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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체: 에 대해 총641,751건의 자료가 검색되었습니다.
  • 364651

    / 기록자료>고도서 / 조의양
    權聖翊이 쓴 輓詞이다. 공이 시문고를 완성하여 그 서문을 요청하였다. 이를 언급하면서, "문장은 이미 완성되었는데, 재주 없는 이 사람이 어찌 서문을 쓸 수 있었겠는가?" 라고 말하였다.
    출처 : 유교넷
  • 364652

    / 기록자료>고도서 / 조의양
    姜必孝가 쓴 輓詞이다. 영남에 유학이 성할 때, 공의 이름이 홀로 드높았다. 젊어서는 정계에 나아가 정책을 내었고 늙어서는 벼슬과 영화를 버리고 유학에 몰두하였다고 하였다.
    출처 : 유교넷
  • 364653

    / 기록자료>고도서 / 조의양
    張中矩가 쓴 輓詞이다. 영남의 노학자들은 언제나 공을 칭찬하니, 문장을 일으켜서 많은 몽매한 사람들을 깨우쳤다고 적었다.
    출처 : 유교넷
  • 364654

    / 기록자료>고도서 / 조의양
    李仁行이 쓴 輓詞이다. 공은 유학의 노선생으로 그는 죽었지만 정신은 여전히 남아 있다고 적었다.
    출처 : 유교넷
  • 364655

    / 기록자료>고도서 / 조의양
    朴時源이 쓴 輓詞이다. 한 가문에 진사가 무수하고 양세에 걸쳐 중추부사를 낸 것은 다시없는 드문 경우라고 하였다. 2수의 對聯이다.
    출처 : 유교넷
  • 364656

    / 기록자료>고도서 / 조의양
    金在成이 쓴 輓詞이다. 공이 살던 고택에는 슬픈 바람이 일고, 梧竹齋의 빈 뜰에는 해가 져서 서늘하다고 하였다.
    출처 : 유교넷
  • 364657

    / 기록자료>고도서 / 조의양
    金龜鍊이 쓴 輓詞이다. 梧竹齋의 선생은 세상을 버렸고 芙蓉山 꼭대기는 서늘하다. 찾아 뵙고 인사하고자 해도 이제 받아줄 선생이 없어 눈물만 흐른다고 적었다. 4수의 對聯이다.
    출처 : 유교넷
  • 364658

    / 기록자료>고도서 / 조의양
    權補가 쓴 輓詞이다. 봉황새는 떠나고 집은 비었으나 드높던 기상은 여전하니, 벽오동과 푸른 대는 해가 바뀌어도 그대로라고 하였다.
    출처 : 유교넷
  • 364659

    / 기록자료>고도서 / 조의양
    宋文煥이 쓴 輓詞이다. 후생은 선생을 그리며 우러러 보아도 보이지 않고 覽德臺 앞의 달빛만 여전하다고 하였다.
    출처 : 유교넷
  • 364660

    / 기록자료>고도서 / 조의양
    辛慶龍이 쓴 輓詞이다. 깊은 마음에는 千家의 말을 담았고 담담한 가슴에는 봄 풍경을 품었다고 하였다. 또한 3대에 걸쳐 영화가 빛났고 한 가문에 존귀함이 연이었다고 하였다.
    출처 : 유교넷
  • 364661

    / 기록자료>고도서 / 조의양
    族孫인 淵晦가 쓴 輓詞이다. 高陽의 자제들은 뛰어난 인품을 지녔고 樞府의 벼슬은 대를 이어 내렸다고 하였다. 經學은 李靑壁에게 배웠고 典刑은 李懶拙齋에게 배웠다고 하였다.
    출처 : 유교넷
  • 364662

    / 기록자료>고도서 / 조의양
    金綄이 쓴 輓詞이다. 세 사람의 어진이가 남으로써 仁을 가히 경험하였고 一代의 문장은 늙어도 다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출처 : 유교넷
  • 364663

    祭文 / 기록자료>고도서 / 조의양
    外孫 柳炳文이 쓴 제문이다. 문장에도 능했지만 詩에 더욱 뛰어났다. 한번 붓을 휘두르면 백편의 시가 나왔고 쓸수록 더욱 기이한 작품이 되었다. 늙어서 더욱 공부에 힘을 쏟았고 책상과 상자에는 시가 쌓였다. 만년에는 주자와 퇴계의 글을 좋아하였고 자세하게 차운하여 따로
    출처 : 유교넷
  • 364664

    / 기록자료>고도서 / 조의양
    外孫 柳徽文이 쓴 제문이다. 부군께서는 옛사람의 기운과 풍모를 타고났으며, 드물게 세상에 나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仲氏인 普陽은 經術에서 뛰어났다. 공은 효성과 우애로써 가풍을 이었고 어버이의 뜻을 공손히 받들었다. 평생 동안 지은 저술은 한 방을 채울 정도라고 하였
    출처 : 유교넷
  • 364665

    / 기록자료>고도서 / 조의양
    從孫 趙顯汶이 쓴 제문이다. 대과에 급제하고 소과에 급제한 것을 영화로 여기지 않았다. 물러나 芙蓉山 아래에 집을 짓고 覽德齋에서 안빈낙도하였다. 문장과 시에 뛰어나 손을 움직이면 아름다운 글이 되었다. 문체는 漢魏體를 모범으로 하였고, 글은 주자와 퇴계를 따랐다.
    출처 : 유교넷
  • 364666

    / 기록자료>고도서 / 조의양
    從孫 趙顯佐가 쓴 제문이다. 梧桐나무를 노래하고 綠竹을 읊었으니, 공의 齋號는 바로 여기서 나왔다. 만년에 香山洞에 집을 짓고 살았으니 골짜기가 매우 깊었다. 산을 鳳凰山이라 하였고 臺號는 覽德齋라 하였다. 사람들은 梧翁으로 불렀으며 이제는 地仙이 되었다. 가난해도
    출처 : 유교넷
  • 364667

    / 기록자료>고도서 / 조의양
    宋啓欽이 쓴 梧竹齋集에 대한 跋文이다. 梧山夫子(해제자주:梧竹齋 趙宜陽)의 저술은 매우 많지만 상자에 담겨서 이미 백년이 지났다. 우리 영남에서 문장이 가장 성하였던 때는 숙종 정조대였는데, 공이 그 가운데 으뜸이었다. 당시에 申石北 鄭南屛 丁海左 李艮翁 등이 일세를
    출처 : 유교넷
  • 364668

    옥봉집 / 기록자료>고도서 / 권위
    옥봉집(玉峯集) 玉峯 權暐의 문집. 4권 2책. 목판본. 이 문집은 權暐의 후손들이 유고를 수집, 편차하여 간행한 것이다. 문집의 체제는 권1은 전부 시이고, 권2에도 말미에 붙은 疏 1편 외엔 모두 詩이다. 권 3에는 書, 雜著, 祝文, 祭文, 行狀, 碑碣, 墓
    출처 : 유교넷
  • 364669

    五言古詩 / 기록자료>고도서 / 권위
    敬次鶴峰先生韻送白文瑞歸鄕(1582), 鄭景任令公次晦庵水調歌頭一闋題金士悅巖亭余亦效顰, 鶴鴐山次西厓柳先生贈僧韻, 敬次退陶先生蓮臺寺韻(1624), 敬次退陶先生次金惇叙詠梅韻, 次申澤遠梅亭韻
    출처 : 유교넷
  • 364670

    五言絶句 / 기록자료>고도서 / 권위
    寄金內翰達遠(1589), 別金正字汝吉(克寧)還湖南, 李大仲省吾堂八詠次雲川韻, 翔鳳臺(東京敎授時作), 鷄林(東京敎授時作), 兄江北邊權命世亭基(東京敎授時作), 敬次退陶先生次老杜六絶韻
    출처 : 유교넷
  • 364671

    五言律詩 / 기록자료>고도서 / 권위
    惟一齎金先生輓, 輓金益精(得), 次金希之悠然堂韻, 輓李進士父(宰), 戊戌正月避兵到陵寺二首(1598), 春晩入才山墾舊田, 偶成示朱鶴林(元兆), 次唐人李啓凡韻, 謝唐人贈扇, 次朱鶴林韻, 金省克昌遠(弘微)赴任江陵病未出餞吟寄短律, 輓三從僉樞兄(興緖), 家前小丘擬作溪亭剗穢鑿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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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672

    五言排律 / 기록자료>고도서 / 권위
    骨窟十韻(東京敎授時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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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673

    七言絶句 / 기록자료>고도서 / 권위
    次洛厓家藏四器韻, 別金止叔(圻, 1602), 金義精(得礒), 棲鵲寺寄詩因次韻四首, 敬次李致遠家藏詩卷退溪先生韻, 丈會途中口占, 雨中種菊, 戱答尹景說(光啓)七首(1608), 夜半夢覺口占, 遊天燈山, 金甥性之笙潭十二景次崔松亭(鎭邦)韻, 廣興寺次板上韻, 秋日閒步, 春寒, 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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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674

    七言律詩 / 기록자료>고도서 / 권위
    松雲師惟政奉命之日本求詩, 洪城主(履祥)棄歸索贈吟呈二律, 階梅, 奉玩李致遠家藏詩卷次大興公韻, 送崔評事興叔(起南)赴北關, 臨湖亭, 輓金止叔, 輓琴性齋聞遠(蘭秀), 藥圃鄭先生輓, 村居, 再從叔僉樞公(德潤)輓, 鳳停寺西樓敬次退溪先生韻 西厓先生輓, 笙潭次近體, 趙城主(存世)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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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675

    七言排律 / 기록자료>고도서 / 권위
    輓權晦谷(春蘭), 寒岡鄭先生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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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676

    擬請築內城疏(1608) / 기록자료>고도서 / 권위
    임진왜란 때 서울이 쉽게 함락된 것은 都城이 견고하지 못한 탓이니, 都城에 內城을 쌓아야 한다고 건의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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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677

    용만집 / 기록자료>고도서 / 권기
    龍巒 權紀의 문집. 2권 1책. 목판본. 권기의 문집인 「龍巒集」은 현재 2종류가 전해지고 있는데, 1800년(정조 24)과 1964년에 각각 간행되었다. 전자는 권기의 후손인 權潤身이 편집하여 간행한 것이며, 후자는 1800년 간행본과 석인한 增補를 합한 중간본이다
    출처 : 유교넷
  • 364678

    / 기록자료>고도서 / 권기
    聞金瑞老(鶠齡)移居浮碧亭下偶吟(戊申), 送安半刺城主(夢尹)移拜咸州, 夢見亡友宋啓叔(汝沃)有感, 病中偶吟(1609), 聞府南店人來役靑城有感而作, 李方叔來訪, 淸明謝權梅湖(行可)曁權叔五來訪, 曉雨, 種栗, 見河濟伯(遇舟)投書,謝李松澗(庭檜)來訪, 家累謁龍山妻厝, 足朝吟聯
    출처 : 유교넷
  • 364679

    謹獨箴 / 기록자료>고도서 / 권기
    이 글은 ‘謹獨’을 통해 선비들이 어떻게 수양해야 하는지를 밝힌 것이다. 그 내용을 정리해 보면, 첫째 밝은 곳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보고 있어서, 사람들이 두려워하지 아니함이 없으니 부지런하고 진실해 보이기 쉽다. 하지만 어두운 곳에서 행하는 모든 행동은 사람들이 알
    출처 : 유교넷
  • 364680

    拙陋亭記 / 기록자료>고도서 / 권기
    이 글은 저자가 아들인 權适이 건립한 정자에 써준 기문이다. 그 내용은 첫째, 저자가 정자의 이름을 ‘拙陋亭’을 짓게 된 이유를 밝히고 있다. 저자의 아들인 适의 성품이 졸렬하고 비루하며, 또한 정자의 구조가 시원하게 트인 것이 아니라 졸렬하게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출처 : 유교넷
  • 364681

    權氏族譜序 / 기록자료>고도서 / 권기
    이 글은 안동 권씨 족보를 엮게 된 계기와 편찬과정을 적은 것이다. 그 내용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1588년(선조 21)에 족보를 엮은 적이 있는데, 그 내용이 고루하고 견문이 좁아서 전체 족보에 손을 대지 못함과 9대조 權靷의 후손을 내외와 지파를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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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682

    永嘉志序 / 기록자료>고도서 / 권기
    안동의 향토지인 「영가지」의 편찬 과정과 의의를 밝힌 글이다. 이 책은 1608년(선조 41)에 편찬된 경상도 안동부의 읍지로서 8권 4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도가 첨부된 목판본으로 조선 중기에 편찬된 읍지 가운데 내용이 충실한 것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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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683

    靑城書院初享記事 / 기록자료>고도서 / 권기
    이 글은 청성서원의 건립배경과 건물 규모, 그리고 初享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것이다. 그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이 서원을 건립하게 된 동기는 권호문의 덕을 기리기 위한 것이며, 그래서 그가 살았던 鳶魚精舍의 서쪽인 靑城山 기슭에 사당을 세우기로 했다는
    출처 : 유교넷
  • 364684

    自誌 / 기록자료>고도서 / 권기
    이 글은 저자가 직접 쓴 자신의 묘지명이다. 이 글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다. 첫 부분은 저자의 인적 사항과 선조를 나열하고 있는데, 고려 태사 權幸의 후손이라는 점과 松巖 權好文의 문인이라는 사실을 부각시키고 있다. 두 번째 부분은 유년기 삶의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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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685

    墓誌銘 / 기록자료>고도서 / 권기
    이 글은 鄭佺이 쓴 저자의 묘지명으로, 연대기 형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 내용을 주제별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저자의 인적 사항과 선조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즉, 공의 휘는 紀, 자는 士立이다. 선조 權幸은 신라의 종성인 김씨이다. 고려 태조
    출처 : 유교넷
  • 364686

    墓碣銘 / 기록자료>고도서 / 권기
    이 글은 조선 중기 안동지역의 대표적인 학자였던 密菴 李栽(1657∼1730)가 쓴 저자의 묘갈명으로, 연대기 형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이 묘갈명은 저자 자신이 쓴 「自誌」와 정전이 쓴 「墓誌銘」과 그 내용이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묘갈명을 기록하게 된 이유를 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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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687

    우원집 / 기록자료>고도서 / 이정국
    우원집(尤園集) 尤園 李楨國의 문집. 8권 4책. 序跋이 없으므로 자세한 간행 경위는 알기 어려우나 10行18字 元 亨 利 貞 4책으로 간행된 목판본이다. 저자가 관직에 진출하지 않아서 교유의 범주가 지방에 한정되어 있는 관계로 등장인물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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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688

    / 기록자료>고도서 / 이정국
    感興(二首), 觀漲, 灌水戱題, 次崔簡易集善竹橋韻, 市隱堂落成謹次朱夫子白鹿洞韻, 壬戌七月因事未逐赤壁之遊次李寡齋日昇(鎭東)韻, 次李寡齋元朝韻, 次李寡齋(二首), 臨汝齋柳公(규)寵臨甲席重辱佳篇因事勸敎令人可感忘陋步呈, 次柳臨齋韻, 次柳臨齋和朱詩韻, 次柳臨齋韻, 伏承僉丈辱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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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689

    與柳臨齋(1797) / 기록자료>고도서 / 이정국
    臨齋 柳규에게 보낸 편지이다. 경상도 관찰사의 천거에 의해 조정으로부터 올라오라는 명령이 엄중하게 내려졌음을 말하고, 그러나 자신은 병으로 인하여 움직일 수가 없는데, 조만간 조정의 해당 관청으로부터 어떻게 되었는가를 묻는 공문이 올 것이라고 걱정하였다. 서울의 학사
    출처 : 유교넷
  • 364690

    答柳臨齋 / 기록자료>고도서 / 이정국
    새해가 되었는데도 제대로 인사를 차리지 못하였음을 말하고, 저자 자신은 근자에 六仙膏를 복용하고 있는데 육십이 된 사람의 질병이 어떻게 쉽게 치유가 되겠는가 하였다. 자신이 만나는 향리의 선비들은 각자 감사할 데는 감사하고 논쟁할 데는 논쟁하여 하나의 평상심을 얻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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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691

    與柳臨齋(1807) / 기록자료>고도서 / 이정국
    향교에서 강론하고 헤어진 후 고을 선비들의 의견은 어떠한지를 물었다. 그 事案은 선배들의 것이지만 그 義理는 우리 자신들의 것이니, 남과 더불어 善을 행함에 있어서 꼭 맞지 않는 부분이 있는 것이, 마치 집안을 경영하는 節目이 옛날과 지금이 꼭 맞지 않는 것과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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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692

    與金雨皐(道行 1801) / 기록자료>고도서 / 이정국
    金道行에게 보낸 편지로서, 그의 아들을 만나고 나서 그간에 선비들과 강론의 자리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하고, 그 자리에 참석치 못함을 아쉬워하였다. 저자 자신도 의리지학을 공부하지만 의지가 굳지 못하고 엄한 스승이 없는 까닭으로 진도가 없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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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693

    與金雨皐(1804) / 기록자료>고도서 / 이정국
    金道行에게 보낸 편지이다. 향리에서 즐거움은 서책을 읽으며 지내는 것인데 근자까지 자신의 모습은 병마와 싸우는 것이었다고 하고, 또한 자손들의 공부를 감독하는 것이 하나의 일과가 되다 보니 김도행을 찾아가 함께 공부할 기회를 만들지 못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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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694

    與鄭士昻(宗魯) / 기록자료>고도서 / 이정국
    立齋 鄭宗魯에게 보낸 편지이다. 한번 찾아뵌 것이 이미 10년 전의 일이었다고 하고, 서쪽에서 오는 친구들에게 대강 안부는 전해 듣고 있으나, 병마로 인하여 편지 한 장 못했다고 밝혔다. 한번 찾아 뵙고 가르침을 받고 싶지만 그런 날이 올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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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695

    答鄭士昻(1804) / 기록자료>고도서 / 이정국
    鄭宗魯에게 보낸 편지이다. 부인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편지를 올려 위로하지 못했다고 하였다. 또 금년에는 운기가 고르지 못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하였다. 河上 柳象春, 酒泉 宋相天 등이 모두 억울하게 죽었다고 했다. 또 정종로 쪽의 선비들이 玉洞의 전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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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696

    答金子野(굉) / 기록자료>고도서 / 이정국
    金굉에게 보낸 편지이다. 김굉이 벼슬을 얻은 것은 우리 사림의 광영이라고 축하하였다. 그러나 시골에 은거하여 있는 까닭에 부임시에 맞추어 축하 인사를 하지 못했지만, 서울에서 오는 사람들에게 소식을 들으니 많은 치적을 쌓았음을 알고 있다고 하였다. 또한 임금에게 올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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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697

    答金子野 / 기록자료>고도서 / 이정국
    金굉에게 보낸 편지이다. 寢郞공으로부터 김굉이 학질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했다. 관직에서 선정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있다 하고, 그러나 외지고 자그마한 땅을 너무 요란하게 다스리는 것은 소잡는 칼로 닭 잡는 격이라 하고, 조용하고 편안하게 다스리는 것만 못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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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698

    與金子野 / 기록자료>고도서 / 이정국
    金굉의 仲氏가 죽은 데 대해 위로하였다. 며칠간 계속되는 초상 치르는 일 때문에 지나치게 슬퍼하여 몸 상하지 않았는지 묻고, 본래 식견이 있는 분인 줄 알지만, 쓸데없이 슬픔을 오래 끌 필요가 없으며 특히 붕우와 조야의 기대를 받고 있는 사람은 더욱 그러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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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699

    與南宗伯(漢朝) / 기록자료>고도서 / 이정국
    損齋 南漢朝에게 보낸 편지이다. 남한조의 공부가 일용간에 평온하고 적실한 절도로서 남들이 미치지 못한 경지에 이르렀을 것이라 하고 한번 들어보기를 갈망한다고 하였다. 저자 자신의 50년 생애가 절반은 명리를 좇는 것이었고 절반은 병마와 싸우는 것이었다 하고, 이제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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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4700

    答南宗伯(1799) / 기록자료>고도서 / 이정국
    南漢朝에게 보낸 편지이다. 정월달 그믐에 李서방이 소매 속에 넣어서 전달해 준 편지를 받으니, 정녕 옛사람의 진면목을 보는 듯 하였다고 했다. 저자는 필부의 몸으로서 몇 번이나 임금의 부름을 받고서도 응하지 않은 것은 단지 병마 때문이지 다른 뜻이 없다고 하였다.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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