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輓詞 1 / 기록자료>고도서 / 유치호凝窩 李源祚, 雲山 李彙載, 龜陰 金光壽(8首), 李庭雲, 金健壽, 頤齋 權璉夏, 拓菴 金道和(2首), 族姪 同窩 柳衡鎭 등 8명이 지은 挽詞가 수록되어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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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文 4 / 기록자료>고도서 / 유치호訂窩 金岱鎭, 肯庵 李敦禹, 愼庵 李晩慤, 尹最植, 族弟 櫟庵 柳致游 등이 지은 제문 5편이 수록되어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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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狀 10 / 기록자료>고도서 / 유치호柳致皜(1800∼1862)의 본관은 完山, 자는 濯叟, 初字는 聖臣, 自號는 東林居士, 始祖는고려말掌令濕이며, 克恕(直提學)→義孫(號檜軒,集賢殿提學)→季潼→軾(弘文館典翰)→潤善(通禮院引儀)→復起(號岐峯,禮賓寺正,左承旨)→希潛(戶曹參判)→榰(號乖厓,京尹)→命輝→尙載→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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墓碣銘(幷序) 26 / 기록자료>고도서 / 유치호묘갈명은 柳致皜의 長男 弘鎭이 柳致明의 문인인 西山 金興洛(1827~1899)에게 청하여 지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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遺事 30 / 기록자료>고도서 / 유치호柳致皜의 從姪인 廣林 柳健欽(1825~1891)이 썼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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跋文 / 기록자료>고도서 / 유치호柳致皜의 族孫인 西坡 柳必永(1842~1924)이 썼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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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암집 / 기록자료>고도서 / 권성오동암집(東巖集) 東巖 權省吾의 문집. 4권 2책. 이 문집은 1927년에 10여 권 되는 것을 權相翊이 刪定하고 편집하여, 1928년에 4권 2책으로 출판하였다. 卷1에는 賦 1편, 詩 211題 217首가 실려 있다. 卷2에는 詩 162首가 실려 있다. 卷3에는 詩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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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 기록자료>고도서 / 권성오記夢詞, 鄕約歌, 登白嶽望都城爲賦二首, 冬日寓東門卽事, 社稷壇卽事, 孟秋旣望聞諸友榜會於東蓮池余以病在家得來字, 洛下秋思, 江上細雨, 以詩謝黃注書應叔(益淸)書, 京寓卽事, 送亞使水西朴公(善長)還鄕, 仲春望日同任博士茂叔沈學正廈擎遊三淸洞, 松都卽事, 過高麗養馬場, 自松京歸,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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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 기록자료>고도서 / 권성오秋夜卽事, 敬次靑巖亭板上韻, 天啓甲子奉命祭吉先生舊宅同諸執事坐飮庭中竹林邊追感而作, 三峯院, 偶題, 追記休官時事, 自警, 贈金上舍伯溫(瑮)丈兼示任上舍宗甫(之道), 山家卽事, 絶句, 借山谷詩集, 哀柳持憲季華(袗)詞, 聞金鶴沙爲伊山山長戱贈, 丙午九月遊赤壁, 次徐山長韻, 休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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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 기록자료>고도서 / 권성오自京還家書事, 挽金鶴沙, 送李提督下鄕, 聞溫陽湯井幸在所消息, 挽鄭齋郞景愚(侙), 挽從弟子安, 哭從弟子方(正吾), 聞朴掌令无悔(敦復)訃, 創口禍四十韻, 晩分租, 絶句示郭丈, 感事, 可畦卽占, 除夕, 子月朔夜占, 觀易堂口占, 年終書感, 冬日端居, 記夢中詩思, 戱贈梅園主人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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請復設順興府第二疏(1649) / 기록자료>고도서 / 권성오順興府의 復設을 위해 군민들을 대신해 지은 글이다. 復設을 원하는 백성들의 간절한 뜻을 지난 번 상소에서 올렸으며, 그 때 임금께서 해당 관서에서 잘 처리하라고 下敎를 하였었다. 그래서 백성들은 수백 년 폐허가 된 곳이 태평성대를 만나 다시 부흥할 것이라 기뻐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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榮川鄕賢祠合享文 / 기록자료>고도서 / 권성오鄕賢祠는 이조판서 金淡, 大司諫 朴承任, 이조참의 金玏 등 세 현인을 하나의 사당에 合享할 때 지은 축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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冶隱吉先生賜祭文 / 기록자료>고도서 / 권성오1624년(인조 2)에 인조임금이 冶隱 吉再의 제사에 내린 제문을 대신 지은 것이다. 한 겨울의 소나무나 거친 물결의 砥柱같은 지조를 세웠으며, 고려 말기에 도학을 익히고 충효를 이루었다. 고려가 망할 조짐을 미리 알고 위태로운 조정에서 물러나 산림에 자취를 감추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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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愚伏鄭先生文 / 기록자료>고도서 / 권성오愚伏 鄭經世의 제사에 올린 글이다. 낙동강과 鵠嶺의 정기가 모여 남들보다 뛰어난 재주를 타고 났다. 처음 선조임금 때 벼슬하여 아름다운 명성이 자자했고, 조정에서는 임금을 모시고 나가서는 변방을 진압하였다. 흥하고 쇠하는 것은 운수 있으니, 전원으로 물러나 육경을 연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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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金鶴沙孝徵文 / 기록자료>고도서 / 권성오鶴沙 金應祖의 제사에 올린 글이다. 孝徵은 김응조의 字이다. 공은 같은 1587년(선조 20)생으로 뜻도 같이 하였다. 어릴 적부터 동문으로 함께 공부하였다. 총명한 자질로 공부를 하여 넉넉해지자 벼슬에 나아갔다. 三司와 五官에서 경륜을 폈다. 멀리 퇴계선생의 연원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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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秦進士(益亨)文 / 기록자료>고도서 / 권성오진사 秦益亨의 제사에 올린 글이다. 저자의 친구로 맑은 성품과 철석같은 지조가 있었다. 서로 시문을 주고받으며 芝蘭같은 우정을 키웠다. 公議를 펴고 옛 예를 익혀 선비들의 기상을 북돋우고 儒門을 활짝 열었다. 공의 재주는 남들보다 뛰어났으나 진사에 합격하는데 그쳤고,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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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金進士(秋任)文 / 기록자료>고도서 / 권성오진사 金秋任의 제사에 올린 글이다. 저자의 친구로 거울같이 맑고 활시위같이 곧은 성품을 타고났으며, 가정에서 經術을 배웠다. 효도와 우애를 행하고 여가에 학문을 익혀 참봉의 벼슬을 받았다. 벼슬에서 물러난 후로 함께 유람하고 공부하며 즐겼다. 그러나 중년에 아들을 먼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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悔窩記 / 기록자료>고도서 / 권성오張仲素가 지은 초가집을 悔窩라고 한데 대한 내력을 적은 글이다. 사람으로 태어난 성인이 아니면 허물이 없을 수 없다. 허물이 있으면 그것을 알고 뉘우쳐야 한다. 날로 뉘우치고 뉘우치면 허물이 적은 데에 이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회와’라고 한 것이다. 옛날 衛나라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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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都詩稿序 / 기록자료>고도서 / 권성오저자가 丁卯胡亂 때 강화도로 임금을 호종하고, 그 사이에 겪은 감회를 적은 시집의 서문이다. 청나라의 침입으로 인한 전황, 강화도로 피난가게 된 경위, 강화도에서의 어려운 생활, 청나라와 화친을 하게 된 경위와 상황, 그리고 근왕병의 현황 등을 기록하였다. 저자가 강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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忘言序 / 기록자료>고도서 / 권성오金榮祖가 ‘忘言’이라고 自號한데 대해 어떤 사람이 “망언이라고 한 것은 어디에서 뜻을 취했는가? 말을 잊는다는 말인가? 남의 남을 잊는다는 말인가?”라고 묻자, 여기에 대답하는 형식으로 김영공이 망언으로 자호한 것에 대해 설명하였다. 말이란 것은 마음의 소리이다. 사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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同樂亭序 / 기록자료>고도서 / 권성오洪柱世가 만든 동락정에 대한 내력을 적은 글이다. 홍주세가 이 정자를 짓게 된 경위를 서술하고, 정자 이름을 동락정이라고 한 것은 백성들과 함께 즐긴다는 의미에서 따온 것이라고 하였다. 이 정자를 완성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홍세주가 죽고, 저자가 이 정자를 찾아갔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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景謝亭詩稿序 / 기록자료>고도서 / 권성오李庾가 만든 정자에 여러 사람의 의견이 있었으나 아직 이름을 정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 아들과 손자들이 집안에 간직하고 있던 이유의 詩稿를 가지고 저자를 찾아와서, 정자의 이름과 함께 시고의 이름을 지어 달라고 청하였다. 이에 경사정이라 이름을 짓게 된 내력을 기록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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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日仙遊錄序 / 기록자료>고도서 / 권성오三日仙遊錄은 학사 김응조가 쓴 것으로 산을 유람한 전말을 기록한 글이다. 여기에 저자가 서문을 쓴 것이다. 이 선유록에는 3일간 산을 유람하고 나서 함께 유람한 사람의 성명과 주고받은 시를 기록한 것이다. 그리고 3일간 유람한 곳은 1667년(현종 8) 7월 21일에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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鵝溪草堂八景詩序 / 기록자료>고도서 / 권성오鵝溪草堂八景詩를 짓게 된 내력을 적은 글이다. 초당의 이름을 ‘아계’라고 한 것은 말고 깨끗함에서 따온 것이다. 從弟인 子約이 이 초당에 거처하고 공부하였다. 저자에게 아계팔경을 제제로 시 지어 줄 것을 청하자 七言絶句 8수를 지어 보내게 되었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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梅花詩帖序 / 기록자료>고도서 / 권성오매화시첩의 서문이다. 지난해 난리를 만난 이후로 조용한 곳에 살면서 세상의 변화를 지켜보고 본래 가졌던 마음을 굳게 지키고 있었다. 이것은 몸을 깨끗하게 학 고고하게 행동하려는 것이 아니라 진심을 잘 수양하여 세속의 번잡함을 벗어나 스스로 즐기기 위한 것이다. 마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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龜灣書堂儒案序 / 기록자료>고도서 / 권성오龜灣書堂 儒案의 서문으로 유안을 만들게 된 내력을 적었다. 이곳은 三松 南夢鰲 선생이 서당을 지어 후진을 양성하던 곳이었다. 그곳이 허물어지자, 선생의 동문 다섯 어른이 이곳에 새로 사당을 지어 귀만서당이라고 하였다. 서당이 세워진 지 80여 년이 지난 지금에야 유안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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守口如甁箴 / 기록자료>고도서 / 권성오말을 삼가기를 호리병처럼 하겠다는 경계를 적은 글이다. 호리병은 가운데는 가득 차 있으면서 입을 가볍게 열지 않고 때를 기다렸다고 기울이니, 스스로 지키는 것이 가장 신령스럽다고 하였다. 저자도 이것을 본받겠다는 것이다. 견문이 적으면서 말이 많은 것이 근심이라고 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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豐山鍾銘(幷序) / 기록자료>고도서 / 권성오金石과 絲竹은 악기 가운데 잘 우는 것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가 답답해서 밖으로 세어 나오는 것은 스스로 잘 울 수 없고 반드시 그 만한 사람을 기다려서 운다. 그렇기 때문에 嶰谷의 鳳管도 伶倫이 아니면 불 수 없었고, 舜임금 궁전의 韶음악도 夔가 아니면 이룰 수 없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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胡越一家頌 / 기록자료>고도서 / 권성오중국 당나라가 천하를 통일하여 북방 오랑캐인 胡族과 남방 오랑캐인 越나라가 복속되어 천하가 하나가 되어 그 우두머리가 당나라 未央宮으로 조회를 와서 태평성대를 이룬 사실을 칭송하였다. 우리 동방에서도 古昌과 新羅가 조정으로 들어오고, 詰利와 智戴가 서울로 와서 아홉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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龜灣耆英祠上樑文 / 기록자료>고도서 / 권성오龜灣書堂의 耆英祠 上樑式에 지은 글이다. 이 사당이 완성된 후에 모든 혼령들이 보호하여 많은 선비들이 떨쳐 일어나게 해 달라고 기원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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陶村聞見錄 / 기록자료>고도서 / 권성오이것은 도촌과 관련된 인물, 산천, 지명, 사당, 묘소 등에 대해 기록한 것이다. 다음 몇 항목만을 뽑아 간략히 서술했다. 桃村에는 원래 촌락이 없어서 수목 사이어 짐승과 새의 발자국이 나 있었다. 昆陽 사람 金存이 처음 이곳에 살면서 황무지를 개간하여 집을 짓게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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題南塘志後 / 기록자료>고도서 / 권성오寒泉居士 黃德裕가 南塘志에 後識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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桃村李先生遺事 / 기록자료>고도서 / 권성오桃村은 李秀亨의 호이다. 자는 英甫이고, 본관은 羽溪이다. 1435년(세종 17)에 태어나서 세조가 왕위에 오른 1455년(세조 즉위년)에 벼슬을 버리고 남쪽으로 내려가 龜城의 북쪽 桃村에 살았다. 그의 장인인 文節公 金淡의 고향이기 때문이었다. 1528년(중종 23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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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松堂南先生行錄 / 기록자료>고도서 / 권성오공의 이름은 夢鰲, 자는 景祥, 본관은 英陽이다. 집안은 대대로 문학과 행실로 명망이 있었다. 공은 자품이 뛰어나고 도량이 웅장하였고, 經史를 널리 보고 의리를 탐구하였다. 여러 번 鄕試에서 1등을 하고 進士에도 합격하였으나 후진양성을 자기의 임무라 생각하였다. 서당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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洗馬農皐黃公墓碣文 / 기록자료>고도서 / 권성오공의 이름은 彦柱, 자는 子建이다. 1553년(명종 8)에 태어나서 1632년(인조 10)에 세상을 마쳤다. 1598년(선조 31)에 典獄長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되자 않아 遞任되어 基川의 龍山으로 돌아와 세상을 마쳤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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墓碣銘 / 기록자료>고도서 / 권성오李玄逸이 지은 저자의 묘갈명이다. 공의 이름은 省吾, 자는 子守, 자호는 東巖, 본관은 안동이다. 고려 태사 幸의 후손이다. 대대로 안동에 거주하였으며, 통정대부 期壽에 이르러 榮川(榮州)의 道知村으로 이사하였다. 공에게 증보부가 된다. 조부는 濟用監 奉事 寅이고,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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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狀 / 기록자료>고도서 / 권성오金世洛이 지은 저자의 행장이다. 선생의 이름은 省吾, 자는 子守, 호는 東巖이다. 안동 권씨이며, 고려 태사 幸은 시조이다. 조선조에 禮儀判書를 지낸 靷이 있는데, 이후로 자손들이 높은 벼슬을 하여 동방의 명망있는 집안이 되었다. 고조 琛은 西部參奉을 지냈고, 증조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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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略 / 기록자료>고도서 / 권성오후손인 權重哲이 저자의 행적을 간략히 적은 글이다. 부군의 이름은 省吾, 자는 子守, 호는 東巖이다. 안동 권씨로 고려 태사 幸의 후손이다. 대대로 안동의 松坡村에 살았다. 조선조에 靷은 禮儀判書를 지냈고, 厚는 彰信校尉를 지냈고, 啓經은 횡성현감을 지냈고, 玠는 修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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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헌집 / 기록자료>고도서 / 금보매헌집(梅軒集) 梅軒 琴輔의 시문집. 4권 2책. 목판본. 1891년(고종 28) 그의 10대손 佑烈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李彙寧의 서문과 年譜가 실려 있고, 권말에는 金鶴鎭 등의 발문이 있다. 권1에 시 31수, 賦 1편, 권2에 書 7편, 祭文 3편,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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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 기록자료>고도서 / 금보淸吟石謹次退溪先生韻(幷序), 㐲次退溪先生和李大成(文樑)之任平陵郵官韻呈大成丈, 仙夢臺謹次退溪先生韻贈主人李靜可(閱道), 茂陵周先生(世鵬)與琴夾之(應夾)遊淸凉有詩病未同賞追次其韻, 讀武夷志次九曲櫂歌韻, 可興郵館次內姪金文卿(箕報)韻, 原韻, 敬次聾叜從叔父司馬會韻, 誠敬吟, 庚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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陳情賦 / 기록자료>고도서 / 금보매헌선생이 51세 때 지은 작품이다. 내용은 주로 자신이 살아 온 날을 회고한 것이다. 주어진 삶도 기박하거니와 鈍才로서 학문하는 길도 마치 하늘에 오르는 것과 같이 어렵다고 하였다. 그러나 스승의 문하에서 분에 넘치는 사랑과 가르침을 받은 것에 대하여 진정 잊을 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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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退溪先生啓蒙問目 / 기록자료>고도서 / 금보매헌선생이 평소 공부하면서 궁금하거나 모르는 것을 퇴계선생에게 질문하고, 퇴계선생이 이에 대하여 대답한 내용이다. 圓者星也·五運·陰陽變合·奇偶多寡·其序之不同·原卦畫形而上形·零星·氣中·一交再交·註分限·無極之前·傳疑易髓云云·氣朔分齊·考變占 등 14개의 조목을 問答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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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金士純(誠一)李逢原論先生與存齋奇明彦(大升)四七辨書編次別紙 / 기록자료>고도서 / 금보이 글은 매헌선생이 金士純·李逢原과 함께 退溪선생과 存齋 奇大升의 四七辨書의 編次를 논의한 別紙이다. 두 사람 간에 오고간 글들을 책으로 편찬하기 위해 그 순서를 조정한 내용으로, 이를테면 存齋의 四端七情說은 第 一書에서 附錄할 필요가 없으나, 存齋의 後說은 당연히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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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郭侯(趪,1566) / 기록자료>고도서 / 금보고을 수령 郭趪에게 올린 편지이다. 郭趪에게 안부를 묻고, 근래 儒薦에 의해 자신을 조정에 천거한다는 소식을 들었으며, 이에 대하여 고마움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선생 자신은 벼슬에 전혀 뜻이 없음을 여러 가지 사정을 대며 鄭重하면서도 曲盡하게 사양한 글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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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柳應見(雲龍,1566) / 기록자료>고도서 / 금보정이 가득 담긴 편지를 받고 柳雲龍에게 고마움을 전한 답장이다. 근일 자신이 山水간에서 靜養하고 讀書하는 정황 등 그간의 心懷를 자세하게 나타낸 글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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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琴聞遠 / 기록자료>고도서 / 금보금문원에게 안부를 묻고, 易東書院에서의 모임이 눈보라로 인해 성사되지 못한 것을 애석해하였다. 자신은 평소 孤山의 勝景을 그리워했는데, 마침내 조그마한 집이 생겨 그곳에서 心志를 펼칠 수 있다고 하였다. 집의 扁額은 小遊仙詩의 의미를 취해 水雲이라고 하였다는 소식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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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金惇敍 / 기록자료>고도서 / 금보퇴계선생의 문하에서 同門 修學한 金惇敍에게 답장한 편지이다. 심부름꾼이 편지를 가지고 와서 위로가 된다는 인사와 함께 도모하던 일이 어려움이 많아 염려된다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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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琴夾之(1574) / 기록자료>고도서 / 금보같은 門徒인 금협지에게 보낸 편지이다. 요즘 자신들이 간간이 토론하는 것은 자칫 口耳之習에 젖어 末學의 폐단에 이를까 두려워하였다. 居敬으로 근본을 세우고 窮理하여 앎을 이루어 躬行實踐하는 것이 학문의 宗旨임을 역설한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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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退溪先生文(1571) / 기록자료>고도서 / 금보평생 스승으로 모셨던 퇴계 이황 선생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이다. 퇴계선생께서 기거하시던 집을 寒栖菴이라고 命名한 의미와 학문에 임하시던 자세, 평소 생활하시던 모습과 후학들을 훈도하시던 모습을 회상하고, 돌아가신 스승의 자리가 너무 큰 것을 애통하게 여긴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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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金愼仲文(1582) / 기록자료>고도서 / 금보퇴계선생 문하에서 同門 受學한 挹淸軒 金富儀(1541~1597)의 죽음을 애도한 글이다. 愼仲은 그의 字인데, 말에는 假飾이 없고 醇美한 자질을 지닌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는 名利보다는 시종 학문에 힘쓰고 덕행을 닦았으며, 형제간에도 우애가 매우 돈독하였다. 이러한출처 : 유교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