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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체: 에 대해 총641,751건의 자료가 검색되었습니다.
  • 358101

    重修琵琶記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태일
    琵琶를 고친 일에 대한 記文이다. 공의 외조부가 조상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던 琵琶가 세월이 오래되어 훼손된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外職으로 나갈 기회가 잦은 자신에게 수리를 당부하였다. 마침 공이 1685년(숙종 11) 봄 任地인 晉陽으로 가게 되었는데, 도착하자마자
    출처 : 유교넷
  • 358102

    遊月出山記(1691)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태일
    月出山 遊記文이다. 공이 靈巖郡 서남쪽 5리에 위치한 月出山을 유람하면서 지은 遊記文으로, 千峰萬壑의 山勢를 자세하고도 생동감 넘치게 그려내고 있다. 유람을 통해 일어나는 감흥을 시로 나타내기도 하였으니, 이를테면 龍巖寺에 이르러 "절은 명산의 가장 꼭대기에 있고"(
    출처 : 유교넷
  • 358103

    龍宮浮翠樓重修記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태일
    龍宮 浮翠樓에 대한 重修記이다. 1692년(숙종 18) 10월 공이 龍城縣을 지나다가 副官 韓相皐의 입을 통해 이 고을의 명승지인 浮翠樓의 소재를 알게 되었는데, 浮翠樓라 이름한 것은 虛白亭 洪貴達의 명에 의한 것이었다. 누대는 세월이 오래되어 피폐되고 그 규모 또한
    출처 : 유교넷
  • 358104

    忠孝堂記(堂乃柳翊贊宜河氏所構)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태일
    忠孝堂에 대한 記文이다. 공이 士人 柳聖和의 입을 통해 그의 조부 翊贊公 柳宜河가 河回의 舊家를 확장하여 忠孝堂을 짓게 된 내력을 듣게 되었다. 忠孝堂이라 명명한 것은 先祖인 西厓 柳成龍의 訓戒詩 중 "자손을 勉勵함에는 모름지기 신중해야 하니, 忠孝 외에 다른 것은
    출처 : 유교넷
  • 358105

    勿溪書院移建記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태일
    勿溪書院 移建에 대한 記文이다. 물계서원은 忠烈公 金楊震(1467∼1535)을 제향하기 위해 후손 鶴沙 金應祖(1587∼1667)의 발의로 세워졌으며 후에 鶴沙 자신도 竝享되었다. 서원의 舊基가 甘泉縣 서쪽 모퉁이에 치우쳐 있고 터 또한 平穩하지 않아 영구히 보존하기
    출처 : 유교넷
  • 358106

    思過齋記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태일
    思過齋에 대한 記文이다. 郡守 申 아무개가 고을에 부임해 온 지 4년이 되었는데, 지극한 정성으로 郡民들을 아껴주었다. 그런데 내리 3년 동안 극심한 흉년이 들어 군민이 굶어죽을 지경에 놓이자 군수는 노심초사하며 애간장을 태웠다. 이에 매년 조세를 면제해주고 곡식을
    출처 : 유교넷
  • 358107

    負暄堂記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태일
    負暄堂에 대한 記文이다. 공의 친구 金正則이 작은 집을 지어 "負暄"이라 이름하고 [負暄堂古風] 60韻을 보여주면서 공에게 記文을 부탁하자, 김정칙은 평생 성현의 가르침을 배우고 仁을 힘쓰는데 게을리하지 않으며, 검박하게 꾸민 깨끗한 방에서 책을 대함에 밝은 해가 등
    출처 : 유교넷
  • 358108

    書蓮桂會詩帖後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태일
    丹陽 지역 선비들의 詩會인 蓮桂會에서 남긴 詩帖에 대한 跋文이다. 공이 단양 군수로 있을 때 權得初가 단양군은 大小科에 급제한 사람만 해도 15인이나 되니 오래전에 없어진 蓮桂會를 다시 부활하자고 건의하였다. 이에 詩會를 만들어 試帖을 남기니, 이 지역에 인재가 많음
    출처 : 유교넷
  • 358109

    鄭統制(起龍)事蹟跋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태일
    鄭起龍(1562∼1622)의 사적에 대한 跋文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동안 討倭大將이 되어 많은 전공을 세운 정기룡은 그의 대부분의 사적이 曺公이 쓴 事蹟記에 상세하게 실려있다. 지금 공이 죽은 지 70년이 지나 공의 손자 鄭善영이 조부의 사적을 版木으로 새기면서
    출처 : 유교넷
  • 358110

    崔直提學出處事蹟後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태일
    文宗 때의 문신인 崔德之(1384∼1455)의 出處 사적에 대한 跋文이다. 1691년(숙종 17) 초여름 공이 靈巖郡守로 부임하자 煙邨書院의 儒生 두 명이 崔德之의 出處 사적이 기록된 책 한 권을 가지고 와서 보게 되었다. 책에는 선생의 出處 사적 및 立祠 顚末,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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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8111

    木枕銘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태일
    鼎山書院에 가운데는 텅 비고 겉은 모가 난 오동나무로 만든 木枕이 있는데, 이 木枕에 대한 느낌을 피력한 銘文이다. 군자는 中虛外方의 이치로써 자신을 단속해야 한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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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8112

    近嵒書院追享時告由文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태일
    近嵒書院에 洪汝河와 金弘敏 두 분을 追享할 때 지은 告由文이다. 경북 聞慶에 위치한 근암서원은 1665년(현종 6)에 창건되어 먼저 洪彦忠과 李德馨 두 분을 제향해 오다가, 후에 洪汝河 金弘敏 두 분을 追享하게 되었다. 지금 두 분을 추향함은 실로 公議에서 나온 것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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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8113

    陶溪里社奉安文 및 常享文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태일
    陶溪里社 奉安文 및 常享祝文이다. 咸寧縣 陶谷仁里는 예로부터 지금까지 群賢들의 발자취가 아름다우니, 祠宇를 지어 縣令 柳公 生員 柳公 醉睡 李公 鋤歸 鄭公 野翁 李公 등 다섯 어진이를 奉安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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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8114

    始祖墓望祭文(在禮安)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태일
    始祖墓의 望祭 때 지은 제문이다. 시조의 位牌를 이 산자락에 편안하게 모신 이래로 세월이 바뀌어 향불도 끊어지고 산소를 살피는 일 역시 없어지게 되었다. 더욱이 못난 후손대에 와서는 先塋의 위치 조차 알지 못하는 지경에 처하게 되었음을 가슴아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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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8115

    祭聘君朴公文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태일
    장인 朴公에 대한 제문이다. 공의 가슴은 옥과 얼음처럼 맑고 깨끗하여 外物에 걸림이 없고, 공의 마음은 비단에 놓은 수와 같아서 아름다운 문장이 거침없이 나온다고 하였다.
    출처 : 유교넷
  • 358116

    祭伯氏砥南公文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태일
    伯氏 砥南公에 대한 제문이다. 어릴 때부터 형제간에 서로 義로써 격려하며 사이좋게 지냈다. 아우들이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으로 나아간 반면 형은 奇才를 가지고도 운이 나빠 누차 鄕試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눈물을 삼켰다. 다행히 늙으막에 관직에 나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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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8117

    祭再從弟(遇一)文(必丹城縣監卒于官)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태일
    再從弟 金遇一에 대한 제문이다. 비록 再從 형제간에 서로 나이는 차이가 나지만 정은 실로 친형제와 같았으며, 지난날 京師에서 함께 벼슬살이 할 때 아침저녁으로 서로 의지하며 旅愁를 잊었다고 회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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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8118

    祭金參奉(球)文(代鄕校儒生作)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태일
    金球에 대한 제문이다. 공은 재주를 지니고도 운이 따르지 않아 典午라는 微官에 머물렀지만 마음에 원망함이 없었고, 평생 책을 읽으며 스스로의 즐거움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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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8119

    祭亡弟後一文(1662)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태일
    죽은 동생 金後一에 대한 제문이다. 18세의 어린 나이에 부모와 형제를 남겨둔 채 먼저 떠난 동생에 대한 슬픔을 적고 있다. 後一 아우는 어릴 때부터 남다른 영민함을 타고났는데, 그런 재능을 펼 기회도 갖지 못하고 요절한 것은 조물주의 시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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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8120

    祭權子韜文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태일
    權子韜에 대한 제문이다. 젊어서부터 남다른 재주를 지니고도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자, 평생 經史를 궁구하며 성현의 가르침을 좇은 그의 행적을 적고 있다.
    출처 : 유교넷
  • 358121

    祭鄭景瞻文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태일
    鄭景瞻에 대한 제문이다. 공은 병든 부모의 侍湯으로 평생을 보냈다. 그의 訃音을 듣고 마땅히 힘을 다하여 서둘러야 하였거늘 관직에 쫓기다 보니 벌써 일 년이 지났다고 회상하면서,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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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8122

    祭從兄(宗河)文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태일
    從兄 金宗河에 대한 제문이다. 質直한 성격과 仁厚한 마음을 지닌 從兄은 같은 마을에서 朝夕으로 서로 따르며 기쁜 일 슬픈 일을 함께 하였다. 이제 형이 저 세상으로 떠나가니 애통하기 그지 없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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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8123

    八公山祈雨祭文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태일
    八公山 祈雨祭 때 올린 제문이다. 이 제문은 공이 1674년(현종 15) 達城 巡察使로 있을 때 지었다. 山神이 신령스럽지 않고 어질지 않으면 어찌 신이 될 수 있겠느냐고 책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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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8124

    月牙山祈雨祭文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태일
    月牙山 祈雨祭 때 올린 제문이다. 이 제문은 공이 晉州에 있을 때 지은 것으로, 백성은 먹을 것에 의지하고 神은 인간에 의지하니, 먹을 것이 없고 백성이 없으면 신이 신이 될 수 없다고 호소하였다.
    출처 : 유교넷
  • 358125

    社稷壇祈雨祭文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태일
    社稷壇 祈雨祭 때 올린 제문이다. 이 제문은 공이 寧海에 있을 때 지은 것으로, 社는 땅을 관장하고 稷은 곡식을 관장하니, 땅은 사람을 기르고 곡식은 백성의 양식이 된다고 하면서 신의 恩德으로 雨澤을 내려주기를 기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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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8126

    犬吠鷄聲說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태일
    개 짖는 소리와 닭 우는 소리를 듣고 그 이치를 설명한 글이다. 새벽에 닭이 울면 개가 갑자기 떼지어 짖는 것은 개가 닭 울음 소리에 놀라 짖는 것이며, 닭이 울음을 그치는 것은 개짖는 소리 때문이 아니라 저절로 그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출처 : 유교넷
  • 358127

    甲子記事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태일
    공이 1684년(숙종 10) 甲子年 가을 國子司藝를 제수받고 京師로 가던 중 可興 강변에 이르자 날이 저물어 邨舍에서 묵었는데, 꿈에 先君께서 나타났다. 이에 先君께 절하고 깨어나 꿈의 내용을 기억하면서 선군께서 평소 아들이 벼슬을 얻으면 관직이 높고 낮음을 불문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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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8128

    鳳山書院祠宇上樑文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태일
    鳳山書院 祠宇 上樑文이다. 예천에 소재한 봉산서원은 寓庵 權檣(1489∼1529)을 제향하기 위하여 세워졌다. 권선생은 집안이 누대에 걸쳐 관직을 지냈고 문헌이 대대로 전해졌다. 영민한 자질로 문장을 짓고 강직한 절개로 품행이 방정하였다. 師友로는  畢齋 金宗直(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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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8129

    翼洞精舍上樑文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태일
    翼洞精舍 上樑文이다. 익동정사는 存齋 李徽逸(1619∼1672)을 제향하기 위해 지은 廟宇이다. 이공은 성정이 영민하고 자질이 순수하여 일찍이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외조부 張興孝가 그의 재주를 인정하였다. 그는 修心養性의 언행에서 시작하여 格物致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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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8130

    贈都承旨行坡州牧使黃公墓碣銘(竝序)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태일
    黃曙의 墓碣銘이다. 공의 휘는 曙이고 자는 光遠이며 본관은 昌原이다. 공은 1554년(명종 9)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영민하였고 커서는 文詞에 뛰어났으며, 성품이 강직하여 구차히 다른 사람에게 영합하지 않았다. 1576년(선조 9) 進士가 되고 1580년(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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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8131

    從祖處士公墓碣銘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태일
    從祖父 金取善의 墓碣銘이다. 공의 휘는 取善이고 자는 與叔이며 성은 金氏이고 본관은 禮安이다. 고조부의 휘는 萬秤이며 左通禮로 증직되었고, 증조부의 휘는 佑이며 左承旨로 증직되었다. 조부의 휘는 士熙이며 軍資監副正으로 증직되었고, 부친의 휘는 胤安이며 司僕寺正으로 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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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8132

    舍弟承旨君墓碣銘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태일
    아우 金海一의 墓碣銘이다. 君의 이름은 海一이고 자는 宗伯이며 성은 金氏이고 본관은 禮安이다. 군은 1640년(인조 18)에 태어났으며 용모가 옥과 같았다. 일찍이 文藝를 이루어 나이 21세에 庚子 司馬試에 급제하고, 24세에 癸卯 式年試에 급제하여 典籍으로 刑 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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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8133

    從兄承議郞公墓誌銘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태일
    從兄 金宗河의 墓誌銘이다. 공의 휘는 宗河이고 자는 淸叔이며 성은 金氏이고 본관은 禮安이다. 부친의 휘는 오이며, 모친은 東萊鄭氏 判校 鄭彦宏의 딸이다. 공은 1629년(인조 7)에 태어났으며, 백부  이 자식이 없자 강보에 쌓인 채 백부의 양자로 들어갔다. 공은 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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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8134

    外王父處士사皐權公碣陰記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태일
    외조부 사皐公 權克諧의 碣陰記이다. 공의 휘는 克諧이고 자는 義叔이며 성은 權氏이고 본관은 安東이다. 증조부 載 조부 寬 부친 忠孝 모두 은일처사로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모친은 文化柳氏이다. 공은 1585년(선조 18) 태어났으며, 10여 세 때 部將公 應期의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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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8135

    居昌縣監洪公碣陰記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태일
    洪彦昇의 碣陰記이다. 공의 휘는 彦昇이고 자는 大曜이며 성은 洪氏이고 본관은 缶溪이다. 공은 燕山君 때 左贊成으로 증직되고 文匡의 시호를 받은 虛白堂 洪貴達(1438∼1504)의 다섯 아들 중 둘째이다. 공은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었으니 아우 彦忠과 함께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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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8136

    부친 金단의 碣陰記이다. 先君의 휘는 단이고 자는 季精이며 성은 金氏이고 본관은 禮安이다. 先君께서는 1610년(광해군 2) 태어났으며, 다섯 형제 중 막내이다. 천부적으로 仁厚함을 지녔으며 좋은 평판에 온화하고 단아하여 外物을 대함에 거스름이 없었다. 사람들과 교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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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8137

    贈吏曹判書行咸陽郡守趙公諡狀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태일
    趙宗道의 諡狀이다. 공의 휘는 宗道이고 자는 伯由이며 성은 趙氏이고 본관은 咸安이다. 공은 1537년(중종 32) 2월 5일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영리하여 7∼8세에 이미 문장을 지을 수 있었다. 후에 隱君子 鄭斗에게 배웠고, 南溟 曺植과 玉溪 盧진의 門下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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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8138

    木齋洪先生行狀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태일
    洪汝河의 행장이다. 공의 휘는 汝河이고 자는 應圖이며 木齋로 自號하였다. 성은 洪氏이고 본관은 缶溪이다. 공은 仁祖 때 大諫을 지낸 洪鎬(1586∼1646)의 아들로서, 1621년(광해군 13) 安東府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理氣의 분별을 알아 愚伏 鄭經世가 장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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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8139

    通訓大夫承文院判校朴公行狀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태일
    朴한의 행장이다. 공의 휘는 한이고 자는 潤甫이며 성은 朴氏이고 본관은 務安이다. 공은 慶尙道都事를 역임하고 후에 通政大夫承政院都承旨로 贈職된 朴善長의 아들로서, 1576년(선조 9) 榮川郡 花川里에서 태어났다. 28세 때 과거에 급제하여 成均館學諭를 시작으로 司憲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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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8140

    成均進士張公行狀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태일
    張璇의 행장이다. 공의 휘는 璇이고 자는 仲文이며 성은 張氏이고 본관은 仁同이다. 張汝의 아들로 1631년(인조 9) 榮川郡 箭丹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영리하여 조부 忠義公이 항상 곁에 두고 訓育하였다. 32세 때 壬寅年의 司馬試에 급제하여 泮中에서 지내며 좋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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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8141

    梅堂權公行狀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태일
    權旭의 행장이다. 공의 휘는 旭이고 자는 景初이며 성은 權氏이고 본관은 安東이다. 居昌縣監을 지낸 權審言의 아들로서, 1556년(명종 11) 醴泉郡 北渚谷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남다른 재주가 있었으며, 8∼9세에 이미 {孝經} {小學}에 통달하여 어버이를 섬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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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8142

    通訓大夫承文院判校西溪鄭公行狀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태일
    鄭彦宏의 행장이다. 공의 휘는 彦宏이고 자는 汝廓이며 호는 西溪이며 성은 鄭氏이고 본관은 東萊이다. 공은 處士 鄭承祖의 아들로서, 1569년(선조 2) 咸昌縣 利安邨에서 태어났다. 약관의 나이에 壬辰倭亂을 당하여 식구들이 난리를 피하느라 생활이 궁핍하였지만 마음은 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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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8143

    先考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府君家狀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태일
    義父 金곤의 家狀이다. 先君의 휘는 곤이고 자는 子珍이며 성은 金氏이고 본관은 禮安이다. 先君께서는 1596년(선조 29)에 태어났으며, 다섯 형제 중 둘째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기로 소문이 자자하였고, 배우기를 좋아하여 成童의 나이에 經書를 두루 섭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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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8144

    行狀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태일
    조카인 金履萬이 쓴 金兌一의 행장이다. 휘는 兌一이고 자는 秋伯이며, 성은 金씨이고 호는 蘆洲이며, 본관은 禮安이다. 고조부 士熙는 軍資監副正을 역임하였고 증조부 胤安은 司僕寺에 증직되었는데 이 때 榮川에서 醴泉 蘆浦로 거주를 옮겼다. 조부 得善은 左承旨에 증직되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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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8145

    墓碣銘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태일
    李瑞雨가 쓴 金兌一의 墓碣銘이다. 내가 젊어서 嶺南의 醴泉에 金秋伯이란 자가 있는데 어려서부터 神童으로 불리었다고 들었다. 오래지 않아 秋伯은 과연 과거에 급제하여 관리로서 京師에 이르니 내가 만날 수 있었다. 당시 秋伯은 아직 젊었으나 老成한 명성이 있었기에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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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8146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태일
    李光庭이 쓴 金兌一의 墓碣銘이다. 銘에 적어 이르노라. 선비가 해야 할 일은 明經이거늘, 항상 궁구하기 어려움을 걱정하도다. 혹 末年이 되어도, 저력을 보이지 않는구나. 마흔에 발탁되었으니, 세상에 그 누가 공과 같겠는가? 대저 공은 경전을 궁구하였지, 과거 급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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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8147

    輓詞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태일
    李玄逸이 쓴 金兌一에 대한 輓詞이다. 번잡함을 다스림에 名聲과 功績이 드높고, 악을 바로잡음에 風儀가 꿋꿋하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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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8148

    祭文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태일
    張진이 쓴 제문이다. 諸子書에서 마음을 노닐게 하고 뭇 經典에서 뜻을 얻어, 傳 述 發 明을 시의적절하게 하였다. 步驟가 文雅하여 후생의 모범이 되었다고 하였다.
    출처 : 유교넷
  • 358149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태일
    李後榮이 쓴 제문이다. 밖으로는 朴素함을 타고났고 안으로는 精神함을 간직하였다. 품행이 방정하고 돈독하였으며 여가가 있으면 文藝에 종사하여, 일찍부터 명성이 두루 퍼져 鄕貢進士로 빼어났다. 그러나 과거에 급제하기를 등한시하여 官途가 좋지 않았으니, 마치 모난 구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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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8150

    / 기록자료>고도서 / 김태일
    權萬濟가 쓴 제문이다. 공은 溫精함을 품부받고 孝友가 마음 속 가득하였다. 공손하고 검소하며 스스로 몸을 경계하고 삼가니, 조화롭기가 醇酒와 醴酒 같으며 온화하기가 봄바람과 같다. 얼굴에는 급한 기색이 없고 입으로는 말을 빨리 하지 않았다. 예로부터 "덕행이 있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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