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雜說 / 기록자료>고도서 / 정칙「孟子」와 「莊子」에 나오는 말을 인용하여 권세와 이익에 집착하지 않는 올바른 삶의 자세를 말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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秦武陽 / 기록자료>고도서 / 정칙자객 秦武陽에 대해 논한 글이다. 그는 용감하고 사납기로 소문난 인물이었지만 荊軻와 함께 秦始皇을 죽이러 갔을 때는 왜 두려움에 몸을 떨었는지를 논변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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恩怨 / 기록자료>고도서 / 정칙은혜는 잊지 말아야 하고 원한은 잊어야 하는 것이나 그 경중에 따라 대처함을 달리해야 한다고 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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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平山人 / 기록자료>고도서 / 정칙세상 사람들의 인물평론에 편견이 많음을 지적한 글이다. 고려 시대 인물 가운데 淸平山人 李資玄은 사당까지 세워 높이면서 그보다 나은 인물인 益齊 李齊賢과 牧隱 李穡은 배척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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讀王右軍傳 / 기록자료>고도서 / 정칙평소에 王徽之를 고상한 인물이라 여겼는데 「王右軍傳」을 본 후 그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고 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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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人才世道係運數 / 기록자료>고도서 / 정칙성인의 출현과 태평성대의 도래는 시대의 運數와 연관된 것이므로 억지로 堯舜 시대의 道를 실현하려 하면 도리어 재앙이 있게 된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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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井田 / 기록자료>고도서 / 정칙지금도 井田法을 실행할 수 있겠는가를 논한 글이다. 정전법이 실현되려면 먼저 백성이 교화되어 순박해야 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니, 지금은 불가능하리라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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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貢問死 / 기록자료>고도서 / 정칙子貢이 孔子에게 ‘死者도 앎이 있느냐’고 물으니 孔子는 ‘나중에 그대가 저절로 알게 되리라’고 답하였는데, 이 글은 孔子의 그 답변에 대해 풀이한 글이다. ‘나중에 저절로 알게 된다’는 말은 ‘죽고 난 다음에 알게 된다’는 뜻이니 死者도 앎이 있다는 뜻이라고 풀이하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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題齋舍禮記卷末 1 / 기록자료>고도서 / 김종덕族兄 金宗喆이 『禮記』를 읽으면서 註釋한 책을 정리하면서 말미에 기록한 내용으로, 1770년(영조 46)에 썼다. 齋舍에 보관되어 있는 책을 보고서는 註說의 내용이 누에가 만들어낸 실이나 소의 털만큼이나 세밀한데다 얇은 종이만큼이나 논리가 치밀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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讀敬窩洛川謾錄小識 2 / 기록자료>고도서 / 김종덕金烋(1597~1638)의 저술인 『敬窩洛川謾錄』에 수록되어 있는 자신의 傍祖이자 松隱 金光粹(1468~1563)의 5대손인 金成童의 행적의 일단을 확인하고 감회를 표현한 내용으로, 1771년(영조 47)에 썼다. 그는 김휴와 인근에 살면서 깊은 교유관계를 맺고 있었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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萬年松識 4 / 기록자료>고도서 / 김종덕義城 沙村에 서 있는 萬年松을 언제까지나 보호할 것을 향촌사림들과 다짐하면서 지은 것이다. 작년 겨울부터 병이 들어 고목이 되어버린 나무를 베자는 의견에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면서, 神과 교감하는 紫檀香의 귀한 종인데다 先祖들이 나무아래 누워 흥취를 돋우던 나무를 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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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慶壽詩後 4 / 기록자료>고도서 / 김종덕영조가 재위 50년을 맞아 70세 또는 80세 이상의 士人들에게 爵祿을 지급하라는 頒敎를 내림에 따라 恩命을 받게 된 再從叔父의 축하연이 열릴 때 지은 내용으로, 1774년(영조 50)에 썼다. 축하연의 광경과 경과를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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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典書蔣公墓石改立記事 5 / 기록자료>고도서 / 김종덕고려시대 典書를 지낸 蔣成發의 碑石을 다시 세울 때 記文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고 경위를 기록한 내용으로, 1785년(정조 9)에 썼다. 그의 行狀뿐만 아니라 官歷 등을 살필 수 있는 족보조차 없어 古老들이 전해준 얘기와 다른 족보 등을 참조해 기문을 완성하게 되었다고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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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張達山遺事後 6 / 기록자료>고도서 / 김종덕고려시대 충신 張達山의 후손 張泰夏가 선조의 遺事를 들고 와 글을 부탁함에 따라 써준 내용으로, 1788년(정조 12)에 썼다. 殷나라에 ‘三仁’이 있었으나 伯夷와 叔齊는 거기에 들지 못했듯이, 고려에 大節로 이름 높은 圃隱(鄭夢周)·冶隱(吉再)·籠巖(金澍)의 三仁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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讀周易大壯卦有感而識 7 / 기록자료>고도서 / 김종덕初伏의 무더위를 식혀주는 비가 내린 다음 서늘한 바람이 부는 날 『周易』 「雷天大壯卦」를 읽으면서 떠오른 감회의 일단을 기록한 내용으로, 1795년(정조 19)에 썼다. “우레가 하늘 위에 있는 것이 大壯이니, 이로써 군자는 예가 아니면 밟지 않는다(雷在天上大壯 君子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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心經講錄刊補後識 7 / 기록자료>고도서 / 김종덕艮齋 李德弘 등이 李滉과 『心經』을 강론한 내용을 묶은 講錄이 보완되어 『心經講錄刊補』로 편찬되는 전말을 기록한 내용으로, 1795년(정조 19)에 썼다. 講錄은 처음 편찬된 이래 수차례에 걸쳐 수정되는 과정에서 本旨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한계를 드러내 보완이 불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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毋計獲箴 9 / 기록자료>고도서 / 김종덕벽에 “먹는 것을 잊고 發憤하되, 私的 利害를 뒤로 하고 公的 利益을 우선한다(發憤忘食 後獲先難).”의 경계하는 글을 써서 걸어두고 그 의미를 설명한 내용으로, 1792년(정조 16)에 썼다. 利·害와 成·敗에 몰두하고 俗學으로 명성만을 추구하는 등 內實보다는 外面에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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毋欲速箴 9 / 기록자료>고도서 / 김종덕天地의 도리가 점진적인 것에 근본을 두고 있다는 점을 전제로, 서두르지 않고 순서에 따라 공부할 것임을 다짐한 내용이다. 항상 과거를 반추하며 묘미의 극치를 찾고 도달하지 못한 부분을 깊이 생각하며 성실하고 여유로운 자세로 조금씩 학문의 진척을 이루어야 밝은 것이 더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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座右銘 10 / 기록자료>고도서 / 김종덕45세 때인 1768년(영조 44)에 결심한 내용이다. “끊고 끊어서 계속함이 없도록 해야 하는 것이 欲이다. 잇고 이어서 끊어짐이 없도록 해야 하는 것이 理이다. 머무르는 것을 끊어야 할 것이 欲이고, 계속하기 편하도록 해야 할 것이 理이다. 계속하고 머무르는 사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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晩窺銘 10 / 기록자료>고도서 / 김종덕66세가 되던 1789년(정조 13) 학문적 심화를 위한 자세를 가다듬으면서 결심한 내용이다. 오로지 敬과 窮의 요체를 찾는데 매진하며 결코 邪說에 현혹되지 않을 것임을 다짐했다. 敬은 전승되어온 것이 아니며 窮은 밖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용모를 바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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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際可字辭 11 / 기록자료>고도서 / 김종덕李象靖의 손자 李秉運의 字를 지어주면서 그 의미를 설명한 내용으로, 1780년(정조 4)에 썼다. 氣가 움직여 사물이 열려서 밝아지고 道가 승화하여 마땅한 때를 얻으면 天·人이 관계를 맺고 陰陽과 五行이 만나 감응하기 마련이다. 생각을 넓고 도탑게 하여 本原을 크게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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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近仁堂(宜泰)文 12 / 기록자료>고도서 / 김종덕近仁堂 李宜泰(1701~1779)이 사망했을 때 지은 弔文으로, 1779년(정조 3)에 썼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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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子河(柱東)文 12 / 기록자료>고도서 / 김종덕善山출신 子河 金柱東이 사망했을 때 지은 弔文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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權幼則(範祖)文 13 / 기록자료>고도서 / 김종덕權範祖가 사망했을 때 지은 弔文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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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寬汝(弘敎)哀辭 14 / 기록자료>고도서 / 김종덕申弘敎의 죽음을 애도하며 지은 것으로, 1786년(정조 10)에 썼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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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景初(啓凞)哀辭 16 / 기록자료>고도서 / 김종덕黃啓凞의 죽음을 애도하며 지은 것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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晩翠堂先祖行狀告成文 17 / 기록자료>고도서 / 김종덕先祖인 晩翠堂 金士元(1539~1601)의 영전에 行狀이 완성되었음을 고한 축문으로, 1771년(영조 47)에 썼다. 행장은 李象靖이 지었다출처 : 유교넷 -
365028
孺子亭開土文 18 / 기록자료>고도서 / 김종덕孺子亭을 건립하기 위해 開土할 때 지은 축문으로, 1787년(정조 11)에 썼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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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隱先祖墓碑改竪祝 18 / 기록자료>고도서 / 김종덕先祖인 松隱 金光粹(1468~1563)의 墓碑를 다시 세우면서 지은 축문으로, 1795년(정조 19)에 썼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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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權逋翁(德秀)文 18 / 기록자료>고도서 / 김종덕逋軒 權德秀(1672~1759)의 영전에 올린 제문으로, 1760년(영조 36)에 썼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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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素巖從叔父文 19 / 기록자료>고도서 / 김종덕從叔父인 素巖 金啓煥(1669~1738)의 忌日에 올린 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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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權景晦(炳)文 20 / 기록자료>고도서 / 김종덕約齋 權炳(1723~1772)의 영전에 올린 제문으로, 1772년(영조 48)에 썼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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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族孫叔養直文 21 / 기록자료>고도서 / 김종덕族孫인 金養直의 영전에 올린 제문으로, 1774년(영조 50)에 썼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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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季父文 22 / 기록자료>고도서 / 김종덕季父의 영전에 올린 제문으로, 1775년(영조 51)에 썼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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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族弟天成(完九)文 24 / 기록자료>고도서 / 김종덕族弟인 金完九의 영전에 올린 제문으로, 1778년(정조 2)에 썼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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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再從叔父(箕應)文 25 / 기록자료>고도서 / 김종덕再從叔父인 金箕應의 영전에 올린 제문으로, 1781년(정조 5)에 썼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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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大山先生文 25 / 기록자료>고도서 / 김종덕大山 李象靖의 영전에 올린 제문으로, 1782년(정조 6)에 썼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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再祭大山先生文 26 / 기록자료>고도서 / 김종덕大山 李象靖의 영전에 재차 올린 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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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仲弟直甫文 27 / 기록자료>고도서 / 김종덕仲弟인 金宗敬의 영전에 올린 제문으로, 1785년(정조 9)에 썼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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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崔百弗庵文 29 / 기록자료>고도서 / 김종덕百弗庵 崔興遠(1705~1786)의 영전에 올린 제문으로, 1786년(정조 10)에 썼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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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族兄顯則(宗赫)文 30 / 기록자료>고도서 / 김종덕族兄인 金宗赫의 영전에 올린 제문으로, 1786년(정조 10)에 썼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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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權支國文 30 / 기록자료>고도서 / 김종덕權支國의 영전에 올린 제문으로, 1787년(정조 11)에 썼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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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李小山文 31 / 기록자료>고도서 / 김종덕小山 李光靖(1714~1789)의 영전에 올린 제문으로, 1789년(정조 13)에 썼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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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李致道文 32 / 기록자료>고도서 / 김종덕李致道의 영전에 올린 제문으로, 1789년(정조 13)에 썼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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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族弟季範(宗泌)文 33 / 기록자료>고도서 / 김종덕族弟인 金宗泌의 영전에 올린 제문으로, 1790년(정조 14)에 썼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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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柳叔文文 34 / 기록자료>고도서 / 김종덕蘆厓 柳道源(1721~1791)의 영전에 올린 제문으로, 1791년(정조 15)에 썼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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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金聖文(光憲)文 35 / 기록자료>고도서 / 김종덕金光憲의 영전에 올린 제문으로, 1791년(정조 15)에 썼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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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權荷塘先生文(改葬時) 35 / 기록자료>고도서 / 김종덕荷塘 權斗寅(1643~1719)의 묘를 이장할 때 올린 제문으로, 1791년(정조 15)에 썼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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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季弟弘輔文 36 / 기록자료>고도서 / 김종덕季弟인 金宗燮의 영전에 올린 제문으로, 1792년(정조 16)에 썼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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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權汝三(思兼)文 38 / 기록자료>고도서 / 김종덕權思兼의 영전에 올린 제문으로, 1793년(정조 17)에 썼다출처 : 유교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