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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 1 / 기록자료>고도서 / 권구金龍錫이 지은 만사이다. 이 세상에 이러한 賢人을 어찌 다시 얻을 것인가, 하면서 애도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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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 2 / 기록자료>고도서 / 권구權運復이 지은 만사이다. 謙德을 갖춘 公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며 애도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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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 2 / 기록자료>고도서 / 권구金瑞翰이 지은 만사이다. 公의 죽음으로 인해 儒林은 才函을 잃었다며 슬퍼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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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 2 / 기록자료>고도서 / 권구安命夏가 지은 만사이다. 거문고 퉁기며 슬픔을 삼킨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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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 3 / 기록자료>고도서 / 권구柳晉鉉이 지은 만사이다. 屛谷 어른 가난해도 道는 결코 가난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애도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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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 3 / 기록자료>고도서 / 권구金成胤이 지은 만사이다. 높고 깨끗한 公의 절개를 찬양하면서 슬픔을 적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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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 3 / 기록자료>고도서 / 권구金瑞一이 지은 만사이다. 公의 義理와 學文을 찬양하면서 애도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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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 4 / 기록자료>고도서 / 권구李象辰이 지은 만사이다. 公의 업적을 晦齋 李彦迪과 退溪 李滉에 비유하면서 애도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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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 4 / 기록자료>고도서 / 권구柳宗春이 지은 만사이다. 屛谷의 古風이 처량하여 낙동강 울음소리가 들려온다면서 슬퍼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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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 5 / 기록자료>고도서 / 권구柳師鉉이 지은 만사이다. 이제 우리는 누구를 스승으로 삼겠느냐며 슬퍼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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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 5 / 기록자료>고도서 / 권구柳霔가 지은 만사이다. 公이 뜻을 품고 세상을 버린 것은 한심스런 世道 때문이라고 한탄하면서 애도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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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 6 / 기록자료>고도서 / 권구權聖揆가 지은 만사이다. 선생께서 이제 가시니 우리 老父은 다시 누구와 벗을 할꼬 라면서 애도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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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文 7 / 기록자료>고도서 / 권구權德秀가 지은 제문이다. 君子께서는 明月처럼 티가 없고 평화로운 마음을 가졌으며 공부에 힘썼습니다. 이 늙은 몸은 墓穴에 나아가 哭送하지 못하고 삼가 兒子 聖揆를 보내어 대신 永訣을 告한다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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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 7 / 기록자료>고도서 / 권구李山斗가 지은 제문이다. 公께서는 나를 깨우쳐 주시고 인도해 주셨으니 나의 스승이시다. 늙음이 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이에 公께서는 위중한 병환이 되었으며 나 또한 病中이었으나 단숨에 일어나 달려갔을 때 公은 이미 易簀(운명)하셨다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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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 8 / 기록자료>고도서 / 권구李景翼이 지은 제문이다. 公은 세속과 인연을 끊고 閉門하여 스스로 몸을 감추어 處士의 銘旌으로 가십니다. 한잔 술로 永訣을 告함에 슬픔이 가슴에 사무친다면서 슬퍼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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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 9 / 기록자료>고도서 / 권구李猷遠이 지은 제문이다. 公께서 百家의 書를 깊이 헤아려 千古의 역사에 밝았습니다. 집안에서는 善으로써 지내셨으며 친척과는 화목하셨습니다. 마땅히 세상에 나가 크게 이바지할 것이나 때를 만나지 못했으니 어찌 애석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와서 한잔 술을 드리니 저의 마음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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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 10 / 기록자료>고도서 / 권구李拱辰이 지은 제문이다. 尊靈은 玉처럼 溫雅했고 얼음처럼 깨끗했으며 소나무처럼 굳건했고 계수나무처럼 매웠으며 周易의 白茅였고 淸朝의 비파였습니다. 醴酒 한잔 드리지만 가슴에는 슬픔이 사무친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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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 11 / 기록자료>고도서 / 권구柳聖曾이 지은 제문이다. 公이 이렇게 가시니 저는 장차 누구에게 의지하겠습니까? 德은 考覽할 데가 없고 疑心은 詳考할 곳이 없습니다. 한잔 술로 告訣하옵는데 公께서는 아십니까 모르십니까 하면서 애통해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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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 12 / 기록자료>고도서 / 권구李象靖이 지은 제문이다. 선생께서는 읽지 않으신 책이 없고 주역과 중용에 힘써 ‘時’字와 ‘中’字를 解得하였습니다. 그리하여 起居에 있어서도 中에 처하면서 어느 것에도 얽매이는 법이 없었습니다. 불행히도 선생께서 下世하셨습니다. 이 애통함을 어찌 글로써 다하겠느냐며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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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 12 / 기록자료>고도서 / 권구柳夢瑞가 지은 제문이다. 병과 죽음이 겹쳐 初喪을 당한 탓에 선생의 殮襲에도 못 왔으니 생전에 입은 은혜를 저버렸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찾아와서 一哭하면서 千秋의 永訣을 아뢴다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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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 14 / 기록자료>고도서 / 권구柳泳이 지은 제문이다. 오호! 선생이 돌아가심에 우리의 道는 잃어 버렸고 우리 영남은 텅 비게 되었다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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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 14 / 기록자료>고도서 / 권구李象辰이 지은 제문이다. 어버이를 여의고 봉양하지 못하는 슬픔을 가누지 못하여 선생을 뵈면 마치 태산과도 같았는데 어찌하여 小子는 복이 없어 永隔을 맞게 되었다고 하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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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 16 / 기록자료>고도서 / 권구金世錂이 지은 제문이다. 선생의 博文約禮하심과 溫和, 良順하심이 이제 끝났으니 이제 누가 이를 傳하며 누가 이어 가겠느냐며 슬퍼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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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 17 / 기록자료>고도서 / 권구柳澐이 지은 제문이다. 小子는 불행히도 아버님을 여의고 福이 없었는데 또 선생께서 돌아가셨으니 외로운 餘生 장차 누구에게 의지하겠느냐며 애통해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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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 18 / 기록자료>고도서 / 권구金濟慶이 지은 제문이다. 선생께서는 天人을 꿰뚫는 학문을 쌓았고 善한 뜻을 겸비하셨는데 이를 베풀지 못하셨으니 백성의 복 없음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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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 19 / 기록자료>고도서 / 권구金始亨이 지은 제문이다. 선생은 兵器를 잡고 위협해도 단호히 應從하지 않으셨고 집안에서는 화목하셨고 信義가 奴僕에까지 미쳤으며 이웃을 사랑하고 鄕黨 사람들은 구슬처럼 귀하게 여겼고 문밖에 나오시면 祥瑞로운 鳳凰처럼 바라보았습니다. 선생이 떠나심에 가슴이 막히니 千古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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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 21 / 기록자료>고도서 / 권구李宗洙가 지은 제문이다. 선생께서는 百世의 스승으로 道로써 殉身하셨으니 이제 저의 앞길을 누가 열어줄 것인지 애통하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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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 21 / 기록자료>고도서 / 권구再從姪 權緻紓가 지은 제문이다. 선생의 높은 명성이 禍根이 되어 賊(李麟佐의 무리)이 위협하면서 동조를 얻으려 했으나 오히려 죽기로 작정하고 목숨을 내어 주셨으며, 의금부에서 바른 말씀을 올리고 聖王의 현명한 판단으로 고향에 돌아오셨으나 세상일을 뜬구름처럼 여기며 유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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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 23 / 기록자료>고도서 / 권구安敏修가 지은 제문이다. 선생이 떠나심으로 인해 학자는 就正할 곳이 사라졌고 小人은 畏忌할 곳이 없어졌으니 사람마다 서러워 합니다. 함께 학습하던 齋舍는 遺墟로 남았는데 저녁연기만 허공에 가득하고 丸窩草堂에는 봄바람이 적막하다면서 슬퍼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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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 25 / 기록자료>고도서 / 권구柳宗春이 지은 제문이다. 좋은 玉이 숨겨져 있듯이 온유함과 위엄이 갖추어져 얼굴에 넘쳐흘렀습니다. 집안에서는 和樂하였고 朋友에게는 信義로 대했으니 鄕黨과 모든 이들이 師宗으로 모셨습니다. 公 私의 생각을 돌이켜보니 품은 恨이 그지없다며 슬퍼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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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 27 / 기록자료>고도서 / 권구金彦燮이 지은 제문이다. 선생께서 세상에 나가셨다면 반드시 世道를 교화시켰을 것이지만 적막한 물가에 버려져서 끝내 蓬蓽 속에서 늙으셨으니 훗날 선생의 행적을 詳考하고 선생의 글을 읽는 이는 반드시 옷깃을 여미고 공경하는 마음을 가지면서 서러움에 겨워 눈물을 흘릴 것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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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 28 / 기록자료>고도서 / 권구金翼溟이 지은 제문이다. 小子의 오늘 哭이 公的인가 私的인가? 公的이라면 國人의 哭일 것이고 私的이라면 小子의 哭입니다. 尊靈께서는 小子의 哭을 미루어 살필 것이라며 슬픔을 적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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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 28 / 기록자료>고도서 / 권구權處勉이 지은 제문이다. 선생으로부터 은혜 입음이 先親보다 더 깊은데 志業을 이루지 못하고 갑자기 일을 당하셨으니 小子 마음을 가누어도 피눈물이 흐르는 것은 단지 애통함만은 아닐 것이라고 슬퍼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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請爵上言 29 / 기록자료>고도서 / 권구李彙濬이 公의 여러 업적을 기려 爵秩을 내려주고 祠堂에 영구토록 모시어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임금에게 요청하는 글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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吏曹回啓(哲朝己未六月吏判南秉轍) 34 / 기록자료>고도서 / 권구임금이 公의 贈職을 요청한 글을 읽고 下問을 내린 것에 대하여 吏曹에서 이를 審議하여 다시 임금에게 올린 글이다. 權榘의 학문과 의리는 여러 선비가 부르짖는 것과 같으니 贈職을 베품이 마땅하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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焚黃告由文(李彙寧) 35 / 기록자료>고도서 / 권구公이 吏曹判書로 증직되고 불천위로 모시게 되었다는 사실을 告하는 고유문이다. 公의 업적을 헤아려 임금님의 은혜로 높은 벼슬이 내려졌습니다. 이에 공손한 마음으로 黃誥를 삼가 불사르는 바 圖書 가득히 쌓인 고택의 靈은 삼가 歆格하시기 바란다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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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卿敎旨註脚(今上辛卯六月) 36 / 기록자료>고도서 / 권구吏曹判書 증직 敎旨의 註脚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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焚黃告由文(柳道獻) 36 / 기록자료>고도서 / 권구백년토록 埋祧하지 않고 제사를 모시게 되었고 聖上께서 벼슬을 더 높여 주시어 天官으로 恩典을 베푸시니 유림의 生光이 더하옵고 九泉에까지 은혜가 넘쳐납니다. 이에 많은 유생들이 달려와 의식을 陳設하여 맑은 술과 술잔을 올린다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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沿革圖跋 37 / 기록자료>고도서 / 권구外孫 柳一春이 지은 글로서, 단군에서 비롯되는 나라의 역사와 갈래를 도표로 설명한 公의 沿革圖 跋文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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魯東書堂上樑文 38 / 기록자료>고도서 / 권구魯東書堂(屛谷 權榘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건물) 상량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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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백당실기 / 기록자료>고도서 / 김계행寶白堂 金係行의 문집. 4권 2책. 조선 초기의 문신 金係行이 남긴 글과 그의 행적에 관한 내용을 기록한 책이다. 초간은 1732년(영조 8)에 이루어 졌으며 1901년(광무 5)에 중간되었다. 문집 첫머리에는 조선후기의 문신인 趙德鄰(玉川, 1658~1737)과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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題驄馬契軸(2首) / 기록자료>고도서 / 김계행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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驄馬契前帖 1 / 기록자료>고도서 / 김계행총마계는 사헌부에 같이 근무하는 관리들이 친목을 목적으로 개최한 계회를 일컫는 이름인데, 김계행이 사헌부에 근무하던 시기에 두 차례의 계회가 열렸으며 이것은 그 중의 첫 번째 계회에 참석한 24인의 인적사항을 적은 座目이다. 좌목의 형식은 위에서 아래로 계회 참가자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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驄馬契後帖 5 / 기록자료>고도서 / 김계행김계행을 포함해 계회에 참석한 23인의 인적사항을 적은 좌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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辭都承旨疏 8 / 기록자료>고도서 / 김계행65세 되던 해(1495년)에 燕山君이 都承旨를 제수하자 사양하면서 올린 疏이다. 『실기』 전체에서 앞서 두 편의 시를 제외하면 유일한 김계행의 글이다. 학문과 재주가 보잘 것 없는데다 연로하고 병까지 걸렸으며 식견이 어둡고 일에 서툴다며 자신을 낮추고, 그럼에도 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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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厓先生永慕錄 1 / 기록자료>고도서 / 김계행김계행의 外玄孫인 서애 유성룡이 김계행을 포함한 자신의 집안과 외가의 사적을 기리기 위해 적은 글이다. 김계행에 관한 내용은 앞의 연보에 언급된 사실과 대체로 비슷하지만 특히 유성룡 자신의 증조모인 서씨부인에 관한 내용을 상세하게 묘사한 것이 특징이다. 먼저 剛直한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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遺事 3 / 기록자료>고도서 / 김계행李簠가 쓴 유사이다. 서애 유성룡이 『永慕錄』에서 그의 外先祖의 행적에 대해 자못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어 그것으로 인해 김계행의 행적이 천세토록 영원히 전해질 것이라고 하면서도, 다만 『영모록』은 유씨의 家譜에 실린 글로서 오로지 김계행의 행적만을 기록한 것은 아니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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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狀 8 / 기록자료>고도서 / 김계행李栽(密庵, 1657∼1730)가 지은 행장으로 연보의 내용과 대동소이하다. 앞서의 연보에서 언급하지 않은 것이나 좀 더 상세하게 언급된 사실들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公은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과묵하고 어지러운 장난을 좋아하지 않았다. 5세에 한번 들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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墓碣銘(幷序) 1 / 기록자료>고도서 / 김계행外孫 李光廷이 쓴 묘갈명이다. 寶白堂 김계행이 돌아가신 후 학가산 아래 稷谷에 묻혔는데 비석만 있고 비문은 없었다. 그렇게 215년이 지난 지금 공의 8세손인 至恒과 9세손인 爾鎬가 이광정을 찾아와 “처음 선조께서 임종시 남기신 말씀이 검소하게 장례를 치르고 碑銘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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奉安文 5 / 기록자료>고도서 / 김계행金世欽이 黙溪書院 淸德祀에 김계행의 위패를 봉안하면서 지은 글로서 김계행의 학행을 추모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