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族祖處士(久時)哀辭 23 / 기록자료>고도서 / 유장원저자의 族祖인 柳久時의 애사이다. 그는 집안이 가난하자, 학문을 익히기 보다는 농사에 전력을 기울여 부모 봉양에 힘쓰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여 농경에 전념하였다. 그리하여 어느 정도 가산을 회복하였다. 그런데 부모님도 돌아가시고 형님도 후사 없이 죽자, 일가 중에 후사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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族孫之文哀辭 24 / 기록자료>고도서 / 유장원저자의 族孫인 柳之文의 애사이다. 저자는 늙고 병들어 직접 찾아갈 수 없으므로 애사로 조문을 대신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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聞韶世稿序 25 / 기록자료>고도서 / 유장원金鎭東이 편한 『聞韶世稿』의 序文이다. 저자는 우선 시조 이래 문장이 끊이지 않아 세고를 편찬할 수 있는 의성김씨에 대해 찬사를 보내고 있다. 아울러 세고를 편찬하는 목적이 후손들로 하여금 학문을 할 때나 세상에 나아가서나 선조들의 덕음을 늘 생각하면서 조신하게 하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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乖厓集序 26 / 기록자료>고도서 / 유장원『乖厓集』의 서문이다. 『괴애집』은 柳榰의 문집으로 그의 현손인 柳浩源이 만사와 뇌사 약간과 간찰 수십개를 수습하여 1책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저자에게 교감 및 서문을 부탁하였다. 저자는 유지의 학문이 나라의 棟梁이 될 만하지만 시대를 잘못 만나 그렇지 못했으며, 또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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族父松陰翁周甲宴序 28 / 기록자료>고도서 / 유장원저자의 族叔인 송음옹의 회갑연을 맞아 쓴 글이다. 송음옹은 저자 부친에게 학문을 익혔고, 저자 형제와는 40년간 친밀하게 지낸 사이였다. 젊어 영민하던 모습이 세월에 따라 많이 변모한 것에 애상에 젖다가도 여전히 근력이 좋고 학문을 등한시하지 않음에 축하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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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贈李養元 29 / 기록자료>고도서 / 유장원이양원이 동암에서 저자에게 『大學或問』의 강의를 듣고 돌아가면서 글을 부탁하여 쓴 것이다. 저자는 『대학혹문』의 강의가 곧 入德하는 방법이고 학문하는 규모를 거의 갖추었기 때문에 굳이 또 자신의 말이 필요하냐는 말로 글을 시작하였다. 그러면서도 『대학』과 주자의 주석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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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贈金舜叟 30 / 기록자료>고도서 / 유장원김순수가 10일 정도 동암에 머물렀다가 돌아가면서 글을 부탁해 쓴 것이다. 저자는 김순수가 이미 대산 선생으로부터 학문하는 방법을 배우고 부형으로부터 올바른 가르침을 받았으니 자신이 거기에 덧붙일 것이 없다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 하지만 벗끼리는 責善을 중시하는 법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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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贈族姪訔休 31 / 기록자료>고도서 / 유장원저자의 族姪인 柳訔休의 부탁으로 쓴 글이다. 유은휴는 노애 유도원에게 학문을 배웠으나 성취가 없어 다시 저자에게 학문을 배우고 싶었다. 그러나 염치가 없어 글을 부탁한 것이다. 저자는 마음을 바로잡고, 心德을 온전하게 하는 것이 학문에 있어서는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말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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雙節記 31 / 기록자료>고도서 / 유장원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들어서자 사환을 거부하고 은둔했던 金濟‧金澍 형제를 기리는 글이다. 저자는 형제가 모두 忠臣義士가 되기는 쉽지 않다고 하였다. 중국에도 그러한 예는 백이숙제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 형제가 모두 충신으로서 절개를 지켰다는 점에서 그 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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拱北亭重建記 33 / 기록자료>고도서 / 유장원영덕에 있는 拱北亭은 언제 지어졌고 언제 훼손되었는지 정확하지 않다. 다만 신모라는 이가 관직을 은퇴하고 노년에 머물렀던 곳으로만 알려져 있다. 1791년(정조 15) 신모의 후손들이 공북정을 중건하고, 申致達이 안동까지 와서 저자에게 중건기를 부탁하여 쓴 글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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喪變通考識 35 / 기록자료>고도서 / 유장원저자가 『상변통고』를 짓게 된 경위와 체재를 설명하고 있다. 예법에 疑文과 變節이 많고 또 논자마다 각기 의견이 다른 상황이었다. 이에 『주자가례』의 순서에 따라 우선 常禮를 서술하고 다음에 의문과 변절에 대한 다양한 설을 실은 다음 저자의 견해를 담았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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纂註增補識 35 / 기록자료>고도서 / 유장원중국에서 영락 연간에 편찬한 『纂註』가 완전하지 않아 『纂註增補』를 지었다고 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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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註考疑識 36 / 기록자료>고도서 / 유장원원나라의 道川倪가 지은 『輯釋大典』에 왕왕 오류가 있어, 그 중 한두 가지를 기록하여 대산 이상정의 교정을 받았다. 인하여 『찬주증보』를 수정하였는데 사문의 교정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함께 편찬하지 않고 별도로 속편으로 하여 『小註考疑』로 이름 붙이고, 훗날 제현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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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註考疑續編識 36 / 기록자료>고도서 / 유장원王份이 찬한 『사서증정』을 보고 전날 의심을 품었던 것 중 상당수가 이미 상세한 해설이 있음을 알았다. 이에 그의 논의가 반드시 다 맞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상당한 설득력이 있는 것을 모아 『小註考疑續編』을 펴낸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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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警錄識 36 / 기록자료>고도서 / 유장원저자가 여러 군자들과 나눈 편지를 모아 『資警錄』을 펴냈다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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龍山世稿後識 36 / 기록자료>고도서 / 유장원광산김씨 3대(唯一齋 金彦璣‧葛峯 金得硏‧晩翠軒 金得璛‧石塘 金光源)의 문집을 모은 『龍山世稿』의 서문이다. 김범구와 택구씨가 저자에게 세고를 들고 와서, 이광정의 교정은 받았으나 서문을 받지 못했으니 부탁한다고 하여 쓴 글이다. 저자는 김득연과 그의 선조인 柳復起‧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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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山卓氏世稿識 37 / 기록자료>고도서 / 유장원卓鼎運‧卓在龍 등이 선조인 景濂亭 卓光茂와 竹亭 卓愼의 유고를 모아 『光山卓氏世稿』를 편찬하고 저자에게 서문을 부탁하여 쓴 글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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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家禮輯解後 38 / 기록자료>고도서 / 유장원저자의 친우인 梧山處士 徐尙甫가 쓴 『家禮輯解』의 발문이다. 이상정의 제자인 서상보는 일찍 과거를 포기하고 예학에 전념하여 내외편으로 이루어진 예서를 남겼다. 그런데 내편은 체재를 갖추었으나, 외편은 초고인 상태라서 애석하게 여겼다. 마침 그의 아들인 명윤과 강윤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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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三山易解參考八則陽生條後 38 / 기록자료>고도서 / 유장원三山 柳正源이 慵窩 柳升鉉, 김강한, 이상정, 저자 등이 『易解』의 八則陽生條의 의미를 두고 문답한 서간을 모아 정리한 책에 쓴 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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讀退溪先生續集 41 / 기록자료>고도서 / 유장원1778년(정조 2) 봄에 『退溪先生續集』이 추후로 간행되었다. 저자는 초본에 실렸는데 원집에서 빠진 것은 다 이유가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굳이 간행할 필요가 있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이듬해 봄에 李世源이 보내준 글을 읽고 나서, 속집을 간행할 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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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揭退陶先生詩說 42 / 기록자료>고도서 / 유장원저자가 동암에 山泉齋를 짓고 퇴계 선생의 문집을 읽다가 東巖言志詩가 있음을 알았다. 이에 그 시를 써서 벽에 걸었는데, 어떤 손이 그걸 보고 ‘이곳은 선생이 머문 곳이 아닌데 우연히 동암이라는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이 시를 걸어놓아도 되느냐?’고 물었다. 이에 저자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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診脈說 43 / 기록자료>고도서 / 유장원저자는 평소 성질이 매우 급하여 감정표현이 중도를 넘어서는 것을 병통으로 여겼다. 어느 날 우연히 맥을 잘 짚는 李宅中을 만나 맥을 짚었더니, 그가 하는 말이, ‘공은 매우 寬緩한 사람으로 이름나 있는데, 맥이 매우 빠르니 이상하다.’고 하였다. 저자는 내심 놀랐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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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剛杖小說 43 / 기록자료>고도서 / 유장원저자는 평소 금강산을 한 번 가보고 싶었는데 가지 못했다. 마침 조카인 柳範休가 고성군수가 되자 편지를 보내 만폭동에 있는 나무로 지팡이를 만들어 보내라고 했는데, 유범휴가 정말 지팡이를 만들어 보냈다. 그리고는 편지에, ‘안에는 仙氣를 품고 있으나 겉으로는 평범한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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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揭退陶先生詩說 42 / 기록자료>고도서 / 유장원저자가 동암에 山泉齋를 짓고 퇴계 선생의 문집을 읽다가 東巖言志詩가 있음을 알았다. 이에 그 시를 써서 벽에 걸었는데, 어떤 손이 그걸 보고 ‘이곳은 선생이 머문 곳이 아닌데 우연히 동암이라는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이 시를 걸어놓아도 되느냐?’고 물었다. 이에 저자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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診脈說 43 / 기록자료>고도서 / 유장원저자는 평소 성질이 매우 급하여 감정표현이 중도를 넘어서는 것을 병통으로 여겼다. 어느 날 우연히 맥을 잘 짚는 李宅中을 만나 맥을 짚었더니, 그가 하는 말이, ‘공은 매우 寬緩한 사람으로 이름나 있는데, 맥이 매우 빠르니 이상하다.’고 하였다. 저자는 내심 놀랐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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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剛杖小說 43 / 기록자료>고도서 / 유장원저자는 평소 금강산을 한 번 가보고 싶었는데 가지 못했다. 마침 조카인 柳範休가 고성군수가 되자 편지를 보내 만폭동에 있는 나무로 지팡이를 만들어 보내라고 했는데, 유범휴가 정말 지팡이를 만들어 보냈다. 그리고는 편지에, ‘안에는 仙氣를 품고 있으나 겉으로는 평범한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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疑禮瞽見 11 / 기록자료>고도서 / 유장원禮制와 관련한 저자의 견해를 쓴 글로, 주로 상례와 관련된 내용이 들어 있다. 즉, 자식이 없어 양자를 들였을 경우 양자를 위해서는 3년복을 입지 않고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견해에 대해, 그것은 타성 양자를 들였을 경우이며 친족에서 양자를 들였을 경우는 3년복을 입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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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庸疑義 21 / 기록자료>고도서 / 유장원저자가 1760년(영조 36) 가을 『대학』과 『중용』을 공부하다가 기존의 해석에 대해 자기 나름의 견해를 적어놓은 책이다. 아울러 이것을 九思堂 金樂行에게 보내 질정을 받은 내용과 大山 李象靖과 비슷한 내용으로 문답한 것도 첨부하였다. 저자는 이 책이 지엽적인 것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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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思錄釋疑辨 1 / 기록자료>고도서 / 유장원저자는 鄭曄이 지은 『近思錄釋疑』가 고증을 상세히 하였고 類例도 정밀하여 『近思錄』에 공이 있다고 할 만한 책이라고 평가하였다. 다만 그 책에서 인용하고 있는 근세 유자들의 설과 정엽의 설에 의문이 드는 것이 있어, 51개조에 걸친 글을 쓰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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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天算法 19 / 기록자료>고도서 / 유장원주천, 즉 각 천체가 각기의 궤도를 따라 한 바퀴 도는 것을 계산하는 방식을 설명한 글이다. 원래 주천산법은 이황이 지은 『啓蒙傳疑』에 자세히 나오지만, 저자는 이를 모두 수록하지는 않고 계산하기 어려운 부분만 골라서 새로운 법을 사용하여 그림으로 설명해서, 초학자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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拜門錄 23 / 기록자료>고도서 / 유장원저자와 그의 스승인 이상정과의 인연에 대해 쓴 글이다. 이 글에 따르면 저자와 이상정의 직접적인 대면은 모두 여섯 차례 있었다. 1758년(영조 34) 가을, 저자 형제는 처음 대산 문하에 가서 학문을 익혔다. 그 날 밤늦도록 講話가 이어져 여러 사람이 피곤을 견디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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追遠祠立享時門親約束 30 / 기록자료>고도서 / 유장원追遠祠에 立享하면서 친족들에게 당부하는 내용을 담은 글이다. 저자는 岐峯 柳復基가 수곡에 문호를 연 이래 수백 년 동안 遺風餘韻이 있어, 行誼가 돈독하고 학업에 정진하며 本實에 힘써 부박하지 않고 謙恭한 풍속을 가졌다. 그러나 최근 가문이 쇠락하면서 학문을 제대로 익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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權處士傳 30 / 기록자료>고도서 / 유장원효자로 이름난 玉里 權斗徵의 傳記다. 평소 효자로 이름났던 권두징은 양친의 건강이 좋지 않으면 대변을 맛보고 斷指하였을 뿐 아니라, 居喪 7년, 素食 10년을 행할 정도였다. 뿐 아니라 仲子의 상을 당해 묏자리를 잡다가, 당숙의 묏자리가 후사가 끊기는 자리라고 하자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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亡女寃死梗槩 32 / 기록자료>고도서 / 유장원저자 딸이 자진한 사연을 적은 글이다. 남편이 유복자만 남기고 돌아가자 자진하지 못했던 그녀는 유복자로 태어난 아들마저 17세에 요절하자 따라서 자결하였다. 그리고 유서에 남편의 대를 잇지 못한 것이 큰 한이라고 하면서 양자로 누구를 삼아줄 것이며, 남편 무덤 앞에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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承文院副正字松窩金公墓碣銘(幷序) 1 / 기록자료>고도서 / 유장원金景沈의 묘갈명이다. 본관은 義城, 자는 仲黙, 호는 松窩이다. 부친은 汝鎔, 모친은 豊壤趙氏이다. 1700년(숙종 26)에 태어나 1732년(영조 8)에 졸하였다. 1725년(영조 1) 문과에 급제하였고, 무신란이 일어나자 右防將으로 의병에 참여하였다. 1729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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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溪處士朴公墓碣銘(幷序) 3 / 기록자료>고도서 / 유장원朴泰茂의 묘갈명이다. 본관은 泰安, 자는 春卿, 호는 西溪이다. 부친은 昌潤, 모친은 晉陽河氏이다. 1677년(숙종 3)에 태어나 1756년(영조 32)에 졸하였다. 1695년(숙종 21) 향시에 장원을 하였으나 평소 그와 친분이 있던 이의 사정이 개입했음을 알고 시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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蟄窩處士金君墓碣銘(幷序) 7 / 기록자료>고도서 / 유장원金井東의 묘갈명이다. 본관은 義城, 자는 漢瑞, 호는 蟄窩이다. 부친은 景漸, 모친은 淸州鄭氏이다. 1721년(경종 1)에 태어나 1771년(영조 47)에 졸하였다. 평소 행동거지가 단아하였고, 환란에 빠진 이를 구휼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흉년이 들어 집안사람들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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孝子李公墓銘 9 / 기록자료>고도서 / 유장원李道謙의 묘갈명이다. 본관은 慶州, 자는 好與, 호는 蟄窩이다. 부친은 夏相, 모친은 驪江李氏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모시는 데 효를 다하였다. 부모 모두 돌아가신 다음에는 차마 노복이 준비한 것을 올릴 수 없다하여 직접 薦香하였고, 여묘할 때 절했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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處士義城金公墓銘(幷序) 10 / 기록자료>고도서 / 유장원金泰東의 묘갈명이다. 본관은 義城, 자는 聖瞻, 호는 蟄窩이다. 부친은 景沈, 모친은 碧珍李氏이다. 1723년(경종 3)에 태어나 1786년(정조 10)에 졸하였다. 평소 종족의 화목과 학문에 정진할 것을 강조하였다. 부인 眞城李氏와의 사이에 2남이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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處士咸安趙公墓銘(幷序) 12 / 기록자료>고도서 / 유장원趙의 묘갈명이다. 본관은 咸安, 자는 士直이다. 부친은 慶運, 모친은 碧珍李氏이다. 1710년(숙종 36)에 태어나 1741년(영조 17)에 졸하였다. 평소 군자의 풍도를 지녀 동학이 모두 경외하였으며, 술과 노름 등을 즐기지 않고 학문에 정진하였다. 부인 西原韓氏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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秀士柳君公墓銘(幷序) 13 / 기록자료>고도서 / 유장원柳鳳休의 묘갈명이다. 본관은 全州, 자는 來瑞이다. 부친은 明源, 모친은 漢陽趙氏이다. 1741년(영조 17)에 태어나 1788년(정조 12)에 졸하였다. 비록 뛰어난 스승을 만나지 못해 높은 학문적 성취를 이루지 못했으나, 평소의 행동은 군자와 다를 바 없었다. 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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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均進士癡軒金公墓表 16 / 기록자료>고도서 / 유장원金德五의 묘표이다. 본관은 遂安, 자는 性兼, 호는 癡軒이다. 부친은 振華, 모친은 熊川朱氏이다. 1680년(숙종 6)에 태어나 1748년(영조 24)에 졸하였다. 1723년(경종 3) 사마시에 입격하였으나 이후 양친을 여읜 다음 과업에 뜻을 두지 않았다. 목은 이색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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槐潭處士裵君墓表 17 / 기록자료>고도서 / 유장원裵相說의 묘표이다. 본관은 曲江, 자는 君弼, 호는 槐潭이다. 부친은 緝, 모친은 安東權氏이다. 1759년(영조 35)에 태어나 1789년(정조 13)에 졸하였다. 상수학과 주역에 통달하여 日影臺와 渾天儀를 만들었다. 이후 대산 이상정을 찾아뵌 후 성리학에 뜻을 두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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孺人泰安朴氏墓誌銘(幷序) 19 / 기록자료>고도서 / 유장원저자의 친우인 金鎭東의 모친인 泰安朴氏의 묘표이다. 본관은 泰安, 부친은 泰茂, 모친은 晉州河氏이다. 1695년(숙종 21)에 태어나 1762년(영조 38)에 졸하였다. 16살에 金景潾에게 시집왔으나, 6년 만에 남편을 잃었다. 몇 해 안 되어 시부모상을 당하고 나서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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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思堂金先生行狀 21 / 기록자료>고도서 / 유장원金樂行의 행장이다. 본관은 義城, 초명은 晉行, 자는 退甫‧艮夫, 호는 九思堂이다. 부친은 弘文館校理 聖鐸, 모친은 務安朴氏이다. 1708년(숙종 34)에 태어나 1766년(영조 42)에 졸하였다. 어려서는 『장자』 추수편을 즐겨 읽었으나, 부친의 꾸지람을 들은 뒤로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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凌虛先生朴公行狀 31 / 기록자료>고도서 / 유장원朴敏의 행장이다. 본관은 泰安, 자는 行遠,호는 凌虛이다. 부친은 贈左承旨 安邦, 모친은 晉州鄭氏이다. 1566년(명종 21)에 태어나 1630년(인조 8)에 졸하였다. 어려서는 당숙인 竹村 朴安室에게 배웠고, 이후에 崔永慶을 만나 크게 감화를 입고 학문에 전념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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芝谷處士金公行狀 37 / 기록자료>고도서 / 유장원金正漢의 행장이다. 본관은 義城, 자는 扶仲, 호는 芝谷散人이다. 부친은 舜錫, 모친은 全州柳氏이다. 1711년(숙종 37)에 태어나 1766년(영조 42)에 졸하였다. 3세에 천자문을 읽을 정도로 영특하였으며, 10세에 부친과 조부를 여의고 어머니로부터 학문에 전념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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萬嶺處士柳公行略 1 / 기록자료>고도서 / 유장원柳益輝의 행장이다. 본관은 全州, 자는 爾謙, 호는 萬嶺處士이다. 부친은 護軍 橚, 모친은 漢陽趙氏이다. 1629년(인조 7)에 태어나 1698년(숙종 24)에 졸하였다. 혼인한 이후 만령촌에 살면서 7~8리 떨어진 수곡까지 매일 걸어서 부모님께 문안드릴 정도로 효자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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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均生員蘿隱柳公行狀 2 / 기록자료>고도서 / 유장원柳台齊의 행장이다. 본관은 全州, 자는 鉉甫, 호는 蘿隱이다. 부친은 尙載, 모친은 眞城李氏이다. 1699년(숙종 25)에 태어나 1767년(영조 43)에 졸하였다. 어려서부터 뛰어난 재능을 보여 증조부인 乖厓公의 사랑을 받아 二品冠服을 선물로 받았다. 1726년(영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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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政大夫司諫院大司諫三山柳公家狀(代作) 6 / 기록자료>고도서 / 유장원柳正源의 행장이다. 본관은 全州, 자는 淳伯, 호는 三山이다. 부친은 錫龜, 모친은 延安李氏이다. 1703년(숙종 29)에 태어나 1761년(영조 37)에 졸하였다. 어려서부터 詩文에 재능을 보였고 스스로 文義를 깨우칠 정도였다. 이에 13세에 부친으로부터 『周易』을출처 : 유교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