며 내주신 「啓蒙」이란 책에서 느낀 바를 적어 보낸 편지이다. 여러 가지 의문이나 통달하지 못한 곳은 한번 직접 만나 여쭙고자 한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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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權逋軒 / 기록자료>고도서 / 김강한「易·序上下篇義」는 程伊川文集에는 없으며, 象數爲主로 된 것은 董氏의 說인 듯하다. 그 가운데 몇 가지 文句는 伊川의 語法이 아닌 듯하여 江漢 자신도 반복하여 推考하였다. 古今의 易學家가 말한 것은 오로지 卦爻의 繫辭이며, 法象의 自然에 대한 강론은 아직 들어 보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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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李大山(象靖) / 기록자료>고도서 / 김강한禮法에 밝은 大山선생께 國喪이 난 경우 私家의 상례에 관하여 질문한 편지이다. 「國典」에 國喪이 나도 卒哭 전에 사가의 葬禮를 금하지 않았으니, 葬事 후 제사도 마땅히 금할 것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관이 빈소에 있고 능묘의 각종 제사를 금지하고 있으니 私家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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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李大山 / 기록자료>고도서 / 김강한東都에 弔問하고 돌아온 大山의 安否를 묻고 나서 자신의 건강 상태와 공부에 관하여 자세하게 말하였다. 자신은 외진 곳에 살며 병석에 있어 선생을 친히 뵈올 길이 없는 까닭에 집의 벽에 걸어두고 조석으로 대할 몇 줄의 글씨를 청하였다. 요사이 금석문을 청하는 자가 모두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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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崔數咎堂(興遠) / 기록자료>고도서 / 김강한數咎堂 崔興遠이 落傷하여 出入을 못하는 처지에 子息마저 잃은 불행을 위로하는 편지이다.출처 : 유교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