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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체: 에 대해 총641,751건의 자료가 검색되었습니다.
  • 361401

    松皐后孫 朴華壽, 朴齊勳, 朴勝文 등이 甲寅年 10월에 30戔을 납부했다는 의미인 듯하다. 단편적인 기록이기 때문에 자세한 사항을 알 수 없다.
    출처 : 유교넷
  • 361402

    단편적인 기록이다. 내용은 “돈 5緡을 삼가 드리는데 혹 쓸데없는 것은 아닐는지요...”이다. 다시 말해 무슨 일로 돈 다섯 꾸러미를 드린 것에 대하여 지극히 겸손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출처 : 유교넷
  • 361403

    庚午년 11월 11일에 債錢으로 買得한 陶山書院의 논에 대하여 陶山書院에서 帖紙가 없음에 처리에 관한 문서
    출처 : 유교넷
  • 361404

    債錢으로 買得한 陶山書院의 논에 대하여 陶山書院에서 帖紙가 없음에 관하여 처리한 문서이다.<br/> 帖紙 : 돈을 받은 표. 곧 영수증.
    출처 : 유교넷
  • 361405

    債錢으로 陶山書院의 논으로 대신 갚고 남은 돈을 따로 처리함에 관한 문서<br/> 標記 : 표가 되게 기록함. 또는 그런 기록.
    출처 : 유교넷
  • 361406

    백호 윤휴의 사당의 건립을 맞이하여 유림대회를 열자는 통고문이다. 김대림이 기초하여 도산서원에 보내는 글로 마산부의 관해정에서 열리는 대회에 참여를 바란다는 내용이다.
    출처 : 유교넷
  • 361407

    1865년(고종2년) 4월 京城의 吳在淳 등이 趙鍾奭과 許邁가 溪堂의 발문을 刪正하자고 주장하므로 두 사람에게 현혹되지 말고 그들을 계도해 달라고 도산서원에 보낸 통고문이다.<br/> 계당이 어디를 말하는지 어떤 서책의 어떤 내용의 발문을 말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출처 : 유교넷
  • 361408

    1902년 이중명이 투장건에 대해 규탄한 통문 / 기록자료>고문서 / 황대진
    1902년(고종 39) 4월 20일 李重明이 魯林書院의 賁翁의 위판을 파고 몰래 묘를 쓴 것을 규탄하는 통문이다. 東溟書堂의 黃大鎭 등이 도산서원에 보냈다. 賁翁은 존경받는 선현인데 후사가 없다. 李重明은 賁翁의 위패를 파고 蘇湖에 묘를 썼으며 나아가 선현의 묘소를
    출처 : 유교넷
  • 361409

    1861년(철종 12, 또는 1921년) 11월 25일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이끌고 싸웠던 배용길을 무함한 李圭文을 규탄한 통문이다. 星州 檜淵의 鄭樻錫 등이 보냈다.<br/> 배용길은 나중에 신원이 되고 李圭文은 향리에서 쫓겨났다. 그런데 그 후손이 李圭文의 유문을
    출처 : 유교넷
  • 361410

    柳村에서 도산 서원에 先集의 내용을 바로잡아 줄 것을 청하는 通文이다.<br/> 寒岡 정구의 후손들이 자리잡은 곳 중의 하나인 柳村에서 정구의 문집 내용을 가지고 시비를 따지고 있다. 년대가 기록되어 있지 않으므로 시기는 알 수 없다. 다만 문집의 9가지 조목의 문답
    출처 : 유교넷
  • 361411

    儒林의 맹주로서 是非의 분변을 책임지는 지위에 있는 陶山書院에서 公正한 持論으로 일을 밝고 분명하게 처리하지 못하고 오히려 사사로움에 치우쳐 枝村의 말만 듣고 道會 일자를 변경하고 鄭逑의 古蹟에서 나온 遺書稿草에 대해 眞僞를 제대로 분변하지 못한 채 앞뒤로 말을 바
    출처 : 유교넷
  • 361412

    1848년(헌종 14) 洒陽에서 도산서원에 보낸 통문으로서 정구의 문집 중 9가지 조목의 문답은 잘못 들어간 내용이므로 8월 7일 檜淵 서원에서 회의를 열 것이니 참석해 달라고 청한 통문이다.<br/> 한강문집은 1680년 허목이 처음 간행했으나 중간에 속집과 별집이
    출처 : 유교넷
  • 361413

    1797년(정조 21), 또는 1857년(철종 8) 1월 原州鄕校 都有司 朴受豊 등이 정구와 조린을 배향했던 苕溪書院을 중건하자고 陶山書院 등에 보낸 통문이다. 통문을 보면 정구는 예학에서, 조린은 역학에서 뛰어난 공헌을 했다고 평가했다. 두 사람이 어떤 연유에서 苕
    출처 : 유교넷
  • 361414

    馬巖鄭氏家의 胄孫 燦東의 妻 金氏가 일찍 남편을 여의고 노모를 봉양하고 여섯 살 난 어린 아이를 키우던 중 兇頑에게 협박당하고 능욕을 당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을 애통해 하고 기리면서 그 節義를 襃揚할 것을 추천하고 아울러 죄인을 속히 처결하여 冤魂을 달래 주기를
    출처 : 유교넷
  • 361415

    판서(判書) 배공(裵公)과 군위현리(軍威縣吏) 이규문(李奎文)과는 친구지간이었는데 이규문(李奎文)이 배공(裵公)을 모함하였다. 서애선생(西厓先生)과 완평선생(完平先生)이 이 일을 안타깝게 여겼고 사림(士林)에서도 이를 안타깝게 여겼다. 그리하여 그 기록을 불태우고 그
    출처 : 유교넷
  • 361416

    1771년(영조 47), 또는 1831년(순조 31) 3월 29일 陶山書院의 上有司 李宗泰 등이 南塘 서원의 변고를 바로잡기 위해 英陽의 英山書院 등에 보낸 통문이다. 문서의 여러 곳이 손상되어서 내용을 파악하기 어렵다. 다만 姜 모가 공론을 무시하고 몰래 姜公을 追
    출처 : 유교넷
  • 361417

    1891년(고종 28) 9월 8일 金永觀 등이 척사를 주장하는 상소에 함께 참여할 것을 청하면서 도산서원에 보낸 통문이다.<br/> 군데군데 문서가 훼손되어 정확한 내용이 파악되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내용을 정리하면 四道의 疏擧가 있었는데 그 과정 중에 찬반 등의 논
    출처 : 유교넷
  • 361418

    1853년(철종 4년) 동강 서원의 李鼎修 등이 동강 서원의 대들보에 적힌 시를 훼손한 사건에 대해 처리해 줄 것을 청하면서 溪上의 李氏 문중에 보낸 통문이다.<br/> 동강 서원의 대들보에 頌이 있는데 그것을 누군가가 훼손한 일이 일어났다. 대들보의 頌詩는 퇴계가
    출처 : 유교넷
  • 361419

    유학 강재선 등이 보낸 통문이다. 통문의 수신처는 확인할 수 없다. 또한 문서의 상단 부분의 缺損이 심하다. 남겨진 부분만을 통해 내용을 추정해보면 다음과 같다. 道會에서 사용된 경비 혹은 소용 물품들을 각각 분배해서 갹출하였는데, 본 통문을 받는 곳도 속히 이를 지
    출처 : 유교넷
  • 361420

    정선생의 편년정보에 관한 안타까움을 쓴 퉁문 / 기록자료>고문서 / 우산수설소
    우복 정선생(愚伏鄭先生)의 편년정보(編年正譜)에 관한 내용으로, 편년정보(編年正譜)가 지어진지 오늘까지 300년이나 되었지만 널리 펴지지 않음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다.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이 선생의 년보를 지었는데 창석(蒼石) 이준(李埈)의 인정을 받아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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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1421

    시호가 내여지는 일이 거행됨을 알린 통문 / 기록자료>고문서 / 이휘부 김덕균
    앞에서는 정자(程子)의 말을 빌어 “옛날의 성군(聖君)들을 천하에 큰다스림을 이른 것을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권하고 징계하는 도(道)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중요한 것은 시호(諡號)를 의논하여 정하는 방법보다 앞서는 것이 없으니 이것은 바로 법도가 중요하고
    출처 : 유교넷
  • 361422

    옥천조선생(玉川趙先生)의 신원(伸寃)에 관한 통문(通文)으로, 이때 천도(天道)가 다시 밝음을 회복하여 무신년(戊申年)에서 시작하여 다시 60년이 되는 해에 비로소 모여 의논하여 한 가지 목소리를 발을 싸매고 궁궐로 가서 일을 알릴 것을 계획하였다. 이러한 일을 본진
    출처 : 유교넷
  • 361423

    1877년(고종 14) 2월 9일 安東鄕校道會所의 李寅魯 등이 禮安 향교 등에 보내는 통문이다.<br/> 병호시비의 과정에서 일어난 일인 듯 하다. 遷動이라는 구절로 볼 때 호계서원에서 병산서원으로 유성룡의 위패를 옮긴 일이 아닐까 생각된다. 병산서원과 호계서원의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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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1424

    권선생의 욕예를 거행하니 오기를 알린 통문 / 기록자료>고문서 / 노봉서원
    죽림 권선생(竹林權先生)은 곧은 충성과 굳센 절개로 이미 열성조의 포장(襃獎)을 입었다. 그러나 운곡(雲谷)에서 철원(掇院)된 뒤로 사모하는 마음을 품고서는 가슴속에 담긴 것을 풀 곳이 없었다. 그래서 3월 17일 욕예(縟禮)를 비로서 거행하니 오기를 알리는 통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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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1425

    경신년 정용모등이 도산서원으로 보낸 통문 / 기록자료>고문서 / 영양향교
    庚申年에 鄭龍謨 등이 있는 英陽鄕校에서 陶山書院에 보낸 통문이다. 皮封은 있으나 정작 내용이 있는 부분은 없고, 단지 통문을 보낸 주체들만 열서된 부분이 남아 있다. 아마도 본문 내용 부분은 서원 유사들이 읽고 다시 제자리에 두지 않았기 때문에 전해지지 않는 듯 하다
    출처 : 유교넷
  • 361426

    예안교원(禮安校院)에서 이번 봄 대향(大享)을 드린 뒤에 모임을 가져 강예(講禮)함을 알리는 통문(通文)으로, 유림(儒林)의 여러 사람들에게 복장, 언제부터 언제까지, 존성흥학회의(尊聖興學會議)하는 날짜, 향음주례(鄕飮酒禮)하는 날짜, 또 공부하는 경서(經書))의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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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1427

    1913년 蘇湖의 李中喆 등이 도산서원에 陶山及門諸子錄의 발간을 위해 함께 攷訂하기를 청하는 통문이다.<br/> 陶山及門諸子錄은 18세기 중엽에 처음으로 발간되었다. 통문에서도 언급했듯이 各家에서 각각 별개로 編輯한 것을 모으고 증보해서 1917년 다시 발간하게 되었
    출처 : 유교넷
  • 361428

    본군(本郡)의 기성면(杞城面)의 해주오씨(海州吳氏) 원근(原根)은 바로 문형공(文衡公) 승(陞)의 자손으로 그 부인은 바로 충주(忠州) 박영하(朴永夏)의 딸로 둔옹(遯翁)의 후손이다. 그는 나이가 열여섯에 오씨(吳氏) 집안으로 시집을 갔는데 시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시고
    출처 : 유교넷
  • 361429

    도산서원(陶山書院)을 잘 이끌어 가기 위해서 어려가지 조목으로 하나씩 나열하였다. 예를 들면 원체(院體)를 존중할 일, 유사(有司)를 적임자(適任者)로 할 일, 재산을 정리(整理)할 일, 현사회(現社會)에 응접할 일, 기타(其他)의 형식으로 서원(書院)을 꾸려 갈 상
    출처 : 유교넷
  • 361430

    1922년 8월 25일 도산면장이 새 印章을 사용할 때에는 다음의 동의서를 첨부하라고 도산 서원에 알린 통문이다.<br/> 도산 서원에서 인장을 새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 인장을 함부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인장을 사용할 때는 도산 서원의 上有司와 齋有司들의 도장이 찍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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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1431

    이 통문은 충남 예산에 있는 향천산방의 여러 유자들이 도산서원으로 보내는 것이다. 계당집 가운데 들어있는 이상선의 제병발은 자기 스승을 농락하고 여러 가지 거짓을 사실처럼 유포시키는 글이므로 이단으로 여겨 배척해야한다는 주장을 나타내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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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1432

    이상선의 책이 발행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통문이다. 비슷한 나이의 유자들의 강요는 받아들이지 않지만, 여러 선배 유자들이 힘을 합하여 그에게 발행해서는 안된다고 강요한다면 그도 그 주장을 따를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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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1433

    1924년 또는 1864년(고종 원년) 晋州의 柳震必 등이 慶南 晋州郡 金谷面 竹谷里에 南岳祠를 건립한다는 사실을 도산 서원에 알리는 通文이다.<br/> 개국의 일등 공신 김유신, 이 도를 천명한 설총, 正學을 독실하게 신뢰한 최치원을 향사하기 위해 南岳祠를 건립하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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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1434

    이상선의 책이 발행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통문이다. 비슷한 나이의 유자들의 강요는 받아들이지 않지만, 여러 선배 유자들이 힘을 합하여 그에게 발행해서는 안된다고 강요한다면 그도 그 주장을 따를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출처 : 유교넷
  • 361435

    1635년(인조 13년) 윤8월 8일 鄭世益 등이 介庵의 위패를 擅降한 일에 대해 규탄하고 介庵의 위패를 灆溪에 權安하겠다고 알리는 통문이다. 문서의 앞부분이 손상되어 내용이 잘 파악되지 않는데 함양 사람들이 정구의 정론을 따르지 않고 정인홍의 말을 따라 介庵의 位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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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1436

    통문형태를 지닌 문서 / 기록자료>고문서
    워낙 지질이 불량하여 남아 있는 글자가 너무 적기 때문에 내용을 파악하기 힘들다.
    출처 : 유교넷
  • 361437

    南塘書院에서 陶山書院에 보내는 통문의 피봉이다. 피봉만 전하기 때문에 그 내용 등은 전혀 파악할 수 없다. 남당서원은 제천에 있는 서원으로 퇴계 선생의 문인이었던 은암 강천민이 세운 서원이다.<br/> 피봉의 접합부에는 직사각형의 도장을 찍었는데, 관청이 아닌 기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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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1438

    도산서원으로 보내는 통문의 피봉 / 기록자료>고문서 / 의흥 재
    통문의 피봉이다. 義興의 향교나 義興에 있는 서원에서 아무개가 陶山書院에서 보낸 통문에 대하여 답신하는 내용의 문서 피봉이다. 사실상 내용을 확인 할 수 있어야 알 수 있으나, 아마도 기관과 기관의 통문보다는 보통의 간찰이었을 가능성도 배제 할 수는 없다.
    출처 : 유교넷
  • 361439

    湖翁이 유성룡의 행장을 초록하면서 글자를 임의로 바꾸어 폄하한 것을 성토하기 위해 발급한 통문이다.유성룡을 폄하한 초록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 않아서 무엇을 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유성룡을 폄하한 데 대해 분노하고 있는 점에서 병호시비의 한 부분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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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1440

    1901년(광무 5) 5월 20일에 榮川鄕席 會中 명의로 曺司 金櫶 등 67명이 도산서원에 보낸 통문이다. 寒泉書院의 埋壇 보존에 도산서원의 협조를 당부하였다.<br/> 통문에 따르면, 한천서원은 果齋 張선생, 竹牖 吳선생, 六友堂 朴선생 등이 배향되었던 곳이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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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1441

    戊午년(1918? 1978?) 2월 27일에 魯林書堂 명의로 都有司 李德珪 등이 도산서원에 보낸 통문이다. 龜窩 金선생에 대한 추모사업에 협조를 당부하였다.<br/> 통문에 따르면, 구와선생은 기호지역에서 道를 전수한 학자로 학문이나 관직생활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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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1442

    1901년(辛丑, 광무 5) 5월 2일에 三溪 會中 명의로 幼學 金祖永 등 19명이 도산서원에 보낸 통문이다. 삼계 회중에서 진행 중인 간행사업에 동참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도산서원에서 보낸 통문에 회답한 형식이다.<br/> 통문에 따르면, 이미 삼계에서는 도산서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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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1443

    甲子년(서기년 불명) 6월 1일에 迂溪書院 명의로 都有司 成民敎 등 19명이 도산서원에 보낸 통문이다. 이황 등이 노닐며 시를 읊었던 장소인 新巖에 산소가 조성되고 있는 것을 염려하여 도산서원에 협조를 당부하였다.<br/> 新巖은 원래 退陶와 艮齋가 노닐며 읊조리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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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1444

    1906년(丙午, 광무 10) 後 4월 24일에 사천 大觀臺 會所 명의로 崔璣煥 등 15명이 도산서원에 보낸 통문이다. 眉叟의 문집인 《記言》의 重刊과 관련하여 도산서원에 협조를 당부하였다.<br/> 통문에 따르면, 의령의 二宜亭에서 《기언》을 重刊하는데 있어 舊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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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1445

    1900년(庚子, 광무 4) 11월 23일에 幼學 李在白 등 47명이 도산서원에 보낸 통문이다. 文元公의 위패가 함부로 다루어지고 있는 것에 대해 도산서원에 협조를 당부하였다.<br/> 통문에 따르면, 慈仁의 觀瀾書院에 배향되어 있던 문원공의 위패는 고종 초년의 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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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1446

    1905년(乙巳, 광무 9) 6월 23일에 方外 영남유생 會中 명의로 李昇九 등 15명이 도산서원에 보낸 통문이다. 丹溪 河선생의 본관을 둘러싼 논란에 대해 도산서원의 적극적인 협조를 당부하였다.<br/> 통문에 의하면, 당시 단계의 본관이 진주라는 설이 폭넓게 퍼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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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1447

    辛丑년(서기년 불명. 1901? 1961?) 4월 2일에 南極周가 도산서원에 보낸 통문이다. 賁趾의 후손이 비지의 선영 보호에 도산서원의 적극 참여해 주기를 당부하였다.<br/> 통문에 따르면, 魯林書院은 분지선생을 배향했던 곳인데 1868년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된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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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1448

    1901년(광무 5) 5월 18일에 충주 苛江壇所 會中 명의로 公事員 李夢九 등 72명이 도산서원에 보낸 통문이다. 衛正斥邪 정신에 따라 李震相의 문집을 배척해줄 것을 당부하였다.<br/> 통문에 따르면, 유림은 衛正斥邪와 闢異端을 따르는 집단인데, 최근 이진상의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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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1449

    1869년(己巳, 고종 6) 4월 12일에 龍宮 會中 명의로 幼學 趙斗永 등 22명이 도산서원에 보낸 통문이다. 서원의 復立에 도산서원의 협조를 당부하였다.<br/> 통문에 따르면, 용궁에서는 1868년의 서원훼철령 이후 서원의 복립을 위해 상경하여 국왕께 호소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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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1450

    壬辰년(서기년 불명) 2월 3일에 李基祥 등 12명이 郁陽書院에 보낸 통문이다. 상소운동에 욱양서원 등 영남유림의 참여를 요청하였다.<br/> 晩年에 塘院之變이 있어 4도의 유생들이 모두 일어나 이구동성으로 상소를 지어 국왕께 호소하게 되었다. 영남 역시 사림의 본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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