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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체: 에 대해 총641,751건의 자료가 검색되었습니다.
  • 358601

    祭李庇遠(國樑)文 / 기록자료>고도서 / 금보
    퇴계의 문하에서 함께 공부한 庇遠 李國樑의 죽음을 애도한 글이다. 뛰어난 풍모와 호매한 성품을 지닌 이국량과는 동년배였는데, 그는 일찍부터 文學에 힘써 鄕隣에 이름이 자자하였다. 효성스런 친구가 不惑의 나이도 못되어 일찍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감을 슬퍼하였다.
    출처 : 유교넷
  • 358602

    叔父通訓大夫行沔川郡守府君碣文抄略 / 기록자료>고도서 / 금보
    沔川郡守를 지낸 叔父 琴元福의 墓碣文을 抄略한 글이다. 82세(1480년~1561년)까지 壽를 누린 公의 成長과 修學過程, 歷任한 官職, 墓所, 家族關係 등 여러 大小事에 얽힌 이야기를 자세히 밝히고 있다.
    출처 : 유교넷
  • 358603

    成均進士南公墓碣陰記 / 기록자료>고도서 / 금보
    成均進士 南瑞龍(1496~1522)의 墓碣文이다. 묘갈문에 따르면, 公의 字는 雲叟, 英陽人이다. 父는 恒年, 母는 江陽 李氏인데, 季父 昌年에게 入籍하였다. 先代의 家系와 生沒年代, 墓所 위치, 家族關係의 顚末을 상세하게 기술하였다. 1577(萬曆 5년 丁丑) 2월
    출처 : 유교넷
  • 358604

    趙普論 / 기록자료>고도서 / 금보
    宋나라 太祖때의 재상인 趙普의 인물 됨됨이와 처세에 관하여 논한 내용이다. 조보는 太祖와 太宗 兩代를 도와 천하를 평정하고 태성성대를 이룬 名臣이다. 그가 재상으로서 인물을 천거하고, 법령을 창제하는 등 뛰어난 재능을 발휘한 공적은 군자들이 본받지 않을 수 없지만,
    출처 : 유교넷
  • 358605

    鄕校重修立約序(附約條) / 기록자료>고도서 / 금보
    鄕校를 중수하게 된 내력과 향교의 約條 내용을 기록한 글이다. 당시 선생이 살던 고을의 향교가 좁고 낡았으나 고을이 작고 재정이 부족하여 보수를 하지 못하였던 차에, 신임 縣監 孫英濟의 도움으로 중수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아울러 향교 운영과 유지에 필요한 約條 20
    출처 : 유교넷
  • 358606

    陶山記考證 / 기록자료>고도서 / 금보
    퇴계선생이 남기신 「陶山記」의 내용 중 의미가 불확실한 것을 상고하거나, 堂宇의 명칭과 사물에 命名한 내용의 출처를 考證한 글이다. 고증한 항목은 모두 35개이다. 고증한 방법은 다음과 같은 예로 하였다. 고증할 내용인 ‘巖麓悄蒨’을 먼저 제시하고, 細註에 ‘悄蒨 幽
    출처 : 유교넷
  • 358607

    靜存齋箴考證 / 기록자료>고도서 / 금보
    「靜存齋箴」의 내용 중에서 그 의미가 명확하지 않은 것을 상고 하거나 출처를 考證한 글이다. 고증한 항목은 모두 35개이다. 고증한 방법은 다음과 같은 예로 하였다. 먼저 ‘本眞而靜’이라는 내용을 예시하고, 細註에는 ‘伊川好學論曰其本也眞而靜’이라고 하였다.
    출처 : 유교넷
  • 358608

    易東書院記事 / 기록자료>고도서 / 금보
    퇴계선생의 발의로 易東 禹倬 선생을 享祀하는 서원을 건립하게 된 내력을 적은 글이다. 우탁선생은 道義風節로서 후학들의 師表가 되고, 廟堂에서 百世토록 祭享될만하다고 尊崇하였다. 퇴계선생은 1558년(嘉靖 戊午) 4월에 趙穆·琴蘭秀가 鼇潭가에 서원터를 잡고, 1563
    출처 : 유교넷
  • 358609

    附遺墨 / 기록자료>고도서 / 금보
    금보선생께서 남긴 필적으로, 단아하면서도 유려한 行草書로 쓰여 있다. 「謝賡 惇叙韻」1首와 金生員 댁과 趙都事 댁에 보낸 안부 편지 2통이다.
    출처 : 유교넷
  • 358610

    四書質疑 / 기록자료>고도서 / 금보
    「四書質疑」는 1556년(嘉靖 丙辰) 금보선생이 寒栖菴 곁에 생활하면서 퇴계선생에게 四書를 受業할 때마다 이해하기 어려운 곳을 묻거나, 간혹 여러 벗들이 질문하고 논변한 것을 아울러 기록한 것이다. 훗날 후학들이 이를 보고 參考하거나 證正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四
    출처 : 유교넷
  • 358611

    師友寄贈 / 기록자료>고도서 / 금보
    師友들이 琴輔선생에게 부쳐준 시로, 모두 10首이다. 題琴士任溪齋(退溪先生), 次琴士任韻, 次琴士任韻(月川趙穆), 次琴士任韻(春塘吳守盈), 寄琴士任, 詠紅桃寄梅軒琴士任(日休琴應夾), 與金惇敍遊山院奉呈琴士任, 龍壽寺次琴士任韻(惺齋禽蘭秀), 次呈琴梅軒(雪月金富倫), 會
    출처 : 유교넷
  • 358612

    家狀 / 기록자료>고도서 / 금보
    금보선생의 손자인 是養이 쓴 家狀이다. 선생의 諱와 字·號를 적고, 家系의 내력을 자세하게 기술하고, 선생의 출생일과 어릴 적의 逸話, 退溪선생의 문하에서 수업한 일을 적었다. 선생은 1546년 司馬試에 합격하여 太學에서 5년간 공부하였으나 정쟁에 염증을 느끼고 낙
    출처 : 유교넷
  • 358613

    行狀 / 기록자료>고도서 / 금보
    금보선생의 행장으로, 吏曹判書·弘文館提學·藝文館提學·經筵日講官을 두루 지낸 孔巖 許傳이 지었다. 家系의 내력부터 공의 평소 생활, 학문, 교우, 逸話 등 삶의 전반을 매우 자세하게 기술하였다. 이 행장에 따르면 금보선생의 字는 士任, 號는 梅軒 또는 栢堂이며 奉化人이
    출처 : 유교넷
  • 358614

    墓誌銘(幷序) / 기록자료>고도서 / 금보
    通訓大夫·司憲府執義知製敎를 지낸 후손 琴이 지은 묘지명이다. 선생의 諱와 字·號를 적고, 家系의 내력을 간략하게 기술하였다. 少時에 숙부와의 逸話, 글씨를 잘 써서 칭찬 받은 이야기, 1546년 司馬試에 합격하여 太學에서 5년간 공부하였으나 과거에는 다시 응하지 않
    출처 : 유교넷
  • 358615

    墓碣銘(幷序) / 기록자료>고도서 / 금보
    通政大夫·戶曹參議를 지낸 眞城 李彙載가 撰한 묘지명이다. 선생의 諱와 字·號, 貫鄕 家系의 내력을 간략하게 기술하였다. 숙부와의 逸話, 1546년 司馬試에 합격하여 太學에서 5년간 공부한 일, 한서암 곁에서 퇴계선생을 모시고 問學한 일을 적었다. 선생은 글씨에도 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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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8616

    跋文 / 기록자료>고도서 / 금보
    崇政大夫·大提學을 지낸 安東 金鶴鎭이 쓴 발문이다. 선생의 학문 연원과 저서 내용, 남아 있는 시문, 書法에 대한 평가, 후학들에게 끼친 영향을 서술하였다. 말미에 선생의 손자 祐烈의 요청으로 발문을 쓰게 된 경위를 적었다.
    출처 : 유교넷
  • 358617

    跋文 / 기록자료>고도서 / 금보
    선생의 방계 손자 書述이 적은 발문이다. 매헌선생의 저서에 대한 가치를 논하고, 이들 저서가 불타서 없어진 것을 애석히 여겼다. 10세손 祐烈이 遺稿를 모아 간행한 점을 칭찬하고, 세상에 널리 유포되어 알려지기를 바라는 내용이다. 그리고 자신은 매헌선생이 남기신 말
    출처 : 유교넷
  • 358618

    跋文 / 기록자료>고도서 / 금보
    선생의 10世孫인 祐烈이 적은 발문이다. 先祖 매헌선생이 퇴계선생께 나아가 問學하며 스승의 뜻을 훌륭하게 이은 것과 博學審問한 결과로 많은 저서가 있게 되었다는 것을 서술하였다. 당시 고을 원님이 郭趪에 의해 조정에 천거된 것을 굳이 사양하고 학문과 수양에 전념한
    출처 : 유교넷
  • 358619

    附松坡公碣銘(幷書) / 기록자료>고도서 / 금보
    吏曹判書·弘文館提學·藝文館提學·經筵日講官을 두루 지낸 孔巖 許傳이 지은 묘갈명이다. 이 묘갈명에 의하면, 松坡공의 諱는 胤古며, 자는 繹如, 奉化人으로 琴輔의 아들이다. 공은 1558년(嘉靖 戊午)에 태어나서 1640년(崇禎 庚辰)에 83세로 일생을 마감했는데, 配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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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8620

    몽재집 / 기록자료>고도서 / 이안도
    몽재집(蒙齋集) 蒙齋 李安道의 문집. 3권 1책. 金道和의 발문에 따르면 이안도 사후 오랫동안 여건이 허락되지 않아서 원고들이 흩어진 상태로 있다가, 후손 李中協과 李中慶이 중심이 되어 의논하고 힘을 합하여 10년에 걸쳐 산일된 원고를 수집하던 중 李安道의 手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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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8621

    / 기록자료>고도서 / 이안도
    具栢潭(鳳齡)贈晦齋集一件盥 手奉閱懇懇忠孝令人起敬而但歎其遭時不幸, 濯纓潭泛月贈李宏仲(德弘), 病臥溪庄適承佳什實賤子往丹砂峽贈李上舍憙韻也復步呈記其日峽中之事, 送金士純(誠一)道契歸覲南州, 易東書院與金上舍叔(富弼富儀富倫)李上舍(叔樑)趙上舍(穆)李上舍叔(宰)琴上舍(蘭秀)琴上舍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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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8622

    與同門諸賢論先生禮葬時儀節與李尙之 / 기록자료>고도서 / 이안도
    퇴계 문하의 여러 학자들에게 퇴계의 장례 의례에 관해 의견을 묻기 위해 보낸 편지이다. 國葬을 사양하고 비석을 세우지 말며 단지 작은 돌에 "退陶隱逸眞城李公之墓"라고만 표시하라고 한 퇴계의 유훈과 머잖아 내려올 것으로 예상되는 왕명, 즉 大夫의 예를 적용해 국장으로
    출처 : 유교넷
  • 358623

    與同門諸賢稟定先生年譜 / 기록자료>고도서 / 이안도
    이황의 연보 교감과 관련 이안도의 견해를 피력하는 내용이다. "溫溪里第" 앞에 "禮安縣" 3글자를 덧붙여야 한다는 세세한 사항의 교감에서부터 문맥상 부적절함, 사실과의 불일치 등 다양한 근거를 들어서 시비를 가리고 첨삭 및 수정의 필요성 혹은 불가성을 주장하고 있다.
    출처 : 유교넷
  • 358624

    與趙月川(1571) / 기록자료>고도서 / 이안도
    퇴계가 죽은 다음해에 장례문제와 관련 月川 趙穆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誌文은 朴淳(思庵:1523∼1589), 墓碣銘은 盧守愼(蘇齋:1515∼1590), 행장은 奇大升(高峰:1527∼1572)에게 부탁하려 하는데 鄕中의 공론이 어떨지 궁금하다는 내용이 담았다.
    출처 : 유교넷
  • 358625

    答趙月川(1580) / 기록자료>고도서 / 이안도
    도산서원에서 여러 벗들이 모여 『大學』을 읽는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병으로 인해 참여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토로하고, 퇴계 遺集의 편집 작업이 끝나가며 조만간 찾아 뵙고 자문을 받을 예정임을 밝히고 있다.
    출처 : 유교넷
  • 358626

    與趙月川(1581) / 기록자료>고도서 / 이안도
    월천 조목에게 부친 편지로 內賜本 삼강오륜 등 세 책과, 朱子의 저작 등을 부쳤으니 받아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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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8627

    與琴惺齋(1571) / 기록자료>고도서 / 이안도
    퇴계가 죽은 다음 해에 장례 의절과 관련 琴蘭秀에게 보낸 편지이다. 誌銘을 받아보니 하찮은 일들만 자세하고 핵심적인 내용은 빠져있으며, 월천 조목의 글은 인용하지 않아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에 드는 곳이 전혀 없지만, 어떻게 손을 써야할 지 모르겠다. 이것은 모두 이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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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8628

    與金雪月堂(1577) / 기록자료>고도서 / 이안도
    이안도가 37살 때 松都에서 金富倫(雪月堂:1531~1598)에게 보낸 편지이다. 고향에서 온 편지에 溪上의 墓碣銘 印本을 朴世雲 편에 보냈다고 하는데 편지는 받았지만 印本은 아직 오지 않았으므로 알아봐 달라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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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8629

    答內舅琴勉進齋(1571) / 기록자료>고도서 / 이안도
    외숙부인 琴應勳(勉進齋:1540∼1616)에게 보낸 편지인데, 禹性傳(秋淵:1542∼1593)이 보내온 책 중에 살펴볼 만한 글이 많은 것 같으니 빨리 베껴 쓴 후 돌려보내길 바란다는 내용이다. 허성전은 임란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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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8630

    答李宏仲(1571) / 기록자료>고도서 / 이안도
    李德弘(艮齋:1541~1596)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오래된 책 상자에서 奇大升이 보낸 여러 편의 서간 중에서 [心統性情圖]를 논한 別紙를 발견했음을 알리고 있다. 이어서 퇴계 행장 초안이 아직 학봉 김성일에게서 오지 않아서 교정을 보지 못하고 있으며, 誌文에 대한
    출처 : 유교넷
  • 358631

    答李宏仲(1572) / 기록자료>고도서 / 이안도
    연보 초고의 교정이 늦어져서는 안되지만 함께 작업할 사람이 없어서 걱정이며, 그와 관련해 奇大升에게 문의할 일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형편상 편지를 쓰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고 했다.
    출처 : 유교넷
  • 358632

    答李宏仲(1573) / 기록자료>고도서 / 이안도
    1573년 3월 4일 보낸 편지인데, 비석 돌을 다듬는 작업이 오늘부터 시작되므로 한번 와서 지켜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내용이다.
    출처 : 유교넷
  • 358633

    答李宏仲(1574) / 기록자료>고도서 / 이안도
    한양으로 갈 예정이었는데 들려온 붕당의 다툼 소식을 접하니 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이즈음 동인과 서인의 분리와 다툼이 처음 생겨나기 시작했다.
    출처 : 유교넷
  • 358634

    答李宏仲 / 기록자료>고도서 / 이안도
    앞의 편지와 같은 해 같은 내용으로 답한 편지이다. 거짓 증거가 바닥을 드러내었다는 소식에 기쁘기는 하지만 조정에 바람직하지 않은 풍조가 생긴 것은 걱정할 만하다고 했다.
    출처 : 유교넷
  • 358635

    答李宏仲(1575) / 기록자료>고도서 / 이안도
    올 봄이래 지리하게 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중인데 장차 아버지 李雋의 명으로 성균관에 가서 지낼 예정임을 알리고 있다. 또한 金隆(勿巖; 1525~1594)이 보내준 전별시 편지를 가지고 오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고 있다.
    출처 : 유교넷
  • 358636

    與南義仲(致利)(1578) / 기록자료>고도서 / 이안도
    정월에 南致利(賁趾:1534~1580)에게 보낸 편지이다. 남치리가 보내온 편지에서 언급한 『理學通錄外集』에 대한 增損이 부당함을 강조하고 있다.
    출처 : 유교넷
  • 358637

    答南義仲 / 기록자료>고도서 / 이안도
    유성룡의 행장과 관련해 남치리가 충고해 준 사항에 대해 동의하고 있으며, 당시 추진 중이던 『啓蒙傳疑』정본 확정과 관련해 교정을 맡아줄 수 있는지 의향을 묻고 있다.
    출처 : 유교넷
  • 358638

    先生言行箚錄 / 기록자료>고도서 / 이안도
    퇴계의 언행을 기록한 글이다. 학봉 김성일이 편찬한 언행록의 토대가 되었으며, 기재된 기사 많은 부분이 겹친다. 퇴계가 上溪에 집터를 얻기까지 霞明洞과 竹洞에 각각 터를 정했다가 여의치 못해 옮겨다닌 사실과, 昏禮가 거의 사라져가고 있던 당시 孫壻 朴欐의 방문에 맞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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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8639

    家庭雜錄 / 기록자료>고도서 / 이안도
    말 그대로 집안에서 퇴계를 시봉하면서 보고들은 사실들을 적은 글이다. 叔父인 李堣(松齋:1469∼1517)가 퇴계를 "집안을 지탱할 인물은 이 아이일 것이다"고 평가한 내용과 "너의 타고난 성품이 남과 달라 세속과 부합하지 않으니 벼슬은 縣監에 그쳐야 한다"고 한 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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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8640

    考終記 / 기록자료>고도서 / 이안도
    1570년 11월 9일부터 퇴계의 임종(12월 8일)까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이황의 마지막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기록이다. 11월 9일 時享 참여 중 감기 기운이 있었는데 자제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參祭했다. 12일 기력이 더욱 쇠잔해진 중에도 奇大升이 致知格物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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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8641

    / 기록자료>고도서 / 이안도
    執事者의 물음[問]에 응하여[對] 답하는 형식의 글로서, 가례 중 祭禮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물음은 時祭와 忌祭에 따른 齋戒 날 수의 차이, 沐浴의 여부 같은 사항에서부터 祭需의 문제, 參神과 降神의 순서, 세속의 절기에 따른 獻食 등의 구체적인 사항은 물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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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8642

    / 기록자료>고도서 / 이안도
    송대의 平章事를 지낸 인물 李沆의 사례를 들어 신하의 군주를 보필하는 도리와 책무에 대해 논한 글이다. 즉, 군주는 구중궁궐에 거하며 억조 창생의 위에 있는 존재이므로 사방의 利害에 대해 두루 알아야 하고, 신하된 자 역시 사방의 사람들이 그 군주의 곁에 이해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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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8643

    輓詞 / 기록자료>고도서 / 이안도
    李叔樑(梅巖:1519~1592)이 쓴 輓詞이다. 道가 있어 퇴계의 문하에서 門生과 선생의 손자가 이론을 다투었으니 하늘이 斯文을 아직 버리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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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8644

    / 기록자료>고도서 / 이안도
    鄭琢(藥圃:1526~1605)이 쓴 輓詞이다. 예전 서로 내왕하면서 사이좋게 지냈는데, 지금은 죽음과 삶으로 갈려져 있음을 안타까워하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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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8645

    / 기록자료>고도서 / 이안도
    琴蘭秀(惺齋:1530~1604)가 쓴 輓詞이다. 弱冠에 퇴계의 가르침을 받들어 함께 학업을 닦는 등 깊은 인연을 맺어 師門이 성대했음을 회고하고 애가 끊어지는 아픔으로 만사를 지어 눈물로 보낸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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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8646

    / 기록자료>고도서 / 이안도
    李純仁이 쓴 挽詞이다. 멀리 嶺外의 부고를 들은 슬픔을 적었다.
    출처 : 유교넷
  • 358647

    / 기록자료>고도서 / 이안도
    勸文海(草澗:1534~1591)가 쓴 만사이다. 떠난 지 반년에 도산서당은 슬픔에 잠긴 채 지키는 사람이 없고 퇴계의 차가운 물은 목이 메어 흐르지 않는다며, 時運이 점차 어려워져 道가 否塞해짐을 염려했다.
    출처 : 유교넷
  • 358648

    / 기록자료>고도서 / 이안도
    鶴峯 金誠一이 쓴 輓詞이다. 돌아보니 퇴계 문하에서 서로 從遊한지 10년이 지났다며, 교유를 통해 重厚한 이안도의 천성에 輕狂한 자신의 천성이 도야되는 도움을 받았음을 말하면서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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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8649

    / 기록자료>고도서 / 이안도
    趙振이 쓴 挽詞이다.
    출처 : 유교넷
  • 358650

    / 기록자료>고도서 / 이안도
    申瀷이 쓴 挽詞이다. 이안도가 없으니 누가 퇴계의 家學을 이을 것인지 걱정하고 도산이 적막해졌음을 말했다.
    출처 : 유교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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