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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族叔九山公文 23 / 기록자료>고도서 / 김병종九山 金章洛의 제사에 드린 글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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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族姪佐卿文 24 / 기록자료>고도서 / 김병종族姪 字 佐卿의 제사에 드린 글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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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櫟巖李丈(元奎)文 25 / 기록자료>고도서 / 김병종櫟巖 李元奎의 제사에 드린 글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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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族弟圓仲文 25 / 기록자료>고도서 / 김병종族弟 字 圓仲의 제사에 드린 글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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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族叔翠石公文 27 / 기록자료>고도서 / 김병종翠石 金柄洛의 제사에 드린 글이다. 그는 秀山의 양자 龍大의 생가 조부였다. 간곡한 감사와 애도를 표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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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族叔處士公(起洛)文 28 / 기록자료>고도서 / 김병종族叔 金起洛의 제사에 드린 글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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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從先祖雲川先生文(遷厝時) 29 / 기록자료>고도서 / 김병종雲川 金涌의 무덤을 臨河 申谷에서 臨東 枝洞으로 이장할 때 드린 글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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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族姪明會文 30 / 기록자료>고도서 / 김병종族姪 金明會의 제사에 드린 글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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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族姪運仲文 31 / 기록자료>고도서 / 김병종族姪 字 運仲의 제사에 드린 글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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濠隱南公墓誌銘 1 / 기록자료>고도서 / 김병종同中樞 南興壽의 묘지명이다. 그의 字는 穉猶이며 號는 濠隱이었다. 아버지는 贈戶曹參議 景适, 어머니는 貞夫人 永陽李氏로, 1813년(순조 13) 정월 15일에 태어났다. 총명하여 종형 海山公 箕壽에게 공부하였고, 定齋 柳先生을 찾아뵙기도 했다. 家學과 鄕學의 스승이었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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懼齋吳公墓誌銘 3 / 기록자료>고도서 / 김병종吳正敎의 묘지명이다. 그의 字는 重五, 號는 懼齋였다. 아버지는 觀協, 어머니는 載寧李氏로, 1825년(순조 25) 6월 19일에 태어났다. 총명하고 널리 교유하며 戒懼謹篤하여 이름이 있었다. 효성이 독실하였고, 우애가 지극하였다. 73세로 고종하였다. 안동 재산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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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氏妹恭人壙記 5 / 기록자료>고도서 / 김병종豊山柳氏에게 시집간 누이의 壙記이다. 아버지의 임종을 함께 한 누이가, 시집에 가서 죽었다는 소식이 왔으니 차마 들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는 靑溪 선생의 후예로 아버지 程洛과 어머니 英陽南氏의 딸로, 열아홉에 柳冑榮에게 시집가서 30세에 죽었다. 아름다운 성품과 덕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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族弟眉仲壙記 7 / 기록자료>고도서 / 김병종族弟 金秉年의 壙記이다. 그의 자는 眉仲이며 아버지는 星洛, 어머니는 完山柳氏였다. 1886(고종 23)에 태어나 1906년(광무 10)에 죽으니 겨우 21세였다. 家學을 이어 事親愛敬하고 善述詩禮하여 기대하였는데 그 끝을 못 보았으니 안타깝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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秀士金君節婦安東權氏合葬壙記 8 / 기록자료>고도서 / 김병종義城 金庭煥과 節婦 安東權氏의 합장 壙記이다. 김정환의 字는 蘭卿이며 아버지는 夏植, 어머니는 固城李氏로 1888년(고종 25)에 태어났다. 16세에 丹丘權氏에게 장가들었다가 초례에서 돌아오면서 병을 얻어 1904년(광무 8)에 죽었다. 절부 권씨는 權相輿와 영양남씨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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舅母孺人朴氏壙記 10 / 기록자료>고도서 / 김병종외숙 南澔朝의 부인 錦城朴氏의 壙記이다. 유인의 아버지는 載璜, 어머니는 驪江李氏였다. 아름다운 품성으로 외삼촌의 繼室로 시집 와서 舅姑께 효성스럽고 법도가 있었다. 집안을 다스릴 때는 우애하며 家法을 잘 실천하였고, 40세에 후사를 정하였고, 병오년에 60세로 돌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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悔窩吳公墓誌銘 11 / 기록자료>고도서 / 김병종吳錫耆의 묘지명이다. 그의 자는 應博이며 아버지는 世寧, 어머니는 義城金氏였다. 1862년(철종 13)에 태어나 1909년(순종 3)에 돌아갔다. 그는 謙齋의 조카로 그 家學의 彬彬함을 이어받아 修身行道하였다. 현서 선영에 장사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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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土山神道碑(代人作) 14 / 기록자료>고도서 / 김병종高麗 金紫光祿大夫 太子詹事 義城君 휘 龍庇의 신도비명을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지은 것이다. 그는 경순왕자 휘 錫의 후손으로서, 공훈으로 인하여 조상의 봉호를 이어받았고, 사후 이 산에 장사하였으니 五土山이며, 그 위에 부인 姜氏의 묘가 있다. 공의 높으신 공훈으로 지출처 : 유교넷 -
360318
贈參判金公墓碣銘 15 / 기록자료>고도서 / 김병종증 참판 金堯欽의 묘갈명이다. 그는 1675년(숙종 1)에 태어나 1709년(숙종 35)에 35세로 졸하였다. 아버지는 증 좌승지 遠重, 어머니는 安陵李氏였다. 일찍부터 재능이 있어서, 屛谷, 雨溪, 霽山 등의 선배들이 기대하였다. 枝洞 寓所에서 졸하자 기현 선영에출처 : 유교넷 -
360319
敎導官戀南齊申公墓碣銘 17 / 기록자료>고도서 / 김병종敎導官 申永錫의 묘갈명이다. 그는 平山申氏로 字를 遠祚, 號를 戀南이라고 했으며, 아버지는 이조참의 藝, 어머니는 金氏였다. 고려가 망하자 罔僕之義를 지켜 스스로 落南하여 남이 알지 못하게 寧海申氏라고 숨겼다. 강계 敎導官으로 있을 때 법도가 있었다. 졸하여 원주 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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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吏曹參議丹厓李公墓碣銘 19 / 기록자료>고도서 / 김병종贈 吏曹參議 李龜孫의 묘갈명이다. 그는 眞城李氏로 字를 穉成, 號를 丹厓라 하였다. 아버지는 世翕, 어머니는 錦城朴氏이며, 1758년(영조 34)에 태어나 엄정한 학풍과 소슬한 풍류로 평생을 보내고 1833년(순조 33)에 76세로 졸하였다. 집 뒤에 장사하고 부인출처 : 유교넷 -
360321
眉山鄭公墓碣銘 20 / 기록자료>고도서 / 김병종鄭道休의 묘갈명이다. 그는 烏川鄭氏로 字는 聖由, 號는 眉山이었다. 아버지는 夏瓊, 어머니는 慶州金氏로, 1807년(순조 7)에 태어나 1877년(고종 14)에 77세로 졸하였다. 그는 7세에 아버지를 잃었으나 어머니께 독실히 효행하였으며, 東淵公에게 배워 학문이 이출처 : 유교넷 -
360322
處士金公墓碣銘 22 / 기록자료>고도서 / 김병종義城 金命欽의 묘갈명이다. 그의 字는 敬受로, 芝村 선생의 손자이며 承宣 遠重과 載寧李氏의 아들이었다. 1679년(숙종 5)에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지극한 성품으로 가학을 이어받았다. 처음 성산이씨에게 장가가서 처가에서 받은 재산이 많았으나 喪妻하자 그 땅을 다 돌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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同樞南公墓碣銘 24 / 기록자료>고도서 / 김병종壽 嘉義大夫 同知中樞府事 南之熏의 묘갈명이다. 그는 1678년(숙종 4)에 아버지 旻柱와 어머니 寧海申氏에게서 태어나, 葛庵 선생께 배우고 戊申亂에 倡義하여 맹약문을 지었다. 만년에 壽職으로 가의대부에 승급하였다. 1768년(영조 44)에 91세로 졸하자 愚尾谷에 장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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素菴鄭公墓碣銘 26 / 기록자료>고도서 / 김병종烏川 鄭信在의 묘갈명이다. 그의 字는 伯輗 號는 素庵이었으며, 1800년(순조 즉위)에 아버지 裕昆과 어머니 安東權氏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여가에는 독실히 공부하였다. 아우들이 먼저 세상을 떠나 깊이 한스러워하였고 자질들을 가르쳐 가법을출처 : 유교넷 -
360325
扐翁權公墓碣銘 28 / 기록자료>고도서 / 김병종永嘉 權周曄의 묘갈명이다. 그의 자는 晦叟였으며, 아버지와 어머니 務安朴氏의 아들로 1830년(순조 30) 태어났다. 逋庵 周郁의 아우로 鄕試에 급제하고 효성으로 부모를 받들었다. 壽職으로 通政階에 올랐으며 1909년(융희 3)에 80세로 졸하였다. 竹長 墻內에 장사출처 : 유교넷 -
360326
下山鄭公墓碣銘 30 / 기록자료>고도서 / 김병종烏川 鄭鎭憲의 묘갈명이다. 字는 希文이며 本生 아버지 淵在와 어머니 光山金氏의 아들로 1834년(헌종 즉위)에 태어나 1911년에 78세로 졸하였다. 그는 晩悟공에게 글을 배우고 定齋 柳선생께 執贄하였으며, 서울에 과거보러 갔다가 時事가 글러진 것을 보고 학문과 가법출처 : 유교넷 -
360327
秘書監丞李公墓碣銘 33 / 기록자료>고도서 / 김병종驪州 李錫贊의 묘갈명이다. 字는 殷甫로 아버지 蓉久와 어머니 廣州安氏의 3남으로 태어났다. 1874년(고종 11)에 태어나 두 형과 돈독한 우애로 살았으며, 형이 일찍 죽은 뒤 조카를 아들처럼 길렀다. 承訓郞을 거쳐 通政 秘書監丞이 되었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아니하고출처 : 유교넷 -
360328
處士南公墓碣銘 34 / 기록자료>고도서 / 김병종英陽 南景和의 묘갈명이다. 자는 士羲로 아버지 得萬과 어머니 永嘉權氏의 아들이었다. 1768년(영조 44)에 태어나 84세를 살고 1851년(철종 2)에 졸했다. 그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백부 勿小窩 澤萬의 가르침을 받고 자랐다. 학문에 정심하고 가법을 아름답게 지출처 : 유교넷 -
360329
處士南公墓碣銘 35 / 기록자료>고도서 / 김병종英陽 南錫晉의 묘갈명이다. 字는 安仲으로 아버지 明翼과 어머니 綾城具氏에게 태어났다. 1826년(순조 26)에 태어나 11세에 아버지를 잃고 아버지의 빚으로 가난해졌지만 근실히 노력하여 회복하였다. 가법을 확립하여 좋은 소문이 들리게 하였다. 1887년(고종 24)에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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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仕郞行順陵參奉朴公恭人鄭氏墓碣銘 36 / 기록자료>고도서 / 김병종密城 朴定復의 묘갈명이다. 字는 景三, 號는 敬軒이며, 아버지 思裕와 어머니 月城崔氏에게서 1842년(헌종 8)에 태어났다. 일찍이 염정한 도리를 배워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본분에 충실하였다. 順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다. 1923년에 82세로 졸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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處士南公墓碣銘 39 / 기록자료>고도서 / 김병종英陽 南有鏛의 묘갈명이다. 字는 叔庸, 아버지 百悔公 崑壽와 어머니 月城孫氏의 아들로 1827년(순조 27)에 태어났다. 어른의 말씀에 순종하여 가정 일을 잘 돌보았으며, 先公의 상을 篤孝로 치렀다. 어머니를 모시고, 일찍 죽은 伯兄의 아들들을 돌보면서 律身範家에 노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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嘉義大夫行同知中樞府事贈奎障閣直提學梧石徐公行狀 41 / 기록자료>고도서 / 김병종達城 徐必道의 행장이다. 처음 이름은 明洙, 字는 德初, 號는 梧石이었다. 1831년(순조 31) 護軍 錫賢과 貞夫人 月城崔氏에게 태어나 백부 贈戶曹參判 錫遜에게 양자로 갔다. 독실한 효성으로 양가 부모를 섬겼으며, 장릉참봉을 시작으로 부호군, 가선대부 동추, 인동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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朋齋金公行狀 44 / 기록자료>고도서 / 김병종延安 金敬淵의 행장이다. 字는 聖穆, 號는 朋齋로 1856년(철종 7) 통정 鐫과 淑夫人 宣城金氏의 아들로 태어나 伯父 錘의 뒤를 이었다. 어려서부터 어른의 돈독한 가르침을 받았으며, 西山 金先生의 칭상을 받았다. 병술년에 전염병이 돌아 온 가족이 전염되었어도 공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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從曾祖芝廬府君遺事 1 / 기록자료>고도서 / 김병종從曾祖父 芝廬공의 諱는 常壽, 字는 季恒이니 義城金氏이다. 靑溪 선생의 長子 후손으로 瓢隱 선생, 蓴浦공 이후 芝谷 諱 正漢의 玄孫이며 諱 宏運과 安東權氏의 5자 중 막내아들이다. 1819년(순조 19)에 태어나 訂窩 諱 岱鎭에게 배우고 향시에 누차 합격하였으나 省試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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族叔莊菴公遺事 10 / 기록자료>고도서 / 김병종族叔 莊庵公의 諱는 時洛, 字는 國應으로, 1857년(철종 8) 諱 敬鎭과 載寧李氏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諱 鎭敎의 뒤를 이었다. 일찍이 영민하여 家學을 이었으며 經史子集을 정밀히 읽었다. 西山 선생께 학문을 청하였고, 향시에 합격하고 省試에 응하려 하였으나 국상으로출처 : 유교넷 -
360336
遺事 25 / 기록자료>고도서 / 김병종金秉矩가 찬한 유사이다. 내용은 저자소개와 같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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墓碣銘 42 / 기록자료>고도서 / 김병종權相圭가 찬한 묘갈명이다. 西山 선생께 배운 사람으로 마침내 문한을 이룬 사람이 秀山 金秉宗이다. 일찍이 家學에서 계발되어 스승을 만나 이루었으니 그 견해와 문사가 빛났다. 서산 선생이 돌아가시자 心喪으로 애통하고, 先公의 상을 애통과 예로 치르시고 학문에 잠심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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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은집 / 기록자료>고도서 / 김한동와은집(臥隱集) 臥隱 金翰東의 문집. 8권 4책. 석인본. 6대 후손인 昌燮의 跋文에 의하면 원래 수십 권이었는데 亂을 만나 거의 다 불에 타 버려 남은 글은 반의반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卷1은 年譜, 卷2는 詩 163수‧書 27편, 卷3은 疏 17편, 卷4는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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年譜 / 기록자료>고도서 / 김한동年譜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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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 기록자료>고도서 / 김한동送春, 八角爐成內白外黑表方裏圓眞一奇玩鵲尾睡鴨何足羨哉遂吟一律, 次權如天思溥八角爐韻, 易東書院謹次老先生精一齋韻, 次再從姪公叔熙稷韻, 送公州權秀士歸櫬, 淸心樓次板上韻, 觀海, 採鮑者, 輓崔進士光岳, 三近次申君百煥韻, 次金錫之百朋韻呈如天兄以釋僑寓之愁, 贈錫之惜移寓, 歎小婢亡출처 : 유교넷 -
360341
答鄭立齋士仰 41 / 기록자료>고도서 / 김한동1804년(순조 4) 강원도 歙谷縣 유배지에서 立齋 鄭宗魯(1738~1816)에게 대답한 편지이다. 공의 숙모가 세상을 떠났으니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는가? 나는 먼 유배지에서 위로의 편지도 보내지 못했으니 부끄럽다. 가을 서늘한 날씨에 상중에 있는 공은 잘 지내고 있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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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鄭士仰 41 / 기록자료>고도서 / 김한동1806년(순조 6) 유배지에서 풀려난 뒤 집에 머물면서 정종노에게 대답한 편지이다. 더운 여름철에 잘 지내고 있느냐? 나는 계속 병이 들어 누워 있다. 하지만 가을 서늘한 바람이 들어 병세에 차도가 있으면 한 번 찾아가 그 동안 못다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寢郞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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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鄭士仰 42 / 기록자료>고도서 / 김한동1806년(순조 6) 유배지에서 풀려난 뒤 집에 머물면서 정종노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추위가 심해지는데 잘 지내고 있느냐? 나는 고질병이 더 심해지고 또 독감에 걸려 괴롭기만 하다. 하루 아침에 갑자기 죽을 지도 모르겠다. 부득이 아들을 보내니 先父와 仲父의 묘지명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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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李穉春 42 / 기록자료>고도서 / 김한동1799년(정조 23)에 穉春 李㙖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여러 해 동안 만나지 못해 항상 그립다. 동지 추위에 잘 지내고 있느냐? 나는 질병이 항상 끊이지를 않는다. 이번 가을 사신 행차편을 통해 朱子書를 구입했으니 이 책을 보낸다. 영남의 여러 친구들에게도 널리 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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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李寢郞穉春 43 / 기록자료>고도서 / 김한동1806년(순조 6) 유배지에서 풀려난 뒤 보낸 편지이다. 공과 나와의 거리는 8백 여 리이다. 좋은 자리를 택해서 몸 조심하기를 바란다. 나는 질병이 더욱 심해져 다시 일어날 희망이 없다. 과연 다시 만날 기약이 있겠느냐는 등의 내용이다. 『순조실록』에 1806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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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李穉春 44 / 기록자료>고도서 / 김한동연대는 나와 있지 않지만 편지 내용상 강진현 고금도에 유배중인 치춘 이우에게 보내는 것으로 1806년(순조 6)으로 추측된다. 천리길 바다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느냐? 공의 아들이 옆에 있으니 그래도 다행한 일이다. 나는 나이가 들어 힘들지만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아서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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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李穉春 44 / 기록자료>고도서 / 김한동앞 편지와 마찬가지로 유배중인 치춘 이우에게 보내는 것으로 1806년(순조 6)으로 추측된다. 일반 평민의 신분으로 유배가게 됨은 참으로 영광스런 일이다. 바닷가의 좋은 경치를 많이 보기를 바란다. 나는 병이 더욱 심해져 회생할 기미가 없다. 형편이 이러하니 한 번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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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李承旨 44 / 기록자료>고도서 / 김한동承旨 李晩秀에게 대답한 편지이다. 1792년(정조 16) 윤4월 27일에 영남 지역에서 10,057명의 사람이 연명하여 상소를 올렸다. 영남 출신인 공으로 하여금 상소의 전말을 보고하라고 하자, 그간의 사정을 승지인 이만수에게 편지로 대답한 것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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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靑鏡書院士林 45 / 기록자료>고도서 / 김한동1788년(정조 12)에 靑城書院과 鏡光書院 두 곳의 유생에게 대답한 편지이다. 1728년(영조 4) 戊申亂(李麟佐亂) 이후 60년이 지났다. 당시 우리 영남 지역에서는 반란에 가담하지 않았다. 현재의 임금은 지혜로우시니 우리의 억울함을 풀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등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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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崔仁同 46 / 기록자료>고도서 / 김한동1798년(정조 22)에 仁同 수령 崔獻重에게 보낸 편지이다. 영남 지역 사림들의 기상이 예전과 같지 못하다. 논의도 하나로 잘 통일되지 않는다는 등의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