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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체: 에 대해 총641,751건의 자료가 검색되었습니다.
  • 364101

    名堂室小記 19 / 기록자료>고도서 / 유치구
    저자가 자신이 거처하는 堂과 室의 이름을 각각 膠窩와 救渾堂으로 짓고, 그에 대해 쓴 글이다. 자신의 志氣가 혼탁해 물욕에 얽매이고 있음을 반성하며 선인들의 가르침에 따라 居敬에 힘쓸 것을 다짐하고 있다.
    출처 : 유교넷
  • 364102

    南牕記 19 / 기록자료>고도서 / 유치구
    저자의 친우인 서원응이 자신의 별장에 집을 새로 짓고 남창이라 이름하였다. 그리고 저자에게 기문을 부탁하여 쓴 것이다. 저자는, ‘서원응이 이름붙인 남창이 도연명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 실은 창문이 남쪽에 있기 때문에 붙인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거처하
    출처 : 유교넷
  • 364103

    龜巖精舍記 20 / 기록자료>고도서 / 유치구
    저자의 죽마고우이자 유낙문과 권이복의 제자로 동문수학했던 李魯則이 고향인 구암으로 돌아가 구암정사에 은거하면서 기문을 부탁하여 쓴 글이다. 저자는 구암의 龜가 거북임에 착안하여, 하도낙서의 고사를 인용하여 세상에 큰 모범을 보일 수 있도록 학문에 정진할 것을 당부하고
    출처 : 유교넷
  • 364104

    梨田坪倉司記 21 / 기록자료>고도서 / 유치구
    이전뜰은 청송부에서 가장 넓고 풍요로우며 인가도 즐비한 곳이다. 그런데 오랫동안 역이 있었는데 창사가 없다가, 순조 연간에 村人인 林尙迪, 林天澤과 驛吏인 趙世培가 호조에 글을 올려 창사를 만들었다. 이후 창고의 곡식을 잘 활용하여 이전뜰 사람들이 큰 혜택을 보았다.
    출처 : 유교넷
  • 364105

    鄕校重修記 22 / 기록자료>고도서 / 유치구
    청송부의 향교는 1609년 당시 부사이던 李文徵이 이건하였다. 그런데 그 이후 퇴락하여, 청송의 선비들이 원래의 자리로 옮기고 싶어하였다. 그러다가 이번에 부사인 兪致弘이 비로소 비용을 내어 향교를 원래의 자리에 중수하였다. 이를 기념하여 쓴 글이다. 향교 중수를 계
    출처 : 유교넷
  • 364106

    敬書先叔父所書聾啞詩後 23 / 기록자료>고도서 / 유치구
    저자의 돌아가신 숙부가 쓴 聾啞詩를 우연한 기회에 얻어서 읽고 그 소감을 쓴 글이다. 세상에 자기가 잘났다고 자처하면 세상 사람들의 미움을 살 것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벙어리, 귀머거리를 자처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쓴 숙부의 시는, 숙부의 처세하는 지혜를 잘
    출처 : 유교넷
  • 364107

    書三賢行錄後 24 / 기록자료>고도서 / 유치구
    徐景魯가 『三賢行錄』을 짓고 저자에게 발문을 부탁하여 쓴 것이다. 저자는 책에 나오는 세 사람의 효성은 이미 『三綱錄』에 실릴 정도이기 때문에 별도의 말이 필요치 않을 것이라고 하고 있다.
    출처 : 유교넷
  • 364108

    水月趙公逸稿後識 24 / 기록자료>고도서 / 유치구
    崇禎處士 水月 趙儉이 돌아간 지 185년 되던 해에 후손인 趙居厚 등이 유허에 비를 세우고, 이어 남은 글과 비에 새긴 행장, 묘갈 등을 모아 문집을 간행하였다. 그리고 저자에게 발문을 부탁하여 쓴 글이다. 저자는 ‘수월공은 그 행동만으로도 이미 세상에 큰 교훈이 되
    출처 : 유교넷
  • 364109

    書濟州牧使松窩李公墓表後 25 / 기록자료>고도서 / 유치구
    濟州牧使를 지낸 松窩 李公의 事蹟은 이미 藍溪가 사실에 즉해서 매우 요령있게 썼다. 그런데도 후손인 李元協이 글을 부탁하자 쓴 글이다. 이에 저자는, ‘이미 사실대로 쓴 글이 있는데, 괜히 수식을 더하는 것은 안하느니만 못한 것이다. 그러나 차마 거절하지 못해 주자가
    출처 : 유교넷
  • 364110

    書退庵集後 26 / 기록자료>고도서 / 유치구
    退庵 權重道의 문집인 『退庵集』의 발문이다. 저자는 퇴암이 스승인 錦陽 李玄逸의 학문을 그대로 이어받아 학문이 뛰어나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뛰어난 학문을 후세에 전하지 않을 수 없어서 문집을 간행한다고 하였다.
    출처 : 유교넷
  • 364111

    書雷皐孫公禮書類編後 26 / 기록자료>고도서 / 유치구
    雷皐 孫汝濟가 쓴 『禮書類編』의 발문이다. 孫汝濟의 종증손인 학와공과 족현손인 설파공이 원고를 교감하여 책으로 간행한 후 저자에게 부탁하여 쓴 글이다. 저자는 『주자가례』에서 상제례가 미흡하여 늘 아쉬움이 있었는데, 이 책이 나옴으로써 그러한 아쉬움이 사라졌다고 평가
    출처 : 유교넷
  • 364112

    敬書退陶先生書抄後 27 / 기록자료>고도서 / 유치구
    저자의 선친과 숙부가 남긴 「退陶先生書抄」가 저자의 친우인 徐善應의 집에 있었다. 이를 책으로 간행하고 저자가 발문을 쓴 것이다. 저자는 자기 부친 등이 남긴 글이기 때문에 이를 책으로 간행한 것이 더욱 반갑고, 양가의 우의가 더욱 깊어질 것이라고 하였다. 아울러 퇴
    출처 : 유교넷
  • 364113

    書黃孝子事蹟後 28 / 기록자료>고도서 / 유치구
    「黃孝子事蹟」에 대한 발문이다. 청송부에 살던 효자 黃泰澄은 어버이에 대한 효성이 지극해, 여름에 부엌에서 송이가 자라고 마른 나무에 기도를 하면 나무가 살아나는 등의 기적이 있었다고 하였다. 저자는 이 이야기를 읽고 효행이 어찌 소학을 읽은 자만이 가능하겠느냐면서,
    출처 : 유교넷
  • 364114

    謹書丙戌雙蓮詩帖後 29 / 기록자료>고도서 / 유치구
    저자 집안이 영남으로 이거한 후 진사시에 입격한 이는 7대조 이하에 모두 31명이고, 그 중 동시에 2명의 급제자를 배출했던 것은 모두 네 번이었다. 이번에 또 저자와 저자의 족숙이 같이 진사시에 입격하였다. 종손인 柳泰永이 이를 기념하기 위해 「丙戌雙蓮詩帖」을 꺼내
    출처 : 유교넷
  • 364115

    書族弟道峻字辭後 29 / 기록자료>고도서 / 유치구
    저자의 族弟이자, 大埜 柳建休의 從孫인 柳致極의 冠禮日에 字를 지어주면서 쓴 글이다. 유건휴는 道峻으로 자를 지어주었는데, 『중용』의 ‘峻極之義’의 뜻을 취한 것이었다. 그런데 유치극은 준극이 성인의 일이기 때문에 자신은 감히 그 이름을 사용하지 못하겠다고 하면서,
    출처 : 유교넷
  • 364116

    申上舍應瑞(弘陽)誄辭 1 / 기록자료>고도서 / 유치구
    申弘陽의 誄辭이다. 신홍양은 그 伯兄인 申弘遠과 함께 저자와 절친한 사이였다. 형인 신홍원은 총명하고 절도가 있었다면, 신홍양은 온아하면서 고집스럽지 않은 성격이었다고 평하고 있다. 저자는 신홍양이 진사시에 입격하던 봄에 그와 더불어 즐기던 일, 바로 그해 8월에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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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117

    申宗武(大重)誄辭 2 / 기록자료>고도서 / 유치구
    申大重의 誄辭이다. 신대중은 동해 바닷가에서 태어나 柳範休에게 수학하였다. 그는 三近處士를 자처하면서, 삼근재라는 서실을 짓고 독서로 소일하였다. 저자는 과거에 그의 서재 앞을 지나다 글 읽는 소리에 매료되어 하룻밤을 같이 지낸 후 그의 인품과 학식에 감탄하였다고 적
    출처 : 유교넷
  • 364118

    誄權井于(東奎)文 2 / 기록자료>고도서 / 유치구
    權東奎의 誄辭이다. 평소 호탕한 성격에 불의를 참지 못하던 그도 결국 세월의 흐름에 무너지고 말았음을 안타까워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출처 : 유교넷
  • 364119

    李公智(克培)誄辭 3 / 기록자료>고도서 / 유치구
    李克培의 誄辭이다. 저자는 약관이던 때 渭陽에서 이극배와 함께 좋은 벗으로 지냈다. 당시의 이극배가 글을 읽으면 그 음성이 맑으면서도 장엄했으며, 사류의 촉망을 받았었다. 그러나 이후 이극배는 출세의 가도를 달리고 저자는 산골에 칩거하면서 서로 그리워할 뿐 만나지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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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120

    族叔壽靜齋(鼎文)誄辭 4 / 기록자료>고도서 / 유치구
    柳鼎文의 誄辭이다. 저자는 무엇보다 蘆厓 柳道源과 東巖 柳長源 등이 최고의 문장가로 그를 꼽았다는 것으로 뇌사를 시작하고 있다. 그만큼 유정문의 문장이 뛰어났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는 선친인 유범휴를 따라 금강산을 유람하며 강건한 문풍을 떨쳤다는 것, 학문의 연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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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121

    誄南而聖(彦喆)文 5 / 기록자료>고도서 / 유치구
    南彦喆의 誄辭이다. 남언철의 부친과 저자는 30년 지기였다. 그런 인연으로 두 사람은 만났다. 저자는 젊고 아름다운 그의 풍모와 그의 집을 방문하여 그의 형제들과 함께 지냈던 일등을 회고하고 있다.
    출처 : 유교넷
  • 364122

    誄族弟國輔(致楨)文 6 / 기록자료>고도서 / 유치구
    柳致楨의 誄辭이다. 유치정의 부친과 저자는 같은 스승에게 배웠고, 같은 해에 진사시에 오른 인연을 갖고 있어 매우 친한 사이였다. 그런데 중간에 유치정의 부친이 세상을 뜨자, 저자와 유치정은 부자지간과 같은 감정을 지니며 지내왔다. 그는 엄동설한에 100리길도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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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123

    誄黃景憲文 6 / 기록자료>고도서 / 유치구
    黃景憲의 誄辭이다. 황경헌은 저자의 숙부와 친교를 맺던 세칭 黃處士의 高弟였다. 그는 학문에 밝았을 뿐 아니라, 스승의 학문을 세상에 알리는 데도 매우 열심인 사람이었다. 아울러 저자와도 서로 찾으며 학문을 논하고 친교를 쌓던 사이였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세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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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124

    誄尹鴻逵文 7 / 기록자료>고도서 / 유치구
    12살의 어린나이에 요절한 尹鴻逵의 誄辭이다. 저자는 벗들과 함께 후생들을 가르쳤는데, 그 중에서도 발군의 재주를 보인 이가 윤홍규였다. 그런데 이렇게 덧없이 세상을 뜨니 매우 비통하다는 내용이다.
    출처 : 유교넷
  • 364125

    鄭叔敎(寬在)哀辭 7 / 기록자료>고도서 / 유치구
    鄭寬在의 哀辭이다. 정관재는 저자와 아주 절친한 친우의 셋째아들이다. 평소 친우가 효성이 깊고 학문에 열심이라고 칭찬이 자자해서 한 번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어린 나이에 요절하니 가슴이 아프다는 내용이다.
    출처 : 유교넷
  • 364126

    徐景威(達熙)哀辭 7 / 기록자료>고도서 / 유치구
    徐達熙의 哀辭이다. 서달희는 뜻이 높고 행동이 방정하며 재주도 많은 촉망받는 인재였다. 그런데 22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하니 매우 가슴이 아프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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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127

    玉溪書院追享櫓南徐先生奉安文 8 / 기록자료>고도서 / 유치구
    玉溪書院에 櫓南 徐穎을 배향한 다음에 쓴 고유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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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128

    告鶴巖徐公文 8 / 기록자료>고도서 / 유치구
    玉溪書院에 鶴巖 徐鈞衡을 배향한 다음에 쓴 고유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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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129

    告龍溪徐公文 9 / 기록자료>고도서 / 유치구
    玉溪書院에 龍溪 徐忭을 배향한 다음에 쓴 고유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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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130

    玉峴別廟方壺趙公奉安文(代本孫作) 9 / 기록자료>고도서 / 유치구
    조씨 문중에서는 親盡한 方壺 趙公을 차마 조매하지 못하고, 玉峴에 別廟를 세워 위패를 봉안하였다. 이 글은 그때 지은 고유문이다. 저자가 本孫을 대신해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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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131

    周王山祈雨文(代府伯作) 10 / 기록자료>고도서 / 유치구
    청송 주왕산에 기우제를 지내면서 쓴 제문이다. 저자가 청송부사를 대신해서 썼다.
    출처 : 유교넷
  • 364132

    祭大埜先生文 10 / 기록자료>고도서 / 유치구
    저자의 스승이었던 大埜 柳建休의 제문이다. 당대의 儒宗이라고 할 수 있는 그의 학문과 인품에 대한 회고와 찬사를 담고 있다.
    출처 : 유교넷
  • 364133

    祭克難齋權公(濟敬)文 11 / 기록자료>고도서 / 유치구
    克難齋 權濟敬의 제문이다. 70여 평생 동안 학문에 정진했던 태도 등을 추모하는 내용이다.
    출처 : 유교넷
  • 364134

    祭族祖生員公(韶休)文 12 / 기록자료>고도서 / 유치구
    저자의 族祖인 柳韶休의 제문이다. 부귀영화를 멀리하고 학문에 침잠했던 그의 인생을 그리고 있다.
    출처 : 유교넷
  • 364135

    祭李叔仁文 13 / 기록자료>고도서 / 유치구
    李叔仁의 제문이다. 저자와의 30년에 걸친 우정과 친교, 학문 등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출처 : 유교넷
  • 364136

    祭堂叔聾窩公文 13 / 기록자료>고도서 / 유치구
    저자의 당숙인 聾窩公의 제문이다. 저자는 농와공으로부터 경전의 의리에서부터 문장력, 도덕 등 학문의 모든 부분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던 것이 큰 행운이었으며, 아울러 청렴결백한 성품으로 저술을 남기지 않고 돌아가셔서 매우 안타깝다고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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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137

    祭族兄(致溫)文 14 / 기록자료>고도서 / 유치구
    저자의 族兄인 柳致溫의 제문이다. 온아하면서도 고인의 풍도를 지키며, 아무리 빈궁하게 살아도 봉제사 접빈객에 최선을 다했던 고인을 추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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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138

    祭吳壻堅汝文 14 / 기록자료>고도서 / 유치구
    저자의 사위인 吳鑽의 제문이다. 21년 동안 사위이자 제자로서, 그리고 늘 자기의 후계자로 여기던 그가 자기보다 먼저 죽으니 매우 애통하다는 것과 평소 학문에 열심이었고 의지가 굳었던 그의 모습을 회고하고 있다. 아울러 그가 자신을 기억할 만한 글을 남기지 않아 안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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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139

    祭子婦咸安趙氏文 15 / 기록자료>고도서 / 유치구
    저자의 며느리인 咸安趙氏의 제문이다. 그녀는 젊어서 과부가 되었으나, 奉祭祀 接賓客과 시부모 봉양, 가산을 일구는 일 등을 묵묵히, 그러면서도 조리있게 잘하던 어진 며느리였다. 그런데 갑작스레 병을 얻어 죽으니 매우 안타깝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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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140

    權烈婦傳 16 / 기록자료>고도서 / 유치구
    朴斌國의 처인 烈婦 安東權氏의 전기이다. 그녀는 18세에 시집와서, 4년 만에 남편을 잃었다. 마침 그녀는 유복자를 임신중이어서, 스스로 맹세하기를, ‘이 아이가 태어나서 8년 뒤에 제 앞가림을 하면 지하에 있는 남편을 따라 가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과연 아이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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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141

    仙圃鄭公墓誌銘(幷序) 18 / 기록자료>고도서 / 유치구
    鄭得天의 묘지명이다. 본관은 慶州, 자는 汝性, 호는 仙圃이다. 부친은 孝綱, 모친은 順興安氏이다. 1743년에 태어나 1814년에 졸하였다. 9살에 부친을 여의고 상례를 치르는 데 예법을 잘 지켰다고 한다. 평소 부모 봉양과 형제 돌보는 데 최선을 다했으며, 가산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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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142

    朝奉大夫刑曹正郞農隱金公墓誌銘(幷序) 19 / 기록자료>고도서 / 유치구
    金緘의 묘지명이다. 본관은 慶州, 자는 重黙, 호는 農隱이다. 부친은 進士 安이다. 생졸년은 미상이다. 1438년 과거에 급제하여, 判尙州, 형조정랑 등을 지냈다. 이후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농은당을 짓고, 학문을 닦고 자연을 노래하며 평생을 종유하였다.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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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143

    孺人安東金氏墓誌銘(幷序) 21 / 기록자료>고도서 / 유치구
    저자의 친우인 徐善應의 처 孺人 安東金氏의 묘지명이다. 부친은 在根, 모친은 全州 柳氏이다. 16세에 출가하여, 남편의 학업 뒷바라지와 시부모 봉양 등을 빈틈없이 하였다. 슬하에 2남 3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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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144

    高敞吳公墓表 22 / 기록자료>고도서 / 유치구
    吳永祚의 묘표이다. 본관은 高敞, 자는 胤卿이다. 1776년에 태어나 1799년에 졸하였다. 효행이 지극했고, 관후한 성격을 지녔다. 부인 安東權氏와의 사이에 2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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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145

    大埜先生遺事摠叙 24 / 기록자료>고도서 / 유치구
    저자가 스승인 大埜 柳建休의 문집을 편찬하면서 쓴 遺事이다. 유건휴는 1768년에 태어나서 1834년에 졸하였다. 어려서부터 조부인 松巖公의 가르침대로 학문 연마에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훌륭한 글이나 말을 들었는데 종이가 없으면 손이나 팔에 적어두었다가 집에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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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146

    先府君遺事 31 / 기록자료>고도서 / 유치구
    저자의 선친인 柳斗文의 유사이다. 본관은 全州, 자는 景韓, 호는 癡翁, 雅谷이다. 부친은 泰休, 모친은 義城金氏이다. 1761년에 태어나 1822년에 졸하였다. 21살 때 『논어』를 읽고 학문에 큰 진전이 있었다. 이에 자제들에게 늘 『논어』를 열심히 읽도록 강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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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147

    叔父方谷先生遺事 36 / 기록자료>고도서 / 유치구
    저자의 스승이자 숙부인 柳洛文의 유사이다. 본관은 全州, 자는 景範, 호는 方谷이다. 부친은 泰休, 모친은 義城金氏이다. 1766년에 태어나 1807년에 졸하였다. 마마를 피해 청송부에 갔다가 厚庵 權濂에게 朞註, 璣衡의 설을 배웠는데, 후암공이 그의 자질에 크게 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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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148

    伯氏行略 43 / 기록자료>고도서 / 유치구
    저자 생가의 큰형인 柳致瑗의 행장이다. 본관은 全州, 자는 聖友이다. 부친은 相文, 모친은 漢陽趙氏이다. 1789년에 태어나 1817년에 졸하였다. 숙부인 유낙문에게 사사하였다. 효성이 지극한 것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모친이 겨울에 思川魚가 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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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149

    輓詞 1 / 기록자료>고도서 / 유치구
    李亨秀, 金鎭宇, 趙基宗, 金岱鎭, 柳致喬, 柳致皜, 柳致游의 만사가 실려 있다.
    출처 : 유교넷
  • 364150

    誄辭 3 / 기록자료>고도서 / 유치구
    申弘遠, 柳衡鎭의 뇌사가 실려 있다.
    출처 : 유교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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