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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체: 에 대해 총641,751건의 자료가 검색되었습니다.
  • 365751

    海州吳氏族譜序 28 / 기록자료>고도서 / 권상익
    聞紹의 博士 吳致昇이 집안의 世譜와 家乘 한 통을 소매에 넣은 채 茶山의 거처에 있는 나를 방문하여 그 문중 父老들의 명을 전하여 말하기를 “우리 오가들의 본관은 海州로 먼 곳이니 근방의 족인들을 모아 파보를 완성하고자 합니다. 그대의 선조인 權寔도 역시 우리 조상으
    출처 : 유교넷
  • 365752

    鄭中建十梅帖序 30 / 기록자료>고도서 / 권상익
    친구인 鄭中建은 文山과 梧溪 사이에 거하고 있었으며, 어려서부터 과거를 준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그 마음을 달래려고 정원에 매화를 심기 시작하여 어느덧 중요한 취미가 되었다. 늘 상하게 하지는 않을까 걱정하여 마르면 물을 주고 차가우면 따뜻하게 해 주었으며, 어
    출처 : 유교넷
  • 365753

    四禮要式序 31 / 기록자료>고도서 / 권상익
    친구인 金寬汝가 엮은 『四禮要式』의 서문이다. 무릇 예의 본체는 지극히 크고, 그 쓰임은 지극히 절실하여 3,300여 가지 항목에 이르며, 天秩을 순환시키고 人紀을 세우는 바가 아님이 없으니 나라와 백성들을 위하여 하루라도 떼놓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책은 『朱子家禮
    출처 : 유교넷
  • 365754

    下晩齋邊公遺集序 32 / 기록자료>고도서 / 권상익
    下晩齋 邊公의 문집 서문이다. 공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가서도 權門에는 발을 들여놓지 않았으며, 시험을 감독했을 때에도 금전으로 매수하려는 자들이 있었으나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고 한다. 공의 손자인 司諫公 邊相勳과 承宣公 邊圭昌 등이 서로 뒤를 이어 조정에
    출처 : 유교넷
  • 365755

    錦南朴公遺卷序(1916) 33 / 기록자료>고도서 / 권상익
    錦南 朴奎陽의 문집 서문이다. 공이 세상을 떠난 지 14년이 지난 丙辰年에 그의 從子인 勝淵이 공의 유문을 裒輯하여 나에게 서문을 부탁하였다. 공의 詩는 기가 두텁고 충만하였으며, 뜻이 원만하고 통달하였다. 공의 文은 활달하고 장중하였으며, 자극적이지 않고 현란하지도
    출처 : 유교넷
  • 365756

    陶隱權公遺稿序 34 / 기록자료>고도서 / 권상익
    陶隱 權虎臣의 문집 서문이다. 어려서부터 장중하고 단정하여 부화함을 싫어하고 장성해서는 문학에 힘썼으나 출세의 뜻을 끊고 부모를 효양하기에 전력하였다. 뒤에 孝廉으로 추천되었으나 노친이 계심을 이유로 사양하였다. 그의 행적은 『榮州誌』와 『闡幽錄』에 자세히 기록되어
    출처 : 유교넷
  • 365757

    溪山李公遺卷序 35 / 기록자료>고도서 / 권상익
    溪山 李公의 문집 서문이다. 공의 맏아들인 潤億과 종자인 潤章이 『溪山遺卷』을 가져와서 나에게 서문을 부탁하였다. 詩文은 모두 平易하고 사실적이어서 모두가 마음속에 있는 그대로 흘러나온 것 같았다. 공이 세상을 떠나고 李中轍과 閔丙承 등이 행장과 묘갈명 등을 지었다.
    출처 : 유교넷
  • 365758

    柳氏三綱錄序 35 / 기록자료>고도서 / 권상익
    柳夏榮이 집에 소장하고 있던 『三綱錄』을 소매에 넣어가지고 와서는 나에게 서문을 부탁하였다. 내용을 읽어보니 豊山柳氏 일가가 충효를 대대로 이어왔으며, 貞烈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參議公 柳宗介가 의로운 죽음을 당한 뒤에 權蒼雪과 李訥翁 등
    출처 : 유교넷
  • 365759

    玉成軒邊公遺卷序 36 / 기록자료>고도서 / 권상익
    玉成軒 邊尙綏의 문집 서문이다. 공은 朱子와 李滉의 서적에 전념하였으며, 예설에도 밝아 『禮儀講錄』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평소 修辭를 간결하게 하고 그 저작 또한 散逸하여 전하는 것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뒤에 6세손인 邊時均과 족형인 邊台均 등이 遺文을 새겨
    출처 : 유교넷
  • 365760

    李景龜遺卷序 37 / 기록자료>고도서 / 권상익
    景龜 李潤億의 문집 서문이다. 貞山 金國卿의 문하로 학문에 열중하였으며, 향당에서는 효자로 이름이 자자하였다. 공이 33세의 나이로 요절하니 동생인 潤章이 눈물을 흘리며 遺草와 師友들이 애도하며 지은 挽誄 등을 모아 2冊으로 수습하여 나에게 가져와서는 서문을 부탁하였
    출처 : 유교넷
  • 365761

    伴翠堂李公實記序 38 / 기록자료>고도서 / 권상익
    伴翠堂 李公의 實記 서문이다. 공은 평소 항상 밝은 얼굴로 부모에 대한 효가 극진했으며, 집안이 곤궁한 상황에서도 봉양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母夫人이 병환을 얻었을 때에는 손가락을 잘라 자신의 피를 드시게 하여 7년이나 더 목숨을 이었으며, 돌아가신 뒤
    출처 : 유교넷
  • 365762

    溪翁李公遺卷序 39 / 기록자료>고도서 / 권상익
    溪翁 李公의 문집 서문이다. 공은 聾齋 선생의 후손이며, 晦齋 文元公의 傍裔이다. 공은 밖으로 도모하는 것을 사절하였으며, 뜻을 궁구하고 행실을 삼가는 실질에 힘을 쏟았다. 때문에 전하는 文辭는 많지 않지만, 述懷詩 120韻을 읽어보면 공의 생평이 어떠했는가를 다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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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5763

    周王山遊記 1 / 기록자료>고도서 / 권상익
    德遠 權秉大‧趙公振‧趙公奎成‧內叔인 趙奎承 등과 4월 10일 星川 밖에서 만나 周王山에 다녀온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鑑浦里를 지나 老萊山을 넘어가는데, 감포리에서 노래산까지 20리 길은 산세가 거칠고 계곡이 깊지만 靑雲驛에 도달하면 산수가 아름답고 들이 넓어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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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5764

    忘吾窩記 6 / 기록자료>고도서 / 권상익
    오랫동안 막역한 사이였던 舜八 李進和가 ‘忘吾’를 자신의 당호로 하고자 한다는 말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개인의 사사로움을 추구하기 때문에 많은 폐단이 생겨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옛날 군자는 마음이 공정하고 말씀이 강직하여 부귀하게 되면 자신이 높다는 것을 잊었고
    출처 : 유교넷
  • 365765

    挹春亭記 7 / 기록자료>고도서 / 권상익
    옛날 부친과 가깝게 지내던 李世鉀과는 부친이 돌아가신 뒤에도 그 두터운 정의가 계속 이어져 나이를 잊고 서로 사귀는 사이가 되었는데, “일찍이 나는 젊어서 立身揚名하지 못하고 이제는 늙어 작은 정자를 짓고 수양하면서 내세를 도모하고자 하니 친구인 李晩煃가 ‘挹春’이라
    출처 : 유교넷
  • 365766

    歸巖亭記 8 / 기록자료>고도서 / 권상익
    冲齋 權橃과는 從兄弟 사이로 어려서부터 그를 따라 배워 가학을 이어받았으며, 中宗 시기와 仁宗 시기 사이에 함께 관직생활을 하기도 한 判官 歸巖 權公을 기리기 위하여 뒤에 사림에서 그의 舊址에 祠宇를 건립하여 배향하려 하였으나 나라에서 금하여 결실을 얻지 못하자 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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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5767

    忍吾堂記 9 / 기록자료>고도서 / 권상익
    忍吾堂 權公은 順興 雲谷에 살고 있었는데, 거처의 서쪽에 따로 건물을 지어서 당호를 忍吾라 하고, 소나무‧국화‧매화‧대나무‧오동나무‧버드나무 등을 심고 이를 ‘六友’라고 하였으며, 뒤에 공의 손자인 權國淵과 權旭淵이 이곳에 거하기를 좋아하였다. 일찍이 조부께서 이 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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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5768

    巖湖亭記 10 / 기록자료>고도서 / 권상익
    고택은 옛날 興州 竹溪의 동쪽 望月峰 아래에 있었으며, 주변경관이 수려하고 그윽하여 ‘波回村’이라 하였다. 寢郞 金正鏞이 이곳에서 한가로이 덕을 수양하여 八十까지 壽하였으며, 그 동생인 金駿鏞과 자제들이 도모하여 거처하던 곳 옆에 정자를 세우고 ‘巖湖’라 하였으니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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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5769

    枕漱亭記 11 / 기록자료>고도서 / 권상익
    永陽의 義谷里에 살고 있던 寢郞 李漢基가 심신을 수양하기 위하여 고요한 곳을 찾다가 거처하고 있는 곳의 동쪽 작은 산기슭에 精舍를 짓고는 ‘枕漱’라고 이름하였는데, 이는 대개 ‘枕泉漱石’의 뜻을 취한 것이다. 그곳은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고, 밝은 곳을 향하고 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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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5770

    小廬記 12 / 기록자료>고도서 / 권상익
    眞城李氏인 李德載의 廬幕으로 永嘉 琴鶴山 아래 周村에 있다. 숲과 골짜기가 아름답고 계곡과 폭포가 뛰어나며, ‘小匡廬’의 뜻을 취하여 ‘小廬’라고 이름하였다. 공과는 집안이 대대로 가깝게 지내온 사이로 여러 차례 그 곳을 방문해 보았는데, 茅苃 몇 칸으로 다소 협소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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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5771

    茶川書堂記 12 / 기록자료>고도서 / 권상익
    居昌 加祚의 남쪽 原泉에 산천이 수려한 곳이 있는데, 俛宇 선생 郭公이 일찍이 즐겨 찾던 곳이었다. 선생이 돌아가신 뒤에 문인들과 자제들이 함께 유지를 받들어 건물을 지었는데, 당호는 ‘二求’로 朱子의 ‘求天知求同理’의 뜻을 취한 것이고, 東室과 西室은 각각 ‘居敬’
    출처 : 유교넷
  • 365772

    屛巖亭記 13 / 기록자료>고도서 / 권상익
    襄陽에서 북쪽으로 10여 리 떨어진 蓉山과 咸浦 사이에 屛巖精舍가 있는데, 옛날 병암 權愭가 지은 건축이다. 공은 만년에 수양하기 위해서 이곳에 정자를 지었으나 공이 세상을 떠난 뒤에 후손들이 잘 돌보지를 못하였다. 100여 년이 지난 뒤에 후손인 權相洛이 門戶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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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5773

    棲雲亭記 14 / 기록자료>고도서 / 권상익
    靈山 동쪽에 험준한 봉우리를 등지고 흐르는 물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하고 있는 이 정자는 辛雨植과 辛東植이 그들의 先大夫 直閣公을 위해서 지은 것이다. 나는 한 번도 공을 받들지도 못하고 정자에도 한 번 올라보지 못했으니 정말 인연이 없는 것 같다. 오늘 신동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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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5774

    稼隱亭記 15 / 기록자료>고도서 / 권상익
    이 정자는 낙동강 상류 佳邱의 동쪽 藏谷에 있는데, 친구인 佐彦 安承國이 지은 것이다. 공의 선친인 處士公이 농사에 뜻을 두고 農書와 농기구를 갖추어 龍山의 남쪽에 자리를 잡았으며, 공은 이곳 정자에서 휴식을 취하기도 하고 수양을 하기고 하였다. 공은 근처에 다시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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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5775

    東山書堂記 16 / 기록자료>고도서 / 권상익
    昌寧의 남쪽 菊洞에 옛날 東山書院이 있었는데, 東岳 盧선생을 주향으로 하고 沃村‧月村‧菊潭 선생 등을 함께 배향하던 곳이었다. 고종 때에 훼철되었다가 1923년 후손들과 士友들에 의하여 舊址에 다시 건물을 짓고 書堂이라고 하였으며, 東齋와 西齋는 각각 ‘居敬’과 ‘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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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5776

    二于堂記 17 / 기록자료>고도서 / 권상익
    川城 남쪽에 鶴洞이라는 곳이 있는데, 산림이 우거지고 계곡이 아름다워 사람들이 좋아하는 곳으로 친구인 金建弼과 金澤鉉 등이 집안 대대로 살고 있는 곳이다. 뒤에 옛날 사람들이 거하던 건물을 다시 수리하였는데, 나에게 이름을 지어줄 것을 청하여 「小雅‧鶴鳴」의 ‘二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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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5777

    千仭室記 18 / 기록자료>고도서 / 권상익
    옛날 端宗이 영월에 유배되자 桃村 李秀亨 선생은 관직을 버리고 榮州로 내려왔는데, 그 거처는 삼면이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북쪽에 있는 영월을 바라보기 위하여 오직 북쪽만 창이 있었다. 보통사람은 하루도 견디기 어려운 이곳에서 선생은 70년을 보냈다. 그러나 선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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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5778

    野逸堂重建記 19 / 기록자료>고도서 / 권상익
    栢巖 金玏의 후손인 通德公은 丙子年의 굴욕을 당한 이후에 東浦의 옛 주거지에 초막을 짓고 노년을 보냈는데, 이곳을 산야로 달아난 백성이라는 뜻에서 ‘野逸’이라고 스스로 명명하였다. 후에 뒤쪽의 계곡으로 이건하였다가 공의 증손인 處士公이 증축하였으며, 공의 7세손인 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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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5779

    種珍庵記 20 / 기록자료>고도서 / 권상익
    族叔인 上舍公 喆淵은 先君께서 酉山의 동쪽에 지은 種珍庵을 철거하고, 썩은 것은 바꾸어 隨壠의 아래에 증축하면서 선군께서 자손을 지극히 사랑하여 학문을 심고 가꾸어 보배를 완성하라는 의미에서 이 암자를 지으셨는데, 불초하여 그 뜻을 아직 받들지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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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5780

    三踈窩記 21 / 기록자료>고도서 / 권상익
    驪興 李東錫은 소백산 아래에 조용히 수양하고자 거처를 마련하여 ‘三踈’라 하고는 나에게 記文을 쓰도록 하였다. 공은 말하기를 “나는 학문에 대한 물음이 소홀하였고, 스스로 다스리는 것도 소홀하였으며, 처세에도 소홀하였다. 나는 종신토록 이러하였으니 거처의 이름은 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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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5781

    木澗齋記 22 / 기록자료>고도서 / 권상익
    宜陽은 先君 冲齋 權翁의 별장으로 태백산 남쪽에 있는데, 산수가 깊고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토양이 비옥하여 桑麻와 오곡이 풍성하여 후손들이 대대로 거주하는 곳이다. 族曾大父인 處士公이 雲谷里에 거하면서 스스로를 수양하기 위하여 거처를 마련하고는 “나는 늙었다. 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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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5782

    東湖觀記 24 / 기록자료>고도서 / 권상익
    朱子의 시 가운데 ‘孺子高風何處尋 東湖臺觀水雲深’이라고 노래한 「過東湖徐穉宅」이라는 시가 있는데, 南昌과 東湖의 사이에 실제로 당시의 유적이 남아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일전에 上舍 徐相鈺이 편지를 보내어 “先君이 竹溪의 남쪽 梨木村에 거처를 마련하고 이름을 ‘東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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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5783

    三湖亭記 25 / 기록자료>고도서 / 권상익
    淸風子 鄭선생은 龍宮지역 산수의 아름다움을 사랑하여 夢村과 三江의 사이를 왕래하며 거하기도 하였다. 뒤에 후손들이 서로 도모하여 거처하던 곳의 서북쪽 강변에 정자를 마련하여 ‘三湖’라는 편액을 걸고 나에게 記文을 청하였다. 특히 선생은 先君인 石泉公과 막역한 사이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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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5784

    鳳松臺記 26 / 기록자료>고도서 / 권상익
    高麗시대 左司諫을 지낸 思復齋 權定 선생의 거처는 옛날 永嘉府 臨河縣에 있었는데, 그곳에 있는 伴鷗亭과 鳳松臺는 모두 선생이 지으신 것이다. 역사가 오래되어 정자는 폐허가 되고 누대는 황폐하게 되어 후손들이 西溪의 옆 우뚝 솟은 산기슭에 있는 이 정자에 ‘伴鷗’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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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5785

    竢德亭重建記 27 / 기록자료>고도서 / 권상익
    秋巒 李榮基 선생이 지은 竢德亭이 바람에 무너지자 후손들이 뜻을 모아 다시 중수하고 記文을 청하였다. 공은 5명의 아들과 17명의 손자를 두었는데, 특히 松月‧虛直‧龜厓‧月浦‧澗雲‧桂隱 등이 모두 학문과 충효로 이름이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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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5786

    景忠齋記 28 / 기록자료>고도서 / 권상익
    평소 忘憂堂 郭선생을 흠모해 오던 차에 후손이 조상의 廟宔를 禮淵의 하류인 求禮에 이건하여 ‘景忠齋’라는 편액을 걸고 記文이 없을 수 없다고 하면서 글을 청해왔다. 공은 충의로 공적이 드높으신 분이었으며, 후손들도 孝悌하고 집안이 모두 화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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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5787

    德山亭記 29 / 기록자료>고도서 / 권상익
    議官 李公이 桃川에 정자를 짓고 德谷의 남쪽에 따로 精舍를 지어 ‘德山’이라고 하였는데, 공의 장자인 李炳弼이 장인인 金瀅模가 지은 記文이 잘못되었다고 인식하였다. 이곳에 올라보니 소백산 자락이 남쪽으로 수 십리 이어져 산세가 수려하고 동서로 두 줄기의 냇물이 흐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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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5788

    順興安氏碑壇齋宇重建記 30 / 기록자료>고도서 / 권상익
    文成公 晦軒 安珦 선생의 부친인 太師門下侍中 安孚와 태사의 王考인 神虎衛上護軍 安子美의 거처는 順興의 許坪村이었는데, 후손들이 舊址에 비석을 세우고 그 옆에 단을 마련하여 두 분을 배향하였으니 이곳이 바로 追遠齋이다. 뒤에 역사가 오래되어 많이 훼손되자 다시 후손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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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5789

    三惜齋記 31 / 기록자료>고도서 / 권상익
    나의 벗인 玉山 張箕應은 어려서부터 명석하고 재주가 있어 입신양명에 뜻을 두었으나 형제 여섯 가운데 형을 비롯하여 모든 동생들이 요절하고 혼자 남아 집을 지키게 되었다. 뒤에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였음을 스스로 애석해 하며, 나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나는 ‘三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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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5790

    農皐精舍移建記 32 / 기록자료>고도서 / 권상익
    東宮洗馬 檜山 黃公이 지은 것으로 본래 龍巖山 아래 泗溪에 있었으나 십여 대를 거치는 동안 300여 년이 지나 피폐해져서 후손들이 뜻을 모아 玄厓洞 獨山의 남쪽으로 이건하였는데, 후손인 黃元鉉이 落成에 즈음하여 記文을 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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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5791

    臨湖書堂記 32 / 기록자료>고도서 / 권상익
    서원이 철폐령으로 훼철된 이후 6, 70여 년이 흐른 지금에 이르러 혹자는 스스로 복설하기도 하고, 혹자는 그 이름을 달리하여 단을 올리기도 하며, 혹자는 옛 자리에 비석을 세워 식별할 수 있도록 하기도 하고, 혹자는 일부 건물을 지어 복원을 기다리기도 하였다. 臨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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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5792

    兩全合選跋 1 / 기록자료>고도서 / 권상익
    외사촌 동생인 李廣初가 晦庵의 『朱子大全』과 李滉의 『退溪全書』에서 각각 일부를 뽑아서 합본으로 만든 책에 붙인 발문이다. 두 선생은 수백 년이라고 하는 시간적 차이와 중국과 조선이라고 하는 지리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道가 서로 부합됨이 마치 친히 주고받은 것과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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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5793

    常變要覽跋 2 / 기록자료>고도서 / 권상익
    鵝山公 權行夏가 지은 『常變要覽』의 발문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禮學에 관심이 많아서 東巖 柳長源의 『常變通攷』를 얻어서 일상생활의 규범을 바로 잡았으며, 의심이 나는 부분은 스승의 말씀을 인용하거나 자신의 의견을 간략하게 첨가하여 정리하였는데, 이 책은 고금의 번잡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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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5794

    晴沙先生遺集跋 3 / 기록자료>고도서 / 권상익
    晴沙 선생 權斗紀의 유집 발문이다. 玄孫인 蠧窩公 權邦度가 모아서 수록하여 두었던 것을 7대손인 權徹淵과 冑孫인 權興燮이 다시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여 4권 2책으로 간행한 것이다. 오랜 세월이 지나 선생의 유문은 산일되었거나 화재로 유실되어 많이 전하지는 않지만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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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5795

    恭書肅景兩廟御帖後 3 / 기록자료>고도서 / 권상익
    族叔인 權徹淵이 肅宗 때와 景宗 때의 御帖을 보여주었는데, 특히 경종 때의 것은 ‘雪梅’라고 크게 쓴 두 글자로 필력이 뛰어나고 엄밀하여 뛰어난 장인이 만든 작품과도 같았으며, 精緻하고 華潔할 뿐만 아니라 刀鉅의 흔적조차 없어서 그 기상과 규모가 세상에서 보기 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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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5796

    敬書童子禮後 4 / 기록자료>고도서 / 권상익
    이 책은 鶴峯 金誠一이 手訂한 것을 虎谷 黃汝一이 소장해 오던 것으로 본래 雲川 金涌이 手書한 것이다. 이 책은 비록 어린 아이들과 초학자들을 위한 것이기는 하지만 ‘以禮立名’의 요지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간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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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5797

    琴軒李先生實紀重編跋 4 / 기록자료>고도서 / 권상익
    琴軒 李선생의 實紀가 세상에 전한 지는 150여 년이 지났으나 그 編帙이 零星하여 事蹟이 갖추어지지 않아서 유림학사들의 오랜 한이 되었다. 선생은 일찍이 寒暄 선생에게서 수학하였으며, 陰厓‧慕齋 등과 道義를 나누었다. 뿐만 아니라 冲齋 선생은 장자를 선생께 보내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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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5798

    慵訥齋兩先生文集重刊跋 6 / 기록자료>고도서 / 권상익
    戊午士禍로 목숨을 잃은 慵齋 李宗準과 동생인 訥齋 李弘準의 문집 重刊本에 붙인 발문이다. 본래 두 선생의 유문은 많이 전하지 않았으나 용재 선생의 후손인 李道炯이 적극적으로 자료를 수집하고 後賢들의 논술한 것을 모았으며, 退溪 선생이 撰한 눌재 선생의 아들 李德璋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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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5799

    悔易堂朴公文集跋 7 / 기록자료>고도서 / 권상익
    寢郞 朴世鉉이 先君인 悔易公의 遺文을 정리하여 글을 청하기에 정중하게 사양을 하였으나 친족인 朴世任이 다시 청하여 쓴 跋文이다. 공은 愚伏 鄭經世‧蒼石 李埈‧忘窩 金榮祖‧鶴沙 金應祖 선생 등을 쫓아 배우기도 하였으며, 杜甫의 「北征」시 등에 次韻한 시를 남기기도 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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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65800

    反招堂李公遺集跋 7 / 기록자료>고도서 / 권상익
    反招堂 李溟翼의 유집 발문이다. 어려서부터 어른들의 곁에서 늘 들어왔던 것이 여러 선현들 가운데 出仕하여 능히 우리 嶺南의 본색을 잃어버리지 않은 자로는 반초당 선생이 으뜸이었다는 말이었다. 공의 詩文은 고풍의 요지를 얻었으며, 사리를 갖추어 仁義를 발하고 德을 갖추
    출처 : 유교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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