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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柳秀夫(1783) 12 / 기록자료>고도서 / 안민수유규에게 보낸 편지 두 통을 연이어 놓았다. 시골에서 녹록하게 사는 처지를 탄식하면서 안부를 물었다. 빌려온 책은 아이가 베끼고 있는데 마침 과거시험 철이라 전력을 기울일 수 없어 늦어지고 있다고 했다. 천연두가 조금 수그러지면 조만간에 반환하겠다고 했다. 또 귀문에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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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權敬叔(聖躋,1786) 13 / 기록자료>고도서 / 안민수權聖躋에게 보낸 편지이다. 권성제가 보낸 시를 찬양하는 내용이다. 궤안 위에 두고 조석으로 감상하면서 직접 만난 것을 대신한다고 했다. 한번 다녀가라고 하는 말은 신병으로 수락하기 어렵다고 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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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柳養直(1786) 14 / 기록자료>고도서 / 안민수柳養直(浩源)에게 답한 편지이다. 유호원은 저자의 절친한 친구로서 그에게 저자의 눈병으로 인한 한심한 처지를 토로하였다. 조만간에 新峴으로 가는 걸음이 있으면 한 번 만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의 병세가 심해진다면 설사 만나더라도 서로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 했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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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金季範(弘式,1786) 14 / 기록자료>고도서 / 안민수金弘式에게 보낸 편지이다. 보내주신 글을 베껴서 벽에 붙여놓고 완상하고 있다고 하면서 감사했다. 지난 겨울 그믐에 외삼촌의 초상에 곡하고 이번에 또 의지하던 사람을 잃으니 통탄스럽다고 했다. 세평에 권 선생을 문안하고 간 김에 김홍식을 찾아갈 생각을 했으나 병세가 호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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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金天用(龍燦) 15 / 기록자료>고도서 / 안민수金龍燦에게 답하는 글이다. 지난번 興叔 형으로부터 김용찬이 저자를 한 번 만나고자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하면서 호의에 감사했다. 다리가 아픈 것은 크게 걱정할 일이 아니라고 했다. 또 못에서 잡은 고기는 근자에 잘 잡기 어렵지만 멀리서 신병으로 고생하는 벗을 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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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枝谷三老(1788) 16 / 기록자료>고도서 / 안민수지곡의 세 장로 즉 克兄‧淵兄‧萬兄에게 보낸다고 했다. 세 사람은 金克夫(弼衡)‧權子淵(明佑)‧權亘萬으로 보인다. 세 사람이 모두 세속적인 문제와 신병으로 고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 번 찾아가 위로하지 못한 것을 미안해했다. 조정에서 무신란에 대한 진압의 공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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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權亘萬(尙佑,1788) 17 / 기록자료>고도서 / 안민수權尙佑에게 보낸 편지이다. 역시 무신란의 공을 인정받기 위한 내용이다. 서울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의하면 상당히 가망이 있어 보인다고 했다. 그리고 임금에게 올리는 글의 초안을 보았다고 하면서, 글이 다소 성글고 협소한 면이 있어 보이는데 이것은 여러 사람의 말을 들었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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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枝谷諸老 17 / 기록자료>고도서 / 안민수제로들이 모두 병을 앓고 있는 것을 위로하고 노인들이라 겨울에 한 번 움직이기도 어려워 한 자리에 모이기는 어려울 것이라 했다. 그리고 상소를 올린 결과 조정으로부터 어떤 포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임금의 은혜가 있었음을 말하고 함께 모여 기쁨을 나누지 못함을 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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寄子爾宅 17 / 기록자료>고도서 / 안민수아들 爾宅에게 보낸 가서이다. 애들이 공부는 잘 하고 있는지 묻고 자신은 설사 증세가 있다고 했다. 집안 종들이 소나무를 베가는 문제를 심각하게 경계했다. 전에도 그랬는데 지금도 그렇다면 종들을 다 모아놓고 분명하게 말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불러다 매를 쳐서 다스리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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寄兒輩 18 / 기록자료>고도서 / 안민수집안 아이들에게 보낸 가서이다. 巡題가 곧 있다는 얘기를 하고 이에 대비할 것을 지시했다. 다음달 그믐께 소집을 하여 서원에서 일시에 발표한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하면서, 너희들은 비록 순제이기는 하지만 반드시 지곡으로 보내서 확인을 받도록 하라고 했다. 지곡으로 보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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寄子爾宅 18 / 기록자료>고도서 / 안민수아들 爾宅에게 보낸 가서이다. 아이가 전염병에 걸려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상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제사를 폐할 수는 없으니 둘째 집에서 반과 갱을 임시로 진설하여 지내고, 그것도 불가능하면 재사에서 지내도록 하라고 했다. 아이 병이 천연두가 아니라면 더 큰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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寄兒輩 19 / 기록자료>고도서 / 안민수집안 아이들에게 보낸 가서이다. 전염병이 돌고 있음을 걱정했다. 말 한 마리를 지곡의 신행집에 빌려주어 내일 아침에 사람과 소를 보낸다고 하면서, 오는 길에 율동의 상가에도 들러 문상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러나 걸어가기 힘들면 판단해서 하라고 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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寄子爾定 19 / 기록자료>고도서 / 안민수아들 爾定에게 보낸 가서이다. 어제 안동에 왔는지 물었다. 이번 묘사에는 저자가 참석하지 못해 섭섭하다고 하고, 손자는 갔는지 물었다. 손자가 이미 갔으면 돌아올 필요가 없으니 서책을 보낸다고 했다. 사람과 말은 언제 보낼지 모른다고 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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寄孫愿(1784) 19 / 기록자료>고도서 / 안민수손자 愿에게 보낸 편지 세 통을 연이어 놓았다. 손자가 절에 들어가 공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공부는 잘 하고 있는지, 집에서 공부하는 것보다 효과가 있는지 물었다. 만약 집에서 공부하는 것보다 효과가 없고 중들에게 폐만 끼치고 있다면 굳이 절로 들어갈 필요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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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古詩冊後(1767) 21 / 기록자료>고도서 / 안민수저자의 외조부인 金龍錫의 필적을 모은 서첩에 대한 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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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類函後(1773) 21 / 기록자료>고도서 / 안민수지난 병자년에 어떤 사람이 쌀이나 돈으로 바꾸기 위해 가지고 온 책 18책을 입수하게 된 경위와 도서의 상태를 적었다. 많은 부분이 산실되고 남은 것을 보철한 것이라 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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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經註撮要後(1776) 21 / 기록자료>고도서 / 안민수저자의 선조 첨정공이 경서 공부를 할 때 손수 베껴 강송의 자료로 삼았던 것으로 오랫동안 상자 속에 방치되어 오던 것을 저자가 보철한 것이라 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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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杏堂童子帖後(1777) 22 / 기록자료>고도서 / 안민수杏堂童子의 필적에 대한 후서이다. 행당동자는 저자의 벗인 金弼衡의 아들로서 요절한 바 있다. 행당동자의 글은 본래 행당집으로 간행된 바 있는데 이 필적은 문집에 포함되지 않은 글이라 했다. 그의 자질을 찬탄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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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族祖處士公祭文冊後(1787) 23 / 기록자료>고도서 / 안민수저자의 족조가 되는 처사공 命賚의 제문을 책으로 엮고 여기에 붙인 후서이다. 저자는 7, 8세 때부터 기초교육을 처사공으로부터 받았다. 처사공에게는 應寅이라는 아들이 있었고 저자와는 병곡 선생에게 배울 때도 함께 배웠지만 일찍 죽는 바람에 저자가 유문을 수습하는 입장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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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兒輩日錄 24 / 기록자료>고도서 / 안민수저자가 자제들에게 당부한 글이다. 이익을 추구하고 인의를 도외시하는 세태를 자세히 말하고 이를 경계할 것을 당부하였다. 지금은 계를 맺어도 도의로써 서로 연마하는 것은 들어보지 못했고, 오로지 錢穀을 가지고 취식을 하는 것으로 일삼고, 종일토록 말하는 것도 오직 시정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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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草戒 25 / 기록자료>고도서 / 안민수담배를 피우는 데 따르는 폐단을 12가지로 정리한 글이다. 일찍이 제산 김성탁은 흡연의 폐단을 10가지로 요약했는데, 저자는 재산의 손실을 초래하는 등 12가지라고 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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守吾箴 26 / 기록자료>고도서 / 안민수저자가 守吾齋를 짓고 나서 지은 잠이다. 처사로서 자신의 삶의 방식을 잘 표현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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座右箴 27 / 기록자료>고도서 / 안민수저자의 좌우명이다. 과업을 처리함, 일에 임함, 몸가짐, 집안을 다스림 등으로 구분하여 좌우명을 지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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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筭箴 27 / 기록자료>고도서 / 안민수저자가 독서를 하는 데 지켜야 할 마음자세를 정리한 짧은 글이다. 전심으로 앎에 도달하고 숙독하고 정밀하게 생각하며 조금의 빈틈도 남기지 않으며 눈앞의 이익만을 따지지 않는다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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守吾銘 27 / 기록자료>고도서 / 안민수수오잠과 같은 맥락의 명이다. 처사로서 자신의 분수를 지키면서 처신의 방도를 압축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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警枕銘 27 / 기록자료>고도서 / 안민수목침에 새긴 명이다. 사람에게 안식을 주는 목침의 덕을 찬양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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掃塵具銘 27 / 기록자료>고도서 / 안민수방을 소지하는 청소도구에 대한 찬양이다. 16자의 짧은 명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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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屛谷權先生文(1749) 1 / 기록자료>고도서 / 안민수저자의 스승인 屛谷 權榘에 대한 제문이다. 두 통이 연이어 있는데 먼저 것은 기사년에 문생을 대표해서 쓴 것이고, 뒤의 것은 신미년에 사적으로 개인적인 감정을 쓴 것이다. 저자의 학문이 병곡으로부터 나왔음을 분명히 했고 병곡의 유고는 간행할 것임을 밝혔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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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聘祖通德郞柳公文(1750) 3 / 기록자료>고도서 / 안민수저자의 빙부인 통덕랑 柳潝에 대한 제문이다. 유흡은 풍산유씨로서 서애 유성룡의 7세손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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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族祖(應寅)文(1750) 5 / 기록자료>고도서 / 안민수저자에게 족숙이 되는 應寅에 대한 제문이다. 응인은 저자에게 족조가 되는 처사공 命賚의 아들이다. 저자는 어릴 때 기초교육을 처사공으로부터 받았고 應寅과는 숙항이지만 병곡 선생에게 함께 배웠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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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代作) 6 / 기록자료>고도서 / 안민수應寅에 대한 제문이다. 저자는 버리고 갈 수 있지만 칠순이 되는 노부모를 어떻게 버리고 갈 수 있느냐고 했다. 응인과 저자 등 수 삼인은 어릴 때부터 집안의 자제들이 적어서 문호를 책임질 것으로 여겨졌는데, 이렇게 가면 장차 집안을 누가 부지할 것인가 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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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族祖(命賚)文(1761) 8 / 기록자료>고도서 / 안민수저자에게 족조가 되는 命賚에 대한 제문이다. 저자의 집안이 쇠박하였는데 자식은 다행히 단절되지 아니하고 선처럼 이어져 왔으며, 이곳에 모여 사는 사람은 불과 서너 집 밖에 되지 않는다고 했다. 따라서 족조는 집안의 길흉 대소사를 처리함에 의귀처가 되었고 중심 역할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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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聘翁守甁窩通德郞柳公文(1755) 10 / 기록자료>고도서 / 안민수저자의 빙부인 통덕랑 柳潝에 대한 제문이다. 유흡의 당호가 守甁窩였던 것으로 보인다. 저자가 장가갔을 때 유흡의 집안이 화기애애하던 모습을 회상하고, 갑술년 여름에 한 달 사이에 유흡을 포함하여 4번의 초상이 나면서 참화를 겪던 모습을 서술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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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代作) 13 / 기록자료>고도서 / 안민수위의 제문과 같은 맥락으로 한꺼번에 이토록 많은 초상이 한 집안에서 난 것은 지금껏 들어본 적 없는 참화라고 하여 애통해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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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柳公(聖求)文 15 / 기록자료>고도서 / 안민수柳聖求에 대한 제문이다. 유성구와 저자의 집안은 부친 때부터 형제처럼 지내던 사이였다. 두 집안의 어른이 모두 세상을 떠나고 저자와 유성구는 서로 의지하고 살았는데, 지난 해 봄여름 사이에 천연두가 만연할 때 유성구도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고 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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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女壻李安之(宗宅)文(1774) 16 / 기록자료>고도서 / 안민수저자의 사위 李宗宅에 대한 제문이다. 이종택은 저자의 집안에 장가든 지 5년 만에 죽었다고 한다. 지난여름에 함께 자면서 가을이 되면 다시 찾아오겠다던 말이 귓가에 쟁쟁한데 이렇게 떠났는가라고 하면서 애통해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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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霽谷權公文(1780) 18 / 기록자료>고도서 / 안민수霽谷 權縉에 대한 제문이다. 권진은 저자가 지곡으로 가서 병곡 권구에게 배울 때 자식처럼 대하면서 가르침을 주었다고 했다. 권진의 형제들이 모두 그러했으므로 저자는 스스로를 지곡 사람으로 자칭했다. 巢谷공이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霽谷공이 죽었지만, 다행히 樹谷공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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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樹谷權公文(1780) 20 / 기록자료>고도서 / 안민수樹谷 權䋠에 대한 제문이다. 수곡공은 저자의 스승 병곡 권구에게 조카가 되며 그 형제분들 가운데 저자가 특히 따르고 존경했던 사람이다. 지난번 霽谷공이 죽었는데 다시 樹谷공이 마저 죽었으니 우리 당은 누구를 의지할 것인가라고 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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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巢谷權公(緝)文(1763) 22 / 기록자료>고도서 / 안민수巢谷 權緝에 대한 제문이다. 저자가 병곡의 문하에 들었을 때 권집은 이미 중년이었으므로 저자가 그의 생애를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집안 어른들에게 들으니 집안의 촉망을 한 몸에 받았으며 병곡 선생도 자질들 가운데 가장 기대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이 제문도 목차에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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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鄭公(履台)文(1781) 24 / 기록자료>고도서 / 안민수鄭履台에 대한 제문이다. 정이태는 저자에게 외삼촌이 된다. 저자의 부친과는 한 고을에 살았으며, 저자가 일찍 모친을 여의고 이모마저 세상을 떠나자 외삼촌에게 의지하는 바가 컸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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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金士章(始泰)文(1782) 26 / 기록자료>고도서 / 안민수金始泰에 대한 제문이다. 명문가에서 태어나 가정의 훈도를 받아 장래가 촉망되었지만 불행히 요절하고 말았다고 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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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表從柳亨叔(泰源)文 27 / 기록자료>고도서 / 안민수저자에게 외사촌이 되는 柳泰源에 대한 제문이다. 평소 가난에 구애되지 않았고 술을 좋아했으며 담론을 좋아해 듣는 사람이 싫증나지 않았다고 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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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族祖(重昌)文(1784) 28 / 기록자료>고도서 / 안민수저자에게 족조가 되는 重昌에 대한 제문이다. 갑진생으로 저자와 동갑이었으나 멀리 떨어져 살았다고 했다. 중창이 오히려 강건했고 저자의 병약함을 걱정했는데 저자보다 먼저 세상을 떴음을 아쉬워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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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族祖(泰祥)文 29 / 기록자료>고도서 / 안민수족조 泰祥에 대한 제문이다. 태상은 저자에게 촌수로는 멀지만 인정으로는 친척과 마찬가지라고 했다. 태상의 선조가 저자의 집안에 은혜를 입은 이후로 저자의 집안이 영락해도 은혜를 잊지 않았다고 했다. 사람됨이 순박하고 세속에 휩쓸리지 않았다고 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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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族祖(鼎復)文 30 / 기록자료>고도서 / 안민수족조 鼎復에 대한 제문이다. 나이 50을 넘기지 못하고 요절했으며 더욱이 그의 부친과 함께 같은 날에 운명을 했으니, 죽고 사는 것은 천명이라 하지만 이 사람의 죽음은 변고 중의 변고라고 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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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鄭公(好相)文 31 / 기록자료>고도서 / 안민수鄭好相에게 대한 제문이다. 저자의 사돈댁의 사람으로 가르침을 받은 바 있다. 저자가 어릴 때부터 그의 인품과 학문을 듣고 자랐으며 평소 가르침을 받고자 했으나 실현하지 못하다가 여동생이 정호상의 집안으로 시집을 가게 된 인연으로 왕래하면서 분에 넘치는 은혜를 입었다고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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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洪誨仲(獻吉)文 33 / 기록자료>고도서 / 안민수洪獻吉에 대한 제문이다. 저자에게 동서가 되는 사람이다. 홍헌길도 저자와 마찬가지로 신병이 많아 서로 잘 만나지 못했지만 서로 생각하는 마음은 친형제와 다름없었다고 했다. 더욱이 홍헌길은 일찍 상처를 하고 아이를 키웠으나 아이가 문호의 촉망을 받는 청년으로 자랐음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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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仲舅金公文 34 / 기록자료>고도서 / 안민수저자의 둘째 외삼촌에 대한 제문이다. 저자가 일찍 모친을 여의고 외삼촌을 아버지처럼 여겼으며 을유년에 부친마저 여의고 난 후로는 더욱 외삼촌에 의탁했다. 이런 연유로 저자의 외삼촌에 대한 정이 각별하게 표현되어 장문의 제문을 지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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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豐昌君懶翁柳公(澐)文 36 / 기록자료>고도서 / 안민수풍창군 懶翁 柳澐에 대한 제문이다. 서애 유성룡의 후손으로 가학을 계승하였다. 관직에도 나아갔으며 만년에는 벼슬을 버리고 전원생활을 즐겼으며 장수하는 복을 누렸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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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權進士(正欽)文(1787) 37 / 기록자료>고도서 / 안민수진사 權正欽에 대한 제문이다. 학문의 자질을 갖고 태어나 詩禮의 교육을 받았다. 이른 나이에 사마시에 합격했으나 관운은 없었다고 했다. 이후로 자연을 소요하면서 독서로 여생을 보냈다고 했다.출처 : 유교넷


