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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체: 에 대해 총641,751건의 자료가 검색되었습니다.
  • 364601

    與李尙之 / 기록자료>고도서 / 조의양
    山陰에서 文會가 있었음을 말하고, 그 자리에 朱子書 1질을 가지고 가서 講討하였음을 말하였다. 또한 그 자리에는 權季善과 李斐彦이 참석하였는데 그들의 筆力이 대단하여 江左의 사림이 쓸쓸하지 않음을 알았다고 하였다
    출처 : 유교넷
  • 364602

    上大人 / 기록자료>고도서 / 조의양
    趙宜陽이 성균관에 유학하면서 아버지 趙元益에게 보낸 편지이다. 멀리 떨어져 있어 만나지 못하는 그리움이 표현되어 있다
    출처 : 유교넷
  • 364603

    上鈍巖伯兄(1772) / 기록자료>고도서 / 조의양
    伯氏인 葵陽에게 보낸 편지이다. 가선대부가 더해졌고 이에 따라 동지중추부사의 교지를 받았음을 말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배경에는 선조인 병조판서공의 음덕이 컸음을 말하면서, 그 은혜에 어떻게 보답할 것인지를 말하였다. 다만 편지에 표기된 간지를 계산해 보면, 행장에
    출처 : 유교넷
  • 364604

    上八友仲兄(1773) / 기록자료>고도서 / 조의양
    숙질간에 함께 과거에 급제한 것을 함께 축하하는 편지이다. 1773년(영조 49)에 仲兄인 八友公 趙普陽과 伯兄인 趙葵陽의 아들 錫晦가 동시에 문과 급제한 사실을 말한다. 趙宜陽은 늙은 부모님께 즐거움을 드린 것에 대해 기뻐하면서, 압구정 뒤에 있는 선조 병판공의 묘
    출처 : 유교넷
  • 364605

    上八友仲兄(1782) / 기록자료>고도서 / 조의양
    오래 동안 형제가 만나지 못하였음을 말하였다. 다친 다리는 이제 아프지는 않고 조금씩 걸으면서 길 떠날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하였다. 집안 친족들의 궁핍을 걱정하면서 도움을 주지 못함을 한탄하고 있다
    출처 : 유교넷
  • 364606

    與李琶西 / 기록자료>고도서 / 조의양
    李集斗에게 보낸 편지이다. 詩를 받고 평론을 부탁하는 편지에 대해 답장을 하였다. 90을 바라본다고 하였으므로, 이 편지를 쓴 시기는 80대 후반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출처 : 유교넷
  • 364607

    答金(1803) / 기록자료>고도서 / 조의양
    金氏성을 가진 사람에게 보냈다. 상대방에 대한 그리움이 늙을수록 더함을 말하였다. 從孫이 알려 주어서 상대방의 정황을 알고 있으며, 직접 만나 의문점을 질의하지 못함을 한탄하였다
    출처 : 유교넷
  • 364608

    與柳壻(萬休, 1766) / 기록자료>고도서 / 조의양
    맏사위인 柳萬休에게 쓴 편지이다. 임금님의 병환이 회복되어 조정에서 3월중에 別試를 베푼다고 하므로 형님의 서울행이 헛걸음이 되지는 않을 것이며, 또한 사위 집안의 형제들도 서울로 갈 것으로 전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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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609

    與柳壻(1770) / 기록자료>고도서 / 조의양
    외손자와 산모의 건강을 걱정하고 있다. 돌림병에 걸려 있으므로 잘 조리한 후에 친정으로 오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하였다. 또 자신의 건강은 이제 위험한 고비는 넘겼음을 화살을 피한 새에 비유하였다
    출처 : 유교넷
  • 364610

    與外孫柳炳文 / 기록자료>고도서 / 조의양
    외손자인 柳炳文에게 쓴 편지이다. 딸과 외손자 형제의 건강을 걱정하면서, 자신은 늙었지만 건강은 여전함을 말하였다. 그리고 외손자 형제에게 공부에 독실하게 매달릴 것을 당부하고 있다. 선비의 맛난 음식은 책 속에 있음을 말하면서, 독서에 있어서 한창 나이는 70세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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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611

    與外孫炳文, 徽文(1792) / 기록자료>고도서 / 조의양
    외손자인 柳炳文 柳徽文에게 보낸 편지이다. 그들이 仲父의 초상을 치른 일을 위로하고 학업을 독려하였다. 독서에 있어서 {大學}을 먼저하고, {中庸}, {綱目}, {左傳} 등을 읽을 것을 말하였다. 그러나 널리 읽되 또한 간략하게 정리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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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612

    又(1796) / 기록자료>고도서 / 조의양
    외손자 柳炳文 柳徽文에게 보낸 편지이다. 趙宜陽의 草谷 동생의 초상이 있어 문상하였음을 말하였다. 외손자들에게는 東巖선생의 죽음으로 인하여 학업에 지장이 있을 것을 걱정하고 師門의 촉망을 생각하여 놀지 말고 더욱 학업에 매진할 것을 주문하였다
    출처 : 유교넷
  • 364613

    溫溪李先生請諡疏 / 기록자료>고도서 / 조의양
    退溪 李滉의 넷째 형인 李瀣의 諡號를 청하는 상소이다. 李瀣의 죽음은 을사사화와 연관되어 있으며, 당시 권신들이 사림을 원수처럼 여겨 사화를 일으키자 李瀣는 사헌부의 장관으로서 그들의 入相을 극력 저지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귀양을 가게 되었고 급기야 妖民 李洪男과 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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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614

    山谷南平草堂記 / 기록자료>고도서 / 조의양
    조카인 晏이 舊宅을 옮겨 草堂을 지은 것에 대한 記文이다. 흙칠을 하고, 온돌을 놓고, 창문을 만들어 방1간 당1칸의 집을 이루었으며, 방의 북쪽에는 2층으로 된 서가를 놓았다고 했다. 특히 이 초당이 자리하고 있는 곳은 계해년에 趙宜陽이 실수로 불을 냈던 적이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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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615

    贈安斯文宜庵序 / 기록자료>고도서 / 조의양
    宜庵 安德文(1714∼1779)에게 써준 서문이다. 趙宜陽과 안덕문이 꼭같이 晦齋 退溪 南冥 삼현을 흠모하였으나 그들의 학문을 놓고 논평함이 서로 달랐던 모양이다. 조의양은 이에 "노선생(퇴계)은 玉山(회재)을 스승으로 하였고, 德山(남명)을 학우로 하였으니, 옛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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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616

    書君子塘記後 / 기록자료>고도서 / 조의양
    艮齋 李德弘(1541∼1596)의 君子塘에 대한 記文이다. 이덕홍은 퇴계의 高足門人으로 12년간 퇴계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며, 퇴계가 죽음에 이르러서는 서적을 정리하는 임무를 맡았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가 살던 迂川의 남쪽에 못을 만들어 蓮을 심고 이름을 君子塘이라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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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617

    書宋處士傳後 / 기록자료>고도서 / 조의양
    형제의 우애가 지극하였던 宋樀, 宋構 형제에 관한 기록이다. 동생인 構가 살인을 하여 죄를 받고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하자, 樀은 "동생이 죽고 형이 살면 살아도 기쁘지 아니하고, 형이 죽고 동생이 살면 죽어도 또한 즐겁다." 하여, 대신 죽음을 택했다고 하였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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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618

    書忍齋遺稿後 / 기록자료>고도서 / 조의양
    忍齋公의 유고에 대한 後書이다. 그의 齋號에 관해서 젊었을 때는 勤齋, 장성하여서는 愚齋, 만년에 이르러서는 忍齋라고 하였다. 공자의 발분망식한 뜻과 寧武子의 어리석음과 仲弓의 과묵함을 겸하였으니, 그의 학문과 사람됨을 알 수 있겠다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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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619

    題棣華亭十二詠後 / 기록자료>고도서 / 조의양
    進士 李公의 정자인 체華亭에서 형제의 우애를 읊은 12수를 짓고 그 후서를 쓴 것이다. 정자는 豊岳의 서쪽 낙동강의 북쪽에 있는 작은 바위 위에 위치하였다고 하였다. 이 곳은 외딴 산속이 아니고 사람들로 시끄러운 인가에 가까운 곳이라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정자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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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620

    題丁海左柴桑孤山圖後 / 기록자료>고도서 / 조의양
    海左 丁範祖가 사람을 시켜서 그린 柴桑孤山眞境에 대한 後題이다. 柴桑山은 중국 江西省 九江縣에 있는 산으로 晉나라때 陶潛이 여기에 살았고, 孤山은 강원도 法泉의 명승지로서 愚潭 丁時翰이 살았으며, 두 사람의 出處가 비슷하였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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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621

    題劉景圭南北槎行錄後 / 기록자료>고도서 / 조의양
    劉景圭는 육로로 介八烏蠻館을 배행하여 중국을 여행하면서 萬壽山 太液池와 같은 천하의 장관을 구경하였고, 또 通信使를 따라서 일본으로 들어가 對馬島와 大坂城을 지나면서 후지산을 보았다. 유경규는 이 여행에서 견문한 것을 기록으로 남겼는데, 그 기록에 대한 後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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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622

    題養閒錄後 / 기록자료>고도서 / 조의양
    鴻巖 權新之가 지은 養閒錄에 대한 後題이다. 권신지는 아직 나이가 많지는 않지만, 공명에의 꿈을 끊고 茅屋을 짓고 한가로움을 지키려는 계책을 세웠다. 이에 趙宜陽이 그 양한록을 읽고 느낀 바가 있어 글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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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623

    艮翁說 / 기록자료>고도서 / 조의양
    趙宜陽의 친구 李夢瑞가 집을 짓고 주역의 艮괘를 自號로 한데 대해, 그 의미를 설명한 글이다. 艮은 그친다는 뜻이다. 그쳐야 할 때에 그치고 움직여야 할 때에 움직여야 하니, 모름지기 時라는 한 글자를 올바로 한다면 艮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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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624

    潛室銘(小序) / 기록자료>고도서 / 조의양
    조카 君美에게 潛室이라는 호를 지어 주면서 지은 銘이다. 이 호는 朱子의 高足인 陳埴의 호에서 취한 것이며, 그 의미는 {시전}의 "潛雖伏矣"와 "相在爾室"에서 나온 것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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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625

    題讀書室學令 / 기록자료>고도서 / 조의양
    仲氏인 八友公이 자식 교육을 위해 지은 독서실을 위하여 지은 學令이다. 事親과 事君의 도리와 공부하는 절차와 단계는 주자의 白鹿洞規를 그대로 사용하였고, 여기에 빠진 부분을 나름대로 정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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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626

    三烈士書院告由文 / 기록자료>고도서 / 조의양
    병자호란에서 공을 세운 세 열사를 모신 사당에 제사를 지내면서 지은 告由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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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627

    祭權仙溪(墉)文 / 기록자료>고도서 / 조의양
    仙溪 權墉에 대한 제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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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628

    祭八友仲兄文 / 기록자료>고도서 / 조의양
    仲氏인 八友公에 대한 제문이다. 팔우공은 문장이 뛰어났으며, 특히 讀洞에 위치한 別業은 많은 문헌이 갖추어져 있어 원근의 학자들이 모이는 장소였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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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629

    祭權子和(燮)文 / 기록자료>고도서 / 조의양
    친우 權燮에 대한 제문이다. 화사하지만 들뜨지 않은 것이 그의 모습이고, 질박하면서도 누추하지 않으며 진실하면서도 소원하지 않는 것이 그의 성정과 행실이라 하였다. 또한 온화하면서도 남과 비교하지 않고 농담을 해도 망령스럽지 않은 것이 그의 즐거운 생활 모습이며, 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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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630

    哭上舍弟夢陽文 / 기록자료>고도서 / 조의양
    동생인 夢陽에 대한 제문이다. 동생에 대하여, 經書를 음식 삼고 富貴를 뜬구름처럼 여겼으며 물 한 바가지로 즐거웠고 빈한한 생활도 편안히 여겼다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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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631

    祭亡室贈貞夫人永陽李氏文 / 기록자료>고도서 / 조의양
    부인 永川李氏에 대한 제문이다. 永川李氏는 처사 猶龍의 여식으로 천성이 孝養하여, 시할머니를 효성으로 섬겼으며 음식을 입에 맞게 하고 옷가지를 언제나 깨끗이 입혀서 옛날의 賢婦보다 못하지 않았다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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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632

    祭柳壻萬休文 / 기록자료>고도서 / 조의양
    사위 柳萬休에 대한 제문이다. 柳萬休가 죽자 친분이 있는 사람이건 없는 사람이건 모두 탄식하였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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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633

    哭姪勗文 / 기록자료>고도서 / 조의양
    조카 勗에 대한 제문이다 . 勗은 仲氏인 八友公의 아들로서, 박학하고 문장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분수에 자족하는 인품이었으나 과거에 급제하지는 못하였다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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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634

    哭姪집文 / 기록자료>고도서 / 조의양
    조카 집에 대한 제문이다. 조카에 대하여 재주와 덕, 그리고 성품과 행실이 옛날의 군자들에 비견하여도 부끄러울 것이 없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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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635

    祭權君命新文 / 기록자료>고도서 / 조의양
    權命新에 대한 제문이다. 권명신은 성품이 화려함을 싫어하였고, 韓愈와 杜甫의 시를 쓰고 시풍은 蘇軾과 黃庭堅을 따랐으며, 만년에는 程朱學에 침참하여 著者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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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636

    伯兄鈍巖公行狀 / 기록자료>고도서 / 조의양
    伯氏인 趙葵陽의 행장이다. 공의 휘는 葵陽이고 자는 向卿이며 본관은 漢陽이다. 父의 휘는 元益이고 母는 禮安李氏이다. 1706년(숙종 32)에 豊山에서 태어나서 1776년(영조 52)에 죽었으니 향년 71세이다. 39세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1773년(영조 49)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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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637

    仲兄八友軒公行狀 / 기록자료>고도서 / 조의양
    仲氏인 趙普陽의 행장이다. 공의 성은 趙氏이고, 휘는 普陽이고 자는 仁卿이며 본관은 漢陽이다. 父는 元益이고 母는 禮安李氏로 1709년(숙종 35)에 豊山에서 태어났다. 증조부 鳴漢은 金鶴沙의 문하에서 수업을 하였고, 조부 鳳徵은 李葛庵의 문하에서 從遊하였다. 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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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638

    通德郞安公(聖復)行狀 / 기록자료>고도서 / 조의양
    安聖復의 행장이다. 공은 휘는 聖復이고, 자는 克甫이며, 본관은 興州이다. 父는 夏圭이고 母는 宜寧余氏이다. 1707년(숙종 33)에 태어나서 1780년(정조 4)에 죽었으니 향년 74세이다. 지극한 효성으로 이웃에 칭찬이 자자하였다. 配는 昌原黃氏로 龜巖 孝恭의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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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639

    祖妣貞夫人豊山柳氏遺事 / 기록자료>고도서 / 조의양
    조모 豊山柳氏의 遺事이다. 정부인 柳氏의 본관은 豊山이다. 류씨의 고조부는 謙庵 雲龍이다. 父는 世馨이고 母는 安東權氏로 1678년(숙종 4)에 태어났다. 정부인은 선정의 閨範을 갖추었고, 우리 집안 吉祥의 기운은 류씨에서 그 싹이 텄다고 하였다. 1751년(영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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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640

    先妣貞夫人宣城李氏遺事 / 기록자료>고도서 / 조의양
    저자의 어머니 宣城李氏의 遺事이다. 이씨의 父는 基晩이고 母는 東萊鄭氏이다. 1623년(인조 1)에 태어나서 1677년(숙종 3)에 죽었다. 시부모를 예의로써 섬겼고, 집안 사람을 화목으로 대했으며, 비복들을 은혜와 위엄으로 부렸고, 자녀 교육에 절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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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641

    三兄處士公行略 / 기록자료>고도서 / 조의양
    셋째 형 得陽의 행적을 간략히 기록한 것이다. 득양은 자가 來卿으로 1715년(숙종 40)에 태어나 1748년(영조 24)에 이른 나이로 죽었다. 配는 咸陽朴氏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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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642

    從孫顯洙行略 / 기록자료>고도서 / 조의양
    從孫 趙顯洙의 행적을 간략히 기록한 것이다. 현수의 자는 集汝이다. 父는 著者의 伯氏인 葵陽의 아들 錫晦이고, 母는 仁川蔡氏이다. 1752년(영조 28)에 태어나서 1781년(정조 5)에 죽었다. 학문에 뜻을 두어 경전 뿐만 아니라 史書와 農書까지도 손수 베껴서 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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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643

    權君命新行錄 / 기록자료>고도서 / 조의양
    權命新의 行錄이다. 권명신은 고려의 태사 幸의 후예로서, 父는 璉이고 母는 宣城金氏이다. 유복자로 태어났지만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남달랐다. 저자는 그의 기이함을 보고 장래 크게 될 것으로 기약하였으며, 명신의 종숙 君珍이 데리고 와서 저자의 문하에서 공부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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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644

    淑夫人永川李氏墓誌銘(幷序) / 기록자료>고도서 / 조의양
    저자의 첫째부인 永川 李氏의 墓誌銘이다. 1715년(숙종 41)에 태어나서 1756년(영조 32)에 죽었으니 향년은 42세였다. 李氏의 父는 猶龍이고 母는 聞韶 金氏이다. 李猶龍은 문장으로 당대의 이름을 떨쳤으나 32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그가 죽자 당대의 명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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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645

    行狀 / 기록자료>고도서 / 조의양
    외손자인 柳炳文이 쓴 趙宜陽의 행장이다. 휘는 宜陽이고 자는 義卿이며, 성은 趙씨이고 본관은 漢陽이다. 공의 8대조인 琮이 기묘사화를 피하여 榮州에 옮겨와 살기 시작했다. 또 증조부 鳴漢은 金鶴沙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父 元益은 정헌대부로서 동지중추부사를 지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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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646

    墓碣銘(幷序) / 기록자료>고도서 / 조의양
    李晩煃가 쓴 趙宜陽의 墓碣銘이다. 1719년(숙종 45)에 태어나서 1808년(순조 8)에 죽었다. 어린 아이 때 이미 정부인이 읽어주는 한글책을 듣고 기억하였다. 일찍이 詩를 지어서 訥隱 李光庭을 찾아 뵙고 가르침을 청하였다. 이광정은 句法은 반드시 漢魏體를 본받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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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647

    遺事 / 기록자료>고도서 / 조의양
    從曾孫 秉相이 쓴 趙宜陽의 遺事이다. 공의 8대조인 琮이 기묘사화를 피하여 榮州에 옮겨와 살기 시작했다. 또 증조부 鳴漢은 金鶴沙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父 元益은 정헌대부로서 동지중추부사를 지냈고, 孝友와 文行으로 사류의 존경을 받았다. 母는 宣城 李氏로 17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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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648

    輓詞 / 기록자료>고도서 / 조의양
    權訪이 쓴 趙宜陽에 대한 輓詞이다. 선대로부터 아름다운 文才를 이어 받아서 동방에 문화를 꽃피웠으며, 공이 죽고 난 뒤 동방의 풍류가 쓸쓸해졌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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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649

    / 기록자료>고도서 / 조의양
    黃龍漢이 쓴 輓詞이다. 공은 문장에서 으뜸이 되어 90평생 萬수의 시를 지었다고 하였다. 또한 상자 속에는 아직도 알려지지 않은 시가 많은데, 풍월은 오래 동안 오동나무와 버드나무가 있는 언덕에 머물러 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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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650

    / 기록자료>고도서 / 조의양
    金相溫이 쓴 輓詞이다. 영남의 문장가는 대개 檜溪公의 가문에서 나왔는데, 공은 만년에 유학에 귀의하였다. 풍류객은 87년을 살고 산 속에 누웠다고 하였다.
    출처 : 유교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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