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跋文 48 / 기록자료>고도서 / 조승기三從弟 趙獻基가 쓴 跋文으로 癸丑年 저자가 운명하신 지 47년 되는 해에 기록한 것이다. 己亥年 문집이 완성되었는데 무릇 8권 4책이었다. 저자의 글은 平易明白 純潔停當했으며, 人情에서 멀지 않았으면서도 風神이 精彩하여 스스로 밖으로 드러났다. 선생은 평소 溫恭近道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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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리집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윤안동리집(東籬集) 東籬 金允安의 문집. 5권 3책. 목판본. 이 문집의 간행 연도는 정확하지 않으나 金允安의 사후 50년 뒤 공의 손자인 金汝萬이 지은 행장과 1773년에 5대손인 金槃의 부탁으로 적은 大山 李象靖의 서문을 근거로 하면 遺集이 필사본 형태로 오랜 기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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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윤안詠海(十歲作), 河回同金昌遠(弘微)柳汝章(椅)詠月, 送鶴峯金先生日本通信使(己丑十二月), 仙遊亭次金淸溪韻, 曉發黃江驛(丙申), 至日奉別都事兄兼示柳汝章, 山村, 曉霜, 題知品村舍(癸卯), 從使相巡到金海行望闕禮吟示河堤督(受一, 乙巳), 從巡兵兩使泛海(幷序), 次沈方伯(惇)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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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윤안道南書院次尙牧韻贈全都事淨源(湜), 次高彦龍韻二首, 次善山洪使君淸字韻, 謝善山洪使君以柳器蒒器二物見遺, 次金驪州道源(涌)淸字韻, 鬼火, 與金藎甫李士直南士仰登高望遠, 悼宋正字, 躑躅杖, 次登嶺歌, 次曺正郞汝益韻, 道南院次曺汝益韻, 古意, 醉題鄭景輔新堂韻, 題李寧海 江舍,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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輓詩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윤안輓金惟一齋(彦璣, 辛卯), 輓藥圃鄭先生(二首, 甲辰), 輓謙菴先生夫人鐵城李氏(乙巳), 輓西厓柳先生(丁未), 輓寒岡鄭先生, 輓徐樂齋(乙卯), 輓琴堤川(應壎, 丙辰), 輓具一甫(成胤), 輓李方叔(鎭南), 輓金栢巖(玏)三首(丁巳), 輓權晦谷(春蘭), 輓權晦谷夫人朴氏, 輓柳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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晦齋先生伸辨疏 1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윤안館學生徒들은 여러 해에 걸쳐 五賢의 從祀를 청원하였다. 하지만 宣祖는 윤허하지 않을 뿐 아니라 晦齋 李彦迪(1491~1553)의 乙巳년 행적을 문제 삼았다. 이 일을 전해들은 영남의 유생들이 1604년(선조 37)에 부당함과 시정을 요구하는 疏文을 올렸다. 金允安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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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賢從祀疏 11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윤안「晦齋先生伸辨疏」를 올린 이후 宣祖의 용납에 감사하며 이로 인하여 여러 사람의 의심이 풀렸음과 현인의 心‧事가 허물없는 지경으로 돌아가게 되었음을 감사하며 올린 疏文이다. 이제 泮疏에 從祀의 의논이 있으니 從祀하는 한 일은 국가의 大題目이며 유생들에게 있어 第一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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擬斥鄭仁弘誣賢疏 12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윤안1611년(광해군 3)에 來菴 鄭仁弘(1535~ 1623)이 晦齋‧退溪의 從祀의 그릇됨을 상소함에 왕이 정인홍의 사람됨을 믿고 이를 이미 가납하였다는 소식에 부당함을 논한 疏文이다. 鄭仁弘의 疏文이 올라옴에 부당함을 논하는 공론이 일고 있다. 그런데도 왕께서 政院과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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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觀察使書 1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윤안46세가 되던 해인 1605년(선조 38)에 召村 察訪으로 부임한 金允安은 왜란이후 극심한 고통 속에서 지내고 있는 驛卒들의 상황을 목도하고 이의 개선을 觀察使에게 건의한 글이다. 召村은 晉州 소속으로 난리 속에 이미 황폐화 되었다. 이후 인원을 보강하였지만 이들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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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柳季華(袗) 7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윤안修巖 柳袗(1582~1635)에게 답한 편지이다. 보내준 「金丹書」‧「獻芹錄」‧「雲巖雜詠」을 잘 받았으며 이에 감사하고 있다. 蘧伯玉의 일을 유쾌하게 여기나 돼지고기도 넉넉히 맛보지 못한 자신이 용 고기를 맛보려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민망해하고 있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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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柳季華 8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윤안修巖 柳袗에게 보낸 편지이다. 왼 무릎 통증으로 고생하는 처지와 문집일이 늦어지고 있음을 개탄하고 있다. 초 4~5일 경에 올라가고자 하니 丘景에서 만날 것을 바라고 있다. 그리고 우리 府使가 파직을 당했다고 하니 그 연유를 궁금해 하고 있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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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柳季華 8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윤안修巖 柳袗에게 보낸 편지이다. 靑宮官屬에 제수 받은 柳袗이 병으로 돌아온 일을 전해 듣고 관직을 수행하지 못함이 아쉬운 것이 아니라 恩命에 감사할 수 없음이 크게 한스러워하고 있다. 지금은 병이 다 나았는지, 돌아오는 날을 묻고 있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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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柳季華 8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윤안修巖 柳袗에게 보낸 편지이다. 대충 예전처럼 지내고 있는 자신의 처지와 여름 가뭄을 걱정하고 있다. 선생의 忌日을 맞아 쌀 五斗, 眞油 二升, 淸 一升을 보낸다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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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金道源(涌) 8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윤안雲川 金涌(1557~1620)에게 보낸 편지이다. 보내준 근체시 두 수는 지금도 쉼 없이 암송하고 있다. 그리고 백년에 반이나 지났음에도 대강 대강 지내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자탄하고 있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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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洪偉夫(瑋) 9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윤안偉夫 洪瑋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상대의 어려운 형편을 알고 친분으로 그냥 지날 수 없기에 五斗를 구해 보내나 그 또한 민망한 일이다. 자신은 方伯으로 공사간에 응접함이 번거로워 관의 비축품을 모두 사용하였다. 이제 전근가야 할 시간은 다가오고 창고는 비었으니 이 또한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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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李嘉仲(亨男) 9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윤안松溪 李亨男(1556~1627)에게 보낸 편지이다. 새로운 院長을 아직 薦하지 않았고 春享의 날이 이미 닥쳤으니 享祀에 院長이 없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春享을 한 달 정도 미루어 院規에 따라 새롭게 院長을 諸生들의 손으로 뽑을 것을 권하고 있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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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李嘉仲 10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윤안松溪 李亨男에게 보낸 편지이다. 상대가 여러 날 屛山에 머문다는 소식을 들었음에도 연이어 절박한 喪을 당하여 나아가 만날 겨를이 없는 자신의 처지를 먼저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날이 매우 차니 급히 집으로 돌아가지 말고 날이 따뜻해지기를 기다릴 것을 권하고 있다. 또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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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李嘉仲 10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윤안松溪 李亨男에게 보낸 편지이다. 靜仲이 전날 말에서 떨어진 뒤 자리보전하고 하고 있음을 안타까워 하고 있다. 屛山書院의 일은 수습하려 해도 계책이 없으니 迂拙老友에게 전하여도 괜찮은지를 상의하고 있다. 그리고 전일에 자식을 통해 보낸 글을 살펴 보았는지 묻고 있는 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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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全遵甫(成憲) 10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윤안遵甫 全成憲에게 보낸 편지이다. 星州에 왔음에도 자신을 찾지 않은 일을 서운해하고 있다. 오십이 넘어 병을 벗하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밝히며 공부하러 간 자식이 기름이 없어 책 읽지 못하고 있으니 아이의 장인인 全成憲에게 헤아려줄 것을 청하고 있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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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全遵甫 11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윤안遵甫 全成憲에게 보낸 편지이다. 편지는 받았으나 一直으로 가는 길이 험하고 다른 사람들의 권유도 있고 하여 이미 비안 길을 올랐기에 서운해 하여도 어쩔 수가 없는 지경이 되었다. 개인적으로도 며느리를 보고 싶으나 초가을에 말미를 받아 올라올 때에 만날 것을 청하고 있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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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丘景仰(山立) 11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윤안景仰 丘山立에게 보낸 편지이다. 가난 속에서 머무는 자신의 처지가 작은 일은 아니다. 이에 당신이 人馬를 보내 가난을 구제하려 하니 남을 대하여 가난을 말하는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있다. 다음 달에 申子敬과 함께 柳季華의 집에서 만날 것을 기약하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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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黌堂僉會中 11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윤안향교로 보낸 편지이다. 먼저 번에 개진한 鄕校에 대한 자신의 의견이 한 터럭이라도 私意가 없음을 밝히고 있다. 당시 鄕校에 있는 塑像이 元朝의 遺風으로 성현을 더럽히니 녹여 버리자는 衆論이 있었다. 이에 대해 자신은 聖賢들께서 그러한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니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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寄兒根厚等 12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윤안아들 金根厚 등에게 보낸 편지이다. 基厚가 보내온 편지 안에 있었던 儒疏의 내용이 상황과 부합되지 않음에 놀라고 있다. 믿는 곳은 오직 하늘이라 하지만 하늘이 원리대로 움직였다면 宋나라가 망하지 않았을 것이니 고려하기를 바라고 있다. 南燁氏가 어제 갑자기 죽은 일에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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寄兒基厚 12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윤안出系한 아들인 晩起堂 金基厚(1583~1633)에게 보낸 편지이다. 노선생의 죽음을 전해 듣고도 방백이 경계에 와 명을 받들어야 하는 자신의 처지와 함께 그 일에 대해 전해 들었는지, 형제가 조문하였는지 묻고 있다. 만약에 兄이 아직 전해 듣지 못하였다면 편지를 보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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寄兒根厚等 12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윤안아들 金根厚 등에게 보낸 편지이다. 아들들에게 안부를 물었다. 修巖 柳袗이 형편이 어려워 노비들을 팔려고 한다하니 안타까워하며 아들에게 豊山 監色에게 분부하여 급히 租 一石, 太 五六斗를 그 집에 보내면 자신이 가을에 갚겠다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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寄兒處厚 13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윤안아들 金處厚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아들이 있는 곳의 가뭄을 걱정하며 자신이 있는 곳의 극심한 가뭄도 구제할 계책이 없음을 걱정하고 있다. 寒岡 선생 집에 있던 朱子節要가 한 부분이 타서 다른 판본을 얻어 베꼈으니 그 곳에 있는 釋義를 잘 싸서 보내라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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消憂堂記 13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윤안東籬 저자가 57세가 되던 1616년(광해군 8)에 구담의 龜山의 아래에 堂을 지어 消憂堂이라 명명하고 지은 記文이다. 여기서 자신의 호를 東籬로 하여 이후의 處世的 삶을 보여주고 있다. 만년에 집은 구했지만 그 또한 궁색하여 손님이 오면 항상 場圃에서 맞이하였기에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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悠然堂記 14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윤안悠然堂 金大賢(1553~1602)이 지은 悠然堂의 기문이다. 堂이 鶴駕山과 서로 대하고있는 모습이 君子, 大人이 서로 엄숙하게 공수하고 있는 듯하니 그 분위기부터 기이하다. 悠然堂은 “유연히 남산을 바라보네.”라는 陶淵明의 시구에서 그 뜻을 취하였다. 사욕을 모두 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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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栢潭具先生 15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윤안처족인 栢潭 具鳳齡(1526~1586) 선생의 小祥에 올린 제문이다(연보에는 小祥, 大祥 모두 제문이 있다고 하나 이것만 전해지고 있다.). 공은 일생토록 明宗‧宣祖 두 조정에서 충을 다하였으며 물러나 가정에 있음에 도리를 다하였다. 자신을 특별하게 보살펴 주셨으며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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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嘯皐朴先生 17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윤안嘯皐 朴承任(1517~1586)의 장사 때에 올린 제문이다. 공은 따를 수 없는 문장과 빼앗을 수 없는 절개를 지니고도 미칠 수 없는 愚를 가진 분이다. 그러기에 선비들은 태산같이 여겼고 나라에서는 지침을 제시할 만한 인물이라 생각하였다. 공이 떠남에 이제 의지할 곳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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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謙菴柳先生 17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윤안謙菴 柳雲龍(1539~1601)의 小祥에 올린 제문이다. 인간사 오복을 갖추고도 세상의 번잡함을 잊고 지내던 분이 떠나가니 안타깝기만 하다. 25년간이나 문하에 다니며 깊은 사랑을 입었다. 1600년(선조 33) 겨울에 추위를 무릅쓰고 오셨을 때 나를 부르시어 먼 길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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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西厓柳先生 18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윤안西厓 柳成龍(1542~1607)에게 올린 제문이다. 先生은 나라에 난이 닥쳐오자 자신의 안위는 멀리하고 敗軍의 즈음에서 興復의 임무를 自任하였다. 才‧德‧功을 모두 갖춘 분으로 경영함에 빈틈이 없었으며, 小人들의 비방을 입어 물러남에 자신을 기름에 게을리하지 않았으니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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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崔松亭墓 21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윤안崔松亭에게 올린 제문이다. 뛰어난 재주로 세상에 쓰여질 것을 기대한 분의 떠나감을 안타까워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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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權晦谷(春蘭) 21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윤안晦谷 權春蘭(1539~1617)에게 올린 제문이다. 학문에 특히 힘을 쏟았던 공은 나와 이웃한 동문으로 특히 자주 만나 서로의 생각을 나누었다. 中年에 들어 일로 인해 자주 만나지 못하였다. 작년 가을에 만나 서로의 興을 화답하였더니 病으로 떠나고 말았음을 아파하고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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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金栢巖(玏) 22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윤안栢巖 金玏(1540~1616)에게 올린 제문이다. 가까이서 입은 은혜 크지만 이제야 곡을 하는 자신의 안타까운 심정을 표현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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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寒岡鄭先生 22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윤안寒岡 鄭逑(1543~1620)에게 올린 제문이다. 선생은 『心經』 한 책에서 敬을 얻어 힘써 행함으로 선비의 師가 되었으며 번잡하게 전해지는 禮를 參酌하여 모았기에 실지로 人道의 大綱에 功이 있다. 선생이 살았던 인근 대구 부사가 되어 다행히도 만나서 허물없는 가르침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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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金梅隱順伯(安繼) 24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윤안梅隱 金安繼(1556~1599)에 올린 제문이다. 44년이라는 짧은 생을 마친 일생을 命이라 하지만 평소 서로의 정을 가까이 하였던 자신으로서는 아직도 꿈만 같다. 특히 어버이가 계시기에 더욱 가슴이 아프다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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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宜人南夫人 25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윤안具氏 부인 사후 1587년(선조 20)에 맞이한 부인 南氏가 1603년(선조 36)에 卒하자 부인과의 정을 이기지 못하여 영전에 올린 祭文이다. 부인과 결혼한 지 17년이 되었건만 이런저런 이유로 서로 같이 지낸 것은 3, 4년 정도이기에 올라오는 슬픔을 누를 길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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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二兄安陰公 29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윤안松磵公 金允明에게 올린 제문이다. 5형제의 막내로 태어난 金允安은 둘째 형을 의지함이 많았다. 형은 총명하여 일찍이 과장에 이름을 올리니 뜻도 있고 재주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 형이 떠났건만 末官에 메여 형의 초상에 직접 참여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며 비통해하는 내용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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警責伯子冠禮後 32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윤안맏아들인 通德郞 金根厚의 관례를 치르고 준 경계의 글이다. 3세에 어머니인 具氏 부인이 세상을 떠나고 남은 너를 위태해하는 마음으로 키웠다. 그런데도 너는 학문에 힘쓰지 않고 주위에서 신임을 얻지 못하여 끝내 小人이 되고 良士가 되지 못하였다. 세월은 흘러가는 물과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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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庵齋舍重創文 32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윤안觀察使 權執經의 재실인 月庵齋를 重創하면서 지은 글이다. 수백 년 전의 九潭에는 사람이 많이 살지 않았다. 觀察使인 權公이 그 풍경을 아껴 九潭에 정착하면서 그의 사위로 參議를 지낸 金有溫이 이주하면서 사람들이 모이게 되었다. 현재 살고 있는 平陽金氏‧完山李氏‧光城金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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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龜巖祠宇上樑文 34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윤안龜巖 李先生의 祠宇에 올린 上樑文이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놀기를 좋아하지 않고 詩禮의 가르침에 힘을 쏟았다. 이제 선생의 舊宅의 가까이에 재물을 모아 景慕의 장소를 만들었으니 후인들이 이곳에서 책을 읽고 고민하여 직접 배우듯이 하기를 바라고 있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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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狀 1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윤안손자인 箕山 金如萬(1625~1711)이 지은 행장이다. 공은 順天人으로 字는 而靜이며 스스로 호를 東籬라 하였다. 1560년(명종 15) 5월 15일 안동 풍산현 九潭에서 다섯 형제의 막내로 태어났다. 네 살 때 외가에 온 공을 보고 퇴계 선생께서 ‘遠大’함으로 허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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墓碣銘 6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윤안霞谷 權愈(1633~1704)가 지은 묘갈명이다. 權愈는 金允安이 歿한 이후에 태어난 인물이라서 金允安의 손자가 지은 행장의 내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주제로 묘갈명을 기술하고 있다. 銘에서 “뜻은 넓으면서도 행실은 맑으며 재목은 준걸이면서 식견이 밝으니 어디를 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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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文 10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윤안문집을 만들며 金允安에게 들어온 제문들을 모아두었다. 蒼石 李埈(1560~1635), 李珍, 生員 李의 初喪時 祭文과 死後 1670년에 遷葬을 할 때 들어온 西坰 李文潑(1622~1691), 屛山書院儒生生員李渫(字 克淸, 1598~?) 等, 門下生柳元之(拙齋, 159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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輓詩 16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윤안문집을 만들며 金允安에게 들어온 輓詩들을 모아두었다. 府使 申楫, 李珍, 溪巖 金坽(1577~1641), 柳世鳴의 輓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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跋文 1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윤안金㙆이 지은 跋文이다. 고을의 선비들이 선생을 謙菴 柳雲龍 선생을 모신 花川書院에 追享하고 선생의 遺集을 간행하려 하였다. 선생의 후손인 世奎‧世瑜씨가 선생의 유집을가지고 와서 서로 교정을 하며 나에게 문집의 발문을 청하여 지었다. 글을 읽고 선생의 蕭散‧閑曠한 흥취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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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집 / 기록자료>고도서 / 권이복만주집(晩州集) 晩洲 權以復의 문집. 4권 2책. 목판본. 이 문집에는 序文은 없지만 跋文이 있어서 정확한 문집의 간행 내역을 알 수가 있다. 저자의 아들 廣美가 門下生 李元協, 徐元模와 聖模 등 여러 사람과 문집간행을 의논하였으나 성취하지 못하고 별세함에 저자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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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 기록자료>고도서 / 권이복除夕(壬午), 元日(甲辰), 庚戌六月十八日世子誕降擧國欣抃九月二十日乃誕降後百日也館長捐三千銅館儒捐兩朔紙館僕亦各獻斛米以飾一日之喜粤肅考誕降時館儒已有志喜之韻因各次, 與徐丈汝一(爾綱)遊月外瀑雲水洞各一絶(壬子), 流頭前一日柳士吉(泰休)明瑞(龜文)要余入周王余病未赴其還明瑞以一絶見贈次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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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大山李先生問目 1 / 기록자료>고도서 / 권이복① 發靷 전일에 朝祖의 의식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 ② 發靷을 할 때에 조상의 묘소가 바라보이는 곳에서 잠시 예를 갖추는 것에 대한 질문, ③ 神主에 孝字를 빼고 次子가 喪事를 주관할 때 ‘子某’라고 쓰는 문제와 ‘介子’ 혹은 ‘攝事子’라고 쓰출처 : 유교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